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불이 거실로 스며들자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2023-01-26     의약뉴스 이순 기자

자정이 못돼서 말수는 집에 도착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차가 집앞에 멈춰섰다. 포목점 집 주인이 내렸다. 두 명의 신사는 양쪽 문으로 통해 동시에 내렸다. 가운데에 앉았던 말수는 맨 나중에 몸을 드러냈다.

갈 때와 비슷한  모습이어서 시간만 돌려 놓으면 가는지 오는지 모를 정도였다. 말수는 뭐라고 몇 마디 했다. 아마도 들어가서 차 한잔 하고 가라는 시늉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손사래를 크게 치면서 사냥했다.

손을 내민 그들과 차례로 악수하고는 말수는 잘가라는 식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같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용희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수가 계단을 타고 올라는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요. 혹 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흡족한 듯 말수의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우리끼리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저들을 잡았는데 그냥 가네. 물론 형식적이었지만.

정말로 들어오면 어쩔뻔 했어요.

그래서 조금 걱정했어. 다행이지 뭐.

우리끼리 합시다.

이 밤중에요?

술은 원래 밤에 먹어야 제맛이지.

그래요. 대신 가볍게 하기요.

용희가 공부가주를 들고 왔다.

도수가 높은 술로 해요.

어쩜 그렇게 나하고 기분이 똑같을까. 나도 포도주보다는 이런 술을 원했는데.

술잔을 받는 말수의 얼굴이 옆으로 넓게 퍼졌다.

그래 누가 어디로 데려가 무얼 묻던가요?

누가 어디로 무얼?

말수가 손가락을 꼽으려 한꺼번에 세가지 질문이라. 난감하니 순서대로 말할게. 일본 영사관 직원이 영사관 안가로 독립운동과 훈련에 대해서 묻더군. 이걸로 충분하지? 짜잔.

말수가 잔을 들이밀며 잔이 아닌 입으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생각보다 점잖았어.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야 그렇지. 난 그들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해봐. 신뢰가 깨지지. 그래서 사실대로 다 말한거야. 훈련 교관으로 참여하고 임정에 독립자금을 대고 그쪽 요원들과 접촉하고. 다 불었지. 자칫하면 이대로 황천길로 갈 수도 있잖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내 목숨을 지킬까 그것만 생각했어. 그렇다고 무턱대고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애걸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나오면 더 일찍 죽는 거지. 그 와중에도 쓰느라고 머릿속은 이렇게 복잡했어.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지요.

그렇게 했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살게만 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요량으로 대답했어. 목숨이 끊어지는 일만 아니라면 원하는 어떤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다짐했지. 그러면서 여기서는 진실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판단했던 거고 그게 맞아 떨어진 거야. 

그런데도 여전히 점잖게 대하던가요?

물론이지. 써먹을 데가 있는데 함부로 나올 이유가 없지. 더구나 내가 연기를 잘했어. 자연스럽게 정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연기를 한 거야.

만족한 듯이 말수가 입을 벌렷다.

그런데서는 남기기 마련이잖아. 긴장되고 흥분되서 앞에 물잔이 있는지도 모르고. 차를 다 먹었더니 앞에 있던 요원이 그러더군. 이곳 차가 일류에요. 한 잔 더 드시지요, 이러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독만 들어 있지 않다면, 하고. 그자가 웃더군. 의사선생은 유머 감각도 좋아. 포목점 집 주인도 덩달아 한 잔 더 먹었지.

형님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던가요? 아마 함께 오면서 서로 말을 맞춘 모양이야.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자고. 나를 시험해 보자고.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지. 내가 다 말해 버렸으니까. 막판에 상관인 자가 말하더군. 악수를 청하면서 일본 첩자가 되라고?

첩자라고요?

그래, 첩자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임정 요원들의 아지트를 알면 바로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 하더라고. 그게 첩자 질이지 다른 게 뭐 있어.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독립군이 길목을 막고 있다는 거야.

형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옆에서 내가 난처해 질경우에 대비해서 바람잡이를 잘해줬어. 눈치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이니.

덕을 봤군요.

그도 내가 아직은 일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본 거지. 모르겠어. 그 형님은. 언제 태도가 돌변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렇게 따지듯이 묻지마. 요원들 보다 더 강압적으로 나오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가벼운 면박을 주면서 말수가 말을 이었다.

알면 알려준다고 했지. 그때는 임정 요원은 물론 주석의 위치까지 알면 그렇게 하겠다는 심정이었어. 실제로.

잘했어요. 짜잔.

이번에는 용희가 잔을 내밀었다.

당신, 그러다 취해. 내일 환자는 어떻게 보려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 겨우 세 잔인데요. 도수를 생각해야지. 40도가 넘어.

