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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04 06:58 (월)
일이 다른 식으로 진행되자 말수는 탈출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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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다른 식으로 진행되자 말수는 탈출을 꿈꿨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0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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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신은 하찮은 존재였다. 하찮은 존재보다 더 보잘것 없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버려진 물건 신세였다. 도쿄의 총알 공장은 양반이었다. 그곳은 십장 하나만 상대하면 됐다. 공장장은 어쩌다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는 숫자를 셀 수가 없다. 여순은 무너지는 것이 무엇이지도 모르고 스스로 무너졌다. 무너지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그것은 무엇이 문제 인지 모르는 무기력이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무엇을 재고 따지고 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갈 수만 있으면 돈이라도 줘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어리석었다. 얽매여 있는 것이 노예보다도 심하다고 해서 노예를 동정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이제 어쩌지. 나는 어떻게 살지. 같은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손에 쥘 수 없는 사치품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몸보다 정신이 먼저 허물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신이 먼저 굴복했다면 만신창이 몸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냥개에 쫓기는 날들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매일이 잡혀 먹는 어린양 신세였다. 그러나 여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망갈 때 까지 도망친 다음 더는 갈 수 없을 때까지 가서는 그냥 그대로 어두꺼니 서 있었다. 잡혀 먹을 때 잡혀 먹히더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쯤은 해야 했다. 그것으로 여순의 하루 하루는 지나갔다. 

이곳에서 여순은 방향을 잡을 수 없었고 그 상태는 오래 지속됐다. 마치 이곳에 내리는 비처럼 모든 것이 무자비했다. 사람도 비도 그랬다. 남양군도 어디에도 자비는 없었다. 군인들은 오늘은 살기띈 얼굴이었다가 내일은 풀이 죽어 있었고 그 다음날에는 아예 죽어서 땅속에 묻혔다. 구멍 뚫린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그랬다. 잠깐이라고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예 하늘은 없었고 그래서 땅이었던 곳이 하늘로 착각될 정도였다.

비는 죽죽 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정말로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빨랫줄처럼 길다랗게 쏟아졌다. 그래서 빨래가 필요없었다. 멈출 때가 됐다 싶으면 다시 기세를 올렸다. 하루 이틀 내리다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비는 난생 처음이었다. 모든 처음이 두려운 것처럼 여순은 폭우에 또다른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다 쓸려가는 것은 아닌가. 군인들이 행군하는 연병장은 배가 떠다닐 만큼 물이 불어났다. 차라리 그랬으면. 다 쓸려 내려가서 태평양 바다위로 둥둥 떠다녔으면 싶었다. 누가 알겠는가. 운이 좋아서 고향마을 앞바다에 닿을지. 

저녁이 되면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거기에 포 소리인지 천둥소리인지 모를 굉음까지 더해지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는 한 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았다. 포소리도 그렇고 비도 그렇고 번개도 그랬다. 밑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여순은 갈데까지 왔는데 또 갈데가 어디있다고 자꾸 이러는가, 왜 내게 이러는데 하고 혼자 중얼 거렸다. 중얼 거리는 버릇은 이제 여순의 습관이 됐다. 이렇게 라도 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상대가 없이 혼자하는 말은 기억 속에 속속 들어왔다. 그리고 잘 들렸다. 작은 소리도 여순이 자신이 무슨 말을 했고 하고 있는지 알아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가로 젖기도 했다.

하늘에서 번개불이 번쩍 번쩍 하는 날이면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기도 했다. 잘 치는 구나. 번개도 여기는 달라. 아주 크고 너무 자주 보이고 색도 붉었다가 파랗다가 심지어 노랗게도 보여. 그런데 이번은 번개가 아닌가 싶다. 오래갔고 주변이 너무 밝았다. 그래 번개는 가고 조명탄이 오는구나. 처음에 둘의 구분이 쉽지 않았으나 이제는 밝기만으로도 여순은 조명탄을 구분해 냈다. 조명탄이다. 피해라. 이런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피하는 대상은 군인이었지 여순은 아니었다. 그래서는 그녀는 피하라는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을 조금 열고 조명탄의 꼬리가 두서 없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검은 대지가 온통 하얗게 빛난다. 빛이다. 빛. 여순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빛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사방으로 퍼졌다. 빛이 사라지고 나면 또다른 빛이 다가왔다. 그것은 소리로 먼저 왔다. 두 둥 쿵 쿠르릉. 천동소리다. 대포 소리와 다른 소리. 여순이 번개와 조명탄을 구분하듯이 천둥과 대포 소리를 정확이 알아 맞췄다. 문이 흔들린다. 그래도 여순은 밖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번개든 조명탄이든 천둥이든 대포 소리든 여순은 겁먹지 않았다. 그런들 바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겁먹어서 바뀐다고 하면 그처럼 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부대안의 여자들 가운데 제일 겁이 많은 것이 여순이었다. 난 겁이 많아. 그래서 겁이 없는거야. 여순은 자신이 한 말이 이상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이상하지 않고 옳은 것 같았다. 겁이 많아 겁이 없다. 자신이 한 말치고는 제법 근사했다. 그래서 그녀는 순간마다 중얼 거렸다. 겁이 많으면 겁이 없는 법이다. 

이제 여순은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용기가 자리 잡았다. 잡을 수만 있다면 손을 뻗쳐 잡고 싶었다. 번개를 잡을 생각을 하다니. 여순은 실제로 번개치는 날에는 손을 뻗어 보기까지 했다. 군인들이 안 보인다 싶으면 뒷 문을 열고 나가 그냥 서 있기도 했다. 비를 흠뻑 맞고 치는 번개를 노려 보면서 여순은 이게 뭐가 무서워, 무섭다니 우스울 뿐이야. 또 이렇게 중얼 거렸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서쪽 하늘 아래서 번쩍이다가 어느새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하늘을 갈라놓는 번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달려 다니기도 했다.

번개를 맞으면 죽는다고했다. 벼락맞아 죽은 년도 있다고 했다. 엄마는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고 화가 나면 벼락맞은 죽을 년이라고 혼잣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여순은 알고 싶지 않았고 궁금하지 않았다. 왜 엄마의 그 목소리가 지금 생각날까. 맞아. 바로 그게 나야. 벼락맞아 죽을 년. 내가 그런 사람이야. 뒤질년이 아니라 뒤진년이라도 상관없다. 난 뒤진 년이야. 그러니 살아도 죽은 거지. 그렇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너무 짧아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한 달이 됐나, 그러나 여순은 백 만년 같은 세월을 느꼈다. 백발의 할머니보다도 백년은 더 산 노파같았다. 노파, 쭈그렁 할머니. 지팡이를 집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 문 간을 나서는 노파. 백년 묵은 여우. 그 정도 살면 도술을 부린다고 했다. 한 번 부려보자. 내가 구미호인지 아닌지 누가 알게 뭐람. 오늘 같은 날이면 더 좋다. 달빛 하나 없는 이런 흐린날 구미호는 나타났다. 내가 구미호다. 머리는 산발하고 입가에는 누군가를 먹어 치운 흔적이 있다. 붉은 피를 흘리면서 다음 대상자를 찾아 나서자. 누구라도 걸리면 뜯어 먹어야지. 그러는데 자비는 없어. 가차 없이 뜯는 거야. 재미 있겠다. 구미호. 여순은 정말로 오늘 밤에는 구미호로 탄생했는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닥치는대로 먹을거야. 사정을 봐주지 말아야지. 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봐주면 나만 손해야. 나는 허기지거든. 많이 먹어야 해. 부자는 봐줄까. 그 자들은 돈을 많이 낼거야. 돈을 준다면 생각해 봐야지.

옷이 낡았어. 비에 젖어서 누렇게 변색됐어. 흰 옷인데 갈색옷이 된 거야. 이쯤되면 하나 사 입어야 되는 거 아냐. 누더기도 이런 누더기가 없어. 넝마는 내게 안 어울려. 난 깨끗하고 멋지 옷을 입어야 해. 경성에 가면 모던 걸이 바로 나란 말씀이야. 여순이, 조선의 신식여자. 매일신보는 신여성이 왔다고 여순을 소개하겠지. 그게 바로 나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고. 그런 내가 여기에 있어. 논을 사겠다고 일본으로 끌려 왔다가 이제는 남양군도에 있어. 섬이름도 몰라. 누구한테도 물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지. 다음에는 물어볼까. 누구에게. 누구겠어. 군인들이지.

