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시술 요청 미확인, 19년치 양육비 부담
서울고법 "부부 결정권 우위"...원심 뒤집어
불임시술 요청을 확인하지 못한 의료진에게 태어난 아기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부담하라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는 최근 A씨 부부가 의사 B씨와 C씨, D보험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태어난 아기가 만 19세에 이를 때까지 양육비를 부담하라며 7147만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한 A씨는 지난 2012년 12월경 제왕절개 수술을 받기 전 수술청약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병원 간호사에게 불임수술을 요청했다. 수술 청약서에 ‘불임수술을 원합니다’고 자필로 기재하고 서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B씨와 C씨는 수술청약서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고, 간호사 등으로부터 불임수술에 대해 보고받지 못해 제왕절개 수술 과정에서 A씨에 대한 불임수술을 시행하지 않았고, 이런 사정을 A씨 부부에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불임수술이 된 것으로 알고 있던 A씨는 이후 넷째 아이를 임신, 2015년 8월경 제왕절개 수술로 남아를 출산했다.
A씨 부부는 “채무불이행으로 인해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됐다”며 진료비·수술비·산후도우미 고용비용·노동능력 상실에 따른 일실수입 손해·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비 및 교육비·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등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B, C씨는 “불임신청을 받은 간호사가 보고를 하지 않아 수술을 시행하지 못했을 뿐, 고의로 수술을 시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채무불이행 책임이 없다”고 맞섰다.
1심 재판부는 A씨 부부의 손을 들어주고 57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병원이 A씨들의 불임수술 청약을 이의없이 받아들임으로써 A씨 부부와 병원 의료진 사이에 불임수술에 관한 의료계약이 성립됐다고 할 것”이라며 “B, C씨는 계약의 불이행으로 인해 A씨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의사는 수술청약서를 확인한 뒤 수술을 시행할 의무가 있었다고 할 것임에도 이를 확인하지 않아 불임수술을 시행하지 아니한 과실이 있다”며 “A씨들로부터 불임수술 신청을 받은 간호사가 B, C씨에게 이를 보고하지 않은 것은 이행보조자의 과실로 피고들의 과실로 간주된다”고 전했다.
또 재판부는 “피고들은 공동으로 보험계약상의 보상한도액 범위에서 A씨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5747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다만 양육비 및 교육비 청구 부분에 대해서는 “비록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해 출생한 자라 할지라도 그 자의 생명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돼야 할 가치로서 부모의 재산상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법 제913조에서는 친권자는 자를 보호하고 교양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부모의 친권에 기한 미성년자에 대한 부양의무는 원칙적으로 이를 면제받거나 제3자에게 전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해 출생한 자라 할지라도 부모는 일단 출생한 자에 대해 부양의무를 면할 수 없고, 부양의무를 손해로 파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심 재판부는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한 자의 출생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등을 지출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A씨의 손해라고 볼 수 없다”며 “그 비용이 손해임을 전제로 한 양육비와 교육비 청구는 이유 없다”고 선고했다.
판결에 불복한 A씨들은 항소를 제기했고, 2심 재판부는 부부의 자기결정권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생명 및 탄생의 가능성 보다 우위에 있다면서 양육비와 교육비 청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생명권의 연장선상에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생명 및 탄생의 가능성도 보호받아 마땅하지만 부부가 행복하기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 형편·가족관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적절한 가족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불임시술을 선택하는 것도 헌법이 확인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의해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불임시술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계약은 그 이행으로 인해 아직 구체화되지 아니한 인간의 생명 및 그 탄생 가능성을 봉쇄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가족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부부의 결정권과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생명 또는 생명 탄생 가능성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한 계약”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우리 법제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인간의 생명 및 그 탄생 가능성의 보호보다는 구체화된 생명인 부부의 결정권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불임시술 당사자인 부부가 계약을 불이행한 의사에 대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통상적인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불임시술 계약의 당사자인 부모가 그 계약을 불이행한 상대방으로부터 양육비 등 상당액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는다고 해 태어난 아이의 존재 자체를 손해로 보는 것은 아니므로 존엄성이 침해된다고 볼 수 없고, 부모의 부양의무를 계약을 불이행한 의사들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며 “의사들은 불임수술 계약 불이행으로 인해 부담하게 된 양육비 등 상당액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출산장려금과 양육수당 등을 지급해 영유아의 출산 및 보육을 지원하고 있는 점을 종합할 때 2015년 8월 12일부터 성년(만 19세)에 이르는 2034년 8월 11일까지 19년 동안의 양육비와 교육비로 4857만 원이 산출된다”며 “산모에게 4218만 원(진료비 및 분만수술비 312만원+일실수입 476만 원+양육비 등 2428만 원+위자료 1000만 원)을, 남편에게 2928만 원(양육비 등 2428만 원+위자료 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