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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6-24 17:23 (월)
환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여순은 수술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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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여순은 수술을 결정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04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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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실로 나온 여순은 글렀다, 다시 자기는 글렀어,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밤이 깊어갈수록 또렷해지는 정신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좋아. 싸우기보다는 친해져야지. 그는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읽을만한 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산 그림 잡지에 눈을 주었다.

그래, 점례나 추억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그가 거실등을 켜고 자리에 앉으며 창밖을 보자 여명이 시작되려는 듯 검붉은 분위기가 방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잘 생각했어, 일본에 가면 점례를 볼 수 있을거야. 요즘들어 자꾸 점례가 그리워진다.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잡지를 뒤적이던 그는 문득 작은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책장을 덮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프랑스 유곽을 드나드는 화가들이 매독 때문에 일찍 죽거나 고생한다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는 그 사진은 작은 군용 막사를 연상시켰다. 군용 막사. 여순은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작은 거미를 내려다보듯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황급히 팔둑을 내리쳤다. 그러나 스멀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환영처럼 팔뚝에 이어 다리로 타고 내려갔다. 불면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새삼스럽게 여순은 그곳의 악몽과 불면을 연결시켰다.

그런가. 다 정리됐다고 생각했던 것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로 엉켜 있었다. 대세계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아세아여관 앞에 모여있던 일본 군인들, 그들은 모여서 담배를 피고 껌을 씹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곧장 문을 열고 미리 정해놓은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으로 안에서는 다른 병사들 서넛이 역시 주변을 둘러보면서 급히 여관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서로 어깨를 부딛치기도 했다. 상관인듯한 자는 군복위에 걸친 하오리를 휘날리며 노동자들이나 신는 지까다비 18문 작업화를 자랑스럽게 앞으로 뻗으면서 시내로 사라졌다.

언뜻 보면 그는 군인인지조차 알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쪽발이 포병대원들이야. 말수는 한 마디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옆에 있는 말수가 한 마디 했다. 여순은 대꾸하지 않았다. 말수는 군인들의 모습만 보고도 그들이 육군인지 포병인지 해군인지를 알아냈다. 헌병대나 경찰을 구분하는 것도 그였다. 그는 왜 군인들을 구별할까. 여순은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전선은 전투가 직접 붙는 곳만이 아니었다. 상하이 곳곳에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잠시 전열을 정비한 후 후난성을 거쳐 창사까지 진격했다. 중국 국민당의 수도였던 난징은 벌써 그들이 점령한지 오래였다.수많은 중국 여자들이 여관에 머물렀다. 일본군이 있는 곳은 어디나 여자들이 군인들 숫자만큼 몰려 있었다. 여순은 다리로 내려갔던 거미들이 다시 다리를 타고 몸통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팔뚝 대신 어디를 쳐야 할지 몰라 들었던 손을 한동에 허공에 대고 있었다. 쳐야 할 곳은 몸 전체였다. 그냥 내릴 수 없어 여순은 자신의 뺨을 한 대 세게 내리쳤다. 빗맞았는지 얼굴이 아닌 코끝으로 손가락 두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뺨 하나도 제대로 치지 못해. 속으로 자신을 호통한 여순은 자로 재기라도 하듯이 뺨의 위치를 확인한 후 다시 한번 내리쳤다. 제대로 맞았는지 이번에는 쇠막대로 칠 때 나는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여순은 쇼파에 몸을 엎드렸다. 눈물이 나왔다. 그 일로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흘리고 말았다. 상하이에는 위안부들이 넘쳐났다. 바로 얼마전에도 자신의 병원 대각선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수상한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삼 층 짜리 건물로 도쿄여관이라는 간판이 하루 종일 번쩍였다.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그 건물에도 군인들이 들락거렸다. 외지에서 온 숙박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길게 4열 종대로 행군하고서는 여관 앞에서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그들이 행군해 올 때면 거리는 순식간에 인적이 드문 죽은 도시로 변했다. 사람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강제로 그러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그렇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군인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족히 30명은 넘어 보이는 인원은 순식간에 삼층 여관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칠흑 같은 밤도 사라지고 있다. 여명은 더 바짝 다가왔다. 여순은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다시 들어왔다. 습관처럼 심호흡을 했다. 바람을 들이마시자 배가 불러왔다. 군가 소리가 들렸다. 새벽 바람을 가르고 그것은 상하이 시내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새벽구름 어쩌고, 영광에 찬 우리 관동군 어쩌고 ,호국의 영령 어쩌고 하는 고함이 울렸다. 탱크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들려오는 굉음이었다. 군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기계가 내는 소리였다.

