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돈키호테> (1604)

2017-09-05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소설의 제목이면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키호테>는 너무 유명하다. 그래서 다시 언급하는 것은 덧붙이는 것에 사족을 더하는 꼴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는 ‘인류의 바이블’은 되레 위대해 외면 받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를 말하지 않고 세상의 그 어떤 책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도 숱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새로운 찬사가 그전의 찬사를 덮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위대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더 빛을 발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혹은 읽었으나 기억이 가물거리는 ‘한가한 독자’들을 위해 내용을 간략히 적어 보면 이렇다.

스페인의 라만차 지역에 한 이달고( 하급양반)가 살았다. 나이는 쉰에 가깝고 얼굴과 몸은 말랐고 체형은 꼿꼿한데 어느 날 부터인가 기사소설 읽는 재미에 뿍 빠져 지냈다.

사냥을 하거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잊는 것은 물론 밤새워 책을 읽느라 있는 밭까지 다 팔아 치웠다.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니 낮에는 멍하게 지내고 마침내 골수까지 말라 정신은 분별력을 잃고 말았다. 마른 뇌에는 대신 결투, 부상, 사랑, 번민, 마법 그 밖의 황당무계한 사건들이 들어찼다.

그리고 거기 나오는 이야기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실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미치광이 상태의 그는 무장한 말을 타고 세상의 모욕을 쳐부수고 불의를 바로잡고 권력의 남용을 막고 모든 종류의 모험을 하기 위해 스스로 편력기사가 되기로 굳은 결심을 하고 드디어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다.

투구와 창을 고치고 나서 타고 가는 말은 로시난테라고 이름을 정했다. 고상하기도 하거니와 부르기도 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여드레를 생각한 끝에 원래 자기 이름인 알론소 키아노 대신 고향의 이름을 붙여 돈키호테 데라만차 라고 불렀으며 사랑하는 귀부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에스파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전투에서 승리해 자신의 영광을 돌릴 상대로 결정했다. 

산초 판사는 편력기사에게 당연히 따라다니는 종자로 낙점됐다.( 돈키호테는 산초 판사를 종자로 고용하면서 자신이 모험으로 얻은 섬을 통치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좀 모자란 농사꾼인 산초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그와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종자가 타고 다니는 것은 말이 아닌 당나귀인데 이 당나귀는 이름 없이 시종일관 당나귀로 혹은 색깔 때문에 잿빛으로 불린다.)

 

모든 준비를 마친 돈키호테는 외조카 딸과 하녀의 배웅을 받고( 그는 부인도 자식도 없다.) 더 늦어지면 세상이 입을 손상이 크다는 생각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지체 없이 로시난테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해댔다.

이후 사건들은 저마다 한마씩 떠들어 댈 수 있는 익히 알려진 그런 내용들이다.

객줏집에서 기사 서품을 받고 정식 기사된 돈키호테는 들판에 서있는 풍차 30~40여개를 향해 기다란 팔을 가진 거인이라며 다짜고짜 돌진해 날개를 부러뜨리다 로시난테와 함께 고꾸라진다.

정신이 멀쩡한 산초가 보기에 이보다 더 미친 짓은 없다. 

하지만 이후 더 미친 짓이 더 센 미친 짓에 치이고 또 다시 차이는 일이 쉬지 않고 벌어진다.

그 때마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기사소설에도 나오지 않는 대단한 적을 제압해 무훈을 세운 것으로 믿고 산초는 미친 주인의 미치광이 짓에 혀를 내두르지만 약속한 것, 다시 말해 눈앞에 가물거리는 섬 때문에 주인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꽁무니를 따라 다닌다.

길을 가다 마주치거나 이야기 하느라 쉬고 있을 때 혹은 숲에서 기대 자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새로운 모험은 계속 이어지고 지칠 줄 모르는 돈키호테는 그 때마다 말에 박차를 가하고 칼과 창을 무자비하게 휘둘러댄다.

왕이 가는 곳에 법이 있지만 돈키호테가 지나가는 길목에도 그 만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대포 돌진은 승리할 때도 한두 번 있으나 대개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몸은 실패했어도 정신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것이 돈키호테만이 가진 정신 승리법이다.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쉰의 <아큐 정전>을 떠올릴 수 있다. 얻어맞아 피가 터져도 때린 것이라고 우기는 아큐 식 해석 말이다. 하지만 호구지책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살아가는 아큐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돈키호테는 완전히 이질적인 인물이다.)

마법에 걸렸거나 마법사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실제로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죽을 때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미쳐 살다가 정신이 들어 죽은 것이다. 광기를 통한 구원이라고나 할까.)

부인의 정조를 의심해 절친한 친구를 이용한다기 보다는 그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버텨 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연극( 나중에는 연극이 사실이되고 사실이 연극이 되는 인간 심리 다시말해 젊은 남녀의 심리 묘사가 한마디로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을 여러 날에 걸쳐 듣기도 하고  산양치기와 여자목동과 조우한 이야기이며 양떼를 군대로 생각해 무모한 도전을 하고 객줏집을 성으로 착각해 돌진하고 이발사의 놋대야를 전리품으로 얻어 투구라고 쓰고 다니는 것은 차라리 애교라고 봐 줄 만 한다.

