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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8 18:04 (목)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막사의 안과 밖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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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막사의 안과 밖은 달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6.04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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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깥공기는 신선했다. 그렇게 느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문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선과 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점례는 일부러 호흡을 길게 했다. 신선한 공기를 뱃속 깊숙이 박아 넣고 싶었다. 아주 깊숙이. 그래서 한 번 들어간 공기는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계속 머물러 있었야 한다. 다시 숨을 쉰다. 이번에는 빠르게 여러번 들이쉬고 뱉었다. 몸 전체가 들썩였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몸이 좌우로 움직였다. 한 몸이 마치 두 몸인 것처럼 따로 놀았다. 맛있는 음식이 이처럼 달콤할까. 점례는 숨 하나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그런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막사 끝에 간신이 걸친 해가 저녁을 알리고 있었다. 조선 여자 셋 중 하나도 점례처럼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처럼 그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들었을까. 저녁이 오고 있는 느끼고 저녁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필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졌을까. 점례는 원래 있던 자리로 고개를 가져왔고 그 순간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점례는 멀리를 돌렸다. 아니 몸 전체를 비틀어 그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보려고 이쪽으로 눈을 돌리지 마. 점례는 세상천지 누구에게도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등뒤로 소녀의 눈길이 여전히 자신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점례는 알았다. 왜 싫다는데 자꾸 쳐다보지. 그러지 마. 너까지 그럴 필요없잖아. 점례는 다시 답답해졌다. 모처럼 시원한 공기로 기분전환이 됐는데 그게 오래가지 않았달.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까. 아야, 차라리 옆구리에 꽃히는 네 시선이 견디기에 나아. 점례는 체념했다. 그녀가 잘하는 것을 하니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래도 처음이 기분상태는 아니었다. 나도 나를 몰라.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알기 위해 쳐다보다니. 이건 옳지 않아. 틀리다고. 그래도 알고 싶다고. 그럼 기다려. 내가 나를 알아볼 때 그 때 알아봐. 그게 순서야. 그래도 늦지 않을 거야. 점례는 그런 상태로 고개만 약간 돌려 자신이 나왔던 문을 바라봤다. 

하필 왜 그 때야. 내가 나올 때 왜 그때냐고. 3분 쯤 전이거나 후 였으면 좋았을 것을. 점례는 이제 소녀가 미워졌다. 그러다가 그 소녀가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것을 알고는 너무 기분나빠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상냥한 얼굴로 네 이름은 뭐니? 하고 물어 볼 용기는 없었다.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점례는 얼른 다시 들어갈까 하다가 미적 거렸다. 텅비고 어두운 방보다는 그래도 여기가 나았다. 점례는 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못했다. 널 탓하지 않을 게. 점례는 얼핏 본 소녀를 용서했다. 그래 내가 잘하는 것을 해야지. 체념하고 용서하는 것. 점례는 하을 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기에서도 싹은 자라고 있었다. 어떤 놈은 제법 커서 허리 높이 만큼 솟아 있었다. 손으로 하나를 잡아 뜯었다.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 이 냄새야. 소꼴을 먹이기 위해 베었던 바로 그 풀냄였다. 점례는 코를 벌름 거리면서 아까 했던 깊이 그리고 오래 숨쉬기를 했다. 폐 가득히 공기가 들어가자 배가 불러왔다. 이제 눈을 마주친 소녀의 존재는 없었다. 다시 한 줌을 그러쥐고 손으로 잡아당겼다. 어렵지 않게 풀을 뽑히기도 하고 잘려 나와 점례의 손에 들어왔다. 풀이야, 풀이라고. 여기서도 풀은 자라고 있다. 이 여린 냄새. 그래 이 냄새야. 점례는 냄새를 통해 잊었던 죽마을을 떠올렸다. 상상속으로 그것은 바람을 타고 어느 순간 점례 앞으로 왔다. 하지만 점례는 일부러 걷어 냈다. 손을 까불러도 가기 않는 것은 억세게 뿌리쳤다. 고향이라니, 나에게 고향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소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듯이 고향도 그래야 한다. 내 얼굴 내 몸 내 목소리를 아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부모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철저히 혼자다. 이것은 소외가 아니라 자발적인 고립이다. 내가 원한거야. 점례야, 네가 원한거라고.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점례는 손에 든 것을 잘게 잘랐다. 그리고는 눈 앞으로 가져와 입을 한껏 오무린 다음 탄력을 이용해 입바람을 불었다. 입바람과 부는 방향이 마침 같은 쪽이어서 풀은 서너 발자국 앞까지 날아갔다. 손을 털고 점례는 일어서려다 멈칫했다. 대개는 손에 있는 것이 사라지만 앉은 자리를 일어났던 경험이 이번에는 작동을 멈추었다. 아직 일러.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야. 좀 더 놀자. 방안에 떡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기다릴 것이 없는 숨막히는 공간으로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점례는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에게 대답했다. 이러한 시간이 좋았다. 상대가 없어도 점례는 대화를 했다. 자신과의 대화는 상대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해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다. 점례는 자신에게 하는 말에 자신이 상처를 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결과는 오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점례는 억지로 기분이 좋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가슴 아래로 무언가 펑 뚫리는 듯한 기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이 공기, 이 신선한 공기를 두고 다시 천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래도록 마시고 싶었다.
 

