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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3-09-30 16:47 (토)
두어 명이 선생의 뒤를 따랐으나 경호는 매우 허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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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명이 선생의 뒤를 따랐으나 경호는 매우 허술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30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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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점례는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비밀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유마의 마음을 사기 위한 의무감 같은 것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 단계 비밀의 문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굴속은 껌껌한 어둠이다. 빛이 있는 곳, 희미한 형체라고 보이는 곳까지는 도달해야한다. 당신 생각은 어때? 같은 질문이 오면 읽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언어로 답하자. 그러게요. 인간이란 존재의 심원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사는 것은 중요한데 정말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삶인지 혼란스러워요. 알수록 많이 배울수록 무언가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자신에게 오는 이익과 손해를 확실히 구분하고 이익에 과감하게 배팅하고 있어요.

그 점은 배울만 하고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가정을 하는 거 였어요. 전쟁없이 평화로울 때 다시 말해 조선이 스스로 통치하고 있을 때 파일 속의 인물이 과연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물론 가정이지만요. 그런 점에서 고민할 거리가 없는 당신이 부럽기는 해요. 점령당하지 않은 국민은 점령지 시민의 마음을 정확히 알 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지? 나 모르는 그 무엇이 있는 가 하고. 

이름과 성이 네 글자인 그분의 이력은 앞서 소개한 분과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그래서 얼굴과 이름을 지우고 보면 동일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살아야 바른 인생이다. 본받아야 할 사람의 표본이 이런 것이구나.  점례는 자신의 생각을 일단 이런 식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유마 호사카가 읽은 소감을 묻는다면 두루뭉술하게 처음에는 글렀으나 나중에는 방향을 바로 잡았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방향을 바로 잡았어. 이런 자에게 처얼썩 따귀 한 대 갈길 수 있을까. 처얼썩 몽둥일 찜질을 내리고 척 죽창을 높이들고 쏴아아~. 아, 이대목에서 점례는 유마의 서랍을 정리하다 본 38구경 권총을 떠올렸다. 휴의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그가 목숨을 던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가. 알듯 모를듯한 기묘한 감정이 솟아났다. 모든 걸 걸고 독립선언서를 썼던 자가 일본에 붙어 도리어 역적이 됐다. 만번 천번 죽어도 지은 죄는 천년 만년 남을 것인가. 만주에서 대학 교수가 되어 독립군에게 투항을 권유하고 흥아보국단이니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참전을 독려했다. 점례는 허리를 뒤로 젖히고 두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폈다. 

숙제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편하게 휴의의 목록을 다시 한번 들춰 봤다. 그러나 상당수 분량이 지워져 있거나 검은 먹으로 칠해 있어 어떤 내용이 들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알아 볼 수 있는 한 두 글자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것은 지운자 외에는 다른 누군가가 봐서는 안된다는 경고였다. 점례는 지워진 부분을 상상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제의 군인으로 사회에 발을 내 딛고 그곳에서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간도특설대에 특차로 뽑혔고 독립군 토벌 작전에 나섰다. 혁혁한 공을 세워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 초급장교의 꽃인 대위에 올랐다. 군인의 길을 걸은지 불과 3년 6개월만이었다.

그는 나머지 독립군 잔당을 뿌리뽑기 위해 경찰과 협력해 조선 팔도를 위아래로 훑고 다녔다. 종착지는 만주였다. 부산에 있다가 어느 날은 함경도에 있고 그다음날은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을때 그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몸은 고되도 하는 일이 국가를 위한 것이었기에 자부심이 있었다. 사라진 조선 대신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은 기분 좋았다. 신식 총도 받고 몸에 어울리는 군복을 입을 때 그는 보령 죽마을 출신인것이 자랑스러웠다. 더구나 친구 완용은 경찰로 입신출세했다. 선의의 경쟁을 하자. 그런 마음으로 그는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잡은 독립군을 고문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독종을 만들었을까.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조직의 수장에 대해 침묵했으며 하는 피묻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로지 조선독립을 위해서였다.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고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조선인이니까. 그 한마디로 족했다. 죽음 직전에 꿈틀거리는 육체에서 내뱉는 한 마디는 휴의의 마음을 흔들었다. 조선인은 그뿐 아니라 나도 조선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거기에 있지 않고 거기에 있는 자들을 거기에서 빼내 오는 일이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 여러 달이 되풀이됐다. 눈앞에 벌건 인두를 들이대는데도 조선독립을 외칠때는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육체가 불쌍했다.

한 마디만 해다오. 나와 조선 독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러면 바로 풀어 주겠다. 옷 입혀 주고 차비 줘서 돌려 보낼 테니 제발 그렇게 말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그러지 않고 침을 그러모아 그렇게 사정하는 자신의 얼굴에 뱉었다. 일본의 개가 되느니 조선의 천한 백성으로 남겠다. 휴의는 침을 닦았다. 어떤 분노도 일지 않았다. 네 가족이 기다린다. 부모 형제가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애가 타겠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말하기 싫으면 사인만 해다오. 내가 다 만들어 왔다. 성명, 이름, 출신지, 생년월일 그 다음에 내용: 위 사람은 조선의 독립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확인하기에 여기에 서명합니다. 김말똥. 여기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그리던지 점을 찍던지 아무거나 표식을 남겨 주시오.

그러면 바로 당신을 풀어 주겠소. 휴의가 말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더 큰 불꽃이 튀었다. 왜놈 아래서 배부르게 먹는 돼지가 되느니 조선에서 배고픈 넝마주의를 택하겠다. 다시 침이 날라왔다. 이번에는 모을 침이 없었다. 핏덩이가 휴의의 눈에 박혔다. 쓰라렸다. 에이, 씨발. 그는 이런 소리를 부지불식간에 내뱉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에 든 인두를 살에 가져가지 않았다. 지질 살이 없었다. 살점은 다 타고 없었다. 그래서 고기타는 냄새는나지 않았다. 그날 밤 휴의는 앓았다. 속에서 열이 났다. 조선인이 뭐 별건가.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마당에 내선일체면 그것으로 족하지 왜나 조선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아니야, 조선 사람은 조선땅에서 살고 일본 사람은 일본 땅에서 살아야지. 왜 일본 사람이 조선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강제로 쳐들어와서는 봐, 높은 자리는 죄다 왜놈들이 차지하고 있잖아.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도 일본놈이다. 아니야, 조선놈이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왜놈은 간혹 월급이라도 주지. 조선 관리는 그런 게있었나. 제놈들 뱃속을 채우려고 곯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탈해 갔잖아. 그래도 그렇지. 뺏기더라도 조선놈에게 뺏겨야 기분이 덜 나빠. 휴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 마녀가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당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능지처참 당하는 죄인처럼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이 따로 놀지 모른다. 고문은 내 체질이 아냐. 더는 인두질을 못하겠어. 고기타는 냄새도 구역질이 나고. 그만두자. 이 짓 말고 다른 짓을 해도 목에 거미줄이 칠까. 군인이 된 뒤로 처음으로 휴의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자기 민족 괴롭히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하지. 그날 밤 내내 휴의는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깬 그는 물 물 물~.을 가늘게 외치는 늘어진 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도 되지만 그날 따라 휴의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네려다 컵을 잡을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입에 갖다 댔다. 그가 침대신 고맙소, 하고 말했다. 그 말이 여간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이었다. 가식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고맙소, 라는 그 말은 생명의 은인에게나 하는 말과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늘의 별은 그날따라 크고 낮게 깔려 있었다. 휴의는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감긴 수갑을 풀었다. 가시오. 가고 싶은 대로 가시오. 나와 함께 갑시다. 당신은 조선사람 아니오? 거기까지 휴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따라 나서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이 없었다.

