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지로 그녀가 마지막까지 옆에 있을 것을 믿었다

2023-01-17     의약뉴스 이순 기자

말수 부부가 화려한 외출을 끝내고 귀가하고 있을 무렵 임정의 안가에서는 주석을 중심으로 작은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참여한 인원은 적었지만 여기서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시중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들려온 소식은 뜻밖이었다. 작전 전권을 휴의에게 맡겼다고는 하지만 조선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한 공격에 임정도 당황했다. 친일파에 대한 적개심이 있으나 여전히 그들도 조선인이라는 공동체로 느슨하게나마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동족 의식이 순식간이 무너져 내렸을 때 민심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휴의도 이제는 믿기 어렵게 됐다. 그는 단지 '백호 땅지렁이 먹이 사냥 완료'라는 암호문 하나만 달랑 보내 왔을 뿐이다.

어떤 부연 설명도 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는 하나 임정으로서는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휴의를 상하이로 급히 불러들여야 했다.

어떤 다른 돌발 상황이 또 터질지 모를 일이다. 그는 이제 동물원을 탈출한 한 마리 호랑이였다. 젖먹이 때 부터 키운 조련사도 몰라보게 됐다. 그러나 계속된 전통에도 휴의는 어떤 답도 보내지 않고 있다.

답답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참다 못해 주석이 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했다. 이제 개인적인 활동보다는 사단급 정규군 투입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기울고 있고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입혀야 할 시점에서 각개 작전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큰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조선 민심 못지않게 일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굶주린 사자가 날뛰면 피해는 고스란히 흰 옷 입은 사람에들에게 돌아간다. 무자비한 무단 통치가 진행되면 민심은 더욱 흉흉해 진다. 그들은 다 너희들이 자초한 것이다, 독립운동인가 뭔가 하는 것이 이런 것이냐, 너희 백성을 죽이는 것이 독립운동하는 자들의 민낯이냐.

일제는 이런 식으로 흰옷 입은 사람들을 선동했다. 너희가 검문을 받고 끌려가는 것은 너희들 안전을 위한 것이고 안전을 해친 자들을 미워해야지 우리에게 적대해서는 안 된다고 윽박질렀다.

책임을 덧씌우는 것이지만 들어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이렇게 민심이 이반하면 대규모 군사작전의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 압도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장개석 군이 밀리는 것은 농민들이 그들을 멀리하고 모택동에게 협조한 때문이다.

주석의 고뇌는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주석은 휴의의 단독 작전이 꼭 임정에게 불리만 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장제스는 사건이 터진 바로 그날 오후 주석에게 전화로 조선인이 위대한 일을 했다고 격려했으며 막대한 군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개인화기나 기관총은 물론 군복 수천 벌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렸다. 훈련병 들은 제대로 된 군복도 없이 입고 온 그대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군복 지급은 침투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조선광복군에게는 어둠속의 빛과 같은 낭보였다.

주석은 그러나 당장 그 군대가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아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시간은 없고 훈련 교관은 부족하고 미군은 자신들 전쟁을 하기에도 급급했다. 

한시가 급하오. 개인화기와 기관총과 수류탄이 필요합니다. 알겠소. 그러나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오. 우리도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소. 공산당과 싸움이 만만치 않아요.

언제까지 지원한다는 말이 중요해 주석은 보름이 남은 일월 달의 달력을 보면서 이달 중으로 가능한지 물었다.

일부라도 지원하겠소.

이렇게 나오자 주석으로서도 더 재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전화를 막 끊고 나자 뜻밖에도 중국 공산당 쪽에서도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사회주의자들이 연결한 끈을 통해 모택동의 최측근이 임정의 주석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면담은 즉시 성사됐다. 측근은 장제스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휴의의 독립투쟁을 축하했다.

조선은 이제 완전한 자주독립의 길에 한 발 다가섰소. 마지막 한 발은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왔던 숱한 길보다 더 험난할 것이오.

주석은 듣고만 있었다. 말하는 것이 힘겨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축하뒤에 숨은 뜻을 간파하기 위해서 였다. 연신 측근은 우리도 조선에서 독립투쟁을 격려한다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뭐든 말만 하면 들어주겠다는 측근의 제의에 주석은 얼떨결에 장제스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총과 수류탄과 무기 같은 군수품이 꽉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측근은 그 자리에서 그러마하고 약속했다. 그러나 속뜻은 달랐다. 조선독립이 중도파나 우파의 손에 떨어지기보다는 좌익의 손으로 이뤄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도와 줄 것이오. 그러니 저쪽이 아닌 우리 쪽과 손을 잡읍시다.