점례는 내친김에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한 발 앞으로 뻗었다. 내딛지 않고 뻗은 것은 그러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자빠지면 창피한 일이야. 소녀는 아직 나를 쳐다보고 있어. 나머지 두 소녀는 더디로 간거야, 그래, 그들도 나처럼 얼굴을 보이기 싫은 거지. 점례는 일부러 눈에 힘을 빼고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몇 걸음 걸었다. 억지로라도 그러고 싶었다. 그랬더니 걷지 않았던 발이 새로운 기억을 끄집어 내기라도 하는 양 힘은 없었으나 앞으로 나아갔다. 걷지 않은 발은, 방안에만 있던 발은 힘이 없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자빠지지는 않는구나. 그래서 점례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뻗듯이 발을 뻗었다. 그 발 바로 아래에 노랗게 핀 민들레가 밟혔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한테 꺾이는 것도 있구나. 불쌍한 것은 점례가 아니라 민들레였다. 

민들레. 점례는 입 속으로 민들레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이미 밟힌 것은 어쩔 수 없어도 다른 녀석은 행여 밟을새라 조심하면서 그 옆에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았다. 짓무른 녀석. 나처럼 몸뚱이가 문질러 졌구나. 가엾어라. 민들레. 점례는 어디서 이런 감정이 나오는지 울컥했다. 하지만 나오려는 눈물은 억지로 참았다. 엉덩이에 흙기운이 묻어났다. 차가운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엉덩이를 가볍게 밀어냈다. 얼마만인가. 흙과 내가 하나가 되다니. 그냥 점례는 푹석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래봤자 먼지 하나 피어 오르지 않지만 편했다. 마음이 그러지 몸도 이 자세가 세상 가장 편한 자세인가 싶었다. 

눈뜨면 만지고 밟고 하던 흙이 이렇게 귀중한 것이었구나. 미안하다 흙아, 예전헨 미쳐 몰랐어. 내가 미안하다. 점례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엉덩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볍게 들어 올렸다. 눌린 흙이 펴지는 느낌이 들자 점례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난, 살아 있어. 여전히 살아 있다고. 살아 있고 숨쉬고 있어. 점례는 부러진 민들에에 손을 댔다. 줄기를 꺾였고 꽃은 잎이 부스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노란 자태를 드러냈다. 부러지고 짓이겨도 여전히 꽃은 꽃이었다. 가만히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처음에는 냄새를 맡기 위해서였으나 지금은 꽃에 입을 맞췄다. 이런 기분일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례는 꽃을 떼면서 줄기에서 흘러나온 액이 자신의 입술에 묻으면서 나는 쓴맛을 느꼈다. 이 맛이지. 민들레는 쓴 맛이야. 쓰지 않느면 민들레가 아니야. 아니라고. 죽마을의 민들레가 여기까지 왔구나. 바람을 타고 산을 넘고 바다른 건너 여기까지 온 거야. 점례의 시선은 이제 다른 민들레에게도 옮겨졌다. 그 것은 짓이겨지지 않은 싱싱한 상태 그대로였다.

나도 그랬어. 처음엔 나도 그랬다고. 너처럼 싱싱했어. 줄기는 수액으로 가득찼고 잎파리는 푸르다 못해 검게 빛났지. 그게 나야. 그게 나였다고. 점례는 과거형을 쓰면서 지금은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처럼 싱싱하지 못해. 밟히고 꺾여 졌어. 점례는 민들레의 줄기를 가만히 잡아 보았다. 안은 무언가로 꽉차 있었고 잡은 손은 반동이 느껴졌다. 충만한 생도감이었다. 노랗게 빛나는 꽃잎 하나하나 역시 제 멋을 뽐내고 있었다. 핀이 있다면 노란색을 고를 거야. 너와 한 번 견줘보자. 점례는 꽃잎도 줄기처럼 가볍게 엄지와 검지로 잡았다. 그것은 생명이었고 그래서 꿈틀거렸다. 가만있어. 움직이면 맞는다. 점례는 그 말을 하고서는 깜짝 놀랐다. 가만있어. 그들은 한결같이 그 말을 했다. 가만있으라고. 알아서 할테니 가만있으라고. 부르르 몸을 떤 점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했다. 꽃 처럼 땅에 바짝 얼어 붙었다. 내 몸이 얼었어. 눈이 얼음이 되듯이 그렇게 얼어 버린거야. 떠밀어도 넘어지지 않겠지. 언다는 것은 이런 좋은 점도 있구나. 

점례는 언 몸을 풀지도 못하고 손만 옆으로 뻗었다. 이번에는 꽃이 지고 나서 열매를 맺은 작은 씨앗이 느껴졌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솜털이 그것을 싸고 있었다. 굳이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없다. 손의 감촉 만으로도 점례는 지금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것이 불면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손가락 사이에 끼고 놀았었지. 그러다가 바람이 불면 손에 올려 놓고 불었어. 그러면 날아갔지. 그래 지금이야. 점례는 한 손으로 줄기를 잡고 둥그렇게 원을 그린 씨앗이 있는 부분을 다른 손의 손톱으로 잘라냈다. 씨앗을 맺었구나. 퍼트려야지. 그래, 넌 빠르고 자라서 먼저 날라 가는 구나. 점례는 코 끝이 간질 거리는 느낌이 들정도로 그것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불었다. 죽마을에서 하던대로 였다. 씨앗은 바람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작년에 내가 날리 씨앗이 돌고 돌아 여기 막사앞 공터에 떨어졌고 꽃을 피웠고 다시 열매를 맺었어. 넌 이번에는 어디로 갈래. 만주를 벗어나. 이곳은 네가 살곳이 아냐. 다시 갈래. 보령의 죽마을로. 싫어. 거긴 싫어. 난 다른 곳으로 갈거야. 태평양을 넘어 프랑스로 갈거야. 에펠탑 아래서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고 싶어. 그래 가, 네가 원하는 곳으로. 점례는 입을 모으고 바람을 세게 불었다. 손에 있던 것이 손바닥을 스치고 날아가는 느낌을 점례는 받았다. 점례는 다른 녀석 하나를 똑같은 방식으로 잡아 손에 올렸다. 또 불어볼까보다. 그때 눈앞에 휴의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기 마. 휴의가 말했다. 점례 네 얼굴에 머물러 있어. 휴의가  점례를 향해 민들레 씨앗을 불어 주었다. 

