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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일단 포목점 사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선생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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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포목점 사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선생은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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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기 위해 편지를 다시 읽었다. 아버지 전상서,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점례는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났다. 진짜 아버지,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그동안 점례는 애써 기억에서 지웠다. 생전에 아버지를 보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지, 그건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아버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다. 무덤조차 보지 않겠다. 막걸리 한 잔 따라 놓고 절하지도 않겠다. 그럴 자격이 없다. 점례는 철저히 부모로 부터 떨어졌다. 자신의 의지라고 했으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전상서라니.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잊고 있던 아니 애써 그러려고 했던 잊혀진 한순간이 자신을 소에 달린 쟁기처럼 억지로 그곳의 어느 한 때로  끌고 갔다. 주름진 얼굴의 아버지, 수확의 기쁨도 잠시 지주에게 거의 전부를 뺏긴 아버지는 그래도 이것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고마우냐고 웃었다. 그날 가족은 모여 앉아 흰 쌀밥을 먹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먹어보는 쌀밥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릇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연신 먹어, 먹어봐 점례야 하고 재촉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주재소에 끌려갔다. 죽마을 읍내서 열리는 소작쟁의에 참여했다 모진 고초를 당했다. 만신창이로 돌아온 아버지는 절망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십 년은 더 늙어 있었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밭고랑보다 더 깊고 넓었다. 그 주름을 점례는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너무 놀라 그만 종이를 찢어 버렸다.

아직 덜 마른 물감이 얼굴에 튀었다. 점례가 눈을 떴을 때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의 참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멋진 옷과 값진 모자를 쓰고 세상을 호령하는 또 다른 아버지. 점례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진짜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무서웠다. 나의 아버지, 점례는 속 깊은 곳에서 사냥개처럼 달려드는 감정을 어찌해야 몰라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금세 추스렸다. 파도처럼 왔다가 금세 밀려나는 그까짓 감정에 자신을 오래 가두고 싶지 않았다. 슬펐다가 기뻣다가 이리 저리 쓸려다니는 그런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점례는 거침없이 그리듯이 그렇게 써 내려갔다. 점례가 편지를 마쳤을 때 유마는 여전히 책상위에 놓인 편지 주변을 서성였다. 그도 아버지 전상서로 시작했으나 한 줄을 써놓고는 더 내려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필체에 눈을 고정했다.

점례는 조심스럽게 유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그는 원래 늦게 쓰는 스타일이고 점례는 일을 질질 끌지 않는 차이 뿐이었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를 보낼 것이고 아니면 둘을 혼합해서 다시 쓰던지 하면 된다. 마감 시간이 있는 원고가 아니다. 그러니 하루 이틀 답장이 늦는다고 문제 될 것도 없다. 점례는 화구를 챙겼다.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유마에게 주었다. 크고 짙은 눈썹 사이로 예의 옅은 미소가 돋아났다.

화랑에 나갈게요. 기다렸다 같이 갈까요? 아니, 난 좀 써야 할 게 많아. 당신은 글도 잘 쓰고 잽싸게 쓰고 난 느려. 당신의 재주가 부러워. 빠르다고 좋은가요? 글은 당신을 따라갈 수 없어요. 알잖아요? 당신은 일본 최고의 작가가 될 겁니다.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면 그때는 모른 체 하기 없기요. 점례가 의도적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잠깐 감돌았다. 그런 말을 하는 저 여자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내 편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나는 아버지와 멀어질 수 있어도 점례와 나는 아니다. 유마는 먼 이국에서 점례에게 의지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방안을 이리저리 걸으면서 자신의 그런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가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쓱쓱 써 내려갔다. 그랬다. 글은 유마였다. 점례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점례는 문장이 부족했다. 사람 심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마는 달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앞뒤 글이 매우 유려했다. 무엇보다 느리게 쓰면서도 너무 늦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신이 느렸다는 것을 알고는 더 늦지 않도록 속도를 낸 것이다. 한 번 탄력이 붙자 구보에 준하는 속보의 글쓰기였다. 느린게 아니었다. 목적지는 토끼보다 빠른 거북이였다. 어떤 사람이 하루를 숙고해 끄집어낸 문장보다도 나았다. 