저쪽이 어디인지 주석은 알고 있었다. 장제스와 손을 끊으라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지원 조건은 이처럼 서로 동상이몽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석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애매하고도 중도적인 입장이 필요했다. 아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일방적인 게임은 위험했다. 자칫 독립이전에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임정의 좌익과 우익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만큼이나 중국내 좌우익의 대립도 나날이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주석은 양쪽을 적절히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편을 가리지 않고 합쳐서 일제를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일 순위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대원칙은 흔들지 않으면서 양쪽의 세를 모아야 한다. 또 다른 대원칙은 훈련 중인 2개 사단의 전투능력 확보였다. 그것도 빠른 시일내에. 군대가 없는 정부는 있을 수 없었다.

미군이 차출해간 정예 일개 사단이 자꾸 아쉬움으로 남았다. 달라고 해도 끝까지 버텼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늦듯이 그들은 지금 중국 땅이 아니라 태평양 전선에 가 있다. 미군의 지휘를 받고 미군 부대 소속으로.

미군은 차출한 조선 일개 사단을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자신들이 돈 대고 훈련 시키고 키웠으니 우리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계획에 없었던 것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미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나머지 2개 사단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임정에게 있다는 확약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총사령관으로 지장군이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장군의 역할을 하면서도 정당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새로운 총사령관이 필요했다. 주석은 병원장을 염두에 뒀다. 그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눈빛과 결단력 그리고 첩보를 통해 들은 개인 군사력이면 충분히 그런 역할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미군 특수부대 출신의 고급 장교이며 조선 독립군에서 활동했다고 이력을 약간 보태면 병사들을 지휘하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각자 생각들을 말씀해 보시오.

주석은 3명의 각 당 대표들에게 공을 넘겼다.

그가 대장으로 적합한지 여부를 묻는 것이지요?

사회주의 당의 대표가 물었다.

일단 하나씩 결정합시다. 그래요, 맞아요.

민족주의 당의 대표가 나섰다.

그분은 사상이 조금 의심스러워요. 일본 첩자인지도 모르고요.

그가 반대 의사를 이런 식으로 표했다.

무슨 말씀이오. 근거가 있나요?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독립자금을 꾸준히 대고 있소. 병원 개업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본 자금을 받았지만 내통한다는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소.

반대에 찬성이 나왔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뭉치지 않았다. 사회주의 당이 찬성했다면 민족주의 당은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주석은 입맛을 다셨다. 중도당의 대표가 중요했다.

그는 주석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자신의 의견을 감췄다.

나는 두 분 당대표처럼 그분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 조선인으로 훌륭한 부부의사라는 것 밖에는요.

주석에게 자신의 표를 넘긴 것은 단지 정보 부족이니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투였다. 주석은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이리로 한 번 초청해서 의견을 들어 보자고 했고 참석자들도 모두 동의했다.

지금이 몇 시죠?

주석은 시계를 차고 있음에도 자신의 시계를 보고 확인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정면 벽에 붙은 괘종시계를 보고 있던 중도파 당수가 정확히 7시네요. 하고 말했다.

그럼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니 사람을 보내 이곳 안가로 모셔오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도 무방합니까? 

주석이 묻자 사회주의자 당 대표가 여기 공간이 노출될 수 있으니 장소를 옮기고 나서 새로운 장소를 알려 주자고 제의했다.

여기서 오분 정도 가면 외부로 통하는 지하가 있는 새로운 안가가 있어요. 거기라면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좋소. 우리가 이동하는 사이 누가 병원으로 가보겠소.

중도파 대표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의견을 내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갚기 위한 태도였다. 그 시각 트로이카를 타고 귀가하는 말수 부부는 흥에 겨웠다.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구나. 전쟁터에서도 돈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는 10분 남짓 오는 동안 자신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그것은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의 다른 말과 같았다. 자신에게 오는 것은 피하지 말자. 손을 내밀면 거부하지 말자.

상황이 빠르게 변할 때는 역류하기보다는 순리를 따르는 게 도리다. 말수는 용희의 손을 잡고 그녀가 평생의 동지로 자신의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렇게 속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