곧 동이 터 올 것이고 병사들이 잠을 깰 것이다. 그는 권총 두 자루를 챙겼다. 실탄도 넣고 관물대에 숨겨 놓은 돈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같이 갑시다. 이것이 휴의가 일제 군인에서 독립투사가 된 경위였다.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 인간이 변신하는데 이처럼 단순한 것은 없다.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 말고 다른 어떤 것을 찾을 수는 없다.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도 휴의가 왜 일제 장교에서 독립투사가 됐는지 파악하는 단초는 됐다. 인간의 심리는 묘한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서 큰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점례는 휴의의 복잡한 심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어릴 때부터 봐왔던, 그에게는 어떤 신의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했다. 배가 고파도 먼저 동생을 챙겼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꺼리는 일은 도맡았다. 양보할 줄 알고 배려하는 힘이 남달랐다. 그런 바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 오빠가 하는 일은 언제나 칭찬을 받았고 믿음직스러웠지. 그렇다고 내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 전혀. 알다시피 내 코가 석자야. 나는 오빠만큼 조선인에 대한 액착이 없어. 애국심 같은 것도 없고. 다만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야. 그렇다고 오빠를 비난할 생각도 없어.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운명은 그에게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아무도 모르잖아.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점례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일부러 많은 말을 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와인도 한잔했다.

내일 만찬에 대한 의견도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호탕하게 웃으며 유ㅏ 호사카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졌을 때 웃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당신은요? 나도 엇비슷해. 조선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는 일본사람으로 사는 게 더 문명적이잖아. 안 그래? 맞아요. 그까짓 나라나 민족이 뭐가 중하겠어? 내 일신 편하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 것이 장땡이지. 장땡? 그래 장땡.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화투 좀 치거든. 군에 있을때 심심하면 패를  들고 쪼였지. 알았어요. 점레가 너그럽게 받았다. 호사카는 평상복 위에 외투를 걸쳤다. 잠깐 나갔다 와도 되지? 허락을 받으려는 건 설마 아니지요? 왜 아니겠어? 잠깐이면 돼. 그럼 다녀 오세요. 바로 호텔 지하 바에서 만나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많이는 마시지 마세요. 

유마가 잠깐 사람을 만나겠다며 자리를 뜨자 점례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 봤다. 아마 완용을 만나겠지. 나를 따돌리고 둘이 은밀한 밀담을 하겠지. 요새 둘이 부쩍 만나는 횟수가 많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오는 걸까.  그러나 난 유마 호사카를 믿어. 그래서 점례는 잠시라도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른 창가에서 벗어나 나도 좀 바람 좀 쐬면 안되요? 답답해서요. 로비에서 커피한 잔 먹고 올게요. 현관문을 잡고 막 나가려던 유마가 다시 돌아서서는 그럽시다. 같이 내려 갑시다,하고 기다려 주었다. 난 바로 올라 올게요. 알았어. 점례는 커리를 시켰고 웨이터 등뒤로 지하로 내려가는 유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루가 길었다. 뜨거운 것이 몸에 들어오자 점례는 긴장이 풀렸다. 나오기를 잘했어. 방에 그대로 있었다면 파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내 마음만 심란한 거지.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안정이 되자 다시 객실로 올라가기 위헤 엘리베이터를 탔다. 샤워를 하고 쇼파에서 자고 있으면 유마가 오겠지.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8층을 눌렀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중년의 노신사가 모자에 손을 얹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과 따뜻한 기운이 문이 닫히면서 좁은 공간을 에워쌌다.

휴의였다. 점례는 휴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점례 손을 잡았다. 내일 정오 덕영산장 만찬에 삼십 분만 늦게 와줘. 당신과 함께 있는 유마 호사카도 꼭 그렇게 해. 휴의는 9층을 눌렀다. 점례는 오빠하고 짧은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묻지 말고. 그래야 해, 살려면. 오빠 믿지. 무슨 핑계를 대든 늦게 와야해. 삼십 분. 기억해. 점례야.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야. 더는 나를 볼 일이 없을 거야. 나로 인해 네가 피해받을 일은 없어. 난 너를 사랑하지만 넌 나를 미워해야 해.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엽서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점례야, 응, 오빠.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야, 삼 십 분 늦게 도착. 그것만 기억해. 응, 오빠. 점례야, 날 미워한다고 말해. 어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8층이다. 문이 열리기 직전이다. 오빠 미워. 그녀는 나갔다. 휴의는 9층에서 내려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방으로 들어온 점례는 전등 대신 촛불을 켰다. 분위기가 제법 있었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됐다. 그녀는 엽서를 촛불 아래 갔다 댔다. 죽마을이었다. 해당화가 핀 새하얀 모래사장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엽서가 더 넓었으면, 우리 집이 나왔을까.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달려나가고 있다. 발에 밟힌 모래가 포말처럼 부서져 종아리 부근에서 흩어졌다. 나와 휴의 오빠. 잡은 손이 단단했다. 그녀는 웃었다. 아니 울었다. 프럼 휴. 점례는 휴에서 눈을 멈췄다.오빠. 그림은 그런대로 그렸다. 프로는 아니었다. 점례는 그 순간에도 그림을 평가했다. 화가의 본능이었다. 이런 재주도 있었네. 풋,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화가가 될 수 없어. 타고나야지.

점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촛불 앞에 엽서를 들이밀었다. 그러다 말고 다시 엽서를 촛불에서 떼어냈다. 왼쪽 상단에 노을 아니면 일출이겠지 하면서 대충 보았던 붉은 기운이 가만히 보니 아니었다. 날개를 단 폭탄이 터져 투하되는 장면이었다. 세 개의 폭탄이 하늘에서 급하게 내려오고 있다.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그녀는 현미경으로 들춰 보듯이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폭탄이 떨어지는 바로 그 위에 덕영산장의 프랑스풍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아래에는 서양식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곡선이 화려한 한옥, 말로만 듣던 99칸 한옥의 한 귀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점례는 아찔했다. 그렇구나. 내일 여기에 폭탄이 떨어지는구나.

점례는 망설이지 않고 엽서를 촛불에 댔다. 불이 붙은 엽서는 거꾸로 들자 조금 주춤하다가 금세 활활 탔다. 재를 담기 위해 그녀는 재떨이를 가져왔다. 작은 엽서는 말그대로 재가 되어 검은 천조각 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깨끗이 씻었다. 여러 번 씻고 또 씻었다. 재털이를 들고 나오자 그 새 유마 호사카가 들어와 있었다.

여보, 이게 무슨 냄새야. 타는 냄새인데. 설마 당신도 궐련에 손을 대나? 어디 불난 거야? 그런 거야? 유마가 틈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아마 그럴걸요. 환기 좀 해야겠네요. 재떨이에 있는 종이쪽지를 태웠어요. 실패한 삽화를 그냥 버리기가 뭐해서요. 그리고 여보, 담배를 좀 줄이면 어때요. 재떨이가 부족할 정도에요. 어제도 치웠는데 오늘도 가득이니. 당신 건강도 챙겨야지요. 만년 청년이 아니란 말이에요. 잔소리? 바가지 긁는 소리?  그래요. 맞아요. 지금은 그런 소리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점례가 입을 내밀었다. 너무 깨끗애. 유마가 재떨이를 보면서 말했다. 여기에 재를 털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 밤에는 금연어때요. 글쎄다. 유마가 이번에는 점례를 흉내내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저 사람을 배신할 수 있을까. 방금 전 헤어진 휴의는 금세 잊었다. 그 말마따나 이제 그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작별은 짧고 강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정체성의 혼란도 막바지에 달하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늘 옆에 있던 존재는 사라지고 없다. 옆구리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해야지. 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래저래 점례는 성숙해 지고 있었다. 정신의 폭발적인 성장이 그녀를 어지럽혔으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었다. 그녀 특유의 뚝심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듯이 시간이 좀 걸려도 풀어나갈 자신감이 있었다.