산 넘고 물 넘고 어쩌고 저쩌고 대동아를 지키는 황군의 화려함 어쩌고 저쩌고 하늘의 독수리 어쩌고 저쩌고 태평양의 아침해 어쩌고 저쩌고 붉은 마음 봄바람 어쩌고 저쩌고 사쿠라 어쩌고 저쩌고. 그들은 서너 곡의 군가를 마치고 도쿄 여관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전선에서 막 돌아온 듯 앞세운 일장기는 옆구리가 터진 채로 아래로 쳐져있었다. 바람이 잦아 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여관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군가 두 세 곡을 더 불러 제켰다. 깃발을 바꿔 달 시간은 없었다.

응, 관동군 군가야, 그리고 대항공의 노래, 다음은 일본사관학교 교가 인가? 언제 나왔는지 말수가 알은체를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들어가서 조금 더 자요. 난 조금 더 있다가. 알았어.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인 거야? 오늘 환자 봐야지. 의사가 환자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 체면이 말이 아닌거 알지? 그 말을 하고 말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여순은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사지에서 돌아와 곤죽이 됐을 그들의 입에서 어디서 그런 큰 함성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개 짖는 소리조차 삼켜버릴 정도로 힘이 셌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순서를 정하는 지 먼저 들어가는 장병들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여관 계단에 일렬로 정렬해서 앉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앉아서 문쪽을 흘끔거렸다. 어떤 병사는 시계를 보면서 앞서 들어간 동료들이 얼마나 지체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여순은 그 모습을 창가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지켜 보았다. 밤새 전선에 있다 후방으로 온 그들은 잠을 자기 위해 여관에 온 것이 아니라 위안을 받으러 왔다. 잠이야 이삼일 못자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위안이 시급한가. 이층, 삼층의 작은 방들이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를 반복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불 빛의 움직임을 여순은 놓치지 않았다. 이제 날은 밝았다. 신호등처럼 보이던 불빛은 밖으로 새 나오지 않았다.

여순은 한동안 그렇게 계속 그곳을 지켜보았다. 건설 일꾼들이 연장을 메고 그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도쿄여관 뒤쪽에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건물 앞에서 노동자들은 군인들처럼 총대신 삽이며 괭이며 연장을 내려 놓았다. 아마도 그곳도 여관이겠지. 이번에는 오사카 여관일까 아니면 큐수 여관일까, 삿포로는? 이름 명을 여순은 생각나는데도 지어 보았다. 시간 감각이 없었다. 모든 군인들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여순은 몸을 돌려 다시 거실 쇼파에 몸을 기댔다.

불면의 밤은 이것 때문인가. 여순은 그러나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면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수면제 신세를 져야 한다. 여순은 가운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차라리 차트나 보면서 오늘 예약된 환자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알고도 여순은 못 들은 척 계단의 난간을 잡았다. 사이렌 소리가 길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선에서 듣던 바로 그 사이렌 소리가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국가를 위한 경례의 시간이기도 했으며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 여섯 시. 기상과 동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거리 곳곳에서, 집안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향해 하던 일을 멈추고 황국의 신민들은 손을 가슴에 대고 있어야 했다. 병원 출입구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보고 여순도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덴노를 향해 충성을 다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눈을 고정했다. 그래, 내가 살 길은 친일이야.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어. 아니야, 깨부수어야 해. 모르겠어. 둘 다 아니야. 여순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일부러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그러나 길은 한길로 통해 있었다. 일본으로 가자. 가자. 가서 도쿄에 부부병원을 개업하자. 여순은 이제 서두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배고픈 사냥개에게 물어 뜯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재울수 없었다. 점례가 파리행을 재촉했던 것처럼. 

요즘 들어 부쩍 들락거리는 일본 깡패들도 싫다. 모른 척 하고 몇 번 돈을 집어줬지만 이제는 그자들 얼굴만 보면 토가 나온다. 진절머리가 나는 듯 여순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해결할게. 당신은 뒤로 빠져. 그러나 말수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도 여러 달 동안 깡패들은 월세금 수금하듯이 한 달에 한 두번은 꼭 병원에 들렀다. 의사선생, 이달은 환자들이 많았다면서요? 늦게까지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제시간에 다 보지 못한 환자들이 있었나 봐요.