섬이름 궁금하지 내게 말해라. 이렇게 명령해야지. 그들은 언제나 명령을 해.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결코 부탁하지 않아. 나도 명령을 하고 싶어. 어이, 너. 그래 너. 뒤돌아 보는 너. 이 섬의 이름이 무엇이냐. 모른다고. 모르면 다야. 엎드려 뻗쳐. 여순은 군인 흉내를 냈다. 명령을 하려면 지휘봉도 있어야 겠지. 급한대로 손가락을 쓰자. 여순은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접었다. 야, 거기 너. 너 임마. 이 섬 이름이 뭐야. 모른다고. 참 잘나나 놈이구나. 섬 이름도 모르면 놈이 달려 들기는. 한심한 자식. 여순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손 끝에서 전기 울림 같은 것을 느끼고는 그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모기에 물렸어. 아, 어쩌지. 정말 거지 같은 삶이었다. 여기 모기는 모기도 그냥 모기가 아니었다. 많은 것은 둘째치고라도 크기는 또 얼마나 큰지. 정말로 파리 만한 몸뚱아리를 가졌다. 그러니 그것이 물었다면 얼마나 아플까. 퉁퉁 붓겠지. 벌에 쏘인 것처럼 뜨큼 했으니 오늘 밤은 손끝이 가만히 있지 못할거야. 그래 물어라 이 놈아. 다른 놈이 먼저 물기 전에 물어. 물으라고. 물어 뜯으라고. 내 몸뚱이는 네 놈들 것이야.  어 그새 손등에 또 한 놈이 달라 붙었네. 말로 할 때 떨어져라. 안 떨어져.

모기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손등에 붙어서 게걸스럽게 여순의 피를 빨아댔다. 모기들은 왠만해서는 달아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여순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때려서 잡아야만 침을 뺄 수 있기 때문이다. 손등에는 피가 흥건했다. 보지 않아도 안다. 흘러 내린 피가 손바닥으로 떨어진다. 정말이다. 핏자국 정도가 아니라 핏덩어리가 모기 사체와 함께 손등에서 나뒹굴었다. 모기 때문이라도 제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이지 싫었다. 여기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돈, 그래 돈은 좋다. 가끔 돈 아닌 종이쪽지가 온다. 그 쪽지에 도장이 찍히고 나중에 이걸 가지고 조선으로 가면 돈으로 바꿔 준다고 했다. 조선으로 가지고 가자. 그래서 여순은 주는 종이쪽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놨다. 그러다가 문득 조선 어디로 가지고 가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어보자. 누구한테. 종이쪽지를 주는 자에게. 이걸 어디로 가지고 가면 돈을 받을 수 있어요. 쪽지를 나눠주던 군인이 어이가 없는지 입을 벌리고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뒷줄에서 쪽지를 받기 위해 내민 손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이런 질문은 처음이다. 같잖았다. 감히 질문을 해. 조센징 년이.

그가 쪽지를 든 손을 그대로 들더니 여순을 향해 힘껏 갈겼다. 번쩍하고 불이 났다. 이 년이. 감히 질문을 해. 천둥 소리였다. 천둥 다음에는 번개가 오는 것이 자연현상이다. 눈에서 불이 켜졌다. 그럼 그렇지. 번개야 번개. 그 바람에 종이쪽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줏어라, 이 년들아. 소녀들이 흩날리는 종이쪽지를 줍기 위해 대열을 흐트렸다. 어떤 종이들은 금방 잡혔지만 어떤 종이는 바람을 타고 연병장 가운데로 날아갔다. 여순이 달렸다. 저것은 내 종이야. 내 돈이라고. 누구도 잡지 못해. 여순이 씩씩거리면서 손에 종이를 잡았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질문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알겠지. 군인이 거들먹 거렸다. 잘알겠어요. 대답을 한 것은 여순이 아니라 여순 다음으로 쪽지를 받으려는 소녀였다.

너구나, 너는 이번달에 일을 열심히 했으니 한 장 더 받아라. 군인이 선심을 썼다. 여순은 빨간 인주가 찍힌 쪽지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넌 도장을 두 장 받아서 좋겠구나. 여순은 중얼 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실수는 없다. 여순은 맞은 뺨을 달래기 위해 쪽지를 잡은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래도 도장 찍은 종이쪽지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종이쪽지 하나면 논을 한 마지기는 사겠지. 그러면 우리 논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내가 모은 종이쪽지를 세어 볼가. 아무리 헐하게 잡아도 백 마지는 되겠군. 부자야, 아버지, 어머니 우린 이제 부자에요. 부자가 됐다고요.  제가 벌었어요. 장하지요. 엄마, 절 칭찬해줘요. 그래요. 그렇게요. 여순아, 내 딸 여순아 장하다. 네가 돈을 벌어 왔구나. 일본은 좋은 곳이지. 그래 어디보자. 살이 쪘구나. 고마운 나라 일본. 황제를 위해 참배를 하자.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속에 만족의 표정이 가득찼다. 떠나올 때 눈물 짓던 엄마는 고생 끝에 낙이 왔다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외양간도 소도 기쁜지 음메하고 운다. 그럴 때면 그래도 살아봐야지 하는 의욕이 살아났다. 모순이었다. 정신은 혼란했다. 검다 희다를 반복했고 그 중간 회색의 어드메쯤에서 멈춰서면 또다시 이런 질문을 한다. 근로정신대가 이런 것인가.

아직도 어두운 밤이었다. 시간은 모른다. 여기서 시간 같은 것은 알 필요도 없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궁금했다. 지금은 몇시지? 새벽 세시. 오소리 가방 하나 들고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다. 여순은 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여행이라도 떠날 참인가. 여행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냥 한 번 열어 본 것이다. 열기 전에는 곧 닫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을 보자 나가고 싶었다. 두려웠으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여순은 슬금슬금 걸어 철조망 앞까지 왔다. 철문은 열려 있었고 병사들은 없었다.

그녀는 그 문을 통해 비가 막 그친 해변으로 가는 길을 조금 걸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 뭐든 시작하면 처음이지.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는 쉬울거야. 나오니 좋네. 조금 떨리기는 하겠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죽으면 죽는거지.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해주면 고마운 일이지. 그런 심정으로 여순은 조금 더 걸었다. 그러나 파도가 치는 해변까지 갈 수는 없었다. 언덕을 내려가면 해변에 닿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발이 미끄러웠다. 맨발로 나왔는데 비 묻은 흙은 얼음판 처럼 미끄러웠다. 넘어질 지도 모른다.

다치면 누가 치료해주나. 아프면 더 서럽다. 도대체 몇시지. 어둠이 걷히고 있다. 비가 그치고 나니 날이 빨리 왔다. 보인다. 보여. 섬들이 보여. 그러니 얼른 돌아가야 해. 섬이 보이면 나도 보인다는 말이겠지. 혼나지 않으려면 어서 돌아가야 해. 그러나 여순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면 망부석이 된다는데. 그러라지 뭐. 남양군도에서 망부석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런 자세라면 어떨까. 여순을 뒤를 돌아보는 자세에서 왼손을 들어 올리고 오른발을 조금 높이 들었다. 이런 모습이면 망부석으로 어울릴까. 

운무가 거치면서 여러 섬들이 고개를 들었다. 꿈속에서 처럼 그것들은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이것 역시 처음보는 풍경이었다. 세어 보기 위해 손가리개를 하고 여순은 섬이 몇개 인지 보이는 대로 손가락을 꼽았다. 열 세개 였다. 많기도 하구나. 여순이 그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 보자 잠시 그쳤던 비가 곧 쏟아 질것처럼 음침했다. 안개는 다시 섬들을 가렸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또 비가 올 것이다. 이렇게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 기온이 한껏 올라왔다. 덥다. 여순은 들었던 손을 얼굴로 가지고와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더 늦으면 낭패라는 듯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철조망을 통과했다. 그 순간 비가 막 쏟아졌다. 그러나 여순은 달리지 않았다. 좀 맞고 싶었다. 비를 맞으며 여순은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쏟아지는 비를 받았다. 그 손으로 세수를 했다. 얼굴을 문질렀다. 기분이 좋았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팠으나 비맞은 사람의 기분을 더 즐기고 싶었다. 

습하고 더운 열기속에서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심란한 마음이 차분해졌다. 자신의 내부에 눌려 있던 것이 폭탄처럼 터져 나오려다 뚝 멈췄다. 살아야지. 살아서 나가는 것이 이기는 자다. 이곳의 질서에 반하면 안돼. 난 지금 그렇게 했어. 운이 좋아서 들키지 않았지. 다음 번에도 운이 좋다고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여기서 멈추자.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고 정리된 이곳의 생활에 적응해야지. 벌써 몇날 몇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헤메다니. 여순이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네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아이였어. 여순은 자신을 꼬집었다. 정신차려. 여순아. 너 이러면 정말 죽는다. 살려고 와서 죽으면 개죽음인 거 알지. 알고 말고. 그걸 모르면 바보 천치가 따로 없지.  어떻게든 살아서 여기를 나가자. 죽음의 순간에 여순은 삶을 보았다.

