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승 교수 “의료위기 본질은 정치력 상실"

사회과학과 의학교육 연구회 창립총회 특강..."진지전으로 헤게모니 되찾아야”

2025-06-11     의약뉴스 강현구 기자

[의약뉴스] 지난 1년간 의료계를 뒤흔든 의대 정원 증원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의사 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의사 집단이 정치 과정에서 겪는 무기력과 고립, 그리고 사회적 헤게모니 상실이라는 날카로운 진단이 나왔다.

단기적 투쟁이 아닌, 사회적 인식과 정치 구조 자체를 바꾸기 위한 장기적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사회과학과 의학교육 연구회(회장 노혜린)는 10일 서울 중구 IGM 세계경영연구원에서 창립총회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 사회과학과 의학교육 연구회는 10일 창립총회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노혜린 회장은 환영사의 서두에 “의료 환경이 급변하고 의정 갈등이 지속하는 이 시점에, 우리는 단순히 환자 진료를 잘하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앞에 서 있다”고 운을 똈다.

이어 “이제 의료인은 의료시스템과 정책을 성찰하고 문제점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의사 리더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의학과 사회과학, 교육과 정책을 아우르는 지식의 교차점이자 소통의 장이 되고자 SSciME를 창립했다”고 심포지엄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 노혜린 회장.

창립총회 특별강연 연사로 나선 일본 관서외국어대 장부승 교수는 ‘2024년 한국 의료위기의 본질과 위기 극복을 위한 의사들의 정치 전략’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의료계가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장 교수는 먼저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로 시작한 일련의 사태가 의사를 늘리자는 정책이 의사 감소를 초래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건강보험 재정 고갈이나 필수의료 의사 부족 현상은 위기의 원인이 아닌 결과에 가깝다고 선을 그었다. 위기의 진짜 본질은 의사 집단이 정치적 힘을 상실한 데 있다는 지적이다.

장 교수는 “특정 대통령, 장차관이 폭주해도 막을 길이 없다”며 한국 정치 시스템 내에 정책을 제동할 비토 포인트(Veto Points)가 없다는 것을 첫 번째 문제로 꼽았다.

일본이나 미국의 의사들은 다양한 정치적 지점을 통해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한국 의사들은 사직이나 휴학 외에는 저항 수단이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의사 집단을 게토화(Ghettoization)하는 구조적 고립도 문제로 지적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주요 의사결정 기구에서 의사 대표는 3분의 1에 불과해 구조적으로 열세라는 것이다.

이는 의사수급분과위 위원의 약 75%가 의사 면허 소지자인 일본의 사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는 설명이다.

▲ 장부승 교수.

 

◆"단기 투쟁 아닌 진지전으로 인식ㆍ제도 바꿔야”
이에 장 교수는 위기 극복 전략으로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제시했다.

단기적 파업이나 선거 같은 ‘기동전’이 아니라, 교육, 홍보, 설득 등을 통해 사회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기적으로 탈환하는 전략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진지전을 수행하려는 집단은 자신의 집단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며 “의사들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문제라는 각성을 통해 보편적 투쟁으로 나아가야 다른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양원제 도입, 비례대표 확대, 합법적 로비 확대 등을 통해 소수자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거부권 지점을 늘리는 자유주의 정치 혁명 수준의 근본적인 정치 시스템 개혁을 지속해서 요구해야 한다"면서 “현행 단일 건강보험 강제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을 공론화하고, 민간 건강보험 허용 등 소비자의 실질적 선택권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의료 제공 체제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거시적 변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주어진 제약 내에서 정당 가입 및 활동, 개인 차원의 정치자금 후원, 연구회ㆍ토론회 조직, 타 사회단체와의 연대 모색 등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