말수는 알아서 준비해 둔 봉투를 내밀었다. 해결한다는 것이 이같은 식이었다. 같이 먹고 삽시다. 우리 일본인끼리. 그들은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떠날 때는 슬쩍 숨겨둔 권총을 내보이기도 했다. 정말 같잖은 짓이었으나 사건에 엮이기 싫어 부부는 그들에게 상납금을 꼬박꼬박 내오고 있었다. 오늘도 그들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말수는 급한 외출이 있다면서 그 놈들 오면 내 서랍에 있는 흰 봉투를 줘서 보내, 하고는 아직 출근하지 않는 페이닥터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아직도 김군은 오지 않았나? 하면서 연신 시계를 보았다.

오겠지요. 당신 오늘 수술 없다고 낮술 먹으면 안 돼요. 오후에는 환자들 몰리니 늦지 말고 일찍 들어 오고요. 점심만 먹으면 바로 달려올게. 내가 언제 내 환자 당신에게 맡기는 것 봤어? 말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약속 시간이 늦었다는 듯이 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깡패 담당은 그래서 여순 차지였다.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예의 그 깡패들이 나타났다. 여순은 말수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데라우찌 영사관님이 어제 다녀가셨어요. 내게 어떤 일이든 부탁하지 않는다고 언짢아하시더군요. 일주일 후에 영사관으로 초대하셨어요.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여기 주둔군 사령관님도 왔다 갔어요. 팔에 조금 부상을 입었는데 나라를 위해 몸 바치다 그랬으니 제가 정성껏 치료했고요. 완치된 후 사령관님은 그라모리 대위를 보내 사례를 하셨어요. 아, 여기 그 분이 주신 조선삼이 있네요.

여순이 산삼 그림이 그려진 바구니 쪽으로 눈을 돌리자 깡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받았던 봉투를 품에서 꺼내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두목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넣어 두세요. 여순은 점잖게 나왔다. 치안을 담당하느라 고생이 많은신데요. 덕분에 우리 병원도 안전하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깡패가 두꺼운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의리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된다. 주는 것도 정중하고 돌려받은 것도 그렇게 해야 후환이 없다.

여순은 그런 식으로 깡패를 따돌렸다. 말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점심 까지는 병원에 온다고 철썩 같이 말해 놓고는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숨찬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미안한 기색을 보이기 싫어서인지 왔다는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서두르는 기색으로 대기하고 있던 환자를 큰 소리로 호명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늦은 핑계는 뒤로 미뤄졌다. 혹 물어보면 대충 꾸며대려고 했던 말은 써먹을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총상을 입은 민간인이 급하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환자는 헌병의 불신검문에 도주하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피가 낭자한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여순은 본능적으로 말수를 찾았다. 여보, 환자요. 환자. 다리에 피를 흘려요. 당연히 남편이 방문을 박차고 달려 올 줄 알았는데 옆에는 겁에 질려 어쩔줄 몰라하는 박군이 붕대 옆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여순의 지시만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 박선생이었군요. 일단 환자를 침대에 올려놓고요. 상처를 보는 것이 급선무요.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왔는지를 살펴야지요.

여순은 말수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해야하기 때문에 말수를 원망하면서 상처를 열었다. 하필 이럴때 약속을 잡고 늦을 게 뭐람. 여순은 속으로 이런 불평을 늘어 놓았다. 총알은 뼈를 관통하지 않고 근육에 박혀 있었다. 다행이었다. 먼 거리서 권총에 맞은 듯했다. 아니면 어딘가 맞고 튕겨져 나와 위력이 떨어진 상태로 종아리쪽에 박혔는지도 몰랐다. 총알을. 그렇지요. 먼저 그것부터 제거해야 겠어요. 마취를 하고 수술칼 준비하세요. 박군은 하라도 대로 했다. 더 시킬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듯이  옷에 피가 묻거나 몸에 닿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하지요? 여순은 잠시 멍해졌다. 그런 다음 무엇을 해야 하지. 맞아 칼을 들고 있는 손을 환자의 상처 부위로 가져가야지. 정신을 차린 여순이 환자의 다리를 고정하고 있는 박군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때 말수가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차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는 화가 날 때 짓는 그런 다급한 모양새였다. 자기 환자를 다 보고 나서 뒤늦게 왔어도 여순은 남편이 듬직했다. 