휴의가 하는 위험한 일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을 때도 고뇌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 나 잘하고 있지? 잘하는 거지? 점례는 늘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이런 자기 다짐을 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같은 것이었고 이는 때때로 힘을 발휘했다. 이 자만 없다면. 멀리하고 싶은 인간이 완용이었다. 집안 상견례가 있던 날에는 심하게 울기도 했다. 한 번 좋았던 기억은 어느 추운 겨울 대보름날 불놀이 하던 때였다. 그 날은 왠지 그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완용은 자신을 감췄다. 그와 결혼 직전까지 가다니. 몸 서리쳐진다. 살아서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해달라고 여러번 기도했다. 하지만 완용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더구나 지금 점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휴의 말고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용해 휴의를 잡기 위해 덫을 놓고 있다. 휴의를 잡으면 나를 잡겠지. 그러기 전에 내가 너를 잡으마. 그렇지, 어림없지. 너 같은 존재에게 잡힐 휴의가 아니다. 나 역시도 네가 꾸미는 일을 손바닥에서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다. 그러니 기다려라. 내가 웃고 네가 우는 꼴을 보기까지 종착점은 멀지 않았다. 휴의와 완용에 대해 점례는 이런 판단을 했고 그 판단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호사카의 심중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열 길 물속 가운데 아홉 길은 보고 있으나 나머지 한 길에서 막히고 있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손에 잡힐 것 같으나 마지막에서 벽에 걸린다. 그러나 그와 나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서로 어느 선까지 넘지 않으며 지켜 줄 것은 지켜준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침략주의자도 아니다.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유마 호사카는 어쩌다 지만  조선의 식민지 상태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정치헤서 손을 뗐다. 그래서 세상사보다는 글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러 외면하고 안 보려는 것은 그것이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예술을 향한 집념은 칭찬해줘야 한다. 여보, 소감을 좀 교환해 볼까.당신이 먼저 해요. 그럴까. 어차피 저녁은 길고 시간은 많아. 내일 면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입을 맞출 필요도 있고. 그가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바에서 술 하지 않았어요? 어 딱 한잔. 간바이만 하고 나왔어. 완용이라는 자가 중한 것도 아닌데 오라가라 귀찮게 하네. 내일이면 너를 볼 일도 없으니 기분좋게 작별인사 하는 셈치고 한 잔 했어. 유마가 바에서 만난 인물이 완용이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아마도 내가 궁금해 할까봐 선심을 베푼 것이다. 굳이 상대를 거론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고 의심같은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일지도 몰랐다. 

나도 대화에 끼어드나요? 당신이 질문하고 참석자들이 답변하는 식이 아니었나요? 그것만으로도 쪽수가 많아 두어 시간은 금방 지나갈 텐데요. 혼자 떠들어 대라고? 웃는 것은 내가 할 테니. 여보, 그러지 마. 내가 당신에게 토스하는 경우가 제법 있을 거야. 절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거나 불편한 질문이 오면 내게 넘겨요. 피하기 없기다. 다시 내게 질문을 던지면 난 난처할 거요. 점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웃는 것은 내게 맡겨요. 빼지 않을게요. 당신에게 유감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요즘 한가하거든요. 아주 아주 한가해요~.

점례는 요즘 유행하는 조선식 말을 쓰면서 억양도 연극 대본 읽듯이 했다. 말에 리듬이 실려 있었다. 나보다 당신이야. 역시 못 말려. 굳이 말리지 않을 거야. 세상 물정에 밝은 당신이 내일 면담의 프리마돈나야. 하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내 생각을 말할게. 서류를 보다가 번뜩하고 떠올랐거든. 점례가 호사카 옆에 검정 치마를 감싸면서 자리를 잡았다. 하오리 끈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사카가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연설을 해보지요, 하고 운율을 살렸다. 얼씨구나. 좋구나, 점례가 박자를 넣었다.

인간은 세 부류가 있어. 원래는 독립된 나라였다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그 나라 국민은 정확히 이 셋으로 갈라지지. 첫 번째는 적극적인 협조자야. 지금 우리 사정을 빗대 쉽게 그냥 친일파라고 하지. 그들은 눈치가 빠르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어. 지위가 높고 배운 자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해. 파일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이 대개 여기에 있어.다음은 방관자.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기회를 엿본다는 점에서 친일파와 별반 다를 바 없지. 침묵은 동조와 다름없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적극적인 친일과 소극적인 친일. 현재 조선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어. 이는 피정복국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야. 선진국이라는 프랑스 봐봐. 독일 점령 4년 만에 완전히 갈라졌어. 부역자와 침묵하는 자, 그러니 조선만의 특이한 상황은 아니지. 호사카가 자신의 말이 객관성이 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휴의 같은 저항파. 

여보, 오늘은 말이 좀 되네요. 그렇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내가 연설도 했어. 대중 앞에서. 언제요? 군에 있을때. 피이. 그건 연설이 아니고 일방적인 설교에 가깝지 않나요? 그래도 대단한 열기였어. 내가 한바탕 하고 나면 전투 분위기가 달라지거든. 정말요? 몰랐어요. 두 손을 들고 때로는 책상을 치며 이 연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그런 연설 말인가요? 정확해. 저도 포두주 한 잔 주세요. 좋지. 당신은 타이밍의 귀재야.잘 모른다고 놀리지 말아요.자, 간바이 하자고.

휴의 같은 독립투사들이 제일 문제야. 그들에게 투사라는 단어는 전투 의욕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죽음을 각오하는 그 정성이 대단해. 내 나라를 찾겠다는 신념은 막기가 어려워. 정복자에 대한 피압자의 정당한 권리. 당신, 파리에 있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해 많이 들었잖아.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는 것은 가슴의 피가 부글부글 끓기 때문이지. 뜨거운 피 하나로 덤비는 거야. 생각해 봐, 총도 없이. 누가 세겠어. 휴의와 완용. 둘은 플라이급과 헤비급으로 게임이 안돼. 휴의가 죽기로 싸운다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나 간혹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길게 늘어지는 경우가 있어.

다들 1회를 못넘 길 거라고 예상하지만 중반전을 넘어서도 버티잖아. 조선이 그래. 참 질긴 민족이야. 무려 30년이 넘게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굴복하지 않아. 무릎꿇기 보다는 코가 깨지는 것을 바라거든. 비록 적은 수지만 그들은 다수보다 힘이 세. 점례가 끼어들었다. 유마 호사카가 더 말을 하지 않고 마른 침을 삼키면서 자신의 차례라고 눈짓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막힐 게 없었다.

당신과 나는 조금 달라요. 내선일체라고는 하지만 태생이 난 조센징 이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요. 그래 그거야. 당신은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논리적으로 나온다니까. 내가 원하는 당신의 모습은 그거야. 난 감성도 좋지만 논리를 더 좋아해.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써볼게요. 역사에서 그것이 통용된다면 말이죠. 만약 일본이 침략이든 평화를 위해서든 아니면 지원을 위해서든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인간 나누기는 의미가 없겠죠. 지당한 말씀. 그래서 그런데요. 일본은 조선에 와서 많은 일을 했어요. 전기가 들어왔고요. 전차가 다니고요. 신식 건물이 생기고 주택이 개량됐어요. 도로가 넓어지고 신문이 나오고 방송도 생겼어요. 한마디로 조선은 일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요.

숨 넘어가겠어. 당신 발음이 좋은 건 알겠지만 천천히 좀 느긋하게. 빨라도 상관없지만.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둘은 상반되는 개념이잖아요.아냐, 난 이 말이 좋아. 천천히 빨리. 알았어요. 어쨌든 후진이나 긴 정체에 빠진 조선에 일본이 온 것은 전진을 의미해요. 처음에 파일을 읽을 때 나는 친일파에 조금 분노했던 게 사실이에요. 누군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하고 누군 양지를 위해 친일을 하느냐고요? 따지고 싶었지요. 그런데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세 부류의 인간에 대해 어떤 인간이 우월하고 열등하고 아니면 더 좋은 인간인지를 판단하기를 유보했어요.

먼저 독립파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이유는 하나니까요. 조선의 독립 말고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없어요. 그러나 친일파는 다르죠. 그들은 국민을 계몽해요. 백성을 일깨워요. 교육자들만 해도 그렇죠. 그들의 열성이 없었다면 조선 각지에서 그런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수 없죠. 김선생님을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그런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나요? 욕을 할 줄만 알지 배우고 때로 익히면서 자신을 단련시키지는 못했죠. 이름만 세글자인 그 분에 대한 비난도 수정되어야 하고요. 지식인의 애국 방법을 놓고 방향에 대한 지적은 있을 수 있으나 총체적으로 매도해서는 곤란해요.

