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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8마일(2003)-랩으로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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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8마일(2003)-랩으로 죽이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5.18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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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어느 분야든 최고가 있다. 권투에 있어서는 슈가레이 레너드다. 숱한 이름들이 기록됐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권투 선수는 나에겐 없다. 영화 <록키>의 실베스터 스탤론이라면 모를까.

성난 두 사람이 사각의 링 위에 올라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눈싸움이 치열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같은 긴장감. 군중은 둘 중 하나가 쓰러지기를 원한다. 승자와 패자는 분명히 갈린다.

권투가 주먹을 써서 이기는 게임이라면 커티스 핸슨 감독의 <8마일>은 입으로 하는 싸움이다. 단순한 욕설이 아니다. 리듬이 있고 음악이 있다. 바로 랩이다. 주인공 비 래빗(에미넴)은 지독히도 불우하다.

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영화에서는 눈코 빼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이 차가 나는 어린 여동생이 있는데 배다른 남매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엄마( 킴 베이싱어)는 일하는 대신 빙고 게임이나 하면서 한탕을 노린다.

유일한 취미는 동거남과의 섹스. 래빗 앞에서 그 짓을 하다 들키고도 태연하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것보다 동거남이 제대로 해주지 않아 아들을 앞에 놓고 불평한다. 꼬락서니가 볼 만하다.

그렇다고 래빗이 주눅들 필요없다. 디트로이트 풍경은 다들 그만그만하기 때문이다. 래빗은 점심시간이 비록 30분밖에 안되는 열악한 곳이지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립을 꿈꾼다. 그 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위태위태 하다. 툭하면 싸움질이다. 그러나 운좋게도 살아남아 하루하루 넘어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서. 밤에는 랩을 부른다. 친구들은 모두 흑인들이다. 거의 유일한 백인인 그는 흰둥이로 놀림을 받는다. 이곳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은 흑인들 틈에 끼어 사는 소수자다. 

▲ 영화에서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죽일수록 승자가 된다. 그러나 현실의 래퍼에게도 이것이 그대로 통할까.
▲ 영화에서는 상대를 무자비하게 죽일수록 승자가 된다. 그러나 현실의 래퍼에게도 이것이 그대로 통할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주인공이니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꿋꿋하다. 여자 친구가 가버렸어도 상심하는 대신 야근을 자청하면서 자립을 원한다. 새로운 여자 친구는 자신이 보는 눈 앞에서 다른 흑인과 놀아난다.

되는 일이 하나 없다. 주인공이 이렇게 구질구질해도 되는가. 성공의 과정이 꼭 이렇게 험란해야만 하는가. 목숨 부지하기도 바쁜 세상인데 꿈이란 게 있을 성 싶지 않다. 그러나 굳이 찾아야 한다. 그래서 찾은 것이 랩이다.

밤거리에서 열리는 랩 배틀의 사회자는 래빗의 재능을 알아본다. 데모 음반을 내주겠다고 다가오는 녀석도 있다. 어느 날 래빗은 배틀의 무대에 선다. 앞서 사각의 링위에 올라선 두 선수의 살기 어린 눈싸움을 말했다. 여기서도 그런 장면이 이어진다.

글로브를 끼지 않은 것만 다를 뿐 랩 배틀에 참가한 두 선수의 눈빛이 가관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첫 대결에서 래빗은 주어진 45초 동안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처참하게 깨진다. 벙거지를 쓰고 꺼벙이처럼 눈만 껌벅이다 물러난다. 의문의 일패다.

그럼 그렇지. 첫 술에 배부르랴. 첫 끗발이 이러니 막판은 좋겠지? 하는 기대감은 갈수록 높아간다. 현실은 허망하더라도 꿈만이라도 높이자, 뭐 그런 심산 아니겠는가.

후반부는 점차 좋아진다. 엄마는 쫒겨 나지 않는다. 빙고 게임이 대박이 터졌다. 아들에게 밥을 해주고 여기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모처럼 엄마다운 말을 한다. 공장에서는 야근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질 만큼 신뢰도 쌓았다.

