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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1:48 (금)
177. 명일(1936)-좀 먹는 책장, 인텔리의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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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명일(1936)-좀 먹는 책장, 인텔리의 가난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22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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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흥! 이놈의 자식 승어부(勝於父)는 했구나.”

요즘 안 쓰는 '승어부'를 찾아보니 아버지보다 낫다는 뜻이다. 아버지보다 나은 자식이라니. 부모의 마음은 여간 기쁘지 않을 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팔불출 소리를 듣더라도 자랑질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버지보다 나은 것이 인물이나 학식이나 됨됨이나 직업이나 뭐 이런 내놓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 뭐지? 놀라지 마시라. 도둑질이다.

그래서 인용표 안의 말을 한 범수는 떠들기보다는 두런거릴 수밖에. 얼마나 작은 소리로 두런거렸길래 옆에 있는 아내 영주조차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도둑질하는 아들이라. 내막을 들여다보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범수와 영주 사이에는 어린 아들 종석과 종태가 있다. 학교를 보내네, 마네 하는 걸로 보아 자식들은 열 살 아래로 보인다.

어린애라는 말이다. 어쩌다가 어린애가 도둑질했을까. 이 또한 놀라지 마시라. 배가 고파서 그랬다. 거짓말 아니고 사실이다. 두부장수가 잠깐 배달 간 사이 리어커에 있는 두부 한모를 꿀꺽했다. 형이 훔치고 동생과 나눠먹다 잡혔다.

그 이전에 아버지 범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집에서만 뒹굴 수 없어 낡아 빠진 단벌 양복 걸쳐 입고 십리 길을 걸어 종로통에 들어섰다. 아스팔트 열기는 뜨겁고 사방은 먼지가 날리고 주변은 시끄럽다. 딱히 어떤 약속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방안에 있기 뭐야 그냥 나왔을 뿐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울적한 기분이 좀 가시지 않겠느냐는 생각. 그 전에 불란서에서 인민전선 내각이 생겼는데 그 이후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무료 열람이 가능한 총독부 도서관에서 밀린 신문도 보고 싶다.

그러나 숨이 질리는 더위에 경성역이나 종각 등을 아무리 걸어 다녀 봐도 푼더분한 남의 생활만 눈에 띌 뿐 우울은 나아지지 않는다. 머리가 핑돌아 곧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그럴 만도 하다. 여러 끼를 굶어 뼈가 살에서 고스란히 쏟아져 나올 정도이니. 더구나 오늘은 일진도 좋지 않다. 종로 네거리에서 어물쩍거리다 교통순경한테 혼났다.

▲ 일제시대 인텔리의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은 당시 사회분위기를 보여준다.
▲ 일제시대 인텔리의 지독한 가난과 무기력은 당시 사회분위기를 보여준다.

에라 모르겠다. 가보려고 했던 금은상에 들른다. 금비녀와 금가락지를 흥정하는 척하다가 들고 튀고 싶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범수는 자책한다.

보통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십육 년을 공부했는데 금비녀 하나 숨기는 재주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교양있는 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나쁘다기보다는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한다. 밖으로 나오니 아들 종석을 닮은 새까만 거지 아이가 아침도 못 먹었다며 한 푼만 달라고 청한다. 여기 손에 사 전 있으니 한 푼만 있으면 호떡을 하나 사 먹을 수 있단다.

'네가 나보다 낫다. 난 그마저도 없어.'

그의 입에서 나온 신세한탄이다. 거지 아이보다 못한 신세가 오늘 범수의 꼬락서니다. 누군가 피다 만 담배꽁초를 버린다. 달려가서 줍고 싶다. 눈치를 보는데 지게 진 품팔이꾼이 냉큼 채간다.

화신백화점으로 들어가는 범수. 전문학교를 나와 화신에서 삼 년 째 일하고 있는 동창생 S에게 돈을 꾸어보고 싶지만 친구는 한술 더 뜬다. 삼년을 다녔지만 입에 풀칠하기보다는 빚만 지고 있다는 것.

낙담하고 있는데 누가 등을 툭 친다. 동경서 유학 생활을 같이 한 P. 그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술깨나 얻어먹는 병정 노릇을 하고 싶지 않으나 어느새 그의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한다.

그가 벗어 놓은 옷. 그 옷속에는 수 백원이 들어 있다. 백원은 크니 없어지면 금방 들통난다. 십원짜리라면. 금은상에서 느꼈던 식은땀이 범수의 등을 적신다. 그러나 그는 P가 올 때까지 옷을 뒤지지 못한다.

그리고 늦은 밤 귀가. 그리고 앞서 나온 승어부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은 도둑질에 실패했으나 아들은 성공했다. 그 아들을 아비는 자동차 정비를 하는 공장으로 데리고 간다.

지금도 있는 용산구 청파동 철물 공장 언저리가 될 터. 점심값만 주면 감지덕지하겠다면서. 종석의 동생 종태는 영주의 손에 끌려 사립학교로 향한다.

아비는 말한다. 누구의 선택이 좋은 결말이 나올지 두고 보자고. 기술로 호구지책을 면하는 것이 좋은지 배우고 익혀 나중을 도모하자는 아내가 옳은지.

: 가난이 원수일 뿐이다. 일제시대는 특히 앨리트 가난이 심각했다. 동경 유학하고 대학까지 나온 아버지와 여고까지 나온 어머니는 당시 최상위 앨리트 계층이었다.

상위 1% 지식인이 몇 끼니씩 굶고 있다. 세월을 탓하는 것이 맞다. 그가 본 일본집 들은 여유가 넘쳐난다. '유까따'를 걸친 아낙들은 한결같이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집집이 나와 서 있다.

그렇다고 세월만 탓할 수는 없다. 노동자처럼 막 품을 팔 수도 없다. 월세가 밀려 쫓겨날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알량한 지식은 남의 나라 혁명이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내는 빌려 쓰는 재봉틀 삯이 아까워 하나 장만하고 싶으나 목돈이 드는 터라 한숨만 내쉰다. 어디 꿀 대도 없다. 범수 부부는 이제 앞날을 걱정할 게 아니다. 내일 즉 명일보다는 당장 오늘이 문제다.

하지만 아내는 명일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남편도 그렇다. 죽지만 않는다면 오늘보다는 명일이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의 단편 <명일>은 이처럼 배운 자의 가난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가 가난한 것은 세상이 원인이지 주인공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물론 문간방의 새색시 남편처럼 철로 까는 '노가다' 일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려고 배운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지식에 합당한 직업이 필요하다.

'나도 그런 짓이나 해 볼까?'

답답한 남편이 말하자 아내는 '죽으면 죽었지 그 일을 하느냐? 세상에 해 먹을 게 없어서 당신이 그 짓을 하느냐'고 타박한다. 아내의 역성은 가난한 인텔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준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손 치더라도 공부한 원죄가 있다. 있는 땅 팔아서 학문을 머릿속에 쟁여 넣지만 않았어도 하는 후회가 먹구름처럼 몰려온다.

좀먹는 책장의 신세가 바로 '세상에 제일 만만한 인종인 돈 없는 인텔리'가 되겠다. 한편 채만식은 일제 말기 친일행위로 민족반역자 반열에 올랐으나 해방 후 다른 친일작가들과는 달리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의 삶을 살다 동란이 발발한 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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