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혼자 있을 때 온전한 자유를 느꼈다

2022-03-07     의약뉴스 이순 기자

그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사라졌다. 뒤쪽에 있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바다는 아버지를 삼키고도 무심히 흘러가기만 했다.

아버지를 곧 보겠지.

용희는 태평양의 먼바다를 바라봤다. 그때 문득 점례가 떠올랐다. 막사의 작은 공터에서 점례가 놀고 있었다. 점례는 그곳이 좋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 여자들과도 말동무가 됐다.

그러나 점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 온전한 자유를 느꼈다. 그래서 뒷문을 통해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가 나면 일부러 방안에서 웅크리고 조용해 지기를 기다렸다.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잠잠해 지면 점례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민들레는 지고 또 피어났다. 한 뿌리에서 여러 번 여러 달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녀석들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점례는 동그란 원형의 씨가 모여 있는 줄기를 조심스럽게 잘랐다. 줄기에서 피 같은 흰 즙이 흘러나왔다.

점례는 그것이 매우 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묻은 그것을 옷에 씻지 않고 언제나 입으로 핥았다. 인상을 쓰면서도 그렇게 한 것은 그 맛 고향의 맛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고향에 있을 때도 점례는 곧장 민들레 줄기를 꺾었고 혀를 댓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바람 부는 쪽으로 불었다. 입을 한껏 오므리고 바람에 실려보낼 때 점례는 행복했다.

홀씨는 멀리 날아갔다. 어떤 것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면 그녀는 홀씨에 얹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홀씨는 가뿐하게 그녀를 태웠다.

그것은 발아래 떨어지지 않고 훈풍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서 백두산을 넘고 경성을 지나 전라도 어느 땅에 도착했다. 죽마을이었다.

대나무가 많아 이름도 죽마을이었다. 대나무 숲 아래 점례의 집이 있었다. 숲의 아래는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병정처럼 서 있었고 작은 오두막은 언제나 대밭에서 불어오는 파도 소리와 진한 솔향에 묻혀 있었다.

점례는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젠가는 이것도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도 봤고 저항도 했고 몸저 눕기도 했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상황 반전을 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곳 만주 일본군 막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리저리 군인들을 따라 옮겨 다니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은 여기까지라고 그러니 이제는 놓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차한 것은 구차한 것이다.

점례는 그러기에 앞서 고향을 두 어 번 더 여행했다. 부모와 마을과 휴의와 용희 등을 떠올렸다. 그녀는 포성이 울리는 야밤을 틈타 고향에서 가져온 꾸러미 하나를 가슴에 안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연병장을 지나 초소 앞에 다다랐다. 사람이 겨우 하나 지나갈 정도로 작은 경계 초소 옆으로 지나갈 때 보초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점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간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알 이유도 없었다.

그냥 총으로 빵 하고 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초병은 그러지 않고 다가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총 끝에 달린 대검의 차디찬 금속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내밀었다. 초병은 그녀를 한 손으로 잡고 초소 안으로 끌고갔다.

안은 포근했다. 점례는 순간 고개를 들었고 긴 수염의 높은 일본인이 마주쳤다.

그는 점례를 내려다보면서 허튼 수작 그만두라는 듯 근엄한 얼굴로 꾸짖고 있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며 당장 원위치 하라고 고함을 쳤다. 

장교 한 명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다 점례를 보고는 작은 눈을 번쩍였다. 한 시간 후 점례는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두 병의 병사가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점례를 이끌었다. 그녀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봤자 허사였다.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방에 갇혔다. 

그녀는 보자기를 끌러 자수를 어루만졌다. 두 마리 학이 서로를 보면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휴의가 자신도 해보겠다며 어설프게 바느질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보자기를 새끼줄 꼬듯이 꼬았다. 그리고 치마를 엮어 길게 늘였다. 그녀는 그것을 막사의 기둥에 걸었다.

새벽에 갓 내린 눈처럼 순수했던 그녀는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