당신은 글을 써야 해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글. 점례는 유마가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이렇게 말했다. 유마도 알고 있었다. 그림보다는 글씨라고. 그는 편지에서 일단 이것을 강조했다. 그래야 집중하는 대상이 그림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아버지 저는 화가보다는 작가가 될 것 같아요. 점례의 화상으로 만족하고요. 조선에서 삼촌이 점례의 화상이었다면 파리에서는 제 몫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올 연말에는 책 한 권이 완성됩니다. 제목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나와 점례예요. 어때요? 근사한가요. 점례 그림은 신이 났어요. 한 마디로 가는 말에 째칙질입니다. 놀라움의 연속은 점례를 통해 매일 매일 확인하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곳 화단의 평가도 그런쪽으로 가고 있어요. 아버지 그런데...

유마는 여기까지 쓰다 그만두었다. 갑자기 휴의와 완용이라는 조선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의와 완용을 아버지는 어찌 알았을까. 이들이 총독부 습격의 주인공들인가. 하나는 습격하고 하나는 방어한 묘한 관계. 어쩌면 이들의 존재를 점례가 알고 있지는 않을까. 유마의 상상은 엉뚱한 곳으로 마구 흘러갔다. 인사동 음식점에서 보았던 경찰이 그 중의 한 명은 아니었을까. 종로서장 완용이 그 인물인가. 점례는 내가 자신을 보는 눈길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점례의 스쳐 지나가는 눈짓에서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바로 그 자라는 표정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경찰이었던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점례의 눈은 그를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상대가 알면 곤란한 입장인 것이 입가에 머물렀었다. 맞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렇다면. 점례와 휴의와 완용이 서로 아는 관계로 묶여 있다면. 그럴수도 있지. 한동네서 자랐다면. 우연의 일치치고는 묘하지만. 그래서 알고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있나? 없을수야 없지. 완용은 그렇다 쳐도 휴의라는 자가 문제지. 그 자는 우리 일본의 적이고 아버지의 원수.

유마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음에도 편지를 마무리했다. 꾸물거리면 더 쓰기 싫어질 것을 알기에 그는 쓰다만 편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길이를 재고는 서둘러 마무리했다. 유마는 아버지와 대결을 피했다.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자는 이야기에 대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못되게 구는 자식이 아니다. 전쟁에 지면 분명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유마는 언급할 수 없었다.

전쟁을 잊었으나 일본이 진다는 생각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자 유마는 의도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거울에서 보고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단어이기에 발로 차버리는 시늉을 했다. 싫어, 난 전쟁이 싫어. 신물이 나.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어가는 자의 비명을 듣는 것도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보는 것도 맥막이 끊어질 때 내는 짐승같은 그르렁 거리는 짐승의 몸부림도. 유마는 다시 방을 어슬렁 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편지로 돌아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은 있는지 살펴보고 미심쩍은 부분은 들어내고 다시 썼다. 내가 그렇게 강조한 것을 너는 왜 모르니? 같은 반문을 아버지에게 주는 것을 삼갔다. 전쟁은 물론 일본 내 정계 움직임에 대해서도 유마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화난 아이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신 자기의 이야기와 점례의 그림에 대해서만 길게 썼다. 아버지 옥체를 보존하세요. 내년쯤 아니 내 후년쯤 일본을 방문할 겁니다. 그 전에 아버지가 파리에 한 번 오셔도 좋구요. 3년 전에 오셨던 파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나쁠 게 없겠지요. 그때는 가능하면 어머니와 함께라면 좋겠어요. 어머니도 파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더 늙으시기 전에 여기 오시면 어머니 추억에도 깊은 인상이 남겠지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못난 아들 유마가. 1944. 10. 13. 편지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됐다. 