그래서 그만하려고요. 당신도 멈추세요.

그럴 생각이야. 평생 먹을 술을 아껴서 먹어야지.

말수가 아까운 듯이 병 마개를 닫았다.

허둥대지 않은 건 내 체질인가 봐.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거든. 표정도 그렇고. 잘못한 사람들은 왜 비굴해지잖아. 난 평소와 같았어. 거짓말 같은 건 꿈도 꾸지마라고 위협하던 눈초리는 금새 수그러들었어. 사실대로 말하니 그들이 준비했던 다음 작전은 쓸모가 없어졌거든. 묻기도 전에 나는 독립군 훈련 등에 대해 속사포처럼 쏘아댔지. 결정적인 건 훈련 시켜서 독립군이 아닌 일본군으로 써먹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 거야.

용희가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껌벅였다.

그 전에 미군이 독립군 일개 사단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돌린 사례도 제시했어. 그들도 놀라더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내 마음속은 언제나 덴노에게 가 있다고. 그러자 옆에 섰던 자가 목소리에 위엄을 깔고는 데노 반자이 하지 않겠어. 거기 있던 대여섯 명이 모두 덴노 반자이 삼창을 했지. 분위기가 어떻겠어.

상상이 가네요.

훈련 제대로 시키시오, 의사선생 이러지 않겠어.

그게 가능해요? 당신은 정신교육도 한다면서요.

그건 순간순간 바뀔 수 있어.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거든. 직속 상관이 어느 순간 일제로 바뀌고 군복을 바꿔 입으면 어떻게 되겠어. 바로 황군이 되는 거야.

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조금 걸려. 하지만 살아야지 어쩌겠어. 살고 나서야 독립도 있고 애국도 있는 거지.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의심 많은 그들이 쉽게 동조한 게 의심이 가요.

그들이 의심하면 나도 의심하면서 지켜보는 수밖에. 아마도 그들은 나를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 생각하나 봐. 일본으로 가기 전에 나카무라 대장이 내 신변에 대해 이렇게 말했거든. 여기 의사 선생은 우리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어떤 불편도 없도록 편의를 봐주세요. 하고 부탁했거든. 그것을 영사관도 알고 있고 일경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믿지.

지금은 그런 시대에요. 믿음이 불신이 되고 불신이 믿음이 되는 세상, 모든 게 뒤죽박죽이지요. 그래 당신은 그 회색의 모습을 언제나 유지해야 되요. 색깔을 드러내는 순간 위험해져요.

걱정 붙들어 매라고. 때에 따라 일제가 되기도 하고 독립파가 되기도 하고 검은색이든 붉은색이든 회색이든 난, 어느 쪽도 아냐. 그게 내 신조고 그 신조를 바꿀 생각은 없어. 지금까지는.

앞으로도 그래야 해요.

용희가 말뚝을 박듯이 말했다.

어쨌든 말이야, 내가 백번 생각해도 연기는 내가 잘해. 다들 내 말은 믿거든. 얼굴에 진실이라고 써있나 봐. 사람에게는 육감이라는 게 있는데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을 신뢰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니라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가짐이 그들의 눈에 보이나 봐. 심지어는 존경의 눈초리까지 보낸다니까.

우리 점 집이나 열까요? 아니면 배우나 돼볼까요.

점쟁이는 좀 그래. 배우가 좋겠어.

평화가 오면 경성방송국에 오디션을 보러 가지요.

당신도?

나라고 못 할 이유가 있나요.

부부의사에 부부 배우라. 그것만으로도 호기심이 일겠는걸.

둘은 일어났다. 말수가 손을 잡았다.

자기 전에 우리 춤이나 한번 춥시다. 소화도 시킬 겸.

지금이 몇 신데요. 주책맞기는.

그거 알아? 상하이 대세계에서 당신은 빛났어. 그 어떤 여성도, 서양 최고의 미인도 당신의 미모와 춤을 따라가지 못했지.

말수가 용희를 안고 빙빙 돌았다.

음악도 없이요?

그렇지.

용희가 레코드에 손을 대려 하자 내가 할게, 하면서 말수가 바늘을 들어 판에 올려놓았다.

황성옛터 좀 한번 가 봐야겠어. 이렇게 질리도록 듣고도 가보지 않으면 노래에 대한 예의가 아냐.

그보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지요.

글쎄, 경주에 있나. 아니면 부여나 공주겠지. 개성이나 평양일지도.

둘은 돌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말수는 용희를 안고 침대로 돌진했다. 삼십 분 쯤 후 코를 고는 말수를 남겨두고 용희는 거실로 나왔다. 흐릿한 가로등 불이 거실로 스며들었다. 술기운 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낮에 죽어라 일해도 숙면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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