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료인에 명의 빌려준 법인, 민사상 책임도
서울중앙지방법원...손해배상 판결
비의료인이 비영리 사단법인의 명의를 빌려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면 법인에게도 행정처분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민사상 법인의 불법행위책임도 인정될 수 있을까?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8민사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A법인과 대표이사인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3억 4283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B씨와 A법인의 행정원장인 C씨는 의료기관의 개설자격이 없음에도 지난 2006년 2월경부터 2008년 5월경까지 ‘A법인 D의원’을 개설·운영하면서 진료실 등을 갖추고 의사·간호사 등을 고용한 후 진료행위를 통해 총 3억 7161만 원 상당의 수입을 올리는 등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했다.
이 같은 사실이 적발되자 검찰은 B씨와 C씨가 공모, D의원을 직접 개설·운영했음을 이유로, A법인에 대해서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A법인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법원은 지난 2009년 1월 B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A법인에 대해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했다. 이에 불복한 B씨와 A법인은 항소를 제기했는데, 항소심에선 원심 판결 중 B씨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 후,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A법인의 항소는 기각했다.
A법인은 항소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상고기각돼 1심 판결이 확정됐다.
건보공단은 형사 소송이 확정되자 A법인이 반환하지 않은 요양급여비용 3억 4283만 원을 반환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B씨는 “C씨가 D의원을 직접 개설·운영했다”며 “병원 명의로 건보공단에 청구한 요양급여비용을 직접 취득하지 않았다”면서 건보공단의 소에 맞섰다.
재판부는 A법인과 B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재판부는 먼저, “의료기관의 개설자가 될 수 없는 자가 의사를 고용해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고용된 의사로 하여금 진료행위를 하게 한 뒤 건보공단에 요양급여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해 이를 지급받은 경우, 이는 보험자인 건보공단으로 하여금 요양급여대상이 아닌 진료행위 대해 요양급여비용을 지급하도록 하는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로 국가가 헌법상 국민의 보건에 관한 보호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보험 원리에 기초해 요양급여대상을 법정하고, 이에 맞춰 보험재정을 형성한 국민건강보험 체계나 질서에 손상을 가하는 행위이므로 민법 제750조의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이어 재판부는 “B씨는 의료기관 개설 자격이 없음에도 의료기관 개설자격을 갖춘 사단법인 A법인의 명의를 빌려 병원을 직접 개설·운영하고, 고용한 의사로 하여금 진료행위를 하도록 한 뒤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함으로써 건보공단으로 하여금 지급의무가 없는 요양급여비용을 지출하도록 하는 불법행위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A법인은 B씨가 법인의 명의를 빌려 병원을 개설·운영하는 것을 고의·과실로 허용하는 등 직무에 관해 건보공단에 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재판부는 “이미 확정된 형사판결에 기초한 사실을 뒤집기에 부족하다”며 “B씨가 C씨와 공모해 병원을 개설·운영하면서 건보공단으로 하여금 지급의무가 없는 요양급여비용을 지출하도록 불법행위를 한 것으로 인정되는 이상 B씨와 C씨 사이의 관계에서 요양급여비용 상당액이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귀속됐는지 여부는 불법행위 성립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B씨는 ‘진료행위는 의사들이 직접 시행했으므로 건보공단이 지급의무 없는 요양급여비용을 지출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지만 D의원은 구 의료법 제33조 제2항을 위반해 적법하게 개설되지 아니한 의료기관”이라며 “실제 진료행위가 이뤄졌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요양급여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요양기관에 해당하지 않고, 요양급여비용도 국민건강보험보험법에서 정한 요양급여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건보공단 법무지원실 김준래 변호사(선임연구위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비영리법인의 사무장병원을 개설해 요양급여비용을 지급받아간 경우 해당 법인에 대해 행정처분을 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이번 사건의 경우 법인에 대해 민사상 법인의 불법행위책임을 물었고, 법원이 이를 인정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법인의 명의를 대여 받아 사무장병원을 개설하는 경우, 법인 자체에도 형사책임을 묻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