그 무렵 상하이의 병원에는 작은 긴장감이 떠돌았다. 포목점 집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보다 조금 일찍 젊은 조선 남자를 치료하기 전까지는 말수는 오로지 병원일에만 집중했다. 이런 저런 골치아픈 일이 생기면 말수는 그렇게 했고 그러면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다. 난 의사 체질이야. 정말 직업 하나는 끝내주게 잘 선택했다고.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말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뭔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자기 내부에 있는 울분을 잠재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머리에 있는 액운을 아래로 힘있게 찍어 누르는데 그만한 것이 따로 없었다. 그러면 언젠가는 오겠거니 했던 아픔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고 꽃을 가꾸기도 했다. 좋은 것만 보고 듣기 위해 고립된 전선의 병사처럼 그야말로 의식적으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그 사투는 죽음이 아닌 생이었고 피가 튀지 않고 따뜻한 온기가 흘렀다. 고향 통영도 그렇다. 가끔 떠올리는 것은 피묻은 칼을 들었어도 종국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지 때문이다. 그 같은 이유 때문인가. 온갖 기괴한 상념 속에 있지 않으면 일부러 호주머니 속의 먼지처럼 통영을 꺼내 들었다.

그럴때면 바다에 달려들었다. 여름날 고운 백사장을 끼고 도는 낮은 파도를 향해 마중가듯이 그렇게 바다를 품에 안고 마주 달려나갔다. 배를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노를 젓고 그물을 들어 올렸다. 힘이 들어도 그 순간은 뱃전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심장도 가파르게 뛰어올라 나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외침이었다. 그러다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처단하는 장면에 이르면 말수는 살인 직전에 쥔 똑같은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이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고기만도 못한 놈은 양념을 넣고 끓인 매운 잡탕이었고 숯불에 구운 생선에 불과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상황이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상의 한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른 장면으로 이어졌다. 지루할 새가 없었다. 막간극의 중간 단계가 사라졌지고 바로 방화와 살인으로 이어졌다. 말수는 지금껏 그 때 죽은 자를 위해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 자가 스스로 죽지 못하고 타인의 손을 빌린 것은 되레 죽은 자가 죽인 자를 위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죽어가면서 그들은 말수에게 죽여줘서 고맙다고 말했어야 옳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했다. 이렇게 말수는 통영의 시절을 확실하게 정리해 두었다. 그 일은 언제나 아련한 것으로 남아 있을 뿐, 기억하거나 거부할 일은 아니었다.

노무자로 끌려가 태평양 어느 섬과 그 섬에서 여순을 만났 던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부와 뼈를 다루는 칼솜씨가 좋았던 덕분에 의사행세를 했던 그 시절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입가에 미소가 엎질러진 물처럼 번들거렸다. 어딘가에 있던 행복한 순간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말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그처럼 자신의 전부를 녹여 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부상병을 치료하는데 모든힘을 쏟아부었다. 째고 자르고 꿰매면서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았다. 자다 일어나서 들이닥친 젊은 피를 위해 또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말수는 거뜬했다. 간혹 졸려 칼잡은 손 그 상태로 존 적은 있어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환자가 신음하면서 자신의 몸과 말수의 손 사이에 있던 실을 잡아 당겼다. 그는 그 정도 일 외에는 다른 것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꾸 실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말수는 눈을 떴다. 마저 꿰매줘요. 입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말 대신 피가 흘러 말은 새어 나오지 못했으나 아직 남아 있는 입술이 조금씩 달싹거렸다. 말수는 그런 병사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일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벌어진 상처를 몇 번의 손놀림 후에 합쳐 놓았다. 그러고 나면 센 파도 같던 불안은 사라지고 평온만이 남아 돌았다.

광산에서 곡괭이 질을 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었다. 해도 해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에서는 보람이나 만족은 없었다. 같이 삽질을 하는 동료들은 동료가 아니었고 짐승과 다름없었다. 자신의 작은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이용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그들을 벗어난 것은 시시적절했다. 조금 더 그 상황이 연장됐다면 다이너마이트가 아닌 자신의 곡괭이에 남아날 자가 없었을 것이다. 구더기 속을 탈출한 파리처럼 말수는 자력으로 날아서 그곳을 탈출했다.  날고 쉬고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다리 많은 똥파리. 말수는 파리의 생활은 할 수 있으나 구더기 생활은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는 벌써 흙이었다. 백태가 낀 눈, 썩어 가는 몸통, 흐르는 물과 드러나는 뼈다귀. 시간은 흘러 백골과 섞여 흙이 된 자신을 말수는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목뼈와 분리된 해골을 들어 올렸다.