듣고 보니 내가 할 말을 당신이 하는군. 말하자면 당신은 친일 쪽에 기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같은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 느낌이 맞는 거지? 친일 편이지? 글쎄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당신이 분류한 세 부류 중 어디에 속하나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곤란해. 딱 부러지게 나눌 수가 없거든. 독립파는 아냐, 그렇다고 적극적인 친일도 아니고 방관자 쪽에 속하지만 그 역시도 미적지근해. 당신은 네 번째 부류라고 해야 할까. 속을 모르는 인간. 하하하 점례가 크게 웃었다. 그래요,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정체성에 혼란이 와요. 당신도 알다시피 휴의 애기가 나오면 동점심과 두려움이 일고요. 완용이 등장하면 마음이 편하면서도 괴로워요. 회색인가요? 나는? 그러면. 점례가 호사카를 쳐다봤다. 눈이 반짝 빛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적당한 말을 찾는 듯 했다.

대답을 유보하겠어. 당신도 모르는 당신을 내가 알기는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대신 나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게. 유마 호사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난 일본 사람이니까 당연히 친일파지. 일본 사람 조선사람이 어딨어요? 우린 내선일체잖아요. 맞아, 미안. 미안 미안해. 가락에 맞춰 노래 부르듯이 이번에도 호사카가 리듬을 타면서 대꾸했다. 재미들린 듯 했다.

친일파지만 독립파에 대한 이해도 있어. 역지사지인 거지 말하자면. 조선이 일본을 침략했다고 반대로 생각해봐. 난 어땠을까. 독립파가 됐을까 아니면 친조파가 됐을까. 아마도 친조파 쪽일 거야. 그러면 글은 사치가 되는 거지. 나라가 먼저지 글이 먼저냐고 따지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까. 당연히 나라가 먼저요. 내 소원은 글 잘 쓰는 소설가가 아니라 완전한 일본의 독립이오 하고 말하겠지. 난, 거기까진 나가지 못했네요. 그래요. 저도 어쩌면 당신과 같은 편일지 몰라요. 똑 부러지게 친일파는 아니지만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내게 없어요. 독립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친일이니까요.

친일이 그렇게 어렵다고 봐? 그럼요. 그들이 그 길을 가는 과정이 얼마나 험란한지는 당사자 말고는 모를 겁니다. 꽃길만 간다고 생각하지만 아닐걸요? 쏟아지는 숱한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 힘을 얻기까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 맷집은 어렵게 만들어지지. 내가 이것만은 약속할게. 당신이 조선인 대표라고 생각하고. 차별을 없앨게. 우린 동족이야. 같은 민족이라고. 조선인의 많은 수가 일본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 장교 빼고는 병사 전부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443부대 알지? 그 부대는 전과가 대단해.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그런 전과가 나오겠어. 난 미국과 영국이 미울 뿐이지 조선은 아냐.

그렇군요. 그들에 대한 변명이라고나 할까요. 역지사지 말씀하셨죠? 나라면 어떨까. 내가 그 입장이라면. 이런 상태가 되면 품이 넓어져 이해해 줄 때도 있고요. 레지스탕스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줬는데 친일파를 이해하니 좀 얼떨떨 하기는 하지만 난 프랑스인이 아니잖아요. 휴의의 영향도 조금은 작용했겠지. 호사카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는 말을 삼키느라 목을 한 번 움찔했다. 그러나 꺼내지 않았다. 프랑스에 레지스탕스가 없고 조선에 독립운동이 없다고 생각해 봐. 그런 민족이 민족이겠어. 미개인이나 야만족에 다름없지.조선사람이 민족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저항하는 소수 때문에 가능해. 역설적이지.

친일파는 독립파 때문에 위상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점을 감사해야 할 거야.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친일은 눈에 띄지 않거든. 그들이 없고 오로지 친일파만 있다고 가정해봐. 그들을 우대할 이유가 없지. 작위를 주고 땅을 주고 권세를 주겠어? 생각해봐. 그것은 독립파를 견제하는 조건이야. 한편 독립파는 되레 일본의 발전에도 도움이 돼. 도전이 없는 개혁이나 발전은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있은 적이 없거든. 씨를 말리기보다는 적정한 수를 유지하는 게 일본에게도 유리하다는 거지. 새로운 논리네요. 언제 연구했나요? 당신은 강단에서서 학생들을 교육시켜도 만점 선생님이 될 거에요. 짝짝짝.

아직은 일러. 시켜주면 잠깐은 하겠지만 그럴 능력이나 시간이 없어. 기분이 좋아진 호사카가 정성을 담아 말했다. 이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만의 논리야. 당신에게 처음으로 발표하는 거고. 영광입니다. 퍼트리면 난 욕 먹을 거야. 내무대신의 아들 자격이 없다고. 입을 꼭꼭 봉하고 있을게요. 자크를 끝까지 끌어 올리죠. 됐죠? 누구 나말고 들은 사람 없겠죠. 점례가 과장된 몸짓으로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싱거워. 간장을 좀 줄까요? 어, 그만 내게 손들었어. 항복이야 항복. 유마 호사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이제 다 정리된 거지요? 이런 식이면 내일 대화는 훈훈하게 전개될 것 같아요. 친일파들에게 새로운 논리도 제공하고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니까요. 그래, 그들과 다툴 생각은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예술은 평화와 평등이거든. 인간의 가치를 재는 것이고. 전쟁을 독려하는 예술은 질이 낮아. 그 점은 지적할 거야. 그런데 또 궁금한 게 있어.이 건 꼭 물어볼 거야. 왜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는지? 지금은 왜 친일을 하는지? 똑같은 질문을 돌아가면서 할 거야. 대신들한테는 답변할 기회는 주지 않고. 그들은 뻔한 답을 낼 거야. 정치인들은 그렇지. 안 그래? 옳은 말씀.점례가 동의했다. 예술은 평화와 평등이고 전쟁을 독려하는 예술은 질이 낮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찬성해요. 여성 문인들에게 그 점을 한 번 집중적으로 캐서 물어봐요. 모성애는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냐고요.

그 건 당신이 알아서 해. 그럴까요. 자, 마십시다. 대단히 진지한 하루였어. 간혹 우리 이런 토론회 하는 건 어때. 그래요. 여보. 그런데 여보?응 말해봐. 내일 일정을 취소하면 어때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호사카는 말이 없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다니. 하지만 점례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폭약 아래에 있다면 누가 글을 쓰고 누가 그림을 그리고 정치를 하고 교육을 할지 걱정이 됐다. 조선 민중을 깨칠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죽는다. 죽을 만한 사람이라도 해도 그렇게 죽는 것은 조선에 어떤 이득이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핍박은 더 세질 것이고 독립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사 독립이 된다고 쳐도 그들이 없다면 어떻게 국가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뜬금 없기는. 그래요. 그냥 해본 소리에요. 술을 먹으면 아무말 대잔치처럼 말이 막 나오네요. 그들을 너무 기죽이지는 말아요. 예술인들은 자존심이 있는데 그걸 꺾으면 나쁜 인상을 주죠. 살살 하라는 의미고요. 알았어. 내일 일어나자마자 당신 말을 복기할게. 필요하다면 손에 적어서 대화 중에 펴서 살펴볼게. 미안해요. 여보. 그런데 정오잖아요. 만찬이. 우린 30분 늦게 출발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이 호사카는 또 말하기를 주저했다. 주인이 머슴들에게 그 정도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어요.

점례가 세게 나갔다. 그래도. 약속이란 게 있잖아. 당신 체면도 있잖아요. 당신은 아버님과 동급이에요. 천황 다음이란 걸 잊지 마세요. 기다려야 하고 기다린다고 해서 불평할 수 없어요. 누를 때는 눌러야지요.안 그래요? 당신 요즘 이상해. 보짱은 알겠는데 갑자기 나오는 말이 기상천외하단 말이야. 상상 이상이야. 감이 안 좋아요. 미신이라면 나도 믿을 만큼 믿어. 종로서가 알아서 할 거야. 경호가 걱정이라면 말이지.술 때문이죠. 투명한 잔을 들어 올리며 점례가 잔을 부딪쳤다. 그래 건배. 술 때문이지. 다 술이 원수지 뭐. 좋아요. 건배. 간바이나 건배나. 유마 호사카가 호응했다. 