하얀 꽃씨가 얼굴에 닿으면 그 작은 것의 감각이 느껴졌다. 어떤 것은 씨앗이 눈에 부딫쳐왔다. 아이, 간지려. 간지려워. 오빠 미워. 점례는 웃었다. 휴의는 아랑고 않고 아직 남아 있는 나머지를 마저 불기 위해 아까보다 더 세게 바람을 모았다. 씨앗은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을 것을 보고 휴의는 종이연을 날리듯이 저 멀리 힘차게 던졌다. 그리고는 아직도 볼에 붙어 있는 씨앗을 불어 점례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점례는 숨결이 남아 있는 휴의의 온기를 손으로 잡았다.  오빠, 점례는 왈칵 설움이 몰려왔다. 오빠는 알까. 나에게 불어주던 민들레 씨앗을. 나 여기 있어. 오빠가 불어준 씨앗이 꽃을 피웠어. 그리고 열매를 맺고 그것을 내가 날렸어. 이제 손에 남은 줄기는 오빠가 했던 것처럼 종이연 처럼 날려 보낼게. 참았던 눈물이 푹푹 열기처럼 쏟아졌다. 다시 설움이 몰려 왔다. 보고 싶다. 그러나 떠오른 얼굴은 휴의가 아닌 엄마였다. 고향집을 떠나 올 때 아버지 옆에서 눈물 짓던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와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은 금세 완용으로 바뀌었다. 내다 점례야. 어떻노. 거기 생활이. 무쟈게 좋지. 능글거리면 완용이 웃고 있다. 

점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르르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렸다. 쓰라렸다. 상처에 소금을 뿌린것처럼 가슴이 얼얼했다. 일본으로 간다며.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며. 다 거짓말이었지. 넌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알았어. 쳐 죽일놈. 살아야지. 넌 위해서도 악착같이 살거야. 점례는 이를 악물었다.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건너편의 소녀는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점례는 그것을 의식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 작은 공간에 점례는 홀로 있다. 홀로 있으니 점례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 울어도 되겠군. 그런 마음을 먹고 점례는 울었다.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하늘은 어두워 졌고 점례는 얼굴진 얼굴 사이로 어른 거리는 휴의를 만났다. 오빠,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지. 일본이야. 군수공장이고 나는 하루종일 총알을 만들어. 끝이 뾰족한 총알을 만들면서 나는 오빠를 생각하고 있어. 점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 사이로 황토배기를 달려 올라가는 휴의의 등을 따라가는 시선이 있었다. 그래, 그게 나야. 점례라고. 순사가 가고 나서 휴의가 점례 집 문간을 서성였다. 문틈으로 점례는 그를 보았다. 문을 열고 점례가 나왔고 휴의는 말없이 황토배기를 향해 달렸다. 점례도 그 뒤를 따랐다. 상기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조금까지 서 있던 죽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공장으로 간다고. 응. 무슨 공장인데. 그건 몰라. 한 일년 고생하면 된다고, 완용 오빠가 말했어. 완용이 그랬단 말이지? 응. 널 위해서 특별히 마련했다고 했어. 심심할 까봐 여순도 같이 간다고. 점례는 들떴다. 그러나 실망하는 휴의를 보면서 그를 위로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돈 벌면 바로 와야지. 그게 쉬울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어. 참고 견뎌야지. 나에겐 꿈이 있어. 논을 사야지. 그리고 난 경성으로 갈거야. 점례야, 휴의가 점례를 불렀다. 응. 그래 잘 갔다와. 오빤 뭐 할거야. 우리집 사정 알잖아. 식구들 먹여 살려야지. 점례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저 언덕에 앉아서 죽마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에 여순 집 뒤로 우뚝 솟아오른 소나무가 보였다. 저 나무 잘릴 운명이야. 순사가 그랬거든. 주재소 화장실 목재로 쓴다고. 여순 아버지 자랑 거리가 하나 사라지겠네. 늘 소나무를 보면서 천년 묵었다고 목에 힘을 주었잖아. 그제도 그 소리를 들었어. 어쩌겠어. 순사가 그렇게 말했는데. 일주일 후에 완용이 톱을 들고 오겠지. 휴의는 완용의 직업이 부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왜놈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늘 너도 완용처럼 순사 부하가 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기회가 없을 뿐이지 있다면 휴의도 완용처럼 순사 부하가 됐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니 완용을 비난하는 것은 자기 양심에 찔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다. 어쨌든 잘 다녀와. 일년이라고 했지. 응. 바뀔 수도 있겠지. 돈벌이가 좋으면 한 일년 더 있을지도 몰라. 오빠도 일본올 기회가 있으면 와. 일본에서 만나면 기분이 묘할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둘은 이런 말을 하다가 네가 먼저가, 휴의가 말했고 점례는 어색하게 일어나 언덕을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 무렵 점례 집 주위를 서성이던 휴의는 점례가 나오자 잠깐 옆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점례 손에 쥐어 주었다. 가지고 가서 놀아. 공장일 하다 심심하면. 고향생각하다 보면 힘든 일도 어렵지 않을 거야. 점례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받았다. 휴의는 하찮은 것이니 놀다가 버려도 좋다는 듯이 별거아냐 하고 점례가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짓자 이렇게 가볍게 말했다. 점례는 손에 든 것을 가만히 쥐었다가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이었다. 휴의는 손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 있는 천하대장군도 그가 깎아 세웠다. 언제 이걸 깎았대. 어제 헤어지고 나서. 밤에 심심해서. 누구냐고 안 물어봐. 물어봐야 하나. 이건 나고 이건 오빠지. 주는 것이니 받겠어. 그런데 난 줄게 없다. 점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뭘 바래고 주는 것 아냐. 점례야, 잘 있다 와라. 거기 가면. 아냐. 아니라고. 오빠 그러지 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울려는 거야? 휴의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점례가 말했다. 그런 거야.  점례는 되레 휴의를 놀렸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휴의였다. 