이게 나다, 말수. 턱이 이빨과 분리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수는 머리뼈를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여순이 장식해 놓은 예쁜 꽃이 놓여 있었다. 여순을 간호사로 쓰자고 제의한 것은 진짜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말수는 여순을 통해 삶의 의지를 다졌고 미래를 꿈꿨다. 언제나 그늘에서만 자라지만 그 어느 꽃보다 향이 좋은 난초. 물 한 모금으로 한 달을 버티는 그런 여자 여순. 기어 가서라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 행복. 그리고 이곳 상하이. 이런 기억은 수시로 소환해도 좋았다. 죽음 앞에서 사랑을 나눴던 일, 사이판의 무너진 성당 잔해 속에서 살자고 다짐했던 맹세는 그 무엇보다도 숭고했다. 말수는 내려놓았던 해골을 다시 들었다.

뼈와 근육과 살점은 다 어디로 갔는가. 말수는 든 해골이 가벼운 이유를 알았다. 백골과 눈이 마주쳤다. 말수는 자신과 여순도 나란히 흙 속에서 썩어 백골이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산 말수가 죽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처참한 광경들 가운데 그중 제일 나았다. 그럴 때면 환자 치료용 마약에도 손을 댔다. 기분을 더 끌어 올려야 한다. 대마초는 약하다. 말수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을 때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미스터리한 인물이고 싶었다.

여순 말고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이런 내 욕망에 여순도 동의할 것이다. 과거는 보자기에 싸서 꼭꼭 묽어 놓고 절대 풀지 않으리라. 그녀도 나 말수 이외에는 자신의 과거를 세상의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알아야 할 것만 알아야 한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면 위험한 일이다. 이제 우리 둘의 지난날은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다. 조선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한의사였고 일본에 유학 간 엘리트 여자.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종군의사로 참여했고 부상을 입고 상하이에 왔으며 전쟁터에서 수많은 일본인을 살려낸 전쟁 영웅. 어떤 상황에서도 병실을 떠나지 않은 백의의 천사.

부상 때문에 전선 대신 상하이에 터를 잡은 조선인이며 일본인. 이것이 이들 부부가 공식적으로. 대내외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살아온 삶이다. 둘은 그렇게 잡은 행복을 놓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그 손이 팔 근육처럼 단단해졌다. 고통의 흔적은 떠났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그래, 술을 먹어야지. 필요하면 약도 좀 먹자. 말수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고 기분을 위로 끌어 올렸고 싫은 것에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때는 행복이 가슴까지 치솟아 오를 때였다. 바람이 부는 날 펄럭이는 치마를 입고 들판을 달려가는 여순이 보인다. 데이지를 한 아름 꺾어 들고 마주 달려오는 남자는 멋진 사나이 말수다. 그들은 이제 짐승을 벗어나 사람이 됐고 사람 가운데서도 좋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긍정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런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포목점 집주인을 만났다. 젊은 조선 남자를 치료했던 것이다. 세상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던 시기였다. 조선독립운동을 알았고 국공합작이니 내전이니 하는 말도 들었다. 그는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읽었다. 시내 도서관에서 미국의 잡지도 찾았다. 언제나 여순도 동행했다. 

여보, 어제 타임지를 봤는데 전선이 일본 쪽에 유리하지 않은가 봐요. 일본이 진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는데, 과연 일본이 질 수 있을까요? 그래 어디 줘 바. 나도 좀 읽어 보자. 말수가 손을 뻗어 탱크위에 올라가 성조기를 흔드는 군인이 표지로 나와 있는 타임지를 받았다. 정말 일본이 패자라고? 그러게요. 나도 그런 생각은 처음 해 봐요. 그런데 조선독립운동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임정은 조선에 상륙시킬 대규모 부대를 모아 훈련 중이라고 하던데요. 다른 소식 들은 거 없어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포목점 주인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 사람을 일부러 만날 생각은 없어. 알려줄 일이 있으면 먼저 찾아 올거야. 윤사장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거든. 잘 생각했어요. 그 사람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안 사람은 좋아 보이지만. 얼굴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아요.