비를 맞고 여순은 기분전환에 성공했다. 어떤 알 수 없는 환희 같은 것이 몰려왔고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쓸려가기 전에 살자. 음, 생명의 충만이 느껴져. 살아 있음을 느껴. 그것은 좋은 것이야. 서러울 것도 미련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세상이 야속하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 없잖아. 야속한 것은 야속한대로 두는 거야. 그러니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견딜 때 까지 견뎌야 한다. 긴 고민 할 것 없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자. 엿보는 자의 재미를 너희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엿보면서 엿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순의 입에 군침이 돌고 배가 비로소 허기졌으니 무언가를 집어 넣어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래 먹여주자. 먹어야 살지. 그렇게 결심한 순간 여순은 지금의 어쩔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속 편했다. 산자가 취할 행동 중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여순은 빗속에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알았다.

이제 뱃멀미 같은 것도 없다. 뱃멀미. 그게 뭔데. 그런 것이 있었어. 여순은 어이 없어서 정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울렁거림은 좋은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것은 잊어야 한다. 여순은 두 손을 잡았다. 아무리 속을 뒤집어 놓아도 더는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포기나 체념도 없다. 뒤로 가지만 않으면 된다. 제자리 걸음도 상관없다. 제자리서 걷다 보면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뒤로 밀어내기보다는 앞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여순은 느꼈다. 그러자 밤이 조금은 덜 두려웠다. 장막을 걷어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어두운 장막을 걷자. 나의 두손으로. 그리고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자. 근로정신대 생활은 그런대로 습관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공장일 대신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 다를 뿐 근로는 마찬가지 아닌가. 여순은 어느 새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러니 여기 올 때 군속이 말한 애초에 한 약속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여순은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날 조선인이 들어왔다. 일본군만 상대하다 조선인이 들어오자 여순은 놀라면서도 반갑고 반가우면서도 창피했다.

아는 사람에게 도둑질하다 얼굴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호기롭게 들어와서는 조금 쭈뼛거렸다. 몸둘 바를 모른다는 표현. 딱 그게 맞아 떨어졌다. 여순은 여느 때처럼 구석으로 몸을 돌리고 등을 보였다. 어, 너야. 익히 듣던 사나운 목소리가 좁은 방을 울렸다. 조선말로 하니 여순은 그것이 더 서러웠다. 하지만 곧 남자의 숨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너 냐고. 용케도 살아 있었네. 사내는 주춤거렸다. 무엇을 하기 위해 들어왔으나 그 목적을 바로 실행하는데 주저했다. 그것은 체면이거나 혹은 하고 나서 후회하게 될 어떤 나쁜 짓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미리 가지는 것과는달랐다. 일종의 당혹감이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결과가 나타났을 때 오는 일종의 열패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뿐이었다. 이미 그렇게 하고자 작심했던 것을 하기 위해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본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쉽게 끝마쳤다.

마지막에 그의 입에서 의미 없는 조선말이 튀어나왔을 때 여순은 다른 때처럼 가만히 있었다.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것이 여순의 특기였다. 그런에 이번에 여순은 가만히 있는 것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조용히 생각한 것이다. 말수. 통영 뱃놈 말수. 여순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것을 생각해서야 알아내다니. 나도 참 바보다. 갑판 위에서 기대감에 들떠 혼자 떠들던 바로 그 사내였다. 정박한 선박에서 빨리 빨리를 외쳤던 통영 사람 그 뱃놈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아는 체 했던 바로 말수였다. 

그는 진작에 여순을 알아봤다. 방에 발을 걸친 순간 수그러진 어깨에서 짐작했고 등 돌린 등짝에서 확인했다. 미한했을까. 여순과 눈이 마주지차 잠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잠깐 잊은 것 같았다. 무엇을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잘못으로 판정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때는 아무말이나 해야 했다. 그런 말은 말수가 잘 하지 않는가. 말하기는 나의 특기지. 지낼 만 하니? 그가 일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낼만 하냐고. 그래 이 놈아. 그러니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었지. 조선인은 처음이지. 처음 이냐고. 네가 원하는 대답이 뭐냐. 처음이다이면 그렇다고 하고 처음이 아니길 원하면 아니다라고 대답해 주마. 왜 말이 없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선인 치고는 꽤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여기서도 적응을 했구나. 저자는 참으로 적응하는데 귀재야.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남을 거야. 

그날 이후 여순은 구렁이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점례와 휴의와 완용과 함께 했던 마을 앞 해변가를 뛰어다니곤 했다. 생각 속에서 여순은 정말로 눈부신 하얀 백사장에서 해당화 향기를 맡으며 뛰어 다녔던 즐거웠던 한 때를 그려 볼 수 있었다. 행복한 순간. 어려울 때 그 때를 기억하는 것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처량한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여순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비참할 때 비참하더라도 갈 때는 가야 한다. 백사장은 길었고 눈부셨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온통 백색의 모래가 햇볕에 부서지고 갈라지고 가라앉았다. 백색과 빨강이 강렬하게 대비됐다. 해당화가 백색에 스며 들었다. 그리고 이내 붉은 물결로 덮였다. 흰 포말이 빨강을 쓸어 갈 듯 덮쳐 오다가 사라지고 덮쳐 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여순은 뛰어다녔다. 점례가 따라오다 넘어지고 휴의가 다가가 그런 점례를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여순은 점례와 휴의의 눈이 어떤 신호처럼 서로에게 전달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둘 만의 미소를 주고 받았다. 완용은 그런 모습을 보고 웃었는지 울었는지 잘 기억할 수 없다.다만 표정이 바뀐 것만은 분명했다. 좋은 쪽이었을까, 아니면 그 반대였을 까. 여순은 지금에서야 완용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여순은 그러나 곧 자신에게로 생각의 끈을 당겨왔다. 그녀는 웃었다. 그래 나는 웃었어. 쉬지 않고 웃었지.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웃음을 웃고 나면 뱃가죽이 아팠어. 그래 지금처럼 뱃가죽이 아래로 당겨졌디. 

웃음의 끝에 여순은 자신의 눈에 멈췄다가 점례의 눈으로 완용의 눈길이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이미 집안끼리 성례가 오가기도 한 점례에 대한 미련이 완용에게 남아 있었다. 여순은 점례에게 주는 완용의 눈에서 따뜻함보다는 이글거리는 어떤 욕망을 보았다. 여순은 완용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저런 눈은 싫어. 한 번 도 싫은 데 어떻게 매번 마주 볼 수 있겠어. 점례가 거부한 것은 나도 거부할 거야. 그날 넷은 물 빠진 바다를 건너 앞의 섬으로 이동했다. 소의 뿔처럼 생겼다고 해서 소뿔섬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한 삼 십분 정도 경사진 절벽을 따라 오르면 잘 정돈된 쌍묘가 드러났다. 그들은 묘와 묘 사이의 평지에 앉아 쉬지 않고 떠들고 깔깔댔다. 

비석도 없이 서 있는 묘는 벌초가 잘 돼 있었다. 효심이 가득한 어느 가난한 자손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들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숨을 다듬고는 일어나 앉아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끝에 눈길을 모았다. 그래 저 끝을 동경했어어. 그 끝이 아마도 이곳 남양군도일까. 동경한 것을 이뤘으니 꿈은 이루어졌다는 건가. 여순은 이보다 더 허탈할 수가 없었다. 쌍묘는 잘 있을까. 나도 죽으면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묻혔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는 사랑했던 사람이면 말할 것도 없고. 대신 누가 돌보지 않다도 된다. 잘 깍지 않다도 되고 무너져 내린 흙더미를 다시 쌓지 않아도 좋다. 그냥 무너진 대로 풀이 자라는데로 있어도 상관없다. 앞에 보이는 바다는 잔잔했고 여순은 살아서 죽은 모습을 상상했다. 

여순이 그때 죽음을 떠올린 것은 다섯살이나 어린 남동생이 그 석달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남의 배를 타고 나가서 배와 함께 영영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동생은 임자 없는 산의 깊숙한 곳에 묻혔다. 아버지는 남 부끄럽다면서 시신도 없는 빈 지게에 달랑 옷가지와 헌 신발 한짝을 지게에 지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밤늦게 돌아왔다. 어머니도 어디에 무덤을 썼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울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하도 재촉하자 마지 못해 그 장소를 알려줬다. 여순도 땔감을 하러 몇 번 가본 서살매였다. 거기에는 토끼를 잡는 매가 살고 있었고 노루를 낚아 채서 날아가는 커다란 독수리가 알을 낳는 곳이었다. 