칼 이리 줘. 그리고 박 선생, 자네는 그래, 다리를 그렇지, 그렇게 붙잡고 있고. 여순은 미우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그라면 이 정도 환자는 쉽게 진정시킬 수 있다. 박힌 총알을 빼내고 소독을 하고 적당히 꿰매고 안정을 취하면 된다. 머릿속은 이렇게 정리가 되는데 막상 환자가 들이 닥치니 그 쉬운 차례가 엉망이 됐다. 여순은 아직 자신이 외과의로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공이 아니니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여기 상하이에서 의사는 과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뛰어야 했다. 차라리 말수가 조금 늦게 왔더라면, 그래서 수술까지 마친 뒤에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솜씨로 완치되는 환자를 보면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지. 이런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면서 여순은 환자가 앞으로 뛰는데 지장은 있겠지만 잘하면 걷는 것은 표나지 않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말수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벌써 수술을 끝냈다. 벌써라고 했지만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대기실에 있던 일본 형사가 문을 열고 나오는 말수에게 다가왔다.

죽지는 않겠지요? 짐작대로 입니다. 총알도 깊지 않아 천만 다행입니다. 다행이라고? 아닌가요? 미안합니다. 전 환자 입장에서 말한 것뿐이고요. 어쨌든 저자를 잘 감시해 주시오. 형사가 말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당장 도망칠 수는 없겠지요? 그럼요. 지금은 가라고 해도 꼼짝달싹 못합니다. 일단 심문을 해야 알겠지만 수상한 자요. 조선 임시정부 안가로 추정되는 곳을 급습했는데 저자가 무작정 달려가기 시작했소. 멈추라고 그렇게 외쳤는데도 달리니 부득이 총을 쐈어요. 어찌나 빠른지 세번 째 발사에서 맞추지 못했더라면 놓치고 말았을 겁니다. 보통내기는 아니니 선생이 잘 감시하시오.

의사가 용의자를 감시하란 말이오? 내 말은 무슨 의심갈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빠지지 말고 알려달라는 의미요. 알겠어요? 형사가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뒤졌지만 수상한 물건은 없었소? 우리가 일차 조사를 했을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혹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깨어나면 바로 문초할 대상입니다. 마취는 언제 끝나요?

말수는 시계를 보았다. 다행히 전신마취는 피했고요. 기분이 상한 말수는 일부러 다행이라는 말을 썼다. 형사는 조용히 있었다. 오후 세 시가 넘었으니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급한 건가요? 적어도 세시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해요. 그때가 되면 어렴풋이 눈을 뜰 겁니다. 지금은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니 원하는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간혹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사람을 몰라볼 수 있어요. 출혈이 너무 심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그건 그렇고. 형사는 환자의 건강 상태는 안중에 없는 듯 그럼 여섯 시에 다시 오겠오. 그때라도 무슨 정보 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오. 형사가 가볍게 인사 하는 척 흉내 내고 물러가자 말수가 큰 일을 치렀다는 듯이 여순을 보고 한마디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일이 터질 뻔했네. 마침 잘 왔어. 과다출혈은 쇼크로 이어지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환자가 위험에 빠진다는 말이야.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려고요? 큰일을 해냈으니 말수가 좀 쉬어도 좋겠다는 표정을 짓자 여순이 이렇게 대꾸했다. 점심때까지는 오신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일부러 그런 것 아니야. 박군하고 손발이 척척 맞더구만. 나 없이도 병원이 잘 돌아가니 배가 아팠어. 더구나 박군도 나 없을 때를 대비해야지. 언제까지나 보조 역할만 할 수는 없잖아. 조금만 더 늦게 올 걸 그랬어. 아까 보니까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 것 같더구먼. 일부러 수술방에 늦게 들어왔다고.

