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상
2005-09-20 의약뉴스
구민상은 5개 분야로 시상하는데 본(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봉사상은 해마다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1996년, 보건소장의 추천으로 첫 도전을 했을 때 틀림없이 구민상을 수상하리라 추천인이나 당사자 모두가 믿었다. 1966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야학을 열고 그 이후 줄곧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관공서와 각 사회단체에서 꾸준하게 봉사를 해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구청장은 약사들과 인연이 깊은 분이어서 약사회장의 수상은 공무원 조직에서조차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회원수가 약사회보다 훨씬 많은 노인회로 돌아갔다.
2년 후 남동구약사회 추천으로 재도전을 했다. 결선에서 심사위원의 투표 결과 다른 후보와 7:7로 동 수가되어 심사위원장의 결정에 판가름이 나야 했다. 하지만 믿었던 위원장은 상대방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충격이었다. 그분은 다름 아닌, 같은 동네에 거주하며 파출소 등 지역 유지로 활동을 할 때 내가 총무 직책을 맡아 도와드리던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 후보 역시 나와 함께 경찰서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심사위원장이 구청 산하 단체장을 맡았을 때 총무로서 도와준 적이 있는 분이었다.
내가 배신감의 충격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낙선한 모 단체 회장은 구청을 찾아가 ‘차라리 봉사활동을 많이 해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약사회장이 선정되었다면 이해가 가지만 어떻게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후보를 단지 구청 산하 단체의 총무 직책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구민상 수상자로 선정할 수 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2년 후 세 번 째 도전을 했을 때 수상자는 다름 아닌 구청을 찾아가 항의한 바 있는 모 단체 회장이었다. 그와 나는 지역 신문사 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신문사 사장이 내게 세 번 째 도전을 적극 권장하면서 뒤로는 그를 신문사 이름으로 추천했던 것이다.
지난 번 보다 더 큰 배신감과 충격을 감당해야 했다. 약사회장직을 내걸고 사회 봉사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점에 대해 남동구약사회 회원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해가 지날수록 내 공적 보고서 자료는 두꺼워 갔지만 구민상은 구청에서 예산 지원을 받는 관변(官邊) 단체장들에게 계속 돌아갔다.
2년이 지난 올해, 네 번 째 도전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 수십 명의 후보를 물리치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사회봉사 부문에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신문 기자가 약국으로 찾아와 취재를 한 후 큼직한 사진과 기사가 조선일보에 게재되어 약사의 위상과 함께 남동구 구민상의 권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남동구약사회장직 8년 5개월 동안 약국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약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보람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 데, 구청의 행사 때마다 회원을 많이 동원하는 다른 관변 단체와 달리 약사회는 약국을 지켜야 하는 직업인 관계로 회장 혼자의 몸으로 뛰다보니 구민들에게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약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사회 봉사활동! 그것은 결코 단순한 여정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