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른 봄에 씨앗 일부를 파종을 할 수 있었다

2021-09-25     의약뉴스 이순 기자

시간은 흘렀다. 장맛비에 물꼬를 틀 때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 번 간 물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일 분은 금세 지나갔고 하루는 좀 더 걸렸다.

정태에게는 일 분이나 하루나 짧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별 있는 새벽에 일어나 사립문을 열었고 달 뜨는 저녁에 닫았다. 시간은 그에게 희망이었고 미래였다.

앞으로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그는 기대와 두려움과 막연한 동경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 사이 오두막으로 시작한 신접살림은 가난을 몰고 오는 시작이 아닌 끝내는 출발점이었는지 세간은 하나씩 늘어났다.

부지런한 정태와 절약하는 용순이 만났을 때 그들은 태어날 자식들은 굶기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질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의 피와 땀은 논밭만 기름지게 만들지 않고 세간살이도 빛나게 했다.

방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한 칸씩 늘어 세 칸이나 되었다. 큰딸 다음에는 예상대로 아들이었다. 그 아들은 영리했고 무럭무럭 자랐다.

용순은 그것이 자랑거리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가 울고 보채면 자다 말고 일어나 젖을 물렸다.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에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꼽으면서 하나, 둘을 외웠다.

‘이놈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나 그런 꿈은 오 년을 넘지 못했다. 어느 날 아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저세상으로 떠났다. 다음날 정태는 포대기에 싸서 선산의 한구석에 돌무덤을 만들었다.

정태가 산으로 간 사이 용순은 바구니와 호미를 챙겨 바다로 갔다.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있으면 가슴이 복받쳐 총 맞은 것처럼 피가 솟구쳐 오를 것이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슬픈 감정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고, 내 새끼야.

그녀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목놓아 대성통곡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용순은 쓰러진 자신을 추스르고 몸 매무새를 다잡았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왔다. 해당화였다. 하얀 모래사장에 피보다 붉은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그때 용순은 무릎을 쳤다. 아차 싶었다.

‘저것은 약재가 아닌가.’

‘저것이라도 다려 먹일걸.’

용순은 그러지도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는 듯이 용순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 번 더 곡을 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옷에서 빠져나온 모래가 유골처럼 바람에 날렸다. 

그녀는 가시에 찔리는 줄도 모르고 꽃 몇 송이를 따서는 그것을 바다에 던졌다. 마침 사리 썰물이라 꽃은 어느새 용순의 시선에서 멀어져 갔다. 어느새 눈물은 마른 논처럼 말라 있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챙겨 꽃을 따라 바다로 깊숙이 들어갔고 그날따라 조개며 굴이며 돌 틈에 숨어 있던 낙지며 꽃게 등을 한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저녁을 거하게 차렸다. 용순과 정태는 아무 말 없이 밥 한 그릇을 뚝 딱 해치웠다. 둘은 그 힘든 시간을 넘어왔다. 홍성과 광천과 대천을 거쳐 집으로 올 때처럼 정태는 다시 집에 안착했다.

다 일 덕분이었다. 일 사이 사이에 바람처럼 아들의 모습이 불어 올 때면 삽질을 했고 그러면 녀석은 바람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태는 눈뜨면 논으로 용순은 밭으로, 바다로 달려갔다.

다음 해 정태는 논도 한 다랑이 더 샀고 집 옆의 대나무밭도 샀다. 밭을 살 때 용순은 쓸모없는 것을 왜 사느냐고 나무랐으나 정태의 생각은 달랐다.

울타리로 쓸 대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캐내면 텃밭으로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틈나는 대로 정태는 대뿌리를 캐냈다. 쉽지 않았다. 뿌리는 질겼고 쉽게 잘라지지 않았다.

어떤 것은 땅속 깊이 박혀 있거나 돌을 감고 돌았다. 그러나 정태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른 봄에 씨앗 일부를 파종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