난 줄게 없어. 점례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신 돈 많이 벌면 일본에서 올 때 아무거나 사올 게. 괜찮아. 너나 잘 챙겨. 그럼 빈손으로 온다. 너만 잘 있다 오면 그것으로 족해. 오빠가 아빠처럼 얘기한다. 웃겨. 그렇지. 웃기지. 웃으면서 헤어지자. 누가 안 그런데. 약속해. 점례가 손을 내밀었고 휴의가 잡았다. 무슨 약속을 하지. 선물 없는거. 좋아 그런 약속이라면 기꺼이 동의하지. 둘은 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이번에는 점례의 얼굴이 상기됐다. 우는 거야. 그런 거야. 이번에는 휴의가 점례를 놀렸다. 

엄마가 싸준 보자기와 거칠게 깎은 나무 인형, 점례가 유일하게 위안을 삼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에게 위안을 삼을 때 점례는 휴의가 준 인형을 꺼내들고 위안을 삼았다. 이제는 손때가 묻어 그것은 반질거렸고 부드러워졌다.
만질 때마다 소나무 향이 났다. 어떤 때는 송진 냄새가 훅 끼쳐올 때도 있었다. 밤새 깎았어. 돌아서면서 휴의가 말했다. 잘됐다. 차라리 잘 된 것이다. 점례는 무엇이 잘됐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차라리 잘 된 것이다. 일본은 너무 가까워. 어쩌면 오빠가 나를 찾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곳은 어림없지. 만주라고, 만주는 넓어 끝이 없지. 아무도 날 찾을 수 없어. 두 명의 조선 여자는 점례가 자신과 놀기보다는 혼자서 미친 여자처럼 가만히 있자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다가 그것도 실증이 났는지 각자 방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옆방의 소녀가 죽었다고 점례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죽었다. 점례는 갸날픈 소녀를 생각했다. 너무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다. 산 속에 버려졌다. 이번에는 그 소녀가 아니라 다른 소녀다. 누굴까. 그러나 점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트럭에서 만난 여자들의 얼굴은 막사에 도착한 직후 잊었다. 생각나는 얼굴이 없다. 죽음. 그녀의 죽음.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트럭 안에서 죽었던 여자는 차리를 행복했다. 그녀도 그 때 죽어서 산 속에 버려졌다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험한 꼴 당하지 않고 떠났더라면. 점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점례도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방을 둘러친 철조망위로 산비둘기 한 마리가 점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 천하대장군이 점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죽마을을 떠나올때 배웅해 주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비둘기가 푸드득 날아 올랐다.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비둘기 뿐만이 아니었다. 어깨에 총을 건 보초 두 명이 점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사를 살피기에 좋은 장소에서 서성이던 두 명의 병사들은 자기들끼기 웃고 끼득거렸다. 점례는 마치 동물원의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눈을 피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기 자리로 가야지. 여기는 내 방이 아니야. 내 공간이 아니라고. 그래도 내가 쉴 곳은, 십 분이라도 기댈 곳은 내 방 밖에 없어. 일어나서 옷을 털고 점례는 자기 방문을 열었다. 점례가 이러고 있을 때 여순은 남양군도의 어느 섬에 막 도착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애초 여순은 일본에 도착했다. 거기서 정말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배를 탔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등 떠밀려 커다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멀미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여순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점례가 트럭 멀미로 고생했다면 여순은 뱃멀리로 생사람 잡다 살아온 사람 처지였다. 기차와 트럭 멀미는 양반이었다. 뱃멀미가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할 때마다 노란 액체가 덩어리로 뿜어져 나왔다. 나중에는 나올 것이 없자 속에 있는 창자가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어떤 때는 올라오던 것이 목에 걸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싶었다. 오한이 나고 온몸이 창백했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백짓장 같은 몸은 산송장과 진배 없었다. 같이 온 여자들도 여순과 같은 처지를 면치 못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조선인 남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타보는 기차와 뱃멀미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배를 탔던 통영의 한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갑판 위를 활보했다. 그는 쓰러져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여순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러다 죽는다 죽어. 참아야지. 쳇.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침을 뱉었다. 갑판에 떨어진 침이 여순에게 붙은 것처럼 그 순간 여순은 움찔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참아야지. 이 정도도 못참으면 어떻게 전쟁터에서 살겠니. 그런 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들렸다. 나무라는 소리였다. 보호받아야 할 여자가 낯선 사내에게 이런 꾸중을 듣고 있다. 이게 참는다고 되는 일이냐. 너와 난 달라. 여순은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말은 목구멍에서 걸렸다. 상한 밥풀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면 죽어. 누워만 있지 말고 일어나 앉아 있어.

그는 마치 노가다의 십장처럼 쓰러지 소녀들을 일꾼처럼 감시하고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순의 귀에는 이제 그런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진공상태가 왔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말수로 불리는 그 남자는 쓰러진 사람들을 참견하는 일에 지치면 여순을 지나쳐 갑판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느긋하게 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에게는 이처럼 좋은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희미한 물체가 왔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여순은 꿈결처럼 느꼈다. 저이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의식이 꺼져갔다 돌아오면 여순은 혼잣말을 했다. 그런 것도 없으면 자신은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여순은 정신이 들면 바로 중얼거렸다. 저이는 사람이겠지. 귀신이 대낮에 돌아다닐일은 없어. 귀신이라면 좋겠네. 제발 이 울렁거림을 멈추게 해달라고 빌어라도 보지. 멀미만 멈추면 못 할 것이 없고 못 참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이때 배가 크게 출렁였다.