그 시각 휴의는 배개를 가슴에 대고 방에 엎드려 있다. 대원 두 명은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가볍게 코를 골면서 세상일 잊은 듯 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일은 내일 일이라는 듯이. 휴의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러다가 다시 읽기를 멈추고 일어나 앉았다. 잠깐 쉬면서 생각읗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희미하게만 보였던 눈앞의 세상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시작한 운동에 대한 이론적 확신이 서고 있다. 일어선 그것은 죽지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몸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래, 이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애벌레였다. 이제 날개를 말린 한 마리 왕벌이다. 휴의는 무한한 자신감이 용광로의 쇳물처럼 끓어 올랐다. 책을 잡은 손이 잡은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했지? 그러나 그 닭들은 꿩만큼의 가치가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가볍게 그는 몸을 떨었다. 일이 성사됐을 때 나오는 그런 만족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보다 몇 곱절은 더할 것을 생각하니 미소보다는 결기가 더 굳어졌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러시아혁명이니 중국공산당이니 하는 것들의 태동은 그에게 조선이 어떤 식으로 식민지가 됐는지를 일깨워줬다. 부패한 황실은 외세에 침략기회를 주고 막아내지 못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분노가 솟았다. 제 백성을 쥐어짤지만 알았지 외세의 침략에는 무능했던 왕실에 대한 적개심이 새삼 솟았다. 무능하고 부패한 세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휴의는 이 구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여전히 황실과의 유대관계를 원하고 있다. 느슨하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이어질 수 있는 폭발력이 있었다. 3.1 만세 운동 때 보지 않았던가. 하나로 모을 힘이 필요하다. 구심점이 없는 투쟁은 의미가 없다. 임정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일제를 물리치고 나면 임정이 새 정부가 되어 운동 중에 죽은 수많은 넋들에 대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분오열된 왕실의 끄나풀이 다시 외세를 등에 업고 허수아비 왕으로 복귀할까. 휴의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기어이 해답을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나라의 붕괴는 외세의 침략 이전에 내부 붕괴로부터 시작한다. 그래, 그렇지. 일제가 오기 전에 조선은 이미 낡은 기와집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뼈대가 없는 허술한 다리는 언제든 가라안지.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거나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 아니 그러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거지. 전쟁이 나자 왕실은 도망을 쳤고 고위관리들은 제 목숨 지키려고 숨기에 바빴지. 핍박받던 무지렁이들이 창이며 낫을 들고 싸웠어. 도망간 그들이 오고 숨었던 그들이 다시 활개 칠 수 있도록 제 목숨을 바쳤던 거지. 휴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점에서 휴의가 두려운 것은 조선왕실의 복귀였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인재들이었다. 그들을 대체할 세력이 아직은 없다.

임정도 하나로 뭉치기보다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독립운동도 한계가 뚜렷하다. 겉돌고 있다. 한인애국단도 세력이 너무 약하다. 의열단은? 그 생각에 미치자 휴의는 처참하게 죽어가는 여성 독립군과 조선청년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한 줌의 재로 남은 소년 병사는. 나는 어디하나 기댈 언덕이 없다. 일제는 그에 비해 너무 강하다. 무단통치에서 문인통치로 돌아선 그들은 영리하다 못해 영악해. 그들을 받쳐주는 조선 지식인들은 기고 만장하고 있고. 민족의 배신도 모자라 민족성마저 비웃고 있어. 게으르고 나태한 민족은 개조해서 일본에 협조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그래 그런 자들은 차고 넘쳐. 강한 일본에 저항하는 무모한 짓을 멈추고 하나된 일본에서 누리며 살자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누리는 것은 너희뿐이라는 것은 왜 밝히지 못하니?

스님은 말했어. 그런 말로 혹세무민하는 조선 천재 두 명에게 호통을 쳤어. 스님도 내 편으로 끌어 모으자, 호통을 쳤으나 받아주자. 의기 투합했던 조선의 천재 문장가 두 명은 그러나 스님한테 바로 쫓겨났어.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 너희놈들은 이미 죽어서 내가 장사 지낸지 오래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너희 놈들은 일제의 개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남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겠다. 서슬퍼런 스님의 소리에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지. 그러면서 이렇게 한 마디 했어. 땡중 놈이 세상을 알아.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염불이나 열심히 해라. 잿밥은 우리가 먹으마. 그들은 후회의 눈물대신 엿으나 먹으라고 종주먹을 들이댄거야.

휴의는 하,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 찬물이라도 들이켜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마. 그러나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앞으로는 안 될 걸.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래, 입만 열면 민족을 위해 산다고 했지, 그러니 민족을 위해 죽어라. 너희들의 애국이 그런 것이었듯 내식의 애국은 이런 거야. 그러니 탓하지 마라. 식이 다르다고 해서. 내일 만찬이 있어. 폭약은 지붕위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지. 독립운동은 죽은 거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쪽발이나 로스케나 짱개나 양키나 다들 조선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보고 있어. 문화통치의 덕이지. 네 놈들은 앞장서서 그것을 퍼트렸어. 사이토 총독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겠지. 그래 죽어서라도 그 고마움을 갚아라.

조선민을 존중한다고? 조선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게 해 준다고? 너희 같은 잘난 유명인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니 흰옷 입은 사람들은 믿고 있지. 철썩 같이. 나도 한 때는 독립투사였소. 그러나 해보니 안 됩디다. 안 되는 이유는 일본은 세고 조선은 약하기 때문이오.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선진국이 된 일본을 우리 조선은 따라야 하오. 조선인으로 살기 보다는 일본인으로 살아야 행복하단 말이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의 연설을 했다. 해보니 안되더라.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조선민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해 본 사람의 말을 믿었다. 저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도층이 하라면 따라 하는 게 이득이다.

당신은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말로만 수군대지. 뒤에서 욕하고 손가락질 하지. 네가 조선독립을 위해 일 해 본 적이 있느냐고. 핏대를 올리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 해보지도 않은 무지렁이들은 그 즉시 찌그러졌다. 휴의는 다시 엎어졌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그럴만도 하지. 지도층의 변심을 이해해야지. 별 수 있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잖아. 왕실은 흔적만 남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조직은 일제가 장악했어. 사람들도 이름을 바꾸고 쓰는 말도 일본어가 대세로 자리 잡았어. 학교에서는 국어가 일본말이다. 내일이면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 민심은 술렁이겠지. 조선은 숨통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인공호흡으로 벌떡 일어났다고. 누가 알겠어. 그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이렇게 떠들어 대는 사람이 나올지.

그래 그거 하나만이면 충분해.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야. 일깨워 주는 거지. 조선 백성들아, 죽지 않은 조선인들도 있다. 변절자의 말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만천하에 알려준다. 세계도 발칵 뒤집어 지겠지. 그 결과를 누가 따먹을까. 임정이 외교력을 발휘할 만한 능력이 있을까. 내가 아는 선생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조선의 생환일까, 궤멸일까. 다시 철권 통치로 회귀할까. 치안유지법은 강화되고 둘 만 보이면 바로 체포될까. 역시 조센싱은 말로 해서는 안돼. 몽둥이가 약이야. 총칼을 들고 마구 휘둘러 댈까. 휴의는 내일 이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 동족을 팔아먹고 제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 자들에 대한 준엄한 공격이라는 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들은 죽어도 싸다. 동족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고 있으니. 본 이득을 토해내야 한다. 유명세를 바탕으로 조선을 일본에 바친 결과에 대한 벌을 받아야한다. 내가 내리는 벌이 아니다. 하늘이 내리는 형벌이다. 신은 때로는 정의를 위해 일을 하고 하늘은 그런 신을 때로는 돕는다. 휴의는 신은 내편이라고, 이번만큼은 반드시 우리 편이라고 믿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다. 휴의는 다시 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어느 여성 문인의 열띤 연설이 눈앞에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이번에는 여류 문인이 앞을 가로 막았다.

