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복덕방>(1936)

2019-11-02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일확천금을 꿈꿔왔다. 힘들이지 않고 단번에 많은 돈을 버는 한탕주의만큼 값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이렇게 돈을 버는 방법은 성공확률이 매우 낮았다. 팔백만분의 일 정도로 희박했다. 그런데도 로또 판매점 앞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북적인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어 황제를 넘볼 수 없다면 매주 십여 명이 당첨되는 기회는 잡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제 강점기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때에도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다. 이태준은 <복덕방>에서 안초시를 그런 사람으로 그렸다.

초시에게는 딸이 있었다. 무용하는 딸은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엘리트로 활동상이 신문에 날 정도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공연 수익으로 그녀는 제법 돈이 있었고 그 돈은 초시의 일확천금을 위해 그루터기, 즉 불쏘시개로 이용됐다.

*투기로 한 몫 잡으려던  꿈이 사라졌을 때 초시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때는 추석 즈음. 하늘은 맑은데 초시의 마음은 붕 떠 있다. 사천 평에 평당 이익을 손꼽으면서 따져 보니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없다.

이렇게만 되면 늘 갓을 쓰고 앉아 누가 집을 보러 오는 지 행길을 내다보는 복덕방 주인 서참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었다.( 서참의는 대정 팔구 년 이후에 제법 목돈을 잡았다. 시골 부자들이 세금이 무서워 집을 사거나 자녀교육을 위해 서울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니?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생, 갈보가 사글세방 하나 얻자고 해도 예, 예하고 따라나서는 만인의 심부름꾼 노릇하는 그가 더는 부럽지 않다. 쫌보(졸보)라고 놀려대며 ‘술 한잔 사쥬랴’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을 더는 보지 않아도 됐다.

어느 날 그는 개발소식을 듣고 오금이 저렸다. 친구 박희완 영감에서 들은 정보는 남 주기가 아까웠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속수국어독본’을 끼고 다니며 대서업 공부에 열중인 그는 황해 연안에 제2의 나진이 생긴다고 떠들었다. 관청에서만 아는 축항 용지라고 하는데 초시가 생각해도 헛소리 같지 않고 상식적으로도 그럴듯했다.

초시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딸에게 부탁해 보자. 그는 복권도 사지 않고 당첨되면 무엇을 하겠다고  떠드는 사람처럼 흥분했다.

복덕방 서참의나 기껏 대서방이나 할 박희완 영감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변화된 자신의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비록 지금은 때 묻어 꼬질꼬질한 적삼 자락을 입고 있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겉으로는 낼 모레면 나이 육십으로 ‘너나 네나 다 산 인생’인데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꾸며댔으나 야심은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안초시는 더 늦게 전에 내 힘으로 세상과 부딪쳐 보고 교섭해 보고 싶었다. 돈이 떨어져서 세상과 끊긴 인연을 다시 잇고 싶었다. 

요즘 들어 돈의 긴요성은 날로 더해졌다. 돈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었다. 고층건물, 문화주택, 미끈한 자동차가 부럽지 않았다.

부러진 안경다리 고친다고 딸에게서 받은 돈을 담뱃값으로 다 날렸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십 전 가지고는 안경에 맞는 다리를 할 수 없었다. 

잘나가던 시절에 테만 오 원 하던 안경인데 겨우 오십 전 가지고는 짝짝이 다리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노끈으로 묶어 쓰는게 낫다고 자존심을 세웠다.

지방순회로 돈푼이나 벌어서 연구소도 차리고 유성기를 사들이는 딸은 목돈을 가지고 있었다. 초시의 관자놀이는 욱씬거렸다.

‘먼저 덤비는 놈이 더 먹는 판이다.’

자기가 산 땅이 열 배, 백배 아니 천 배 이상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진도 겨우 오륙 전 하던 땅이 개항된다는 소문만으로 그렇게 됐는데 이번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 산 나이에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오늘따라 잘 떨어지지 않던 화투의 거북 패가 뚝 떨어졌다. 운수 좋은 날이 따로 없었다.

그 날 저녁 초시는 딸에게 자신이 들은 정보를 들려주었다.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십수 년을 상업계에서 논 초시의 투자 권유는 딸의 마음을 흔들었다.

다음날 딸은 출자회사를 통해 거금 삼천 원을 마련했다. 초시는 흥분했다. 제자리서 펄쩍펄쩍 뛰었다. 돈냥이나 엎질러본 녀석이 돈을 번다는 신념은 맞아  떨어질 것이다.

“서참의 이놈, 날 은근히 멸시 했것다. 내 굳이 널 시켜 네 집보다 난 집을 살 테다.”

세상은 살게 마련, 이라며 가진 자의 여유를 부리는 서참의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온 것이다. 엄청난 순이익이 생기면 자신에게도 만원 쯤은 떨어질 것으로 초시는 단정했다.

자, 그의 투자는 성공했을까. 아니면 실패했을까. 초시가 성공해 보란 듯이 황혼 녘을 붉게 물들였을까. 그 붉은 물로 친구인 서참의에게 '술 한잔 사쥬랴'고 선심을 쓰고 박희완 영감에게 책 사서 공부하라고 돈푼깨나 집어 줬을까.

: 투기의 역사는 깊다. <허생전>에도 투기질로 한몫 단단히 잡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투기질이 되겠다.

질이라고 한 수 깎아내린 것은 그것의 비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할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가 있고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먼저 덤비지 않을 자,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없을 것이기에.

따라서 안초시의 태도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졸부가 돼서 갈지자 걸음을 걸으면서 떵떵거린다 해도 나무라지 않겠다. 

그러나 투기는 성공도 하지만 실패도 하기 마련이다. 초시가 투자하고 일 년이 지났으나 신문 어느 구석에도 축항을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속임수에 초시가 넘어간 것이다.

벼락 맞은 초시는 서너 끼를 굶어도 밥 먹을 생각이 없다. 악몽치고는 매우 고약했다. 그는 세상에 큰소리치기 전에 세상과 연을 끊었다. 졸부의 꿈이 사라지자 초시의 목숨도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재물이란 친자 간의 의리도 배추 밑 도리듯 하는 건가?” 하는 탄식뿐이었다. 뾰로통한 입으로 말끝마다 흥, 젠장 같은 꼬투리다는 말을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가 죽었을 때 가는 길은 성대했다. 체면 때문에 조용히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던 딸은 (자살이라고) 관청에 연락하지 않겠다는 참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위해 들었던 보험금은 장례식 비용을 쓰였다.

당대의 문장가 이태준은 단편에서 탁월한 실적을 거뒀다.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해방 후 북에서 활동해 남에서 한때 소홀히 취급됐다. (정지용 역시 마찬가지.)

종군작가로 전쟁 중에 남하했으나 이후 북에서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북동 초입에는 1930년대에 지어진 아담한 한옥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이 있다. 작은 정원이 정감이 가는데 이곳에 들러 차 한잔하면서 이태준이 머물며 글을 썼던 공간을 음미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이태준은 <복덕방> 외에도 <가마귀>, <달밤> 같은 주옥같은 단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