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 전공의인지, 봉직의인지 혼란스럽다”

사직 전공의 A씨, 정부-전공의 치킨게임 양상...“2025년 의대 모집ㆍ패키지 중단이 협상 시발점”

2024-12-10     의약뉴스 강현구 기자

[의약뉴스] 평생 외과를 꿈꿔온 한 사직 전공의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마음은 아직 전공의였지만, 신분은 이미 요양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봉직의가 됐다는 것.

사직 전공의 A씨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미 3번이나 정부에게 뒤통수를 맞았고, 지난 10개월간 칼을 들이밀고 협박을 당했는데, 전공의들이 쉽게 마음을 열겠냐”면서, 정부가 2025년 의대 모집과 필수의료 패키지 중단을 선언하지 않으면 전공의와의 협상은 시작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사직 전공의 A씨.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전공의로 일하다, 지난 2월 그만 둔 이후 한 요양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서고 있는 A씨는 인터뷰에 앞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비공개로 해줄 것을 당부했다.

먼저 그는 현재 전공의들이 왜 이렇게 강경하게 변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정부와 사회의 갖은 질타에 더해, 지난 2020년 의사 파업을 겪은 세대였기에 트라우마가 남아있다는 것.

그는 “우리 세대는 이미 2020년에 크게 당했던 세대로, 나만 해도 당시 본과 4학년이었다”며 “당시 9.4 의정합의를 했음에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합의가 뒤집히는 것을 보면서 이해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2020년 경험이 없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사분오열됐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미 한 번 싸웠던 사람들이라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나오게 된 것”이라며 “전공의 3년차인데 사직하면 아깝지 않냐는 말도 들었지만 이미 전공인 외과의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수련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고 전했다.

특히 그가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을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의학교육 질 저하다. 의대 정원이 늘어 교육여건이 나빠진 걸 몸으로 겪었는데, 그가 다녔던 전북의대에 폐교된 서남의대생들이 편입해 왔기 때문이다.

이어 “본과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서남대 의대가 폐교되고 학생들이 편입됐다. 학년 정원이 110명이었는데, 갑자기 160명 가까이 늘었다”며 “바로 아래 학번은 유급생까지 포함해서 170명 가까이 강의를 들었는데, 그해 우리가 반대 시위를 하자 총장과 학장은 교육여건이 나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또 “다음 해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교실이 없어서 본과 1학년들은 대강당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며 “강의실과 달리 대강당은 화면도 별로 없고, 마이크도 잘 안 들리는 등 교육여건이 너무 열악했고, 나중에는 건물 뒷벽을 허물어서 컨테이너박스를 붙이고 수업을 듣게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당시 태블릿 PC로 수업을 받았는데, 전기도 와이파이도 안 들어오고 춥기까지 한 곳에서 어떻게 수업을 받겠는가? 뒤의 두 줄은 엎드려 잤다”며 “문제는 얼마 전 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컨테이너 박스가 그대로 있는 걸 목격했다”고 질타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A씨는 의대 증원과 함께 1년 안에 의대 교육 여건을 개선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당시 전북의대는 정원의 20~30% 증원이었는데도 교육여건 악화가 심각했다”며 “그런데 정부의 의대 증원에 따라 내년에 어떤 의대는 100% 증원하는데, 이대로 되면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총선용이 아니라 진심으로 증원할 계획이 있었다면 지난 2월부터 의학 교육실 증축을 시작했어야 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며 “제대로 된 의학 교육의 질을 유지하려면 수험생 핑계를 대지 말고 모집을 중지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A씨는 지난 2월 전공의들의 사직은 정치적 목적이나 집단의 통제에 의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공의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직을 선택했다면 마음이 다 모이지 못했을 것”이라며 “소위 인기과라고 말하는 전공의들도 사직할 정도로, 모두 같은 마음이었기에 가능했지, 소수의 집단이 정치적으로 통제했다면 많은 전공의들이 이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한전공의협의회든, 박단 비대위원장이든 공개적 모임을 하지 않고, 그저 페이스북을 통해 개인적 입장만 밝혀왔다”며 “전공의들은 박단이라는 사람이 대전협 비대위원장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말이 우리를 명확히 대변하니까 따라간다고 보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에 더해 A씨는 정부와 정치권이 먼저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의료대란을 해결할 실마리가 나올 거라고 진단했다.

그는 “사태 초기부터 부는 수많은 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으면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등 거세게 몰아붙였다”며 “정부에 더해 국민도, 언론도, 심지어 교수들도 우리를 욕했기에, 전공의들이 강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와 정치권이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뒤통수를 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보니, 어떤 모습을 보이지도 않은 채 협상의 자리에 나오라고 할 때 누가 믿을 수 있겠나”라며 “2025년 의대 모집 중단, 필수의료 패키지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해야 협상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A씨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만, 외과 전공의로 근무했던 시절을 종종 떠올린다고 밝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의술을 통해 다른 이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과의사인 조너선 캐플런의 ‘아름다운 응급실’이라는 책을 읽고 외과의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의대에 들어와보니 해부학 실습도 너무 재밌었고 소위 ‘폴리클’(Polycle, 임상실습)을 돌 때도 수술 장면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았다”고 전했다.

이어 “사직한 이후, 요양병원에 당직의사로 취직했는데, 전공의 시절 근무강도에 비교하면 너무 즐겁다”며 “몇 달간 의사 일을 안 하다가 해서 그런지 재미있었고, 이렇게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나를 그렇게 갈아 넣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 쉬었다.

또 “이번 사태가 잘 마무리되면 외과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지금도 틈 나는 대로 외과학 교과서를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다”며 “외과 전공의 대부분은 돈이 아니라 외과가 재미있어서 온 사람들인데 1년 가까이 손을 놀리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내년에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데, 앞으로 이번 사태가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어떤 의사가 될지 달라질 거 같다”며 “용산에 있는 한 사람의 고집이 완성된다면 더 이상 외과의 꿈을 꾸지 못할 거 같다. 미용이나 통증을 배우든가, 또는 해외로 나가든가하는 준비를 군복무 기간 동안 할 거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