지금껏 보지 못한 엄청난 크기의 배 인데도 태평양 바다 앞에서는 작은 나뭇잎에 불과했다. 잎은 마구 흔들렸고 가라 앉았고 다시 떠올랐다. 그때 마다 선실과 갑판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토하고 소리지르고 쓰러졌다. 굉장한 크기의 물보라가 갑판 위로 둑이 터졌을 때처럼 덮쳐왔다. 여순도 물 보라 세레를 맞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깨어 났을 때도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까무라 친 것도 물 때문이었고 정신을 차린 것도 물 때문이;었다. 여순은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보따리를 움켜쥐었다. 보호해야 할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사수해야 한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그러나 여순은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그 순간 배가 위로 끝없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을 뿜으면서 올라오듯이 배가 그렇게 파도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더니 끝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천길 낭떨어지로 곤두박치던 배는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다.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고 다시 세찬 물보라에 위로도 아래로도 아닌 옆으로 움직였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순은 죽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목숨처럼 여겼던 보따리가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눈을 뒤집고 여순은 까무라쳤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혼은 사라졌다. 

어쩌면 이것은 다행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녀 스스로 봤다면 그것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옷은 훌러덩 뒤집어져 속곳이 드러났고 머리는 산발한 채 눈을 덮었다. 검정 치마는 그녀 몸뚱이 전체를 감아 버렸다. 흰 고무신은 저 멀리 달아나서 둥둥 떠다녔다. 그래서 다행한 것이다. 보지 못한 것은 본 것보다 나았다.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난 이후로 여순은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일을 반복했다. 정박하지 않는 한 여순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자 어느 순간 멀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여순은 자신처럼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는 소녀들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을 것 같았으나 정말 죽은 소녀들은 없었다. 한 달 동안의 긴 항해 끝에 일부는 그것에 적응했다. 그러나 아직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도 있었다. 너무 하네, 정말 너무해. 말수가 그런 소녀들을 쳐다 보면서 해도 너무 하다고 외쳤다. 너무한 것이 파도인지 그 파도를 이기지 못한 것이 너무한 것인지 알지 못한채 여순은 말수를 따라 너무 하다고 중얼거렸다. 정말 이것은 너무한 것이야. 

여순은 말수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 그가 하는 행동을 눈여겨 봤다. 저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남들은 다 죽어 나자빠 졌는데 혼자가 갑판을 달려 다니고 쓰러진 자를 툭툭차면서 죽었는지 확인하고 어떤 때는 신이 나서 노래도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 모를 노래를 구슬프게 불러대가가 여순과 눈이 마주치자 뭘 봐, 하는 불쾌한 표정을 던지기도 했다. 뱃일을 했다고 들었다. 누가 말해줘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 나는 통영 뱃놈이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배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통영 뱃놈인 것을 알았다. 통영 뱃놈은 잠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여순이 어렵게 눈을 뜨면 사방은 깜깜한 밤이었다. 그러나 주변이 익수해 지면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고 말수가 움직였다. 그는 늘 갑판을 걸어 다녔고 뛰어 다녔다. 말수가 여순의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는 척 여순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날 보는 걸 알아. 나도 널 보고 있었거든. 말수는 여순이 들으라고 하는 건지 아닌지 조용한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겨우 옆사람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평소와 달리 이렇게 나오자 여순은 말수가 아닌 딴사람인가 하고 착각했다. 그러나 실눈을 뜨고 본 말수의 다부진 상체는 그가 통영 뱃놈인 것을 증명했다. 여순은 그 상태로 그 대로 어깨 너머로 뜬 달을 올려다 봤다. 달은 컸다. 죽마을의 달보다 열배는 큰 것 같았다. 커다란 쟁반처럼 그것은 바로 머리 위해서 빛났다. 파도는 잔잔했고 배는 정지한 듯이 아무런 물살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살면 기회가 있어. 지금처럼 버텨봐. 말수가 말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죽지 않고 살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으니 힘들더라도 견뎌내자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순은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밖의 행동 때문에 여순은 말수를 달리 생각하게 됐다. 

곧 육지에 도착한다. 큰 섬을 봤거든. 그게 점점 가까이와. 처음엔 환영인 줄 알았는데 육지였어. 곧 내릴거다. 정신 차리자. 그 말을 하고 말수는 원래 있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순은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러나 옴싹달싹 할 수 없었다. 간신히 떨어져 있는 보따리를 잡았고 벗겨진 고무신을 신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내린다고. 살았네, 살았어. 여순은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지간히도 왔어. 군수공장 공장장에게 당할 때는 여기만 빠져 나오면 살 줄 알았어. 그런데 멀미는 더 하더군. 이보단 더 한 건 없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여순은 그 순간 자신의 멀미가 멈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말수의 말을 들었다. 귀가 온전히 작동하고 있어. 몸이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지. 견딜 만큼 견뎠으니 목적지에 온 거야. 어떤 것이 그곳에서 나를 맞을 지 상상이 안가. 하지만 이보다 심하겠어. 여순은 그 사이 자신이 더 강해지고 커졌다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릴 때도 된 거지. 내릴 때가 되자 여순은 논이고 밭이고 집이고 아무 생각이 없던 것이 다시 눈 앞에 어른 거렸다. 몸이 회복되면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돈다발을 세는 모습이 어른 거렸다. 일본서 못 번 돈 여기서 벌자. 여기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느낌이 좋아. 이렇게 고생해서 왔는데 노다지는 아니더라도 돈을 모을 수 있을 거야. 여순은 보자기를 잡은 손을 꼭 쥐었다. 