늦은 오후 여서인지 그늘이 진 묘는 초라했고 불쌍했다. 얼마나 추울까. 무서울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설움이 너무 크고 깊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아, 아들아. 깊은 산속에 울려 퍼지는 여인의 갸냘프고 찢어지는 목소리는 여순의 가슴에 칼처럼 박혔다. 늦둥이를 잃은 어미의 가슴은 갈갈이 찢어졌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여순은 깜짝 놀랐다. 손에 갈색을 한 몸집이 큰 메뚜기 한 마리가 날라와서 앉아 있었다. 얼른 손을 털어 내면서 소리치자 어머니가 울음을 멈추고 여순 쪽을 쳐다봤다. 니 동생이 왔나보다. 그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어머니의 울음이 딱 그쳤다.

말수는 간혹 찾아왔다. 유일한 조선인 손님이었다.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에 조선인 말수가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함께 있는 자리의 조선인 리더 였기 때문이다. 통영 뱃놈은 이제 광산의 십장이 됐다. 어디서나 그는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됐다. 여기서도 그는 머리를 차지했고 그 위세로 여순을 찾았다. 말수는 언제나 돈을 낼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을 했다. 나 돈 많아. 그 말에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과 다를 바 없이 대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돈은 똑같은 돈이니 일본놈 돈이나 조센징 돈이나 다를 게 뭐 있노.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여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일이 끝나고 나서는 두서없이 지껄였다. 나도 너의 상대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나 돈 많이 벌었다. 광신일이 고된 만큼 이만큼 벌었다고. 그가 두 손을 펼쳐서 위로 들었다. 무거운 지폐 더미에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런 노동은 난생처음이야. 뱃일 힘든 거 알제. 그런 건 약과야 약과. 여기서는 반은 죽는다니께. 허다하게 죽어나가. 돈 많이 벌면 뭐하노. 죽으면 다 일본놈 것인데. 맨 앞에선 조선인 제일 먼저 죽어 나가잖아. 난 용케 살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 여순앞에서 말수는 죽음을 꺼내 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힘들어 죽겠다고. 여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힘들어도 나 만큼 힘들까. 죽기로 말하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그러나 여순은 그가 말을 다 마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수의 말 상대가 됐다. 그는 전쟁이 곧 끝난다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러면 광산에서 번 돈으로 배를 여러 척 사서 선주로 살고 싶다고 했다.

통영으로 갈꺼야. 그래도 내 고향 아닌감. 넌 보령이라고. 그래 한 번 놀러와. 내가 잡은 고기로 생선구이 해줄게. 찜도 쪄줄게. 날 것으로 먹어 봤니. 등에 가시가 박힌 돔이라고 있어. 너도 해변가 출신이니 들어는 봤지. 돔 중에서도 붉은 놈은 황돔이라고 해. 엄청 맛있어. 그 가 입맛을 다셨다. 갈치도 잡아. 갈치는 알지. 그 놈은 회보다는 구워 먹어야 해. 왜 물어보는데. 대답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지껄일 거면. 여순은 그렇게 토라졌다. 흥, 내가 그것도 모를까봐. 내 말 안믿는 겨 시방. 날 믿어 나 말수라고. 말수. 말수가 뭔데. 그 이름에 신용이라도 박혀 있남. 되레 거짓 뿌렁이지. 말수는 여순이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라도 조선말로 서로 통하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여순은 여순대로 그의 존재를 조금씩 각인하기 시작했다. 

정말 통영에서 배를 살 수 있어. 여순은 믿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말수 자신도 그것이 실제로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말의 주인이 이런데 상대가 믿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니. 말수는 여순을 이해했다. 너도 전표 받지. 종이에 도장이 찍힌거. 그거 정말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찍기는 매일 찍어. 그마저도 없으면 누가 믿겠어. 하지만 다 믿어도 일본놈은 믿을 수 없어. 여간 영악한 놈들이 아니라서. 너도 알잖아. 몰라. 난 몰라. 이 등신 같은 놈아. 여순은 냅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딱히 말수가 싫어서가 아니다. 어디 화풀이 할 데가 없는데 이렇게 조곤조건 이야기 하니 여순은 그게 더 싫었다. 조선말로 조선인이 지껄인다. 차라리 일본말로 떠들어라. 그런 심정이었다. 그래도 전표는 잘 보관해라.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야. 그 전표 쪼가리가 논을 살 돈이 될지. 누가 알겠니. 너도 모른다는 말이지. 이제 실토하는 군. 그래도  그것 받으면 기분이 좋아. 나도 그래.

말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 여순은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면서 약속인데 안주고는 못 배길껄. 내 돈 떼먹으면 내가 가만 있겠어. 말수가 주먹을 내밀면서 자랑했다. 여순은 헛 웃음이 나왔다. 그래, 말이라도 그렇게 하니 고맙다. 감히 일본에게 대드는 사람이 말수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비록 숨어서 하는 말이지만 여순은 속이 다 시원했다. 여순아, 니 말이다. 니가 못받으면 이 오빠가 받아주마. 그 땐 나에게 뽀지 떼어줘야 한다. 남들처럼 가혹하게는 안할 께. 삼할만 주라. 삼할. 말수가 주먹쥔 손에에서 손가락 세개를 펴 보였다. 못 받는데 삼할이 뭐 대순가. 이 놈아 팔할을 떼줄게. 받아만 와다오. 여순은 또 헛웃음을 지었다. 말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금세 낯빛이 어두워 졌다. 받을 돈을 받지 못할 거라는 예감 때문이 아니었다.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그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음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말수는 늘 죽음을 달고 산다. 그것은 순간순간 자신에게 달라 붙는다. 운 좋게도 지금까지는 떨어져 나갔으나 언제까지 이런 행운이 자신을 지켜 줄 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조센징 열세 명이 죽어 나갔어. 부상자는 삼십 명이 넘어. 사람이 죽어도 시체를 옆에 놓고 그래도 그냥 일해. 곡괭이질을 한다고. 뒤집어 진 눈을 보면서 땅을 판다고. 피 비린내를 맡으면서. 여순아, 이게 너는 이해가 되니. 되느냐고. 왜 나한테 따지고 지랄이야. 내가 죽였니. 내가 일하라고 시켰느냐고 이 등신아. 병신 머저리야. 그날 말수는 돈 대신 성경책 하나를 여순에게 주고 갔다. 여순은 필요없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도움이 된다고 기어코 방 구석에 밀어 놨다. 돈 대신 주는 거 아냐. 다 적어놔. 내가 한 것은 내가 반드시 갚는다. 말수가 나가고 여순은 던진 성경책이 벽에 부딪쳐 그 자리에 멈춰선 것을 보았다. 성경책이라면 여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좀 작았다. 작은 성경책 말고 노트 만큼 큰 성경책을 여순은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기억에도 까마득한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고모를 따라 천웅 읍내의 성당에 갔다. 아무것도 몰랐으나 발걸음을 깡총 거리며 간 것은 무언가 기대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은 달걀 하나를 받아 들고 여순은 정말로 행복했다. 천사가 따로 있나. 선물을 주는자가 천사였고 하느님이었다. 삶은 달걀은 여순으로 하여금 성당은 좋은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십자가, 그래 십자가야. 성당과 십자가. 떠나올 때 아스라이 사라지는 십자가를 봤지. 그것이 나를 배웅하고 있었어. 잘 다녀와. 아냐 십자가는 아니야. 그 전에 황토배기 언덕을 넘을 때 장승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어. 휴의 오빠가 만든 장승. 사모관대를 쓰고 엄한 눈으로 내려 봤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어. 잘 갔다와라, 여순아. 그렇게 인사했었지. 여순은 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려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서 기적을 울리며 다가왔던 기차. 검은 연기를 내뿜었었지. 빠앙 하고 울었어. 그것이 울 때 나는 기뻤는데 지금은 아냐. 기차가 울면 나도 울고 싶어. 나 또 울고 있네. 그녀는 이런 상태라면 곧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얼른 알아채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무엇이 눈에 들어간 것 처럼 가장했으나 나를 내가 속일 수는 없어. 아껴 두어야지. 아무때나 흘릴 눈물이 아냐. 그러나 자꾸 나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여순은 울었다.

