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國弓)의 교훈
2006-01-31 의약뉴스
동녘이 잠에서 덜 깬 듯 병풍처럼 둘러 싼 산 그림자는 아직 어슴푸레하다. 두 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하며 오염되지 않은 대공원의 정기를 들이마신다. 매일 반복하는 과정이지만 느낌은 그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활을 잡은 지도 어언 20년이 되어 온다. 초등학교 때, 대나무 활과 수수깡 화살로 할아버지의 활쏘기 흉내를 내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역사는 더욱 깊어진다.
당시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편을 갈라 경기를 했던 소꿉 친구들은 신궁(神弓)의 경지에 도달한 심재성 9단을 비롯해 다섯 명이 5단 이상의 명궁(名弓)으로 변신했다. 어릴 때 뛰어 놀던 만수동 주산(主山)의 산세가 활처럼 두 봉우리로 휘어있어 명궁의 정기를 받았다고 우리들은 믿고있다.
나는 약사라는 직업 때문에 아직 명궁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활(弓)과 화살(矢)에 대한 애착을 저버린 적이 없다. 몇 년 전, 오십견 통증으로 상의조차 걸치지 못했을 때도 왼손으로 약국을 어떻게 경영해 나갈까하는 걱정보다 오직 초록 잔디 위 145미터 거리에서 웃고 있는 과녁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국궁을 선호하는 이유는 활을 궁술(弓術)이라 하지 않고 궁도(弓道)라 칭하며 활량(閑良)이 지켜야 할 구계훈(九戒訓)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활은 예의범절을 가장 우선한다.(예의엄수 禮儀嚴守)
사정에 들어서면 먼저 정간(正間)에 ‘활 배우러 왔습니다’하고 배례를 해야 한다.
또한 사대(射臺)에 서는 순서는 위계질서가 엄하고 정(亭)이 정한 제반 규칙을 어기는 활량에게 엄중한 징계를 내리는 곳이 활터이다.
활은 겸손하고 성실하라고 이른다.(성실겸손 誠實謙遜)
활은 마음의 거울이다. 마음을 비우고 시위를 당기면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지만 조금이라도 욕심을 품으면 과녁 위를 스쳐 지나간다. 화살 다섯 대 중 연거푸 세 대를 관중 시키면 나머지 두 대는 과녁을 넘게 마련이다.
네 대를 연속 맞추면 나머지 한 대는 거의 과녁을 넘고 다음 순(巡) 사대에 들어서면 한 대도 관중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모두 5시5중(五矢五中)의 과욕을 품고 시위를 당겼기 때문이다.
활은 사랑과 덕행으로 본을 보이라고 이른다.(인애덕행 仁愛德行)
오래 전, 내가 처음 활을 배울 때 편사 놀이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죽마고우인 심재성 신궁(神弓)은 내 옆에 서서 내가 과녁을 맞추지 못하면 똑같이 화살을 옆으로 보내며 나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다. 어쩌다 내가 관중을 시키면 친구도 화살을 과녁에 적중시키며 추켜세워 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집궁(執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친구 덕분이다.
친구는 인천에 단 두 명밖에 없는 9단 신궁(神弓)이며 그 당시 5시 5중을 14번이나 연거푸 했던 실력자이다. 아마 그 날도 해가 넘어가지 않았다면 몇 십 번을 더 이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활은 몸과 마음을 항상 바르게 하라고 이른다.(정심정기 正心正己)
잡념을 품은 채 시위를 당기거나, 마음과 호흡을 다듬지 않고 급하게 서둘러 시위 줄을 놓으면 화살은 영락없이 과녁 양편 곁길로 빠지곤 한다.
활은 곧고 청렴하며 용감하고 결단성을 갖추라고 이른다.(염직과감 廉直果敢)
평소 성적(矢數)이 좋다가도 막상 대회에 출전해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을 망각한 채 자신을 과시하려 하거나 담력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당황하여 시위를 반듯하게 떼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져 심한 경우 화살이 고전을 향해 날아가는 수가 있다. 고전은 과녁 저만치 옆에서 화살의 방향을 깃발로 표시해 주고 땅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 보내는 시동을 말한다.
활은 침묵의 도인이다.(습사무언 習射無言)
시위가 묵묵히 화살을 밀어내듯 사대에 선 활량은 입을 다물고 오직 궁시(弓矢)와 과녁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인생사에서도 타인을 비방하는 등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라는 뜻이다.
활은 신중한 행실과 굳은 절조를 가르친다.(자중절조 自重節操)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 없듯 시위를 떠난 화살을 되돌아오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빠른 세월의 흐름을 쏜살(화살)에 비유하며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활은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라 이른다.(불원승자 不怨勝者)
패배를 오직 내 탓으로 돌리며 재기의 초석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절대로 타인의 활을 당기지 말라 이른다.(막만타궁 莫灣他弓)
경솔히 남의 활을 당겼다가 자칫 실수하면 육십 여 만원 상당의 각궁(角弓)을 변상해 주어야 하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세상사에서도 남의 물건을 조심하는 예의를 갖추고 남의 재산을 절대로 넘보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 새벽에도 나는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긴다. 궁술(弓術)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 되어주는 구계훈(九械訓)을 가르치는 궁도(弓道)를 닦기 위해서다.
김사연( 수필가. 인천시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