말수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예상한 대로 배가 멈추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쥐죽은 듯이 엎어져 있다가 갑자가 일어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웅얼 거리는 일 말이다. 그들은 비틀거렸으나 두 발로 일어섰다. 여순은 그것을 보았고 자신도 뒤쳐지지 않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기고는 마침내 여순은 일어섰다.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풀린 다리를 흔들면서 중심을 잡았다. 간신히 난간을 잡고 몸보다 더 흔들리는 머리를 안정시켰다. 그러기에 가슴에 안은 보따리는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갑판의 바람은 끈적거렸다. 마치 질게 반죽된 밀가루를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떠려 내려고 해도 떼어지지가 않았다. 피부를 벗어야만 뜯어진다. 여순은 그런 습하고 뜨거운 바람을 온 몸으로 느꼈다. 지금가지 느껴보지 못했던 끈적거림이었다. 장마철의 죽마을 외양간이나 도쿄의 여름날 과도 달랐다.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그런 공기 앞에서 여순은 이곳 역시 만만치 않을 거라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러나 당하고 나기 전에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보다 더 하기는 하겠어. 이것이 여순이 마음을 다잡는 힘이었다. 도쿄의 군수공장은 지옥이었어. 그곳을 빠져 나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그런 마음이 들자 여순은 자신을 괴롭혔던 공장장이 되레 행운의 여신이라도 된 듯이 고맙게 여겼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 온거야. 공장에서 14시간 일했지. 밥이라고는 주먹한 서너개가 고작이었고. 잘 빠져 나온 거야. 돈은 구경도 못했어. 종이 쪼가리에 얼마 벌었다고 얼마나 저금했다고 보여줬지만 지금 내 손에 아무것도 없어. 다른 조선소녀들도 마찬가지였지. 점례야, 너는 이곳에 없지. 너 만이라도 돈을 벌어서 금의환향해라. 점례를 생각하자 여순은 조금 힘이 났다. 갑판을 내려왔다. 어떻게 그런 걸을 기운이 났는지 의아했다. 소녀들은 서로 그런 기분으로 다른 소녀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여순처럼 일본에 있다가 이곳으로 온 처녀들도 있었고 애초 목적지가 이곳인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이건 뭐지? 이건 뭐냐고? 서로에게 묻고 있었으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의문이 한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위의 태양이 마치 불기둥처럼 뜨거운 불을 쏟아 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도 같은 태양이 아니다. 어찌 이리 뜨겁지. 델 거 같아. 피부가 허물어 지는 정도를 넘어섰어. 이 태양 아래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없어. 질문과 동시에 답이 나온 것은 그것이 힘이 얼마나 센지 알게 해주는 증거였다. 습도는 높았다.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부는데 몸에 닿은 공기는 축축했다. 이럴수도 있나. 모든 것이 상식밖이었다. 누구도 이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도 몸도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겨우 땅에 발을 디딘 흰옷 입은 사람들은 다시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그날 순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맡아 보는 다른 냄새가 기이했다. 입 속의 혀가 바싹 타 들어가 목구멍을 가로 막았다. 물을 먹고 싶다. 왜 저들은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끌고만 가지. 일을 시키려면 먹을 걸 줘야지. 도쿄는 양반인가. 여순은 자꾸만 물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묻는 사람이 되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말수. 그래 말수. 그 사람은 어디있지. 그 라면 무엇인가 할텐데. 알수도 있고. 그러나 눈에 비치는 풍경은 넓은 공터와 막사와 군인들과 그들을 태우고 다니는 트럭이 전부였다.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마음이 어떤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순은 알았다. 

정박한 배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여순이 느낀 첫 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공기가 달라도 너무 달라. 이 세상 공기가 아냐.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면 저승세계인가.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처음으로 맡아 보는 세상공기도 이처럼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냄새는 그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좋은 냄새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여순은 자신이 다시 구석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잡아 끄는 자는 또다시 여순을 구석으로 몰고 있다. 난 가기 싫어. 하고 싶지도 않고. 왜 자꾸 구석으로 밀지. 구석말고 가운데에 있고 싶어. 여순은 자비를 바랐다. 간청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고 싶었다. 두 손을 모을 힘도 없다. 그러나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옆의 소녀가 자빠져서 이마가 깨졌다. 피를 흘리고 있지만 붕대를 감아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여순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핏대를 올려 세웠다. 흙먼지를 날리는 연병장의 모래 바람 사이로 푸른 바다에 눈에 들어왔다. 지겹게도 본 바다. 그 바다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바다도 여순이 익히 알고 왔던 바다와는 달랐다.

고향 죽마을에서 봤던 넓고 넓은 바다였으나 그 바다는 아니었다. 저게 뭐지.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이 묻는 것처럼 이상했다. 그것은 낯설음이었다. 얼굴을 가리는 어린아이처럼 얼르는 나처 모르는 어른을 향해 여순을 울부짓고 싶었다. 자지러지면 엄마가 달래줄 것이다. 여순은 엄나하고 나즉이 불렀다. 그러나 잠시라도 엄마는 여순의 곁으로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단절이 이런 것인가. 홀로 내버려졌다는 절망감으로 여순은 몸을 떨었다. 왜 이리 춥지. 날은 이렇게 더운데 여순은 오한으로 떨었다. 덜덜 떨었고 그것은 자신은 물론 옆의 사람도 느낄 정도였다. 그만떨어. 나까지 떨리니까. 겨우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올려다 봐. 하늘은 같은 하늘이야. 높고 푸른 하늘에 너무나 큰 구름이 머리에 닿을 듯이 내려와 있었다. 하늘도 달라. 고향 하늘이 아냐. 구름이 저렇게 큰 적이 없거든. 공기도 바다도 하늘도 무엇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이런 세상을 알았더라면, 그런 경험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에 조금은 더 잘 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멀미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멀미의 끝은 죽음 아닌가. 여순은 죽음을 떠올렸다. 죽으면 그만이잖아. 그런 생각이 들자 여순은 덜 두려워졌다. 오한도 사그라 드는 것 같았다. 그래, 죽기 밖에 더하겠어. 여순은 하늘을 보라던 여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야 죽기밖에 더 하겠니. 힘내자 힘. 하고 명랑한 체 했다. 왜 죽니. 죽긴 왜 죽어. 누구 좋으라고. 하늘을 보라던 여자가 독기를 품고 대들듯이 말했다. 나보다 먼저 깨우쳤구나. 여순은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가진 여자가 있다는데 안도감을 느꼈다. 화로에서 나오는 공기라도 실컷 들이키자. 살자고 마음먹자 여순은 뜨거운 공기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런 것이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은가. 자신과는 달리 여자들의 일부는 일치감치 들떠 있었다.

