448.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지난 여름은 더웠다

2025-09-16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의약뉴스]

젊은이가 병원에 간다. 약 봉투를 받아온다. 이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복선이다. 무심한 듯이 스쳐 지나가지만 정원(한석규)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구체적으로 무슨 병인지는 모른다.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도 없다. 수술 같은 일정도 잡히지 않는다. 그저 실수로 끼워진 컷 같은 느낌이다. 병색도 없고 표정도 어둡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다림(심은하)과 데이트로 기대가 들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에 보여줬던 병원 장면이 영 꺼림칙하다. 막 사랑이 터져 나올 무렵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이다.

정원은 노총각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다림은 주차 보조원이다. 스무살로 나오는 걸 보면 대학 진학보다는 고교 졸업 후 바로 실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사진사와 주차단속 요원.

필름을 맡기면서 둘은 서로 안면을 익힌다. 싫지 않은 느낌이다. 정원은 다림을 동생 다루듯 하지만 다림은 그런 정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렷한 숙녀로 대해주길 바란다.

영화는 이렇게 흘러간다. 주차 단속을 하고 필름을 현상하고. 그러다 정원의 옛 애인을 만나기도 한다. 지독히 사랑했지만 헤어졌던 여인은 남편의 폭력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 있다.

▲ 사진관 유리창 밖에서 안에 있는 석규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은하의 표정에 사랑이 가득담겨 있다.

노트에 사진을 넣고 다닐 만큼 각별했던 정원에게 옛여인은 이제 추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정원의 병은 깊어간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날이 얹그제인데 눈이 내렸다. 사진관은 닫혀있다. 다림은 초조하다. 우편물은 쌓여 가는데 정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시각 정원은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정원은 다림을 원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영문도 모른채 다림은 그런 정원이 얄밉기만 하다.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다. 9월 중순을 지나는 지금도 30도를 넘고 있어 여전히 후텁지근하다. 그래서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 8월에 기다리는 그날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아마도 오래전 봤던 기억의 잔상 때문이리라. 그 영화를 다시 꺼내 보니 잔잔한 것이 거친 파도보다 되레 후렴이 길게 이어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허진호 감독은 한석규, 심은하를 등장시켜 이 영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한국 영화사를 풍성하게 했다.

국가: 한국

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 심은하

평점:

팁: 초원 사진관이 있는 군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역시 오래전이다. 그곳에서 심은하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사진을 찍었더랬다. 

영화의 주인공 흉내를 내 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추억을 남기는 것이다. 사진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은 정리된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찍는 정원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도 영정 속의 주인공이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을까. 친구와 술을 먹고 늦은 밤 거리를 거닐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세상을 미워했을까. 저주 했을까. 담담하게 운명을 받이들이듯 자신의 생을 받아들였던 정원에게 다림은 어떤 존재였을까.

비록 이승을 떠나더라도 누군가의 존재로 인식된다면 그 죽음은 그리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자신과 함께 했던 즐거웠던 지난날을 추억해줄 것이기에. 더구나 그 추억이 사랑이라면.

그나저나 심은하와 한석규가 요즘 잘 보이지 않아 여간 섭섭한 게 아니다. 저력 있는 배우들이 나와 한국 영화판을 더 활기차고 풍성하게 꾸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