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겨울女子(1977)

2015-10-19     의약뉴스

정확히 머리의 반을 가른 긴 생머리의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웃으니 입이 벌어지고 벌어진 입 사이로 하얀 치아가 가지런하다.

입속의 혀는 ‘검은 잎’이 아닌 선홍빛이 선명하다. 이 여자는 올리비아 핫세도 아니고 소피마르소도 아니다. 바로 장미희다. 그 장미희가 김호선 감독의 <겨울女子>의 주인공으로 영화 포스터에 등장했다.

이 후 장미희는 더 이상 그 이전의 장미희가 아니다. 70년대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한국 영화계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바로 그 장미희로 변신한 것이다.

바야흐로 장미희는 <겨울女子>로 태어났고 <겨울女子>로 성장했고 <겨울女子>로 완성됐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해마다 <겨울女子> 장미희가 생각난다.

장미희 같은 여자 어디 없나 두 리 번 거리면서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장미희가 벌인 애정행각을 떠올리며 음흉한 미소를 짓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장미희가 생각나는 것은 장미희라는 대 여배우에게 찬사와 경의를 보내기 위해서다.

올해도 어김없이 10월이 지나가고 있다. 당연히 장미희가 떠오른다.
장미희가 연기하는 이화는 목사 아버지와 연애편지를 공유할만한 친구 같은 어머니와 동생을 둔 화목한 상류층의 여고3학년이다.

곤색 교복에 하얀 칼라가 산뜻하다. 할 수만 있다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 따라가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여학생들 가운데 돋보인다. 내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남자가 손을 내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셉(신광일)이라는 남자가 손대신 편지를 들이민다.

운 좋은 요셉은 막 대학에 합격한 이화를 강가의 근사한 별장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둘 만의 공간에서 요셉은 이화의 얼굴을 만지고 무릎 꿇고 찰나의 순간 이화의 체온을 접한다.

 

놀란 이화는 이게 뭐예요, 뭐예요, 난 몰라요 하면서 밖으로 달려 나가고 운 좋은 요셉은 더 이상 운 좋은 놈이 아니다. 죄책감인지 우울증 때문인지 요셉은 자살한다. 이화는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육체에 회의를 느낀다. 도대체 죽으면 사라질 육체가 얼마나 대단 하다고 한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화의 고심은 깊어지고 마침내 그녀는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 신처럼 나보다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하고 싶어 하고 도와주고 싶어 한다.

여자의 육체는 신성하거나 무한정으로 보호받거나 깨끗하거나 순결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완벽하게 정립한다. 이런 이화를 우석기(김추련)가 콕 찍어서 뒤쫓는다.

정치과 3학년 석기는 여대 앞에서 기다리다 역사과 2학년인 이화를 꼬드기는데 성공한다. ( 운 좋은 놈은 요셉이 아니라 석기다.) 석기는 쉽게 이화와 동침하는데 성공한다.

이화는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것을 자신이 남자에게 주는 가벼운 선물 정도로 여긴다. 아니 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받은 큰 은총으로 까지 생각한다.

그러니 섹스를 했다고 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돈을 달라고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거나 속상해 하거나 순결을 뺏겼다는 그런 허접한 생각으로 힘들어 하지 않는다.

굶주린 남자에게 밥을 주듯 성을 준 것이니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마음이 가볍다. 둘의 관계는 그러니 어디에 얽매일 수 없다. 말 그대로 성인 남녀가 즐기는 유희이므로 부모나 다른 누구 심지어 국가가 관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석기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군대에 간다. 첫 휴가를 나오기로 한 석기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홀로 남겨진 이화는 여고 선생님이었던 허민( 신성일)을 우연히 만난다. 아파트에 사는 허민은 이혼하고 혼자 사는 홀아비다. 지금은 대학교수로 강의를 나간다.

이화는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이든 남자가 얼마나 외로울까. 밥도 제대로 해먹지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더구나 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게 아닌가. 이화의 눈에 허민은 보살펴 줘야 할 남자다. 당연히 그와 잠자리를 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진짜 운 좋은 놈은 요셉도 석기도 아닌 허민이 아닐까.)

조금 남아 있는 양심 때문에 꺼리는 척 하는 허민은 이화의 유혹 아닌 유혹에 넘어가 옷을 벗고 같은 이불을 덮는다. 허민은 이화와 결혼하고 싶어 매달린다.

이화가 결혼을 할까. 아니다. 이화는 또 다른 석기나 허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몸을 주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혼한 전처(박원숙)를 찾아가 둘이 다시 합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아직 개발 중인 강남의 어느 도로를 산뜻하게 걷고 있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이화에게 말을 붙인다면 그 남자는 진정으로 운 좋은 남자가 될 것이다. ( 이화는 세 남자를 만나면서 완벽한 성인으로 자랐다. 만약 이화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만났어도 세 남자와 같은 무언가 바라지 않는 모성애적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화는 그런 여자다.)

참말로 이화는 멋진 여자가 아닌가. 남의 불행을 돌보지 않는다는 그런 권리는 포기하겠다는 이화 같은 이런 여자가 10명만 있어도 살만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세상의 남자들은 이제는 지구상에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을 윤리적 관습을 깨는 이화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겨울女子>는 당시 한국 여성의 성 모럴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한다. 포스터의 “이화는 누구에게나 속해있고 또 이화는 아무에게도 속해있지 않다”는 선전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국가: 한국

감독: 김호선

출연: 장미희 김추련 신성일

평점:

 

 

 

팁: 영화 포스터는 조해일 원작 김승옥 각색을 김호선 감독 보다 앞선 쪽에 배치하고 있다.

그만큼 원작자와 각색자의 지명도나 호감도가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앙일보에 75년 1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연재된 조해일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명작 <영자의 전성시대>(1975)를 만든 김 감독의 네 번째 작품으로 <별들의 고향> 46만 명을 뛰어넘는 58만 명의 관객들 동원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서울인구가 600만 명) 단성사에서 비원까지 이르는 길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관중을 동원했는지 실감난다.

추석특선으로 개봉해 해를 넘겨 구정특선까지 장장 100일이 넘는 전회 매진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영화는 1990년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 나오기 까지 무려 13년 동안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웠다.

영화와 함께 나온 김세화가 부른 ‘겨울이야기’와 ‘눈물로 쓴 편지’ 사운드 트렉은 영화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바람 부는 갈대숲, 강의 곡선 등을 표현한 영상미도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