그 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힘들 내자고. 다 왔어. 도달했다는 말이다. 말수였다. 찿아도 보이지 않던 말수였다. 그들은 여자들과는 달리 남자들 무리에 섞여 있었으나 여자들과 같이 걷게 되자 이렇게 떠들어 댔다. 딱히 누구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위로의 말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다잡고 있었고 정말로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기대치가 남달랐다. 그는 마치 공사판의 일본인 십장처럼 거침이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이곳이 마치 신천지라도 되는 듯이 떠들고 있어. 저 사람의 긍정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신기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정말 신기한 동물이었다. 곧 죽을 사람들도 뭐, 대수롭지 않은 말 한미디에 용기를 얻고 살아난다.

자, 다왔어. 일을 시작하자.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일이라니. 무슨 일. 너는 일거리라도 받았느냐. 우린 아무 것도 없어. 나를 부르는 사람도 없고 골라가는 사람도 없는데 넌, 용케도 자리를 잡았구나. 너에겐 이곳이 신천지나 되는 모양이지. 천국인가. 넌 교회도 나가지 않잖아. 네게 천국 따위는 없어. 하지만 말수는 이곳을 그렇게 여겼다. 선실에서도 갑판에 올라와서도 이곳에 도착해서도 그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그는 피로를 몰랐다. 빨리, 빨리. 빨리 걸으라고.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니잖아. 형장이 아니란 말이다. 그는 조선말로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반말로 사람들을 다그쳤다. 누가 시켜서 했으면 이렇까 싶을 정도로 그는 앞장서기를 좋아했다.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명령했고 사람들은 그 명령을 따랐다. 여순은 묻고 싶었다. 그래 빨리 걷는다. 걷겠다고. 그러면, 그 다음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뭐냐고. 알기나 알고 하는 소린가. 움직여, 움직이라골. 이 굼벵이들아.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가 이런 열성을 부리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타고난 성질은 꾸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빨리, 빨리 이 굼벵이 조센징들아. 그가 설치는 꼴을 보고 일본인 관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 고마웠기 때문인지 간섭하는 것이 피곤했는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수가 여순의 근처를 지나갔다. 아니 여순과 거의 나란히 걷고 있다. 옆 모습에 보이는 얼굴의 광대뼈가 붉게 타고 있었다. 짙은 눈썹의 한 쪽이 위로 올라갔다. 빨리 빨리를 외치기 전에 나오는 사전 동작이었다. 그가 여순을 노려봤다. 그렇게 느꼈다. 사람을 노려보는 기분이 드는 작고 가는 눈은 무언가를 찾아 번득이는 뱀눈을 연상시켰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혀가 침을 뱉기 위해 입술 안에서 오물 거렸다. 그게 보였냐고. 보였다. 여순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말로 말수는 입술을 오물 거렸고 그와 동시에 침을 뱉었다. 짜증나는 행동이었다. 참, 같잖은 놈이다. 저런 놈은 조선에서 있었어. 그러자 완용이 떠올랐다. 그 놈의 순사의 부하게 되어 나를 일본으로 끌고 갔어. 완용과 이 놈이 닮았거든. 설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네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속으로는 이런 마음이었으나 겉으로는 눈을 마주 보기가 무서웠다. 소름이 끼치는 눈으로 먹이를 노리는 실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한동안 침묵하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침묵보다는 차라리 욕설이 나았다. 여순은 말수에 대한 이런 이상한 감정에 사로 잡혔다. 싫지만 좋은 느낌. 참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괄괄한 목소리가 이 때다 싶게 또 뛰어 나왔다. 걸으란 말이야. 조센징들아. 수박먹고 싶지. 군인들 보이지. 막사에 가면 수박보다 더 맛있는 물있다. 물, 물이다. 물이 먹고 싶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물이다. 물. 그제서야 여순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다. 말수야. 넌 네게 잊었던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야. 그래, 얼굴은 보지 말고 목소리만 듣자. 소리만 들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 말수였다. 

