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산불(1962)- 점례와 사월과 규복이
[의약뉴스]
내전은 상처는 오래간다. 웬만한 사건은 한 세대가 지나면 잊는다. 하지만 내전은 아니다. 세월이 아무리 켜켜이 쌓여도 한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아는 사람, 이웃에 의한 가해와 피해가 자행됐기 때문이다. 차범석의 희곡 <산불> 역시 내전의 상흔에 관한 일이다. 두 세대가 지난 지금 돌이켜 봐도 가슴이 먹먹한데 현재 진행형인 당사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겠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은 한결같이 과부들이다. 남편들은 빨갱이에 죽고 경찰과 국군에 의해 죽었다. 남은 과부들이 소백산 자락에 모여 살고 있다. 그 과부들의 지난한 삶이 이 희곡의 배경이 되겠다.
양씨와 최씨 가족은 각각 경찰과 빨갱이에 목숨을 잃었다. 서로 원수 지간 이지만 한 마을에 사니 얼굴을 아니보고 살 수 없다. 최씨는 마을이장으로 산사람들이 내려오는 날 그들에게 바칠 곡물을 갹출하고 있다.
때는 한겨울, 자기들 먹을 식량도 없으면서 인민군을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아직 이 마을은 인민군 점령지다. 워낙 산세가 깊고 험해 다른 곳은 이승만 경찰이 장악하고 있으나 이곳만은 아직 저들의 손에 있는 것.
서로 덜 내려고 숨기고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경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는 일도 한다. 여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편 양씨는 시아버지 김씨와 과부인 며느리 점례와 전쟁으로 정신이상이 된 딸 귀덕과 함께 살고 있다. 최씨 역시 과부인 딸 사월이 있다. 점례와 사월은 집안이 원수 사이여도 과부라는 공통점과 나이가 20대 후반으로 엇비슷해 서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다.
모여서 바느질도 하고 홀로된 마음을 서로 보듬기도 한다. 떠돌이 옷장수 병영댁이 들고 온 옷가지를 보고 돈이 없어도 사고 싶은 들뜬 마음도 있다.
허나 깊은 속은 언제나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여성의 채우지 못한 욕구로 몸부림 친다. 하지만 어쩌랴. 마을에는 남정네라고는 언제나 밥타령만 하는 늙은 김씨 말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을.
이러는 가운데 부상당한 공비 규복이 점례에 대밭에 숨어든다. 점례는 들키면 혼쭐이 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달걀을 가져다 주고 밥을 챙긴다. 규복은 점례로 인해 생명을 얻었다.
둘은 애뜻한 마음이 삭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점례는 교원이었다가 속아서 산사람이 된 규복을 자수 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규복은 자수하는 순간 경찰에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한다.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이때 사월이 점례의 수상쩍은 행동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가 남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사악한 사월은 점례를 협박한다.
규복을 넘기던지 아니면 신고당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점례. 적당한 선에서 점례는 타협한다. 규복은 점례와 사월 둘 다를 사랑할수 밖에 없다.
시간은 또 흐른다. 사월은 입덧을 심하게 한다. 누구도 사월의 임신을 눈치채지 못한다. 남자가 없는데 애를 배는 것은 가당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가 불러오고 드디어 임신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 이 무렵 군경의 협공작전은 거세진다. 하늘에는 정찰 비행이 이어지고 규복은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팁: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군인이 들이 닥친다.
그들은 양씨네 대밭을 불태워 공비들이 숨을 공간을 차단하려고 한다. 점례와 사월 중 누가 더 사색이 됐을까. 가짜 어머니와 진짜 어머니가 중 누가 아들을 반으로 나눠 가지라고 했을 때 더 충격을 받았을까.
하여튼 산의 대밭은 불에 탄다. 산속에 숨어 있던 규복은 살지 못하고 죽는다. 도망치다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규복은 죽기 전에 두 여자의 사랑을 가슴에 안았을까, 아니면 자신이 노리개로 여자들에게 당했다고 한탄했을까.
최씨에게 된통 꾸중을 들은 사월은 양잿물을 먹고 자살한다.
앞서 내전의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지금도 우리 사회를 옥죄는 것은 그때 그 절규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잊고 용서하는 마음은 내전에는 해당되지 않는걸까. 누가 이쪽에 서고 싶었겠는가. 누가 저쪽편을 들고 싶었겠는가. 그저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해 순간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