조선의 어머니들이여, 황군으로 입대하라. 가서 싸우고 장렬히 전사하라. 그것이 조선민이 일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다. 아들은 총으로, 여성들은 정신으로 황군을 위문하라. 여성도 전사다, 정신대에 하루 빨리 입대하라. 위는 흰옷을 아래는 검은 치마를 흰 옷입은 그 여류 문인은 제 흥에 겨워 앞에 있는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연단 아래서도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 강도라면 주먹이 아플 것이다. 휴의는 저 여류 문인의 손은 괜찮을까. 혹시 손이 다쳐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저 손은 그냥 손이 아니다. 아무나 갖고 있는 그런 손이 아니라 조선민이 일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손이다. 매일신보에 그녀는 내리친 그 손으로 이렇게 쓴다. 나는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조선민들에게 호소했다. 간절한 내 호소는 먹혀들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청년들이 자원입대를 위한 서류에 인장을 꽉 찍었다. 어떤 청년은 인장대신 손을 깨물어 혈서로 맹세했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합니다. 어린 소녀는, 아직 이마에 피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는 정신대 입대는 황군의 기세를 올려줄 더 없는 기회라면서 감격에 겨워 울면서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여류문인은 연설하느라 목이 터져 피가 나왔으나 그들이 이런 식으로 보답하자 아픈 목이 자고 일어나니 씻을 듯이 나았다. 손도 멀쩡하다.그렇지. 멀쩡하지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겠나. 내일은 수원으로 간다. 그리고 하루걸러 하루씩 천안 홍성 보령 군산을 거쳐 목포로 간다. 황군을 향한 나의 열정은 쉴틈이 없다. 휴의는 다른 장면으로 눈을 돌렸다. 안경을 쓴 잘생긴 얼굴의 그녀는 언제나 조선 최초를 달고 살았다. 미국 유학도 최초요, 박사 학위도 최초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하나의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칼을 찬 순사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얼치기 수 천보다 한 사람의 인재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었다. 입을 연 그녀는 입을 다물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일본은 오천년 조선 역사보다 더 길고 긴 수만 년을 우리 조선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다. 일본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세고 강해 미국이나 영국도 결국 우리 일본 앞에 무릎을 꿇을 날이 오고야 만다. 그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멀지 않은 미래하는 것이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일본 국민으로 성스러운 전투에 나서고 있는 황군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합니다. 황군의 승리는 조선의 승리이고 조선의 승리는 우리 일본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둘이 아닌 한 몸 입니다. 이제 조선이라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맙시다.

우리 일본을 위해 우리 조국 일본을 위해 다 같이 총을 들고 폭탄을 메고 적진으로 돌격합시다.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정신대 앞으로 진군 합시다. 그녀는 연설을 마치고 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연단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는 군중의 환호에 화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를 타고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다음 목적지인 YMCA로 향했다. 시간이 늦었다. 열변을 토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거기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이 있다. 다음날 아침,유마 호사카의 눈은 안내장에 가 있었다. 한문이 제법 그럴싸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서예의 대가로도 손색이 없다. 예서는 물론 행서에도 일가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누가 썼나 살펴보니 총리대신이라는 직함이 보인다. 총리대신 정도면 이 정도는 해야 하나. 과연 직책이 수준을 만든다니까. 

호사카는 식순을 죽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인사말을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사말은 가볍게 하자. 내 인사말은 면담 내내 이어질 것이다. 사회도 보고 주제 발표도 한다. 말할 기회가 무수히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학생의 축하 노래도 있다. 제목은 나와있지 않다. 참석자들의 명단은 그 아래 있다. 알만한 인물들이군. 종로서장이 준 파일에 나와 있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름옆에 사진도 있다. 흐릿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어서 낯이 익다. 그래 미리 알아서 나쁠 게 없지. 그는 안내장을 접으려다 말고 내선일체를 뜻하는 ‘두 땅이 한 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는 조선어를 접했다. 조선글도 잘 쓰는군. 명필이야 명필. 유마 호사카는 그렇게 중얼 거리면서 옆에 있는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날을 살피는 눈으로 끝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손으로 가볍게 쓸어 내렸다. 여보, 그걸 또 꺼냈어요?

점례가 위험한 물건이라는 듯이 눈쌀을 치푸렸다. 늘 옆에 차고 있는데도 언제나 그리워. 이 금속이 주는 차가움은 내 심장을 뛰게해. 이걸 쓸 일이없기를 바라는 거지. 칼이 춤추면 사람 목숨은 날아가는 거거든.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아요? 생명은 중요해요. 평생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런 생각이야.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 아니지 않소. 그래도요. 참을 인자를 늘 새기세요. 염려 붙어 맵시다.
호사카가 이러고 있을 때 상하이의 말수는 닥쳐오는 앞날에 대한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였다.

변화는 안정된 사람에게 일종의 두려움이다. 말수는 자신에게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 악몽을 꾸고 난 후에 보는 검은 색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은 새로운 걱정거리였다. 포목점 집주인과 어울리면서 말수는 세상 물정에 눈을 떴다. 국제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했다. 결과는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패망을 조심스럽게 예견했다. 돌아가는 행세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정세분석은 아주 없지는 않다는 희박성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불과 두서너 달 전만 해도 그런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거나 반대세력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밤새 술과 정치로 시간을 보낸 말수는 집에 돌아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잡지를 보고 방송을 듣고 신문을 훓었다. 포목점집 주인의 말을 검증했다. 상하이에서는 미국 신문들을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었다. 일본 언론과 비교해 볼 수 있고 그것은 그에게 어떤 판단력을 새롭게 요구하지 않았다. 여보, 무얼 그리 열심히 읽어요? 나도 알려줘요. 좋은 소식 있나요? 별거 아니요. 어제는 몇 시에 들어왔어요?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당신이 옆에 있어요. 안심은 됐지만 요새 무리하는 것아니에요? 당신. 여순이 가볍게 스치듯이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오후에 수술 있나? 공사장에서 다친 노동자 재수술 한 건 생각 안나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왜 또 어디 가게요. 잠깐 시내에 나갔다 오려고. 당신 요즘 병원보다는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그건 알고 있지요? 그래 알고말고. 당신이 있으니 그러지. 하지만 병원장이 낮에 자리를 자주 비우면 어떡해요. 급한 환자가 오면 어쩌려고요?

당신을 믿어. 그리고 페이닥터 진군도 일을 잘하니~. 말수가 말꼬리를 늘였다. 그는 요즘 병원보다는 여순 말마따나 다른 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병원 개업의 초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관심은 온통 전쟁에 쏠려 있었다. 그렇게 혐오했고 한 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전쟁에 그는 발을 깊숙이 들여놓고 있었다. 그것이 갑갑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리에 맞았다. 옛날의 말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으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뱃사람의 기질과 광산 노무자로 잔뼈가 굵었던 그는 병원의 잔일보다는( 그는 환자를 상대하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큰일을 하고 싶었다.

일본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았으나 자신을 살린 것도 일본이었다. 상하이에서 병원을 개업한 것은 일본 장군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신분 세탁을 눈감아 주고 인정해 준것도 그였다. 그런 일본이 무너지는 것은 그에게 어떤 마음의 빚을 영영 값지 못하는 찜찜한 기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일본이라면 병원 일에만 신경을 써도 된다. 하지만 돌아가는 판세는 분명 불리해 지고 있다. 진주만 기습이후 기세가 올랐으나 그것 때문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미국의 개입은 일본에게 불리하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일본이 상대할 적으로 미국은 너무 셌다. 중국과 러시아와는 또 다른 상대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이 버티고는 있으나 세력 면에서는 일본이 해 볼 만하다. 그러나 미국은 아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미국 세상이다. 그는 미국의 신문과 잡지를 읽으면서 일본의 열세를 인정했다. 포목점 집주인은 여전히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무리 판단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너는 도대체 누구니? 묻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순간순간 변했다. 독립을 지지 했다가 어떤 때는 친일로 돌아섰다. 중국을 응원하다가도 갑자기 러시아를 밀었고 미국이 정의롭다고 말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사장이 분석하는 판세는 대체로 맞았다. 그는 어느 한 편에 서기 보다는 유리한 쪽에 붙는 사람이었다. 말수는 그가 부러웠다. 심중을 아무렇게나 드러내지만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 포목점 집 주인이었다.