울면서 그녀는 하나님을 부르면 나 있는 여기로 하나님이 달려올까. 십자가를 걸고 하느님을 찾으면 그분은 내 눈앞에 나타나 너의 고통을 알고 있으니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할까. 무거운 짐진자여, 내가 네 짐을 대신 지어주마. 하고 홀연히 말씀하실까. 말씀 하지 말아요. 약속만 하지 말고요. 그냥 실천해 주세요. 저는 많이 아파요. 정말 아프다고요. 그러니 약속 말고 말씀 말고 그냥 절 구해 주세요. 그럴거죠. 믿는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믿겠어요. 여기 성경책이 있어요. 말수가 준 것은 이 때문이죠. 믿으라고. 가 말했어요. 네가 할 수 있는 게 믿음 말고 다른 게 없다고 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나는 그 말을 늘 떠올려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순의 여린 손을 잡는 사람은없었다. 아무리 성경책을 부여잡고 울고불고해도 소용없었다. 그래도 여순은 손에 잡은 성경책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는 그냥 펴고 아무데나 읽었다. 그러는 것이 나았다.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편했다. 여러 번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장은 반질반질해져 있고 또 어떤 장의 글씨는 흐릿해지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읽는 것이 습관이 됐고 또 재미를 붙였다. 책을 읽다니. 내가 성경책을 읽다니, 여순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알았어. 성경을 읽는 여순을. 좋은 문장이 많아.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글을 썼지. 그래 외워두자. 써먹을 데가 없어도 이런 말은 나를 위로해 줄 거야. 그러면서 여순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해 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낯설었고 하는 일은 미숙했다. 

여순이 맞닥트리는 것은 모두 처음이었다. 처음. 태어나서 처음해 보는 일. 해보면 익숙해 지기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 말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일은 손에 익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순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바느질을 하면 늘고 빨래를 요령을 배웠다. 그러나 이 일은 좀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 사람은 살기 마련이다. 말수가 말했다. 살아야지. 그래야 고생한 보람이 있어. 넌 관상이 좋아. 분명 괜찮을 거야. 기회가 올거고. 난 아냐. 험상궂지. 널 통해서 내가 좋아질 수 있을까. 어느 말 말수는 이런 말로 나를 위로했다. 관상이 좋다고.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은 편하다고. 싫어. 난 지금이 좋아야 해. 나중은 멀고 너무 떨어져 있어. 이것도 사는 것인가. 숨 쉬고 있다고 사는 것인가. 여순은 살기는 살았어도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무엇이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이 늘 이어졌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예쁜 옷을 만들고 질긴 고무신을 만든다는 꿈은 헛되고 또 헛됐다. 차라리 총알을 만들때가 좋았어. 그 때는 십장이니 공장장이니 한 두 명만 상대하면 됐잖아. 그 때 말을 들을 걸 그랬어. 가만히 있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못한 것이 한이 됐다.

아, 어쩌지. 어쩔 수 없어 여순은 때때로 주저앉고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살아야지 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 날 다음에는 또 죽는 꿈을 꾸었다. 살자고 다짐하면 꼭 꿈에서 죽은 시체로 떠나녔다. 하루는 강물 위에서 하루는 바다 모래 사장에서 시체로 죽어 있었다. 놀라서 깨어나면 죽지 못한 것이 죄가 됐다. 꿈에서는 죽는데 왜 낮에는 죽지 못하지. 그래, 죽어보자. 꿈에서 처럼 쉽게 죽어보자. 그러기 위해 여순은 두어끼를 굶기도 했다. 그러나 산목숨은 그런다고 죽어지지 않았다. 배만 고파서 되레 살려는 욕구가 더 심해졌다.

비가 또 왔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하늘의 모든 물이 말라야만 비는 그칠 것이다. 여순은 지독하게 내리는 비를 보면서 이곳은 저주 받은 땅이라고 외쳤다. 그래서 하느님도 오지 않는 거야. 심하게 저주 받았거든. 멀리서 익숙한 군가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출병했던 장병들이, 훈련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빗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특기였다. 비가 온다고 해서 자세가 틀어지지 않았다. 문틈으로 여순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지켜봤다. 오늘은 좀 늦었군. 여순은 어두운 밖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발목까지 물이 들어찬 연병장에 도열한 그들은 바로 해산하지 않았다. 구호를 외치고 승리를 다짐했으며 내일은 오늘 못한 적을 물리치자고 총을 쥔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허리에 찬 긴 칼이 흔들렸고 어깨에 걸친 번쩍이는 총구도 흔들렸다. 그들은 그것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한다는 자만을 드러냈다. 나무토막같이 서 있던 그들이 마침내 해산했다. 부대는 해산했으나 병사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밤이 오기를 기다린 병사들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하나둘씩 적진에 침투했다. 그런 자세로 여순에게 다가왔다. 어둠의 자식들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여순은 오늘 밤은 길고도 길 것을 예감했다.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졌고 여순은 다른 예감도 이처럼 맞아 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나쁜 것 말고 좋은 것도 그렇게 되기를. 여기온 세 달은 여순의 전생애보다도 길었다.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지는 그 긴 세월 동안 여순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하늘에 대고 묻고 또 물었다. 감당할 수 없어요. 감당할 수 없다고요. 그러나 오늘도 여순은 감당했다.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말수. 그래 말수가 내 버티는 힘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그가 주고 간 작은 성경책을 쳐다볼 때마다, 조선말로 욕을 하는 말수가, 비록 거칠고 사나웠으나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말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을 가져요. 당신 밖에는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가 말수는 비난했다. 가차 없이 저주했다. 어쩌자고 나에게 와서 잘해 주지. 성경책 따위는 왜 던져 놓고 간거야. 너만 없었어도 저 종이쪼가리만 없었어도. 난 지금쯤 편히 누워 있을 거야. 그랬을 거야. 여순은 손톱을 물어 뜯었다. 눈 앞에 있다면 말수도 그렇게 이빨로 잘근잘근 뜯어 주고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군인이 없으며 여순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순의 막사는 철조망 근처에 있었고 그 철조망에는 작은 개구멍이 있었다. 군인들은 구멍난 철조망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았다. 여순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종이쪽지가 없을 때 그들은 무릎 걸음으로 기어서 철조망을 통과했다. 줄서거 기다리지 않고 참았다가 야음을 틈타 뱀처럼 숨어 들었다. 그래, 너희들만 이용하니. 나도 좀 써먹자. 여순은 그들의 눈을 피해 철조망을 넘나 들었다. 처음이 어렵다고 했다. 몇 번 해보니 두려움 같은 건 사라졌다. 철조망 너머의 세계를 그리워 하면서 해변에서 찰싹 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여순은 살아났다. 난 오늘도 살아있어. 살아 있다고. 귀로 파도 소리를 들어. 눈으로 바다를 보고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지. 발가락 사이로 고운 모래가 밟혀.  모처럼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자, 이제 찌는 듯안 더위가 오겠군. 여순은 벌써 날씨를 읽었다. 

그 많던 바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말 바람 한 점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군인들이 떠난 막사 주변은 그야말로 쥐죽은 듯 고요했다. 멀리서 들리던 폭발음도 사라졌다. 광산에서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소리도 없다. 들물인가, 썰물인가. 찰싹 찰싹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소리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여순은 바다로 향했다. 맨발로 발가락 사이를 오가는 물살이 느껴진다. 그럴수 있을까. 저기까지는 너무 멀다. 그 사이 군인들이 들이 닥칠지 몰라. 들물이라면 좋겠다. 멀리 가지 않아도 물을 만날 수 있다. 물을 만나면 물 따라 멀리 저 멀리 사라지고 싶다. 흔적도 없이 가버려 영원히 바다와 함께 살아도 상관없다.

누가 알겠는가. 태평양 바다 어디쯤에서 고향 죽마을이 나타날지. 아버지가 하는 고기잡이 배에 올라 탈지. 그물을 당기면서 어영차, 어영차 노래부르면 신이 날 것이다. 그런데 노는 아버지가 아닌 완용이 젓고 있다. 완용이, 우리 배를? 여순은 의아했으나 고기만 많이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따라 고기가 정말로 많이 잡혔다. 완용은 이제 그만 가자는 여순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잡을 때 더 잡아야 한다며 채울 공간도 없는데 그물을 더 내렸다. 그에게 내일은 없었다. 들어올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고기들이 걸려들었다. 완용은 이것봐 하면서 만족했으나 여순은 떼어낼 고기에 그만 기가 질렸다. 고기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늘이 떨어지고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움직임이 없는 고기들은 그물에 그냥 걸린채 이리저리 휩쓸렸다.

완용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여순을 눌렀다.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여순은 발버둥쳤다. 그러다가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고기처럼 여순도 죽었다. 눈을 떴을 때 여순은 그물에 걸린 고기와 자신이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았다. 팔딱 거리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고기처럼 여순은 나도 이렇게 죽어가는 신세라고 여겼다. 그게 나였다. 그물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 물고기. 물고기는 말라갔다. 해풍은 그런 역할을 했다. 몸에서 수분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리고 또 말려졌다. 여순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미이라가 됐다. 박제된 자신의 미이라를 여순은 바라보았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싹 말라 버린 몸뚱이를 일본군이 들어왔다가 보고 기겁을 해서 도망갔다.

