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혼 관계 투자, 사무장병원 아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전원 무죄 선고
의사가 아닌 이가 병원 개설자금을 조달하고, 자금관리·행정처리 등 실무에 관한 전체적인 운영을 담당했어도 사무장병원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이 사무장병원으로 보지 않은 근거는 병원운영을 담당하던 이가 의사와 사실혼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최근 의료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와 의사 B, C, D, E씨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에 따르면 비의료인인 A씨는 병의원 경영관리 및 대행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 F사의 대표이사로, A씨가 의료기관 개설에 필요한 자금을 투자하고 성형외과를 총괄 운영하면서 B씨에게 병원 수익금의 절반, C씨에게는 월 500만원 및 C씨가 한 수술 수가의 20%, D, E씨에게는 월 1000만원을 지급하고 C, D, E씨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기로 공모했다.
이들은 지난 2013년 7월경 서울 시내의 한 건물 2층을 임차해 진료실, 수술실, 상담실 등을 구비하고 직원들을 고용한 후, C씨의 명의로 G의원을 개설해 2013년 9월 3일까지 운영했다.
여기에 이들은 2013년 9월 4일∼2015년 7월 12일까지는 D씨의 명의로 G의원 개설했고, 2015년 7월 13일 E씨의 명의로 H성형외과의원을 개설한 후 2015년 7월 28일 명칭을 I성형외과의원으로 변경, 2016년 1월 7일까지 운영했다. 이들이 운영한 병원은 의사 명의와 의원 상호만 다를 뿐 전부 같은 건물이다.
의료기관 개설을 규정한 의료법 제33조 제2항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또는 조산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료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민법이나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비영리법인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준정부기관, 지방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방의료원,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법에 따른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해당하지 않는 자가 아니면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A씨가 이 사건 병원의 개설주체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A씨가 병원 개설의 주체가 된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면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먼저 재판부는 “A씨와 B씨는 이 사건 병원이 개설되기 이전부터 내연관계 내지 사실혼관계로 지내왔고, 2010년경부터는 A씨의 집에서 함께 거주해오고 있는 상태”라며 “A씨는 B씨에게 남동생의 주택을 담보로 거액의 사업자금과 개원자금을 빌려줬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B씨는 빌딩을 매수했다 되파는 과정에서 17억 원대에 달하는 양도소득세를 비롯해 세금 체납 문제가 발생하자 성형외과를 개설할 때마다 다른 의사들의 명의로 개설했다”며 “C, D, E씨는 B씨의 부탁을 받고 이 사건 병원에 관한 개설 신고를 하게 됐고, B씨와 고용조건을 협의하고 고용계약서 등을 작성하는 등 B씨는 병원을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피고인들은 이 사건 병원에 근무하면서 A씨를 알게 됐고, 상당기간 동안 A씨와 B씨의 관계나 A씨가 B씨에게 병원 개설자금 등을 대여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또한 재판부는 “세금 체납 등으로 자신의 명의로 병원을 개설하기 곤란한 B씨가 A씨로부터 개설자금을 차용해 다른 의사들과 함께 사건 병원을 개설·운영하게 된 것으로 보일 뿐 A씨가 개설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A씨가 병원 개설 시점부터 자금관리·행정절차 등 병원 운영 실무에 전체적 운영을 담당했다 하더라도 B씨의 사실상 배우자”라며 “병원 개설자금 등을 친정 측으로부터 조달한 A씨가 B의사의 재기와 채권 회수를 위해 다른 의사들이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병원 운영에 관한 사항을 포괄적으로 위임받았기 때문으로 보이고 A씨의 행위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공동피고인 중 한 명인 D씨가 공소사실을 자백하고 있으나 상당 기간 근무하기까지는 B씨가 이 병원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월급과 병원에 대한 투자금을 반환받지 못한 채 의료기기 리스업체 등으로부터 개설 명의인으로서의 책임만 추궁당하자 A씨와 B씨를 고소해 수사기관에서 다소 과장해 진술했다”며 “법률 문외한으로서 의료법 위반의 점에 관한 법률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비춰 볼 때 D씨의 자백만으로 다른 피고인의 죄책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 법무지원실 김준래 변호사(선임전문연구위원)는 “이번 판결은 의료기관을 개설한 주체를 의료인인 B씨로 보고, 비의료인 A씨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봤다”며 “이에 따라, 의료법 제33조 제2항 위반한 의료기관, 즉 이른바 사무장병원으로 보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B씨가 다른 의료인들 명의로 개설한 셈이므로 이는 의료법 제4조 제2항 위반에 해당한다”며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어도 국민건강보험법상 부당이득 환수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의료법 제4조 제2항은 ‘의료인은 다른 의료인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운영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B씨의 행위는 이를 위반했다는 것.
김준래 변호사는 “의료법 제4조 제2항은 형사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국민건강보험법상 부당이득 환수대상”이라며 “지난해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선고된 판례에 따르면 의료법 제4조 제2항을 위반하면 건보법상 부당이득환수대상이라고 판시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