빨리 움직입시다. 배도 고프고 잠도 자야지요. 안 그렇소, 형씨. 그는 여순에게서 벗어나서 남자들 틈에 어느 순간 끼어 있었다. 형씨, 힘 냅시다. 그는 옆에서 느그적 거리며 겨우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자기 일이라는 듯이 확신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었다. 대답대신 남자는 그러겠다는 의사 표시를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다 죽어가던 분위기는 말수의 이런 언행 때문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남자들도 마찬가지구나. 분위기에 넘어가고 있어. 말수는 갈래를 져서 연병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여자들과 남자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렇게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를 따라 사람들이 움직였다. 단상이 보인다. 그래서 저기서 모이면 어떤 암시를 받을 만한 말이 나오겠지. 높은 사람이 올라서서 너희들이 여기에 온 목적을 말할 거야. 과연 그런 기대는 맞아 떨어졌다. 호각 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어디서든 일본인은 호각을 불어댔다. 그러면 알아서 소리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길고 긴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호각 소리를 잠재웠다. 무리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을 태우고 온 육중한 배가 길고 느린 움직임을 보이면서 서서히 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면서 여순은 이곳이 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정박한 곳에는 인가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군용 막사였고 제복을 입고 차렷자세로 서 있는 군인들 뿐이었다. 여긴 공장이 없구나. 굴뚝의 연기도 보이지 않아. 그럼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지. 남자들은 또 무슨 일을 하고. 궁금증이 일었다. 질문은 이제 여순이 하는 일상이 됐다.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의문은 있으나 그것을 풀 대상은 없었다. 그래서 여순은 답답했다. 여순의 몸이 다시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오한이 나는지 떨리기까지 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이 뜨거운 열기에 감기라니. 참 가지가지 한다. 여순은 자신을 탓했다.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자신을 책망하고 또 자책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개미떼처럼 움직이는 군인들이 자신들을 애워쌌다. 그럴 필요가 없다. 도망칠 곳도 그러려는 의사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총을 어깨에 메고 배에서 내린 조선사람들을 감시했다. 그리고는 수를 세고 열을 맞추어 세워 놓았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연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여자와 남자는 구분됐다. 줄이 대충 세워지고 인원 파악이 끝날 무렵 멀다 싶은 곳에서 둔탁한 굉음이 울렸다.

군인들이 잽싸게 엎드렸다. 그들은 엎드린 상태로 손짓으로 너희들도 우리를 따라 이렇게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여순은 흙냄새를 맡았다. 모래알이 콧구멍을 간지렸다. 재채기가 나왔으나 여기서는 참아야 한다는 본능이 앞섰다. 그래서 겨우 참았다. 그러자 흙이 코에 걸려 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흙냄새조차 달랐다. 시큼하면서도 때로는 음식 냄새까지 풍기던 죽마을의 흙이 아니었다. 부서지고 건조한 흙은 모래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피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건 피 냄새야. 비가 왔으면 좋겠다. 쓸려 가야지. 내가 싫어하는 냄새야.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더 큰 폭발음이 들렸다. 일어서려던 일본군은 다시 엎드렸고 여순도 따라했다. 여기는 전쟁터구나. 일본이 아니고 전쟁터야. 남양군도의 어느 섬이라는 것을 여순은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여기가 어디고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어디인지는 알고 싶었다. 그런 궁금증은 말수가 해결했다. 엎드린 그는 옆 사람에게 남양군도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 죽어가던 남자는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들어본다. 남양군도라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남양군도라고 확실하게 발음했다. 그 말은 옆으로 새서 여자들 틈에 있는 여순의 귀에 까지 들어왔다. 남양군도. 여순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그 순간 들어온 감정은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였다. 그런 의문은 곧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힘이 생겼다. 다 나갔던 힘이 어디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났는지 여순은 살 수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배속되기전 조선인들은 주먹밥을 먹었다.

허기진 배는 재촉했으나 여순은 손이 떨려 입으로 그것을 가져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나 억지로 집어넣었다. 누군가 막대기로 목구멍을 쑤셔 대는 것처럼 깔깔한 이물질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밥이 아니라 구렁이를 산채로 삼키고 있었다. 살려면 무슨 짓을 못해. 구렁이든 뭐든지 먹어야지. 여순은 입을 앙 다물었다. 뱃속의 울렁임, 머릿속의 혼란 같은 것은 잊자. 잊어야지. 여순은 어느 순간 남은 밥톨 하나 없이 다 먹어치었다. 마지막에 넘어갈 대 뱀의 꼬리가 여순의 목젖을 내리쳤다. 목이매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숨이 꽉 막혔다. 물을 먹어야 한다. 물이 어딨지. 물 물. 여순은 저도 모르게 물을 찾다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눈을 떳을 때 아니 정확히는 의식이 조금 찾아왔을 때 그녀의 눈에는 고향집 토담을 넘어가는 커다란 진짜 구렁이 한 마리가 어른거렸다. 온몸을 검은 칠로 덮은 녀석은 크고 길어 담장으로 머리를 넘기고도 여전히 꼬리는 땅에 걸쳐 있었다.

녀석은 그런 자세로 한동한 움직임이 없었다. 봄볕을 즐기는 여유였다. 그러다가 무슨 위험을 느꼈는지 급하게 몸통을 끌어 올려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여순은 눈을 떴다. 구렁이는 사라졌으나 몸은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전히 무언가가 자신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담 넘어 사라진 먹구렁이가 여순의 몸을 감고 목을 죄고 있었다. 여순은 발버둥 쳤다. 손으로 놈을 떼어 내려고 몸통을 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놈은 더 세게 죄어왔고 여순은 다시 까무라쳤다. 놈이 꼬리로 여순의 손목을 세게 내려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여순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이렇게 죽는구나. 죽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래, 누구나 한 번은 죽지. 그 때가 이 때란 말이지. 여순은 죽음이 다가오자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숨이나 쉬고 죽자는 심정으로 여순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손톱을 세워 놈을 긁었다.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과연 효과가 나타났다. 놈의 몸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순간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연병장에서 맡던 바로 그 피의 냄새였다. 흘린 피는 바닥을 적시고 문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바다는 금세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하룻밤이 지났다. 그러나 밤이 지나도 낮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곳의 시계는 날마다 밤이었다. 매일매일 시커먼 구렁이는 담을 넘고 다시 대문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급하게 일을 마치고는 다시 돌담을 넘어 슬그머니 도망쳤다. 도대체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순은 그것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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