귀신이 있다. 말라버린 시체다. 그들은 나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순은 그들의 등뒤에 깔깔대고 웃었다. 미친년, 저년은 미쳤다.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사이렌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려 퍼졌다. 높았다 낮았다를 반복할 때 연병장에 커다란 폭탄이 터졌다. 파견에 맞아 내가 죽는구나. 여순은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어 미이라 신세인데 두 번 죽는다고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지금 전황이 어느 쪽에 유리한 것이야는 것이었다. 일본군에 유리한가, 아니면 불리한가. 항상 승전가를 불러 이기는 줄만 알았는데 일본군 밀집 지역에 폭탄이 터지고 있다. 여순은 일어나서 얼른 커튼을 내렸다. 작은 천이었으나 그것으로 조금은 위안이 됐다. 어두운 방안에서 여순은 구석에 앉았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자신은 늘 구석에 앉는 존재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행히 폭탄은 여순의 막사를 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여순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바람빠진 공에 공기가 들어차는 것처럼 여순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여순은 좋을 것이 없는데 하고 낙담했다. 이런 모습이 나는 싫어. 살이 붙은 내가 싫다고. 나는 말라 비틀어 질거야. 해풍에 여러달 말린 고기처럼 딱딱하게 굳을 거야. 어려운 시기였다. 여순은 완용인지 일본군인지 말수인지 모를 씨를 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애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기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폭탄이 터졌다. 이번에는 막사 저편이었다. 섬광이 번쩍였다. 섬 전체가 귀를 막아도 소용없이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순은 이런 혼란을 즐겼다. 그러지 않고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참 시간을 잘 지키네. 어제도 이 시간에 터지더니 오늘도 같은 시간이야. 여순은 다음 폭탄이 터지기를 기다리면서 무릎을 얼굴에 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시각 막사의 작은 공터에서 점례가 놀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흙을 손으로 잡았고 손톱으로 땅을 팠다. 판 흙은 손가락을 갈퀴로 만들어 그러 모았다. 모은 그것을 한 곳에 쌓았다가 다시 평평하게 흩뿌렸다. 흙장난이다. 점례는 말했다. 흙장난 하지마. 옷 더러워 진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점례야, 흰 옷이 누런 옷이 된다. 그만 놀고 들어와. 여자애가 흙장난이 다 무어니. 여자애. 여자애는 흙장난 하면 안 되나. 나는 흙을 가지고 노는 것이 좋아. 만지면 기분이 좋거든.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것이 아닌 내것이었다. 흙이 손에 만져질 때 점례는 마음이 진정됐다. 문을 열고 나오면 있는 작은 공터, 점례는 그곳이 좋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과 밖은 종이 한장 차이였으나 삶과 죽음만큼이나 다른 공간이었다.

문안에서 죽었던 점례는 문밖에서 살아났다. 문밖에서 숨을 헐떡이던 고기가 죽기 직전 물을 만나 다시 헤엄치는 꼴이었다. 이곳이 없었다면 점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례는 조선 여자들과도 말동무가 됐다. 애써 피했던 조선 여자들이 안 보이면 서운하기도 했다. 조선말로 서로 알아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위안이 됐다. 그러나 점례는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겼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 온전한 자유를 느꼈다. 정말이지 그랬다.그 순간은 점례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혼자일 때 느끼는 자유의 온전함. 그래서 뒷문을 통해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가 나면 일부러 방안에서 웅크리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때를 놓치기도 했지만 일부러 소리를 찾아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다른 소녀들은 밖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혼자 있기 보다는 여럿이 있기를 좋아했다. 

대개는 잠깐 나왔다가 금방 사라졌다.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잠잠해 지면 점례는 슬며시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으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혼자 있으면 살 만한 용기가 생긴다. 민들레는 지고 또 피어났다. 한 뿌리에서 난 것이 여러번에 걸쳐 피었다 졌다를 반복했다. 녀석들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구나. 너를 보고 있으면 다 잊어. 용서하게 된다고. 그리고 살아야지 하는 작은 희망도 생겨나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겠지. 난 그걸 믿어.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고. 이 일도 언젠가는 끝날 거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시작의 끝에 서고 싶어. 당당하게 서서 나는 이렇게 살아 남았다고 외치고 싶어. 귀큰 임금처럼 숲속에 들어가서 외칠 거야. 점례야, 나 살아왔다. 이렇게 살아 있어. 나비가 날고 새들이 지져귀고 옹달샘의 사슴이 물을 먹다가 화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것 없으면 어때.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점례는 동그란 원형의 씨가 모여 있는 줄기를 조심스럽게 손톱끝으로 잘랐다. 줄기에서 피 같은 흰 즙이 흘러나왔다. 점례는 그것이 매우 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에 묻은 그것을 옷에 씻지 않고 점례는 입으로 핥기 전에 먼저 인상부터 썼다. 그럴 거면 왜 하는데. 안 하면 얼굴에 주름질 일이 없잖아. 인상을 쓰면서도 점례가 그렇게 한 것은 그 맛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씁쓸한 맛은 언제나 고향을 떠올렸다. 두번 다시 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지만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었다. 고향에 있을 때 점례는 곧장 민들레 줄기를 꺾었고 하얀 즙이 손에서 사라지기 전에 혀를 대고 그것을 빨았다. 쓰면서도 달콤한 그 맛을 여기서도 맛보고 있다. 역시 써. 쓰군. 민들레 맛이 어디 가겠어. 점례는 침을 뱉으려다 꾹 참았다. 한 번 그러고 나면 그날은 더는 맛을 보지 않았다. 한 번이면 족해. 하루에 두 번은 무리야. 그런데 나는 뭐야. 하루 두번이 무리라면 열 번 삼 십번은 뭐냐고. 그 와중에서 점례는 어젯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그만. 그만하자. 그녀는 세기를 멈추고  뭉친 씨앗이 잘 날아 갈 수 있도록 바람 부는 쪽으로 힘껏 불었다.

입을 한껏 오므리고 바람에 실려보낼 때 점례는 그런대로 몸이 괜찮았다. 날아가는 것을 눈으로 좇으면서 나도 씨앗처럼 가볍게 날아가고 싶었다. 어떤 날 홀씨는 지난날 보다 멀리 날아갔다. 어떤 것은 얼마나 세게 불었던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면 그녀는 자신도 홀씨에 얹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홀씨는 가뿐하게 그녀를 태웠고 비상했다. 발아래 떨어져 내리지 않고 제대로 날린 종이 비행기처럼 저 멀리 날아 갈 때 그녀는 지금쯤 백두산 천지를 넘고 있겠지, 벌써 경성역이 내려다 보이네 하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는 죽마을이네. 고향가는 길이 이렇게 쉽구나. 이리 쉬운 것은 진작에 해볼 걸. 이제라도 했으니 다행이지 뭐야. 변하지 않았어. 떠나 올 때 인사했던 장승도 그대로야. 무엇보다 공기가 안 변했어. 숨쉬기가 편해. 엄마 냄새야, 해당화 냄새이기도 하고. 이런 냄새라는 하루 종일 맡아도 지겹지 않아. 내가 고향땅에 도착한 것야.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대나무였다. 어른 팔뚝만한 대나무가 몸은 가볍게 흔들면서 잘왔다고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인산한 녀석을 따라 너도나도 그렇게 하자 사각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점례네 집은 죽마을에서도 대나무가 제일 많았다. 집 뒤는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었다. 그래서 점례네의 다른 이름은 병죽이네 였다.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집. 그옆에는 여순네가 있었다. 점례네가 대나무 집이라면 여순네는 소나무 집이었다. 천년 묵은 소나무를 여순 아버지는 자랑했었지. 소나무는 대나무와는 달라. 사각 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아.