또다시 베틀이 시작된다. 여자친구는 감이 좋다며 그를 부추긴다. 잘할 거야. 래빗은 용기를 얻었다. 좌절하거나 망설일 시간 없다. 영화는 거의 막판에 다가왔다. 결말이 허망하다면 이 영화는 끝장이다. 감독은 그걸 알고 관객도 모를 리 없다. 상대를 꺾는다. 거칠게 나오는 녀석들을 보기 좋게 먹였다.

다음 상대는 챔피언. 파파독( 안소니 마키)을 꺾으면 디트로이트 밤거리의 진정한 힙합의 왕자가 새롭게 탄생한다. 흰둥이라고 놀리며 인종차별을 거침없이 하는 녀석들에게  실제로 그는 흰 엉덩이를 까면서 여기까지 왔다.

물러설 수 없다.  관중은 래빗을 목놓아 부른다. 상대를 처참하게 박살냈다. 시간이 끝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동안 쌓인 것을 다 풀어냈다. 욕설에 욕설이 더해진다. 그것도 모자라 사상최대의 인신공격, 인종차별이 난무한다. 상대는 기가 질렸다. 살면서 이런 욕은, 이런 비인간적인 랩을 들어본 적이 없다. 래빗은 이겼다. 관중의 환호는 하늘을 찌른다.

승자가 된 래빗. 이것으로 그는 데모 음반도 녹음하고 새로운 여자 친구와도 잘 될 것을 기대한다. 사회자는 둘이 뭐 좀 같이하자고 꼬드긴다. 친구들은 돈을 만지게 됐으니 예쁜 여자와 놓고 신나게 즐기자고 한다. 래빗의 대답은. 무대 위의 살기 뛴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 실망인가. 그렇다고 해도 별수 없다.

그는 랩 배틀에서 승리했지만 공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것이 승자의 여유인가. 실베스터 스탤론이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질주하고 나서 두 팔을 들고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런 장면이다.

슈거레이 레러드가 파고드는 인파이터를 워밍업으로 피하면서 번개같은 양훅을 날리는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는 돌아서서 왼손을 등뒤로 올린다. 그가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든, 브이자를 그렸든 상관없다. 이것은 그만의 루틴이다.

국가: 미국, 독일

감독: 커티스 핸슨

출연: 에미넴, 킴 베이싱어

평점:

: 잔소리 같은 랩이 귓가에 여전하다. 랩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절로 어깨를 들썩거리게 만든다. 빠르고 흥겹지만 내용은 역겹다. 지저분하고 저열하다. 더 그래야 한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것은 장난이 아니라 전투이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이기는데 점잖이나 겸손 따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더 잔인하게 더 악랄하게 짓뭉기고 디스해야 한다. 

상대 엄마를 창녀로 공격하고 약점을 잡아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져야 한다. 네 엄마가 낙태안 안한 걸 후회하게 해줄게. 돈 벌러 온 흰둥이. 이 순간만큼은 백인인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흑인이 점령한 랩의 세계에서 랩만 잘하면 피부색은 노. 이것은 위로일까. 또다른 차별일까.

한편 지난주 참피언은 생애 가장 최악의 치욕을 듣고도 왜 얌전히 물러났을까. 래빗에게 주눅이 들어서는 아니다. 참피언의 현란한 혀는 왜 움직이지 않고 입안에서 조차 맴돌지 않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첫 대결에서 래빗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대꾸도 없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래빗에서 패한 그가 진정한 승자는 아닐까. 다음 배틀이 열린다면 래빗을 제치고 그가 다시 승자가 될 수 있을까. 물러날 때를 알고 조용히 마이크를 넘긴 패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에미넴은 영화처럼 실제로도 디트로이트 슬럼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일어나 흑인 전유물이었던 힙합에서 백인으로는 가장 성공한 랩 가수로 우뚝 섰다. 2000년대에는 음반을 가장 많이 판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렸는데 2위는 비틀즈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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