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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사울의 아들(2016)- 죽은 자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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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사울의 아들(2016)- 죽은 자에 대한 예의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4.05.23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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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영화를 보면서 고전을 떠올렸다. 고전을 보다 영화를 기억하는 것처럼.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은 어둡고 슬픈 영화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비극이다. 둘은 내용 면에서 닮았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더 그렇다. 영화는 죽의 자의 매장에 관한 것이고 고전 역시 그부분이 중요하다.

오이디푸스 왕의 장녀 안티고네는 죽은 오빠의 장례를 준비한다. 들판에 그냥 버려둘 수 없다. 통치자인 외삼촌 크레온은 누구든지 반역자에게 시혜를 베풀면 죽이겠다는 포고령을 내려놓은 상태다.

안티고네는 죽을 각오로 새나 개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는다. 성대하게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면 적어도 매장만이라도 하고 싶다. 영화에서 사울은 죽은 아들을 화장장의 재로 만들 수 없다. 그 역시 안티고네처럼 매장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한다.

1944년 나치 독일은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에 열을 올린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울(게좌 뢰리)은 가스실의 시체를 처리하는 특수 작업반 소속이다.

▲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사울은 죽을 각오를 마다하지 않는다.
▲ 아들을 매장하기 위해 사울은 죽을 각오를 마다하지 않는다.

화면 만큼이나 어둡고 소름 끼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울은 다른 작업자처럼 시체들을 처리한다. 그 와중에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장면을 목격한다. 바로 아들의 죽음.

그러나 아들은 아직 살아 있다. 숨을 쉬고 있다. 독일군 군의관은 그런 아들을 질식사시킨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아버지 사울. 아들은 죽었다. 군의관은 부검을 명령한다.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부검만큼은 막고 싶다.

다행히 아들은 그런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남은 것은 소각로 대신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그 일을 아버지는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매장을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 기도해 줄 랍비가 있어야 한다.

전쟁통에, 쉼 없이 가스실로 가는 혼란한 행렬 속에 랍비를 찾는 일은 서울서 김서방 찾기다. 설사 랍비가 있다고 손 치더라도 선뜻 나서서 매장에 동의해 줄 처지가 아니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사울도 이제 명단에 들었다. 샤워를 하고 입금을 받는 좋은 조건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소각로 들어가야 할 신세다. 운 좋게 사울은 숲으로 도망칠 기회를 얻는다. 적과 싸울 준비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도망이나 적과의 싸움은 뒷전이다. 그의 어깨에는 아들의 시체가 매달려 있다. 묻어야 한다. 랍비가 없어도 좋다. 가짜 랍비라도, 배교자라도 상관없다. 그냥 묻기만 하면 된다.

간헐적인 기관총 소리, 가까이 다가오는 개들의 짖는 소리. 아버지는 아들을 메고 강물로 뛰어든다. 그런데 아뿔싸 깊은 곳에 이르러 아들을 놓치고 만다.

여기서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불현듯 생각났다. <안티고네>처럼 영화가 고전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책은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남은 가족들이 머나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어머니가 친정 식구들이 묻혀 있는 곳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필 많은 비가 내렸다. 강물은 불어 다리가 잠겼다. 돌고 돌아가면 너무 늦다. 강을 건넌다.

그러다 어머니의 관을 놓쳤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숲속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오두막에서 사울 일행은 잠시 쉬고 있다. 그때 사립문 밖으로 아들인지 아닌지 또래의 소년이 서 있다. 아버지와 소년이 눈이 마주친다.

사울의 아들인가, 아닌가. 환영인가, 실제인가.

국가: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스

출연: 게자뢰리, 레벤테 몰나르

평점:

: 죽은 자에 예를 표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같다. 내버려 두면, 매장 없이 아무 곳에나 방치 하면 영원히 안식처를 얻지 못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종교적이든 아니든 어떤 경우라도 산자처럼 죽은 자도 절차에 따른 예식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전쟁터라면, 산 자들의 생명도 절체절명에 빠진 상황이라면 죽은 자를 신경 쓰기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다. 아들의 죽음을 내가 죽더라도 그냥 방치할 수 없다. 사울의 애끓는 부성애가 아우슈비츠 숲속에 울려 퍼진다.

사울의 고뇌가 통치자의 위협이 있더라도 곡을 하고 애통해하고 땅속에 묻어 줘야 하는 안티고네의 고뇌와 맞닿아 있다.

한편 영화와 달리 책은 떠내려간 어머니의 관을 찾았다. 그리고 무사히 매장했다. 매장 후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각자 자기 길을 갔다.

사울은 그러지 못했다. 영화 밖의 일이겠지만 아마도 오두막에서 사울은 일행과 최후를 마쳤을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희망의 빛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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