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와 쇠도끼
2004-12-26 의약뉴스
미국의 ‘아폴로 안톤 오노’ 선수가 양팔을 벌리며 마치 밀려나는 것 같은 ‘할리우드 액션’을 취했으며 심판은 이를 받아들여 2위인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안겨 주었다.
전명규 감독은 심판진에게 항의서를 제출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부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경기를 한 선수와 취재 기자들은 김 선수의 우승을 주장했다. 미국의 NBC가 경기 직후 실시한 인터넷 투표에서도 압도적으로 김동성에게 표를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홈그라운드의 이점인 텃세 테러는 미국만의 전유물이었던가?
88 서울 올림픽 당시 신준섭 선수는 일방적으로 뒤진 경기를 하고도 복싱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 심판이 내린 판정은 아니었지만 상대방 선수의 가슴에 못을 심었고 아이들이 볼까봐 낯뜨거운 장면이었다.
2천년 새해 벽두에도 한국 권투 사(史)에 오점을 남기는 판정이 일어났다. 한국의 조인주 챔피언과 도전자인 필리핀의 ‘페날로사’의 경기에서 1회전부터 치명타를 허용한 챔피언은 내내 도망만 다니기에 바빴으면서도 판정승을 거둔 것이다.
지난해 WBA 슈퍼 페더급 챔피언인 몽고의 ‘리쿠바심’과 백종권 도전자의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한차례의 다운을 빼앗고 세 번의 ‘그로기’ 상황까지 몰고 간 몽고 선수, 만일 한국 선수가 그 정도의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면 도중에 경기를 중단시키고 TKO 승을 선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심은 일방적인 우세를 펼친 ‘리쿠바심’에게 벌점을 주더니 어이없게도 한국 선수에게 챔피언 벨트를 안겨 주었다.
한국 프로 축구의 최고 정상을 가리는 수원 삼성과 부산 대우의 경기에서 삼성은 ‘샤샤’ 선수의 공(?)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문제는 고의든 아니든 발로 차야 할 공을 손으로 쳐 골인시켰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각종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미모보다 뒷돈의 액수로 수상자가 선발되었다는 某 미인대회, 뽑을 사원은 이미 정해 놓고 형식적으로 모집 광고를 낸다는 某 개인 기업 등 각종 비리를 매스컴을 통해 자주 접해 왔다.
밝고 명랑한 사회를 구현시키기 위해 구청에서 수여하는, 가장 선명성을 띠어야 할, 구민 상조차 후보자의 업적을 냉철하게 평가하기보다 인맥과 정분을 앞세우는가 하면 힘있는 추천 기관의 눈치를 살피며 엉뚱한 후보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다.
공명선거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금권을 동원하다 못해 상대방의 약점인 신체장애까지 들먹인 파렴치한들이 정정당당한 승리자 행세를 하며 의원 배지를 달고 활보하고 있다. 뛰어난 흑색 선전술에 비해 주민을 대변해야 할 그들의 의정 활동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때마다 양상군자처럼 승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며 거절하는 페어 플레이 정신의 선수와, 영예의 수상자는 내가 아니라며 수상을 거부하는 양심가는 어째서 나타나지 않을까?
연못에 도끼를 빠트린 나무꾼의 이야기처럼 ‘내 도끼는 금도끼도, 은도끼도 아닌 쇠도끼 일뿐’이라고 양심선언을 할 의로운 인물이 이 시대에는 진정 없단 말인가?
어린이들에게는 ‘길에서 주운 물건은 내 것이 아니므로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정 반대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지도층 인사들에게 고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