어, 그런데 그 나무가 보이지 않네. 어디로 간거야. 점례의 눈에 그 순간 소나무가 붉은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무는 쓰러지면서 여순네를 덮치고 점례의 집을 부쉈다. 우리 집이 무너졌어. 여순네도 그렇고. 누가 벤 거야. 그 놈이구나. 순사를 데리고 와서는 나무를 잘랐어. 주재소 변소로 쓴 거야. 죽일 놈. 천하에 죽일 놈. 점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다 무너진 집을 보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고향에 왔어도 돌아갈 집이 없구나. 이를 어째. 그 순간 점례의 코 끝으로 송진 냄새가 강하게 들어왔다. 먹을 것이 없으면 저걸 엿처럼 먹었었지. 불 쏘시개로 쓰기도 했고. 그래 송진냄새. 어쩌자고 냄새는 자꾸 나는 거야. 대밭에서 불어오는 파도 소리와 진한 솔향에 점례는 그만 감정이 복받쳐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다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 문이 열리고 조선 여자 둘이 다시 공터로 나왔다. 점례는 정신을 차렸다. 운 흔적은 빨리 지워졌다. 소녀들은 점례를 무시하고 자기들 끼리 뭐라고 속닥거렸다. 그러다가 점례를 의식하고는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점례는 답례했다. 두 소녀의 얼굴이 어둡다. 문 밖으로 나올 때는 그런데로 표정이 됐으나 오늘은 아니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수롭지 않다. 조선 여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들 그것이 무슨 관심 거리가 되겠는가. 점례는 어두운 소녀의 모습에서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처음에는 언젠가는 이것도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도 봤고 저항도 했고 몸져 눕기도 했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상황 반전을 노려도 봤다. 허사였다.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이곳 만주 일본군 막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놓아버려야 할 때다. 더는 사는 것은 구차한 것이다. 자신은 민들레가 아니었다. 밟혀도 뿌리뻗는 민들레가 아닌 사람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짐승도 이렇지는 않아.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결심을 하자 그 결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온 몸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곧 터져 버릴 거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버릴거야. 그러기 전에 작별할 것이 있나. 이승의 것들과 말이다. 치사했다. 죽으러 가면서 동정을 바라고 있다. 내가 죽으니 내 처량한 신세를 위로해달라고 애걸하고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점례는 비굴한 자신을 저주했다. 무슨 미련이 있다고 이러나. 없어. 언젠가 그랬듯이 내가 그랬어. 세상에 남은 미련은 없다고. 그래 그 말을 했었어. 그리고 나는 내 말에 충분히 만족했지.

그녀는 포성이 울리는 야밤을 틈타 고향에서 가져온 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간혹 먼 하늘에서 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번쩍하고 빛이 보였다. 천둥이 오기 전에 번개가 치는 격이었다. 그 순간을 이용해 점례는 한 발 씩 길을 익혔다. 철조망 틈새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안녕, 이 나쁜 철사놈아. 이젠 안녕. 연병장을 지날 때 점례는 누가 자신의 뒷목을 낚아채는 것 같아 움찔했다. 잠시 멈춘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연병장 끝에 있는 초소 앞에 다다랐다. 점례는 떨지 않았다. 의외였다. 계획할 때는 이빨이 덜덜 떨려 그러기 전에 죽을 것 같았으나 실제로 그러고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점례는 되레 차분해졌다. 아마도 그것은 들키면 죽기 밖에 더 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차분해 진다. 

그래서 점례는 대담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람이 겨우 하나 지나갈 정도로 작은 초소 옆으로 길이 하나 나 있었다. 개구멍을 이용하는 병사들이 그곳을 통과하듯이 점례는 그렇게 거기를 빠져나왔다. 어디로 간다는 목적지는 없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거기가 끝이구나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만주는 넓으니 끝은 쉬이 나타나지 않겠지만 끝이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초소 옆을 지나 군용차량이 지나는 큰 길로 나섰다. 그 때 뒤쪽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고 등에 무언가 꾹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발각된 것이다. 서라. 거기 서. 어디로 가니? 너.

점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알 이유가 없었고 내가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꾹 찌른 곳을 그냥 총으로 뻥하고 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초병은 그러지 않고 다가와 그녀를 잡아 세웠다. 총구가 이번에는 가슴을 찔렀다. 옷 위로 차디찬 금속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 두 발짝 충격으로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는 아까 했던 것처럼 앞으로 가려고 동작을 취했다. 초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초병은 그녀를 총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잡고 초소 안으로 끌고갔다. 그는 힘이 셌다. 점례는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잡은 손의 힘을 통해 느꼈다. 그래서 끌려가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초소한은 따뜻했다. 안과 밖이 다른 것은 초소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초소의 안은 막사의 안과 달리 포근하고 아늑했다. 좋은 냄새가 풍겨왔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냄새의 근원지를 찾다 점례는 작은 난로 위에 있는 주전자가 끊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뉴월 불도 쬐면 따뜻하다고 했지. 만주의 깊은 산속은 저녁은 제법 쌀살했다. 그래서 초소안의 장교들은 차를 먹기 위해 난로를 피우고 주전자를 올려 놓았다. 막사는 밖이 좋은데 이곳은 안이 좋군. 점례는 그 순간에도 막사와 초소를 비교했다. 초병은 도망치는 년을 잡아 왔다고 말하고는 처분을 기다리는 자세로 차렷하고 있었다. 점례는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내의 등짝을 보았다. 그 사내가 등짝을 돌려서 앞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점례는 일본인 장교의 눈과 마주쳤다. 장교도 점례와 눈을 마주치고는 놀랐으나 놀랐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할 일은 많은데 풀리지 않고 뭔가 그래도 해야 하는데 방해꾼이 나타난 것을 표정으로 나나탰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데 왜 여기에 왔느냐고 힐난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아프게 찌르는 눈의 이면에는 점례를 향한 어떤 동정심 같은 것이 슬쩍 지나쳐갔다.

장교는 잠시 점례를 보고는 초병에게 지시했다. 다시 막사로 데려가라. 심하게 다루지 말고. 오늘 밤에는 내버려 둬. 아니 내일 까지도. 아니다. 일주일 간 얼씬도 하지 마라. 하이. 초병이 소리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손을 눈가에 올려 붙였다. 막사를 떠난지 한 시간 후 점례는 다시 막사로 잡혀왔다. 탈출은 실패로 끝났다. 초병은 그녀가 방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는 손에 든 봉지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장교가 준 일본 과자였다.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로 과자를 힐끗 보고는 보자기를 끌렀다. 그리고는 집에서 가져온 자수를 어루만졌다. 두 마리 학이 서로를 보면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휴의가 자신도 해보겠다며 어설프게 바느질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보자기를 새끼줄 꼬듯이 꼬았다. 그리고 치마를 엮어 길게 늘였다.

그녀는 그것을 막사의 천장 기둥에 걸었다. 이만하면 됐지. 그녀는 줄을 잡아 당겨보았다. 단단하구나. 됐어. 소싯적에 나도 새끼좀 꼬았거든. 점례는 자신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냈다. 단단하다고. 그 말을 하는 입술위로 짠내가 스며들었다. 눈물이라는 것은 끝이 없었다. 나래비 서서 기다리는 군인들처럼 없어졌다 생겨났다를 무한 반복했다. 날카로운 바늘로 눈물이 나오는 그곳을 꾹 찔러 버리고 싶었다. 점례는 일어섰고 다음에 무엇을 할 지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아는대로 그렇게 실행했다. 늘어진 보따리 줄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토담에 몸통을 대고 고개만 흔드는 커다란 먹구렁이처럼 음산한 냄새를 풍겼다. 마지막이다. 이 순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나, 지점례. 이렇게 가는 구나. 가는 마당에 미련이야 없을 수 없겠냐만은  다 떨쳐내야지. 그래, 나 지금 편안하고 행복해. 한 달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 되지 않은 희망에 들떴던 그 때보다 완전한 절망에 빠진 내가 보기에 좋다고. 그만큼 난 성숙해 진거야. 어른이 됐다고. 그러니 슬픔 따위는 잊어버려. 스물 점례는 손으로 머리를 집어 넣기 위해 손으로 원을 만들어ㅓㅆ다. 그 순간 과자 봉지가 보였다. 그녀는 잡은 줄을 풀었다. 그리고 앉아서 과자봉지를 잡고 뜯었다. 