일본의 지고 있지요? 어떻게 보세요. 형님은. 나 말인가. 나도 동생 의견과 비슷해. 포목점 집 주인이 술병을 열었다. 동생도 알다시피 지금 일본은 아니라고 하지만 뒤로 자꾸 밀리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다보면 알잖아. 한 번 밀리면 따라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대개는 그대로 게임이 끝나는 수가 많지. 알잖아 선생도. 포목점 집 주인은 막내 아들을 양자로 보낸 후 동생이라고 했다가 선생이라고 했다가 말수에 대한 호칭을 제멋대로 부르면서 어제와 달리 오늘은 일본이 열세라고 주장했다.

그래요?  일본이 밀린다고요? 어쩌면 좋아요? 아니 동생은 친일파인가요? 밀리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말수는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기다가 지고 있으니 그런 거지요. 딱히 지지할 이유는 없어요. 알잖아요? 형님도. 이국땅에서 조선사람은 다 애국자에요. 친일은 애국이 아니고? 포목점집 주인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말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런데 말이요. 의사 선생. 일본이 밀리는 데는 독립군의 힘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소? 요즘 독립군의 위세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보다는 대단하게 크고 있어요. 따로 군기지를 마련했고 거기서 광복군 3개 사단이 훈련하고 있어요. 3개 사단이라고요? 그렇게 많이요? 그 수를 일본 밀정은 최근에야 파악했어요. 그 많은 인원을 훈련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요. 독립군에 그런 거금이 있나요? 그래서 말인데요. 의사 선생이 일본의 부진을 두려워한다면 간혹 상하이 조선인 단체에 기부하는 돈 있잖아요. 그걸 당장 끊으시오. 내가 얼마나 낸다고요. 십시일반이라는 것 모르나요?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고 있지만 지난달부터는 끊었어요. 그게 다 독립군 자금으로 들어가요. 알겠어요?

그가 술을 따랐다. 독한 빼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둘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말이요. 그 독립군 수장이라는 임정 선생 말이오. 그 사람이 지금 조선에 폭파 전문가를 파견한 것, 알고 있나요? 선생이 일차 조선 총독부를 공격을 명령했고 지금은 이차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지금쯤 터졌는지도 모르고요.배후가 임정 선생님이라는 건가요? 내가 언젠가 말했지요? 그 휴의라는 놈이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조선에 급파됐어요. 미군의 특수 훈련을 받고 잠입에 성공했는데 아마 조선발로 큰 뉴스가 곧 올 겁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쉿, 그가 덥수룩한 콧털 아래에 검지를 세우면서 주의를 주었다. 선생 생각은 어때요? 그런 독립활동은 일제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너무 뻔한 질문이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말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그 모든 책임에 임정이 있고 최종 결정권자가 선생인가요? 하고 또 물었다.

말해 뭣해요. 선생은 병원에만 있으니 세상이 어둡게 보이지만 말이요. 한 발만 밖으로 나오면 온 세상의 일들이 다 보입니다. 나처럼요. 일본이 패전한다면 임정 때문일 수도 있어요. 여기 상하이는 물론 만주, 연해주,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군이 득시글해요. 내가 파악한 군기지만 해도 세 곳입니다. 한 곳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세 곳이라고요? 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에요. 지난 번에는 소규모로 침투했지만 이번에는 다를거요. 국경 지역의 일본 경찰서는 심심찮게 공격을 받고 있어요. 홍범도의 봉오동,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를 뛰어넘는 전과를 올려요. 지난 총독부 급습 때 중국 장개석 정부는 충칭으로 임정 주석을 초청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을 내놓았어요.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조선 사람 몇 명이 하고 있다면서요.

지금도 장개석과 임정은 수시로 만나고 있나요? 한때 서먹하고 소원했던 관계는 총독부 공격이 임정의 배후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급속하게 친해지고 있어요. 장개석이 임정을 세게 밀고 있어요. 임정의 다른 조직은 러시아 혁명 조직과도 손잡고 연합군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고요. 아하, 일이 그렇게 사방으로 흘러가고 있군요. 일제는 현상금을 걸었지만 임정 요인들을 체포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어요. 그들은 신취귀몰해서 한 사람이 성을 열한 개나 쓰고 이름을 다섯 개나 쓰는 등 변장에 능해요. 성이 열 한개고 이름이 다섯이라고요? 그러나 임정은 사실 알고 보면 껍데기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일본 패망이면 임정 때문이라고 두려워하더니 아니라니요?

그게 선생 하나만 없애면 와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이란 말이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개인은 뛰어나지만 뭉치면 모래알이라는 걸 선생도 아시잖아요. 서로 우두머리를 하려고 이전투구가 말도 못해요. 당수가 되려고 당을 만든 것이 열 손가락도 부족할 만큼 많아요. 대통령이라는 자가 횡령했다가 조직에서 쫓겨난 것은 아시지요? 거기다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싸움도 하루도 그칠 날 없고요. 좌우 대립이 그 정도로 심각해요? 그러니 우두머리 하나만 제거하면 일본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조선 본토에 광복군 사단이 침투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해요. 일본은 전쟁에 지기 전에 조선 전투에서 패망합니다.

결정적으로 말씀 하시는 군요? 퇴로를 잃은 일본은 어디서 식량을 보급할까요. 배급 선이 끊기면 만주의 일본군은 괴멸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고요. 말수는 정신없이 말에 빨려 들어갔다. 일본이 지면 조선이 독립하는 건가. 그러면 나는? 우리 병원은? 그리고 여순과 아들은? 나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의사 자격증도 가짜로 따고 일본인 행세하다가 중국인으로 다시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삶도 송두리째 부정된다. 병원을 잃을 수도 있다. 말수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데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선생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지난번에 본 몸 안의 상처는 권총 탄환의 흔적이었다. 약간만 빗나갔어도 총알은 내장을 관통해 생존하기 어려웠다. 그는 강한 생명력으로 누구나 죽는다는 말을 뒤집었다. 의사는 무려 4시간 동안 지켜보다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자 수술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이다. 말수는 그를 알고 있다. 이미 치료한 경험이 있다. 흰 옷을 허리 위로 걷어 올렸을 때 보았던 선명한 흉터자국. 손가락 만한 구멍이 한 눈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통을 호소하던 그는 나중에 나타나서 의사 선생 때문에 만성 소화불량이 해소 됐다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생명존중 세계평화라는 여덟글자가 세로로 가지런하게 씌여 있었다. 선생이 임정에 주는 관심에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 글자가 조금 흔들려 보이지요. 남들은 이것을 떨림체라고 하나 나는 총알체라고 부릅니다.그 날의 일이 말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그 글씨는 말수의 병원 책상 위에 표구된 채로 놓여 있다. 포목점 집 주인의 말은 일부 사실로 드러났다. 실제로 임정 산하에 3개 사단이 국내 진입을 위해 독립기지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간혹 연합군이 와서 훈련 사항을 점검하기도 했으나 전적으로 조선인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고 있었다.

