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과 부하의 고리가 끊어지자 개운함이 다가왔다

2020-09-29     의약뉴스 이순 기자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고 뒤로 미뤄졌다. 서청 간부가 떼거리를 몰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작전에 없는 계획이었다.

혼자가 아니고 여럿일 때 어떻게 자수를 한 단 말인가. 그가 설혹 자수를 받아 주고 싶어도 나머지들이 반대하면서 체포하거나 당장 죽일 기세라도 보인다면 난감한 일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변수가 생길수록 결단의 시간은 뒤로 자꾸 미뤄졌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호석 아버지는 자신이 이제는 전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럴 나이도 됐다. 만주에서, 간도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절정기였다.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독립군의 기치로 토벌대와 맞서고 왜군을 기습하면서 느꼈던 애국심을 다시 살리고 싶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애국이 무엇인지 조차 가물거렸다. 조선은 나라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

뒤죽박죽된 세상에서 그는 다시 총을 들었고 산으로 들어갔고 막다른 길에 몰렸다.

다 같이 생명을 내놓고 하는 일인데 그때는 애국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없었으므로 그는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비어갔다.

싸울 의지도 그럴 내용도, 각오도 무뎌지면서 호석 아버지는 자신이 벌인 큰 사건의 뒷감당을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지 감당하기 어려웠다.

최후의 일인까지 당당하게 싸우다 죽자던 산 속의 다짐은 어느 새 온데 간데 없어졌다. 전투력은 소진됐고 식량은 떨어졌다.

날은 추워지고 대원들은 아프고 그러다가 더러 죽었다. 사기가 없는데 어떻게 적과 싸울 수 있는가. 그것을 살릴 방법은 없었다.

독립과 맞설 만한 그럴싸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대신할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독립운동만이 애국이 아닌 것은 안다.

잘못가고 있다면 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 것도 애국이다. 그러나 동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왜놈과 왜놈편에 섰던 자들과 싸울때가 좋았다.

왜놈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속이 뒤틀려 싸우는 것은 아니다. 잘 못 들어선 길을 제대로 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애국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애국을 독차지한 그들은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반란자로 몰았고 빨갱이로 낙인 찍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마음이 변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허탈하다가 무력해지다가 엉뚱한 생각이 틈새로 파고든다.

호석 아버지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사라지자 고개를 뻬꼼하게 내밀었다. 행여 누가 볼세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없다. 사방은 고요했고 움직이는 그림자는 없었다. 몸을 길게 늘어 뜨리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상은 안도가 아니라 무언가 하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그는 그래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 들었다.

연기와 냄새는 근처에 매복한 적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지만 그러면 어떤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관총 세례를 받고 깨끗이 저세상으로 사라지고 싶은 자포자기 심정이 담배에 불을 당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지 않았다.

길게 호흡하고 니코틴의 쓰디쓴 맛을 즐겼다. 사형수가 마지막 생의 3분을 남겨 놓고 얻어 피는 담배 맛이 이럴까 싶었다. 쓰면서도 달고 달면서 어딘지 역겨웠다.

호석 아버지는 서청 간부의 집으로 들이 닥칠지 아니면 매복을 피해 다시 왔던 산으로 올라갈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고 있었다.

결정은 늘 어렵지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으므로 안되면 손바닥에 침이라도 뱉고 튀겨서 정해면 될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어떤 공허한 외침과도 같은 것이 목을 타고 올라오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눈짐작으로 저쪽으로 내려가면 그자의 집이 나온다. 지금쯤 놈들은 각자 흩어졌는지 모른다. 이른 새벽 모이기로 시간을 정해 놓고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기습으로 놈을 제압한 후 협상 카드를 내밀자.

저간의 사정이야 놈이 더 잘 알 것이므로 긴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놀라겠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이런 저런 질문을 두서 없이 내 뱉고 누군가와 상의하기 위해 전화를 찾거나 연락병을 보낼 것이다. 그런 것 필요없다.

네가 결정하고 네가 승낙하지 않으면 네 목숨은 열 세기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협박한다. 서청간부는 그만한 권한이 있다. 그도 승진할 거리가 하나 더 생길 것이고 팔자가 피면 나중에, 정말 먼 훗날에 친구였으나 산에서 내려와 자수하러 간 나를 떠올릴지 몰랐다.

대원들을 살리고 나만 처벌 받는다는 조건은 그로써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당은 모두 타진됐고 지리산은 평화가 찾아온다.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다만 자수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부하들의 안전만 보장하면 된다.

호석 아버지는 다시 권총의 방아쇠에 손을 갖다 댔다. 여차하면 갈기고 긴 말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다음은 발 길 가는 대로 갈 것이다.

산으로 간 대원은 대장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라고 명령했다고 다른 명령을 하달 했을 것이고 이것으로 그도 대장과 부하의 고리를 끊었다. 뒤끝이 없는 것은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