과자구나. 그래 먹자. 점례는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맛있었다. 생전 처음 맛본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맛있지? 점례는 한 개를 더 먹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개 였다. 점례는 하나를 더 뜯으려다 그만 두었다. 남은 것은 제사상에 올려야지, 그런 심정이었다. 입맛을 다신 점례는 다시 줄을 잡고 원을 만들었다. 무슨 미련이 있겠어. 그러나 미련이 있었다. 점례는 마치 잊은 소중한 물건을 찾는 것처럼 방의 구석을 돌아봤다. 작은 식탁 위의 성경책이 눈에 띄었다. 점례는 기어가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직이 불렀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는 성경책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작은 목각 인형을 잡았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지만 점례에게 그것은 휴의가 건네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번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항상 같은 자세로 점례와 눈을 맞췄다. 살아 있는 것처럼 조각상이 살짝 웃었다. 점례도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숭고한 어떤 것을 마주 보고 있는 듯이 조각상을 가슴에 품었다. 마치 성모상에 하듯이. 그리고는 얼마후 안녕, 이제 정말로 안녕하고 작별을 고했다. 그래도 다른 것은 없나하고 두리번 거렸다. 옳지. 그녀는 수를 놓기 위해 언제나 앉아서 무릎위에 펼쳤던 학 자수를 집어 들었다. 가는 길이 길어. 참으로 길어. 그래도 한 번 가면 오지 못하니 이 정도는 해야지. 작별은 여러번 해도 괜찮아. 여전히 학은 그 자리에 있었다.목각인형처럼 손때가 묻었으나 두 마리의 학은 여전히 날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곱게 접어 성경책 위에 놓았다. 남겨질 자신의 흔적들. 굿바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 끝났다는 안도감인가. 그러자 감은 눈 사이로 무수한 빛이 반짝거렸다. 상상속에서 그녀는 어딘지 모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빛이 사방에서 번개처럼 순간 순간 내리쳤고 그 빛 사이로 엄마가 다가왔다. 누군가하는 의심이 들거나 하지 않고 바로 엄마라고 알아 맞출만큼 선명한 이미지였다. 엄마라고 부르려는데 엄마는 가타부타 말없이 너무 빨리 점례의 눈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점례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빛 사이로 그림자가 내려왔고 그림자는 몇 번 변신을 하더니 휴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엄마와 달리 다급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있었다. 그가 그것을 휘둘렀다. 막 어깨와 목과 얼굴에 그것이 닿을려는 순간 휴의도 사라졌다. 물건하고 이별하더니 이제 사람하고도 이별했다. 이런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살아 나가서 기필코 살아서 다른 세상을 보고자 했는데 그 결심은 무너졌다. 결심은 무너지라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무너지는 거고. 

하지 않겠다는 일을 해 버린 것이었고 점례는 결심을 바꾼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처지에 몰린 내가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백번 물어도 대답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데 감당하겠다고 나선다고. 말이 안 되는 말이엇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나이가 먹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스물 점례가 아닌 마흔 세 살 점례가 됐다. 중년의 점례는 많이 살아본 사람답게 체념할 줄을 알았다. 벽의 작은 거울에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고 그것이 맞다고 그래야 한다고 거울속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폭격이 다시 시작됐다. 여느때처럼 그 폭격은 어느 쪽에서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적인지 아닌지 점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본능에 따라 되는대로 방바닥에 엎드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순간 떠났고 다시 엄습했다. 점례를 방에 밀어 넣고 초소로 돌아가던 병사도 점례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병사도 점례처럼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병사는 옷을 털고 있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야할 소초쪽이 아닌 점례의 방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너는 전쟁에 나간 병사의 공포를 아느냐. 죽음의 공포를 아느냐고. 그런데도 도망을 쳐. 지금쯤 과자를 다 쳐먹었겠지. 명령을 무시하고 내가 먹을 걸. 병사는 후회하는 마음이 앞서자 조금 전의 안쓰러움은 사라졌다. 죽을 거야, 난 곧 죽어. 그러니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방금 전에 죽지 않고 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일어나서 옷 털기를 멈춘 그는 달리기 선수처럼 달렸다. 소초로 복귀가 아닌 점례의 막사였다. 등 뒤로 따라붙는 적을 따돌리기 위한 필사적인 도주였다. 그만큼 속도가 붙었다. 늦으면, 한 발짝만 늦으면 적의 총검이 등을 뚫고 앞가슴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런 공포의 힘으로 병사는 내달렸다. 죽기전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난 그런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욕심이 아니다. 되레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 그를 존중하자. 이 시국에 내버려두는 것은 그녀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다. 병사는 그렇게 자기를 합리화 했다. 습격나갔던 다른 중대 병력이 들이 닥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그들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면 자신의 차지는 없다.

전쟁터 병사의 동물성과 이기심은 이런 때 써먹어야 한다. 그것이 싸우는 병사가 취할 태도였다. 그는 더 서둘렀다. 어깨에 걸린 총이 부자연스럽게 덜컥거리자 아래로 내려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앳된 얼굴의 어린 초병은 이제 더는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에 이기는 마음으로 천황폐하의 이름으로 그는 발보다 먼저 총검을 들이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초병은 무언가 허공에 매달려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태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총신의 끝에 달린 대검을 세우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내리쳤다.

점례가 힘없이 떨어져 내리면서 머리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사병은 씩씩대며 ‘빠가야로’를 서너 번 외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찌르려고 총 잡은 손을 뒤로 뺐다. 동작에 제법 각이 서 있었다. 거듭된 훈련의 결과였다. 병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할 줄 몰라 찔러 총 자세를 한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대신 방바닥에 떨어진 성경책을 발로 걷어찼다. 더러운 조센징, 빠가야로. 그는 성경책을 걷어차고는 그 옆에 있는 목각 인형을 보고는 이건 또 이건 뭐야 하는 억하심정으로 군홧발로 밟았다. 부서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인 병사는 했던 욕을 여러 번 되풀이 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면서 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달리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이 가까이 내려 앉았다. 점례도 쏟아지는 별의 세례를 받았다. 새벽이었고 곧 날이 밝을 것이다. 점례는 죽음에 이르지 못했다. 대신 신성한 것만이 망가졌다. 점례는 그런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는 꿈속을 진창처럼 헤맸다. 늪지대를 벗어나자 맑은 개울물이 나왔다.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그녀는 세워놨던 나뭇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했다. 아궁이 앞에 앉은 점례는 마른 솔잎을 집어넣고 그 위에 장작 서너 개를 얹었다. 마른 솔잎은 연기를 내면서 금새 타올랐다. 점례는 바짝 불 곁으로 다가가 젖은 옷을 말렸다. 손을 비비며 몸도 말렸다. 따뜻한 온기가 전신으로 번졌다. 불은 꺼지지 않고 잘 타고 있다. 굴뚝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솔가지는 장작에 옮겨붙어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등을 두드리며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 소리였다. 장작에 붙은 불은 작은 화산이 폭발하는 듯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그 순간 의식의 저편에서 점례는 막사를 벗어나 집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무쇠솥이 끓고 밥 익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일 나간 아버지는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점례는 소리 질렀으나 목구멍에서 막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점례는 그렇게 소리 지르다 눈을 떴다.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뜰에서 만났던 조선인 여자였다. 한동안 멍해 있던 점례는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 날 초소의 장교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지 못했으나 과자 먹어 하고 내밀 때 지난번에 보았던 바로 그 과자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랐다. 서두르지도 않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전투복에서 화약냄새도 없었다. 전투 대신 행정업무를 보는 장교였다. 쫓기고 살기 뛴 얼굴 대신 잔잔한 여유가 있었다. 한 번은 군용 실과 대바늘을 들고 왔다. 천 조각을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는 자수를 뜨는 점례를 위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댓가를 지불했다. 그는 점례가 읽는 성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말은 언제 배웠니? 우리글도 잘 쓰는구나. 자수도 좋고. 장교는 점례를 칭찬했다. 점례는 그에게서 인정을 느꼈다. 여자같이 곱상하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아. 장교에게서 점례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한편 남양군도의 여순은 말수와 마주 앉았다. 조선인 십장으로 일본군을 대신해 노무자들을 책임진 그는 다른 조선인과는 다른 신분을 이용해 오늘도 여순을 만나러 왔다. 만남이 지속될수록 그는 여순이 말수가 적으면서도 강단이 있고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엇을 도모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둘이라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그는 광산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도모해야 할것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될지를 계획했다. 더 늦기 전에 실행해야 한다. 어설프게라도 말이다. 광산에서는 툭하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오늘도 그랬다. 현장에서 바로 죽은 자는 없었지만 곧 죽을 부상자가 여러 명 나왔다.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들고 병원행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붕대와 소독약 정도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어떤 인자한 사람은 그런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곡괭이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미안해, 내가 죽으면 난 편한데 남은 사람들이 곱절로 일해야 하니.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말수는 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분노를 느꼈다. 대상은 분명했으나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분풀이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자 말수는 탈출을 꿈꿨다.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 젊었다. 26살의 나이에 돈 벌겠다고 따라온 것이 죄라면 죄였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 그래서 벌을 받는 거야. 혼자 있을 때 말수는 이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제 잇속만 챙기는 왜놈같은 놈으로 비췄지만 말수는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제 발로 찾아온 것이지. 도망쳤어야 했어.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본가면 돈 많이 벌고 출세한다는 말을 믿는 내가 잘못이야. 내 책임지.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야. 너무 고되. 뱃일은 이에 비하면 껌이야, 껌닥지라고. 도망치자. 그는 여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다 나왔는지 심하게 떨렸다. 삶을 내걸고 하는 도박꾼다운 태도였다. 여순이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입술 역시 바르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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