적의 손을 묶는 대신 자신의 손이 묶이면 마법에 걸린 것으로 치고 당치 않은 호기심으로 붉은 포도주가 담긴 가죽부대를 수없이 찌르고 거인의 목을 한 칼에 댕강 잘랐다고 의기양양 하는데에 이르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슨 일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든다.

이런 정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약골체질인 돈키호테는 더욱 수척해져 훌륭한 종자(때에 따라서는)가 살펴보니 슬픈 몰골을 하고 있다.( 돈키호테의 다른 별명은 슬픈 몰골의 기사이며 나중에는 사자의 기사라는 호칭을 얻기도 한다. 그는 하얀 달의 기사로 변신한 고향의 학사 삼손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 자기가 보지 못한 지구상의 땅은 없고 치르지 않은 전투가 없다고 떠벌일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아나니 모험은 새로운 모험을 낳고 전투는 신기한 싸움으로 이어진다.

학문과 군사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가 하면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기도 하고 적에게 잡혀 포로 신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죽기 전에 제때에 살아난다. 나는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도 모른 체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불의를 깨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입고 있던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이름을 알거나 모르는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난다. 산이 학자를 키우고 목동의 오두막이 철학자를 품고 있는 그런 곳으로 아무 싸움이나 망설이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돈키호테는 시골사람에게 몽둥이 한 방을 얻어맞고 어깨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산초가 죽은 줄로 알고 때린 사람에게 더 때리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 겨우 살아난 주인이 한 말은 “사랑하는 귀부인 둘시네아여! 그대를 떠나 사는 자 이렇게 큰 불행을 당했다, 산초여! 나를 도와 마법에 걸린 수레에 태워 주게.”였다.(2014, 열린책들, 안영옥 번역)

돈키호테는 비쩍 마르고 누렇게 뜬 채 소달구지를 타고 건초위에 제대로 뻗어서 고향땅에 도착했다.

이것으로 1부가 끝났다. 주인공이 죽지 않고 끝났으니 부상에서 회복되면 뭔가 새로운 모험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불현듯 든다. 더구나 작가는 마지막에 돈키호테의 세 번째 출발을 기대한다고 적었다. 2부는 10년 후인 1614년 발표됐다.

그 이전에 다른 작가에 의한 속편이 나왔다. 이를 두고 세르반테스는 2편에서 그 작자를 무자비하게 등장인물을 시켜 무능한 인간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돈키호테>에 대한 찬사는 앞서 이야기 했다. 

구체적으로는 ‘근대소설의 효시’( 알베르트 티보데), ‘<돈키호테> 이후에 쓴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 (르네 지라르)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 ( 표드르 또스또예프스키) ‘<돈키호테> 속에서 나의 근원을 발견했다’ ( 구스타프 플로베르) 혹은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다’ ( 호세 오르테가 이 카세트) 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내 의견을 첨가해 하나를 더 쓰면 '모든 소설의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2부가 없이 1부 만으로도 <돈키호테>는 더 보태고 더 뺄게 없는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2부의 내용은 1부에 비해 좀 재미가 떨어지고 박진감도 모자라 보인다. (2부가 더 낫다는 사람도 있다. 개인취향이라고 보면된다.)

그만큼 1부가 가져온 충격이 크다는 말이다. 

지금과는 달리 출간을 허락받기 위해 규정가격을 정하고 원문과 비교해 하자고 없고 요구한 대로 수정했다는 내용의 정정에 대한 증명 그리고 유효기간이 10년인 왕의 특허장과 책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글 들이 흥미롭다.

이 책의 서문은 앞서 언급한바 있는 ‘한가로운 독자여’로 시작하는데 어떤 책의 첫 구절보다 멋진 표현이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가 벌이는 익살과 해학과 재치, 그 속에 있는 평등, 자유, 신분을 뛰어넘는 인류애, 문학, 철학, 통치( 실제로 산초는 약속대로 섬의 통치자가 된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산초는 아주 유능한 판관 역할을 하는데 지금의 통치자들도 본받아야 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우정 그리고 배신과 음모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금언들은 이 책의 이런 저런 평가가 과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 자신이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는 만신창이 인생을 살았음에도 이처럼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약한 자의 벗을 자처하고 나서다니 세르반테스는 과연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 장대를 넘어섰다. ( 사람들은 그와 견줄만한 유일한 인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햄릿>의 작가 셰익스피어를 꼽기도 한다. )

그가 만든 <돈키호테>는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며 세상은 그가 무서워 벌벌 떨었으니 신에게 자랑할 만한 인간이 만든 그 무엇이 있다면 첫번째는 바로 <돈키호테>일 것이다.

중세를 넘어 근대를 탄생시킨 돈키호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명한 이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