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천일야화(1704)-셰에라자드를 기억하자
[의약뉴스]
세상에는 이야기도 많고 그걸 전달하는 꾼들도 허다하다. 다들 얼마나 재미있게 '썰'을 푸는지 웃다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는 지금도 홍수처럼 넘쳐난다.
하지만 단 하나를 뽑으라면. 글쎄, 잠시 망설일 것도 없다. 인물은 셰에라자드이고 이야기는 <천일야화>라고 단언할 수 있다. 비교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이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가 아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과 요술 램프, 나르는 양탄자, 신드바드의 모험 등등, 이 모든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이야기꾼 셰에라자드의 입을 통해 후대에 전파됐다.
재미있고 황당하고 놀라운 천하루 밤(아랍에서 천하루는 끝없는, 무한한 이라는 뜻을 가졌다.) 동안의 이야기는 아랍의 설화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주인공과 배경이 모두 아랍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모술, 이집트의 카이로, 이란( 페르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등이 수시로 나온다. 사람과 지역도 모두 아랍이지만 이걸 글로 옮겨 적은 사람은 아랍 사람이 아니다.
프랑스인 앙투안 갈랑이 파편 조각들을 모으고 이어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쓴 영문판도 존재한다.) 우리가 즐기는 오늘날의 <천일야화>는 그의 손을 거쳐 비로소 완성품이 됐다.
그럼, 여기서 어떤 계기로 이야기가 끊기지 않고 천하루 밤 간 길게 이어졌는지 알아보자. 거기에는 생명이 걸려 있다. 페르시아가 강력했던 옛날 옛적 어느 날 부왕이 죽고 큰아들 샤리아가 후계자가 됐다.
그는 우애가 깊은 동생 샤즈난에게 나라 하나를 떼어줬다. 둘은 헤어진 지 10년 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샤즈난은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왕비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왕궁을 찾았다.
그만큼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왕이 떠나고 나서 왕비는 왕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다른 남자와 동침하고 있었다. 나만을 사랑할 줄 알았던 왕비가 어떤 사내놈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지 않은가.
두 연놈을 칼로 단번에 해치운 후 연못에 내던지고 동생은 형을 만나러 갔다. 어두운 기색의 동생을 보고 형은 의아했다. 그래서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온갖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사냥을 나갔다. 동생은 가지 않았는데 우연히 왕비가 건장한 흑인 남자 열 명과 옷을 벗고 희롱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자신이 겪은 비극이 특별한 것으로 여겼으나 실상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많은 국가를 다스리는 지도자이자 위대한 군주인 술탄조차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상황을 인식한 동생은 슬퍼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즐겁게 지냈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은 동생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 자초지종을 물었고 동생은 그제야 자신이 겪은 슬픔과 기쁨을 말했다. 형은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동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냥을 간다고 왕비를 속이고 숨어서 지켜보니 과연 그랬다. 둘은 여성의 정절에 자신들의 평화와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수치심으로 죽을까 결심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탄은 재혼했고 매일 밤 여자들을 갈아 치웠으며 그리고는 죽였다. 그런 소문은 나라 전체에 퍼졌다.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술탄과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더는 처녀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셰에라자드는 술탄을 찾았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말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이야기를 들은 술탄은 죽이는 것을 내일로 미루면서 그렇게 천 하루를 보냈다.
그 천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바로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이 되겠다. 결론은 짐작했듯이 술탄이 셰에라자드를 죽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여인들의 정절에 대한 고약한 편견을 누그러뜨려 잔혹한 법을 포기했으며 그녀를 정식 황후로 인정하고 영원히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맹렬한 맹세를 했다.
셰에라자드는 정녕 여인들의 구원자로 칭송받고 기억돼야 마땅하다.
팁: 못하는 게 없는 요정이나 정령, 혹은 술탄이나 왕 하다못해 재상이라도 돼야 이야기의 주인공 언저리에 낄 수 있다. 그런데 하인인 주제에 주인공 못지않은 활약을 펼친 인물이 있다.
열려라 참깨! 라는 주문을 몰라 도적에게 사등분으로 잘려 죽은 욕심쟁이 형 카심과 착한 동생 알리바바가 등장하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하녀 모르지안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 되겠다. ( 알라딘과 요술램프의 주인공 알라딘 역시 하층민이다. 그의 아버지 무스타파는 가난한 양복장이였다.)
그녀는 도둑들이 항아리에 숨어서 알리바바를 해치려 할 때 끓는 기름을 부어 죽여 주인을 구한 영웅이다. 모르지안의 이름을 우리가 모르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알리바바가 위험에 처할 때 집을 찾지 못하도록 다른 집에도 X표를 하고 붉은 칠을 하는 등 기지를 발휘했다. 바닥층에 있는 인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기막힌 사례다.
한편 <천일야화>에는 과감하고 노골적인 성적인 내용이나 목을 베는 참수 장면 등 끔찍하고 괴기한 내용도 있으나 이 모든 것에서 무언가 수두룩한 것을 배울 수 있다.
앙투아 갈랑은 서문에서 "미덕과 악덕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풍속을 교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타락시키고 있는 다른 이야기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숱한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고 있다. 그나저나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다마스쿠스나 모술, 바그다드 등등 배경이 되는 도시들을 머릿속이 아닌 현실에서 보고 싶다는 욕망을 지금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 지역은 현재 내전이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문명을 꽃피웠고 그것을 후대에게 물려 주었던 찬란한 역사가 오늘날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거나 후퇴되고 있으니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