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小崗) 민관식 명예회장님 영전(靈前)에
2006-01-22 의약뉴스
이 어인 청천벽력(靑天霹靂)입니까?
근력과 기백이 전혀 흐트러짐 없었던 회장님이시기에 소천이란 단어는 언감 생시 상상도 못했건만 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5만 여 약사들에게 더위를 가려주는 그늘을 자초하시고, 폭풍을 만난 약사 호 선장들에게는 등대가 되어 주셨으며, 철부지 후배들에게는 매서운 회초리 역할을 해 오신 회장님!
회장님의 카랑카랑한 음성과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빛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1979년 여름, 저는 8미리 무비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매고 대한약사회 전남 수해지구 무료투약 봉사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습니다.
저희 일행이 탄 버스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벗어났을 때 갑자기 경찰 오토바이 대열이 앞장을 서며 안내를 했습니다. 전남도청에 도착했을 때는 도지사가 현관 앞에서 저희 일행을 영접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이런 파격적인 환대가 당시 국회부의장님을 맡고 계신 회장님의 전화 한 통화 덕분임을 알았을 때 약사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면 도로 확장으로 철거될 약국을 내팽개치고 무료투약 일행에 동참한 행동에 대해 회의감보다는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약사문예 수상자를 격려하시던 약사공론 창간 기념식에서 회장님은 ‘우물안의 개구리 모양 약사공론 등 약업계 신문에만 글을 쓰지 말고 국민들이 읽을 수 있는 일간지에 기고하라’고 따끔한 충고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며 저는 약사 수필가로 약사 칼럼니스트로 사명감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여약사님들의 술잔을 거절하시지 못하시는 신사도(紳士道)와 두둑한 배포를 공유하신 회장님! 회장님께서 내유외강(內柔外剛)의 신조를 생활철학으로 실천하신 덕분에 저희 후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존경하옵는 회장님은 정부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1968년에 약사공론을 창간하셨고, 70년대 말 신민당과 한의사회가 주동한 한약파동을 초기에 진압하시며 약사회의 정치참여 필요성을 후배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사랑하옵는 회장님은 1973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산 금정약국 약화사고를 해결하시며 약사의 권익 보호가 약사회의 최우선 과제임을 약사회 임원들에게 재확인시켜 주셨으며, 문교부장관 시절의 정책 경험을 되살려 1975년에 약사보수교육을 법제화시키신 분이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약사회에 끼친 위대한 업적을 어찌 어설픈 일필로 기술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며 체육, 교육, 정치 등 전반적인 면에서 감히 공과를 논할 수조차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회장님께서 소천하신 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약사회는 소중한 대부(代父)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저 세상에 가셨을 지라도 약사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변함없는 북극성과 등대가 되어 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덧없는 육신은 사라지지만 값진 영혼(靈魂)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게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신 민관식 회장님!
제가 약사(藥師)로 살아있는 날까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편히 영면(永眠)하소서.
2006년 1월 16일
김사연 (수필가, 인천시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