미군이나 영국군은 그런 상황을 본국에 보고 했으나 자신들의 일도 바빠 제대로 챙겨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3개 사단 가운데 303 사단이 훈련 성과가 제일 좋았다. 일명 삼공산 사단에는 일본군 탈영병들과 학병에서 도망친 조선인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들은 기본 군사 교육을 숙지하고 있었고 총기를 능숙하게 다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전 경험이었다. 일본군 탈영병 가운데 도수영 오장은 폭파 능력에서 탁울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는 휴의가 미군 특수부대서 훈련받은 조선인 3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휴의가 훈련소를 탈출해 조선에 잠입한 사이 그는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미군 배속으로 있다 포로가 됐다. 일본군 포로 신세인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이 미군에 속아 훈련 받은 사실을 알리고 황군으로 남은 목숨을 바치겠다고 혈서를 쓰고 일본군 오장으로 입대했다. 정식 일본군이 된 그는 미군에게서 배운 폭파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미군에게 중요한 보급로인 다리 폭파는 물론 요인 암살을 위한 지하 폭팔물 매설에도 공을 세웠다. 그는 한 차례 더 폭파 성공을 할 경우 장교 승진도 약속받았다. 신뢰는 그만큼 높았고 한때 미제 스파이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틈을 이용해 도수영 오장은 필리핀을 탈출해 만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의 합류는 303 사단에 큰 힘이 됐다. 바로 육군 소위로 임관한 도수영 소위는 훈련병들의 폭파 교육을 담당했다.

임정의 선생은 사단 병력의 국내 진입에 앞서 그를 조선에 급파했다. 휴의를 만나 그를 도우라는 지령이었다. 일차 실패 후 휴의와는 접선이 잘되지 않자 임정은 초조한 나머지 국무회의를 열고 이같은 결정을 만장일치로 정했다. 도소위는 무사히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휴의와 접선은 쉽지 않았다. 수시로 변경되는 암호가 착오를 일으켰다. 휴의는 일차 암호를 받고 이것은 일제가 흘린 역정보라고 여겼다. 이차 암호를 기다렸으나 뜻밖에도 암호는 노출이 쉬운 상태로 휴의에게 전달됐다. 두 번의 암호를 해독한 그는 일제가 쳐논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암호 해독을 당분가 포기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도수영 소위를 만났다. 우연이라고 한 마디로 짧게 설명하는 것을 독자들은 이해해야 한다. 정말 광화문 앞거리를 걷가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휴의와 도소위의 만남은 절반의 성공을 의미했다. 

암호 해독을 포기한 것이 되레 행운으로 다가왔다. 매일신보에 내무대신의 아들과 조선 문인들과의 면담 일정이 잡히자 휴의는 처형 대상을 급히 바꾸고 그것의 실행에 집중했다. 임정과는 사전에 상의된 바가 없었다. 단독 결정에 대한 부담도 있었으나 오로지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그 판단이 옳다는 신념은 굳어갔다. 차원이 다른 친일파의 처단은 민족의 이름으로 진행되어야 옳았다. 그는 민족이라는 거친 글자에 붓글씨로 쓰고 거기에 자신의 검은 손바닥 인장을 찍었다. 이런 형식이 우습게 보였으나 결의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보면 대단한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다.

한편 윤사장과 헤어져 병원으로 돌아온 말수는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병원일은 이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 속에 있는 거친 태도가 한동한 숨죽였다가 외부로 폭발하기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피부 깊숙한 곳에서 꿈틀 거리는 욕망에 말수는 자신에게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사람은 바꿀 수 없다. 피는 속일수 없는 것이고 말수의 피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해치울 것을 찾고 있었다. 우두머리만 처리하면 독립군은 와해된다는 포목점 집주인의 말이 귀를 떠나지 않고 있다. 우두머리는 말하지 않더라도 임정의 선생이 아닌가. 두 번의 치료 경험으로 그는 임정의 신뢰를 받고 있다. 한인회에 대한 후원금과 이따금 전달하는 독립자금도 그런 믿음에 힘을 보태고 있다.

조선인 부부 의사는 상하이에서 독립군의 숨은 조력자였다.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여순의 태도 때문에 이런 사실은 외부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포목점 집 주인을 통해 일제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기 위해 내색을 하지 않고 동태만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번의 병원 방문 이후 선새은 세 달이 지나도록 병원과 연락을 끊고 있다. 낌새를 채고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석도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사실 가슴 통증 때문에 정기적인 진통제 처방을 받아야 했으나 선생은 작은 병을 핑계로 자리를 비울 한가한 시간이 없다고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냈다.

독립군 조선 파병의 시기를 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휴의와 접선이 성공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다른 일들을 뒤로 밀어 놓게 만들었다. 조선으로부터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속을 태우고 있다. 장개석 군대는 악천고투하고 있다. 내전에서 말로는 앞서 가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자들에 뒤쳐지고 있었다. 전세가 역전된 곳도 있었다. 그들은 민심을 잡는데 실패하면서 군대는 점차 쪼그라들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단체들은 그런 변화를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장개석을 외면하고 모택동의 사회주의 쪽으로 붙는 단체들도 생겨났다. 그들과 접촉하면서 조선독립도 그런 쪽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였다.

선생은 임정이 갈라지고 노선 싸움을 하고 사분오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당 대표들과 수시로 자리를 마련했으나 생각이 다른 그들을 하나로 모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독립군 조선 파견에 대해서는 시기의 문제일뿐 이견은 없었다. 임정은 서둘렀다. 훈련된 일차 병력을 먼저 조선으로 파견하기 위해 선생은 미군 쪽과 은밀히 접촉했다. 그들로 부터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다는 정보를 얻으면서 선생의 마음은 급해졌다. 독립군 활동이 미미한 상황에서 일본의 패주는 임정에 대한 발언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임정이 힘을 갖고 패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독립군 파견은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였다.당장 이달 13일을 디데이로 삼을까 하오. 너무 이르단 말이오. 서두를 필요가 없소. 조선독립군 병력 일부를 태평양으로 보내야 합니다. 거기서 적의 숨통을 끊으면 일본은 조선에서 떠납니다. 급소를 놔두고 왜 어렵게 돌아가려 하시오. 미군 정보대장은 주석을 바라보며 부하에게 명령하듯이 대꾸했다. 적의 숨통은 태평양이 아니라 조선이오. 조선의 보급망을 끊으면 적은 자연히 숨통이 끊어져요. 왜 그걸 모르시오. 선생도 지지 않고 받았다. 작전은 내가 당신보다 잘 알아요. 그러니 두 말 없이 조선독립군 일개 사단을 내놓으시오.

선생은 혹을 떼려다 혹을붙이는 결과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결정권은 자신이 아닌 미국측에 있었다. 선생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 싫으면 지원을 중단하겠소. 이 한마디는 선생의 다리 힘은 풀어졌다. 그는 이런 식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머지 2개 사단은 조선 투입용이니 어떤 경우도 차출하기 없기요. 알았소. 그것은 내가 약속하오. 이것으로 급하게 추진됐던 만주 기지에 있던 독립군 삼공삼 사단의 조선 침투는 좌절됐다. 여기서 독자들은 나머지 2개 사단을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병력은 최근 급조된 것으로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개인화기 지급도 삼십 프로 정도에 머물러 있다.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사람을 어찌 군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을 파견한들 무슨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선생은 우선 급한 것이 개인 화기라고 했다.총을 주시오. 개인화기와 일개 소대당 두 대의 기관총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이 말만 한다고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생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아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부족하지만 돈을 조금 가지고 왔소. 이것으로는 기관총 서너 대 값에도 부족하지만 성의로 봐주시오.

선생은 함께 온 사무관의 가방을 받아 미군 대장에게 인계했다. 파이프 담배를 피던 그는 입술 사이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받은 가방을 한쪽으로 밀었다. 아마도 그 돈은 개인이 착복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우리의 목표는 무기의 획득이다. 알았소. 정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협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돌아가서 잘 말할 테니 기다리시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요. 그리고 참, 훈련 장교 한 명도 지원해 주겠소. 그가 일어서면서 선심을 쓰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은 미군 장교가 돈 가방을 들고 나가는 민망한 순간을 보지 않기 위해 서둘러 악수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선생은 차에 올랐다. 두어 명의 사내들이 그림자처럼 뒤를 호위했다. 멀찍이서 신호를 받고 움직이는 그들은 선생이 미군 안가를 빠져나올 때까지 사방을 서성였다. 말수는 선생이 탄 검은 차를 예의 주시했다. 매연을 뿜으며 시내로 들어가는 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수는 지켜보았다. 저 정도의 경호는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매우 허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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