무슨 말이에요? 박군이 다리를 들고 있을 때 당신은 아주 친절하게도 설명을 잘해 주고 있었어. 떨지도 않고 지시도 제때 제때 잘 내리고. 보고 있었던 거예요? 환자를 생각했다면 지체해서는 안됐지만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잠깐 서 있었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서로 잘도 어울리더군. 그만큼 정신이 없었나? 당신도 참.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늦게 온 것에 대한 미안함 대신 역공을 펼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내가 왜? 말수가 조금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런 느낌이 들어요. 죽이 잘 맞는다거나 어울린다는 말은 듣기 거북하네요.

그만 합시다. 사실은 늦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오. 이걸 하나 가져왔어. 선물인가요? 그래 맞았어. 당신에게 주는 거야. 말수가 엘피판을 여순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조선에서 지금 굉장한 인기야. 당신도 귀동냥은 했겠지만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어. 아주 어렵게 샀다고. 여순이 받아들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어쨌든이라. 꼭 그말을 앞에 넣어야 해. 정말 고마워요. 여순이 눈꼬리를 올리면서 이번에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 신세야. 당신이란 사람은 좀처럼 미워하기 힘들어. 좀처럼은 또 뭔가요? 내 참. 손 좀 잘 닦아요. 피가 있어요. 가운에도 튀고. 당신도 그래. 한번 쳐다보라고. 빨래할 때가 됐으니 오후 진료 끝나고 한꺼번에 하지요. 그리고. 아냐, 당신은 좀 이층에서 올라가 있어. 내가 박군과 얘기 좀 할게 있거든. 그럼 이건 이따 저녁에 듣기로 해요. 당신 모처럼 실력 발휘했어요. 가끔 이렇게 몸 좀 풀어야지. 그래야 녹슬지 않아. 말수가 팔을 돌리면서 몸을 비틀었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여순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표지에 적인 가사를 속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갈 길은 너는 지켜라. 마지막 구절을 가만히 따라 불렀다. 말수는 부상당한 청년이 형사가 말한 불순한 용의자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상당한 근육질로 몸이 다져졌고 얼핏 본 상체에도 총알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낯이 익었다는 육감 같은 것도 따라왔다. 어쩌면 시장통에서 우연히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조선인 얼굴이 그 얼굴이 대개 그 얼굴이 아닌가. 그래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런 기분 왜일까? 얼굴은 그렇다 쳐도 몸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특수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 같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수술할 때는 마취를 한다고 해도 누구나 비명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다. 생살을 찢고 꿰매는 과정은 극도의 공포를 가져온다. 더구나 이송해 오는 과정에서 출혈이 심해 많은 피가 빠져나갔다.

숨을 헐떡이고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청년은 아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강인한 훈련이 없다면 버틸 수 없는 용기였다. 누구지? 독립군 끄나풀인가. 아니면 잡상인을 괴롭히는 일본 날건달인가. 조선 깡패는 아니다. 사람은 성년이 되면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고 얼굴에 씌여 있다. 긴 머리가 이마를 덮고 눈썹을 가렸지만 뒤로 넘겨 보았을 때 넓은 이마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의지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이 정도 피를 흘리고도 살아남은 것은 엄청난 체력 때문이다. 말수는 자신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안다. 육체적 고통을 견뎌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금방 포기해 버린다. 피를 보고 겁을 먹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그것이 치료를 어렵게 하고 생명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 반대다. 그러나 형사가 말한 단서라고 삼을 만한 것은 이런 것 말고는 딱히 없다.

여순은 엘피판을 레코드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고 샤워를 했다. 비누 거품 속으로 피비린내가 씻겨 나갔다. 그도 말수와 비슷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디서 본듯한 기시감이 있었고 그것은 육감 이상의 것이었다. 수술이 급해 서두르다가 환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언뜻 본 그 눈동자와 이마와 강단 있어 보이는 광대뼈 등이 적어도 몇 번은 본 사람 같았다.

누구지, 나를 이토록 궁금하게 하는 사람은? 혹시? 그인가? 설마. 아, 맞다. 휴의가 아닐까. 맞아, 휴의 오빠. 정말 그가 여기에 왔을까. 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휴의 일까. 그녀는 확인하기 위해 바로 내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말수가 박 선생과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한 것을 상기했다. 방해가 될지 모른다. 남자들끼리 이야기일 수도 있고 환자 처리에 대한 지시일 수도 있다.

