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 정신질환 낙인찍지 말아야"
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ㆍ신경정신의학회 등 입장문 배포..."유사범죄 방지 위한 정책ㆍ제도 필요"
[의약뉴스]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피살사건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정신질환을 범죄와 연관 짓거나 가해자를 진료한 의료진에게 화살을 돌려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지난 10일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40대 여교사가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이던 초등학생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가해자인 교사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병가와 휴직을 병행했다는 사실과 함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소견서를 부실하게 작성해 이번 사건을 사실상 방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을 포함한 의료계에서 정신질환을 범죄와 연관 짓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대한의사협회(회장 김택우)는 13일 성명을 통해 “가해자의 우울증이 범죄 원인이고 전문의가 소견서를 부실하게 작성해 범죄를 방임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면서 “우울증 환자가 범죄를 저질렀으니 우울증이 원인이라고 단편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논리는 우울증 환자에게 부정적 낙인을 찍고 환자의 치료를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가해자가 우울증 환자라고 해서 이를 진료한 전문의의 부실한 진료로 범죄가 벌어졌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며 “가해자의 범행 동기와 병력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만큼,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언론의 각종 추측성 보도는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회장 김동욱)도 14일 입장문을 내고 피해자의 명복을 비는 한편, 가해자의 정신질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먼저 가해자가 우울증으로 치료받아 온 사실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여부로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를 평가할 수 없다"면서 "증상이 심한 순서대로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것이 아닌 만큼, 치료를 받은 이력이 심각성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는 다만 적극적인 관리와 치료를 통한 건강 회복의 과정을 선택했다는 의미”라며 "편견에도 불구하고 병의원을 찾는 이들이 이런 사건으로 치료 의지가 위축돼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여기에 더해 “개인의 범죄 행위에 대해 의료진이 과도한 책임을 짊어질 근거는 없다”며 “살인은 범죄자 개인의 인격과 도덕성이 영향을 미칠텐데, 잔인한 행위를 정신질환 탓으로 돌린다면 오히려 정신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환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일갈했다.
특히 “진단서는 작성 당시의 의학적 판단을 근거로 소견을 기술하므로 변화할 수 있고, 정신질환 특성상 완치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며 “적극적인 치료로 호전되기도 하듯, 치료 중단으로 급격히 악화되며, 복직 및 휴진, 운전면허 등의 문제와 관련해 정신과 의사에게 의학적 판단을 넘어선 진단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합리적인 평가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의사회의 지적이다.
이들은 “공무원 직무 수행 가능 여부는 독립적인 평가 기관이나 위원회에서 객관적으로 심사해야 한다”며 “공공의 책임 아래 교사들의 건강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병가, 휴ㆍ복직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신건강에 대한 검진이 학교에서 이뤄진다고 해도 간단한 자가문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층적인 평가가 이뤄져 실제 학교 정신건강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며 “교직원과 학생이 진료가 필요하면 더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이사장 안용민), 대한간호협회 정신간호사회(회장 김숙자), 한국심리학회(회장 최훈석), 한국정신건강간호사회(회장 한금선), 한국정신건강사회복지학회(회장 심우찬)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회장 최윤경)도 14일 공등 입장문을 통해 피해 학생과 유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책 마련과 정신질환에 대한 언론의 자극적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이들 단체는 “갑작스러운 참사에 직면한 유가족과 국민은 슬픔과 분노, 무력감, 죄책감, 수면 문제와 신체 증상 등 다양한 애도 반응과 트라우마 반응을 경험할 수 있다”며 “참사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회복하기 위해 애도과정을 충분히 함께하고 심리적 회복을 위한 지원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만약 고통이 심하고 일상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면 즉시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서 "정부와 사회공동체의 적극적인 치유ㆍ회복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정부는 피해자와 유가족, 국민 모두가 안전한 환경에서 애도의 과정을 견디고 회복해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지역사회, 관계기관, 전문가, 언론, 정부와 사회구성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번 참사의 수습과 회복, 재발방지를 위한 역할에 충실하며 피해아동과 유가족, 학교 구성원들을 혐오와 비난, 2차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언론 취재는 정신건강과 관련한 보도기준인 정신건강 보도 권고기준을 따라야 하며, 정신질환을 범죄의 동기, 원인과 연관시키는 데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면서 “참사 관련 보도에 대한 자극적인 댓글이나 잘못된 정보를 생산ㆍ공유하는 행동을 지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아가 "가해자의 우울증 치료병력이 우울증의 폭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이번 사건이 자칫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조장해,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없는 치료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이와 함께 “가해자의 범죄와 정신건강의 문제는 충분히 조사하되, 가해자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게 사법절차를 진행하고 유사범죄가 재발되지 않도록 관련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언론과 미디어는 수사과정에서 이번 사건이 정신질환과 연관됐다는 내용을 파악하더라도 범죄의 유일한 원인으로 단정하거나 정신질환으로 인한 사건으로 암시하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