당장은 끼어들 필요가 없다. 아래층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 내려가도 늦지 않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가벼운 화장을 했다. 피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남아 파리처럼 간지럽혔지만 어디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지 않던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빨리 지우고 싶었다. 그녀는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렸다. 샤워한 몸이 생기를 돌게 했다. 박군과 수술을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뭐, 마무리는 짓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여순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다정하게 보였나. 그 상황에서 그렇게 본 것은 말수의 농담일 것이다. 괜히 늦게 온것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아니면 그냥 해본 소리거나. 그래도 여순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처녀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남자 얘기만 나오면 가슴을 벌렁거렸던 그 시절로 여순은 잠시 돌아갔다. 완용과 혼사가 오갈 때 여순은 지금처럼 가슴이 떨렸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러다가 그것과는 다른 호흡이 갑자기 심하게 뛸 때는 휴의가 자기 눈앞에 와 있었다. 오빠는 점례와 사이가 좋았으나 자신을 보는 눈초리도 나쁘지 않았다. 뭐가 생기면 점례와 똑같이 나누어 줬고 해안가 놀이에서도 가시 때문에 조심스럽게 딴 해당화 꽃잎을 점례에게만 주지 않았다. 그가 약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여순아, 맡아봐, 향기가 죽여줘, 하면서 건넨 꽃이 아직도 자기 손에 있는 듯했다.

찔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가볍게 잡고 있을 때 손에서 해당화 향기는 줄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 입술 부근에 와 닿았었다. 그래 휴의다. 틀림없다. 오빠, 죽지 않고 살았군요. 여순이 자신이 휴의를 살렸다는 생각에 내가 오빠의 생명의 은인이다, 라고 뽐내고 싶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도 잠시. 그가 독립군 대장으로 조선땅에서 폭파를 일으켰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몸을 바싹 움츠렸다. 형사가 눈치를 챈 것인가. 몸에서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요주의 인물이라 사진을 대보면 영사관에서는 그를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 대조는 시간이 걸린다.

형사도 그의 사진을 항상 갖고 있지 않다. 그랬더라면 현장에서 병원으로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그의 신분은 모른다. 여섯 시에 형사가 온다고. 그러면 사진과 비교해 볼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간 형사가 영사관에 불순한 자가 총상을 입고 부부병원에 입원 중이다, 라고 보고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영사관에서 이런 자인지 꼭 확인하라면서 사진을 보냈을 수도 있다.

여순은 마음이 급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고 뭐고 일단 수술실로 가서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똑바로 보고 자세히 보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몇 년 만에 만났어도 알 수 있다. 그의 귀에 대고 휴의 오빠? 라고 불러보자. 그가 반응할 것이다. 틀림없다. 여순은 가벼운 실내복 위에 흰옷을 걸치고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말수의 방문이 열려 있고 등을 보이고 있는 박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꾸지람을 하는 것인지 총상 환자는 제일 먼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순과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말수는 모른 체하고 자기 일을 했다. 여순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마취가 풀리면서 환자가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소리는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자 이마 가운데로 긴 줄 하나가 생겨났다. 여순이 붕대로 싸맨 다리를 슬쩍 보고 나서 환자 얼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흔들었다. 가볍게. 환자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휴의 오빠, 오빠 맞지? 사내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난 야마모토요. 쉿, 조용히 해요. 나 여순이에요. 여순. 아시겠어요? 야마모토는 놀랍다는 듯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니 여순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환자에게 안 좋아요. 대신 내 말을 들어요. 난 이곳 병원의 의사예요. 수술한 사람은 남편이고요. 형사가 왔어요. 아직은 오빠의 신분을 몰라요. 이따 다시 온다고 했어요. 이대로 가면 분명히 체포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건 안돼. 아직 할 일이 있어. 선생님도 만나지 못했고. 겨우 어제 상하이에 왔단 말이오. 접선에 실패했어. 아마도 밀정이 있는 듯해. 임정 내 끄나풀이 일본 영사관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런 말은 나중에 해도 충분해요. 일단은 오빠 얼굴을 감춰야 해요.

여순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얼굴을 좀 꿰매야겠어요. 상처를 내고. 그러면 부어올라 형사가 사진을 갖고 와서 대조를 해도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겁니다. 일단 이마와 눈썹 그리고 턱 부분을 수술할게요. 여순이. 왜 오빠. 남편도 알고 있어? 아직 몰라요. 하지만 말해야지요. 어떤 돌발 변수가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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