나도 그럴 생각이야. 그래서 깊은 속은 드러내지 않아. 믿을 수가 없거든. 둘은 이런 대화를 하기도 했다. 어려은 질문도, 어려운 답변도 아니었다. 해골을 들었던 손을 놓고 잡지를 들고 말하는 말수와 어느 새 놀 틈도 없이 바느질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여순은 일상의 어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각자 환자를 받았고 그러다 보면 또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일상이 유지될 때 여순은 불행하지 않고 행복했다. 행복하다는 것을 여순은 알았고 그래서 하루가 무척 소중했다.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은 내일의 행복을 기다린다는 의미였다.  내일도 오늘 같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녀가 꿈꾸는 일과였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고 하는 일도 마음에 들었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말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던 사내가 온순한 사람으로 돌아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멀미로 검은 물을 흘리며 고통 받던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고 춤추었던 뱃사람의 기질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섭기만 했던 그가 행복의 원천이 될 줄은 여순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솟는 물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숱한 죽음의 문턱에서 생사를 같이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을 맹세 했지만 여순은 하루에도 여러 번 말수의 존재에 대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어떤 때는 숨 쉬고 있는 공기보다도 좋았다. 그러면 여순은 아이들처럼 코를 막고 숨을 쉬지 않으면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곤 했다. 일 분을 넘기고 삼십 초가 더 지나면 여순은 손을 털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더 견디기 어려운 순간까지 왔을 때도 여순은 산소는 없어도 좋으니 말수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다짐했다. 병원을 개업하고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작은 일들이 없을 수야 없었지만 화가 났을 때도 말수는 좀처럼 여순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가 막사의 그 일을 연상할 만한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의 그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당하게 내 인생의 중앙을 차지하는 그는 내 드라마의 주연이었다. 그것이 여순은 고마웠다. 나에게 또다른 선택의 순간이 벼락처럼 달려온다고 해도 말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다 말수와 연관이 있었다. 여순은 일상에서 그의 가슴과 어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말수는 여순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침착했다.지옥을 견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영적인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힘은 환자를 대할 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술을 먹고 약을 하지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 한꺼번에 두 명의 외상환자가 들어왔다. 차가 뒤 집어져 운전사와 동승자가 실려온 것이다. 온몸이 피투성이여서 상처 부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보니 남자는 턱과 어깨를 심하게 다쳤고 여자는 팔과 발목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수는 그런 환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환자보다 자신을 먼저 안정시키고 우선 급한 부위부터 틀어막았다.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가면서 이리저리 왔다가 갔다 했다.

여순도 날세게 움직였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나이프를 건네주었고 붕대를 감았다. 얼추 두 어 시간의 사투가 끝났다. 그야말로 녹초가 됐다. 마지막 남은 촛농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둘은 기진맥진 상태였다. 그러나 말수는 지친 표정을 하거나 더는 손을 쓸 수 없다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되레 여순의 피묻은 손을 닦아 주면서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 당신이 먼저 씻으세요. 아냐, 씻을 사람은 내가 아냐. 거울 한 번 봐, 어디서 흠씬 두둘겨 맞은 여자 같아. 정말요? 내가 어디가서 맞고 올 사람 처럼 보여요. 그렇다니까, 다른 날은 아니어도 지금은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씻어. 말수가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루는 의사를 한 명 더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때의 그 너그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수가 물었다. 이미 정해 놓고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는 태도였다. 여순은 망설였다. 의사 한 명을 더 두는 것은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구를 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직 다른 의사를 여순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용 의사를 둘 만큼의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중한 말수가 꺼낸 말이니 새겨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일전의 그 일을 겪고 나니 여순도 마음이 흔들렸다.

하나의 환자가 퇴원하고 다른 환자가 들어오는 순서가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몰려올 때는 아무리 능숙한 말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다.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놓치는 것이다. 여순은 서로 생각 좀 더 해보고 나서 결정하자고 했고 말수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여순은 벌써 한 명의 외과 의사가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무렵 포목점 집 주인이 팔을 다친 아들을 데리고 말수를 찾았다. 한참 만에 본지라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들은 팔이 부러져 석고로 감았는데 한 달 정도는 있어야 뼈가 붙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흔한 일이니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다행히 심하지 않으니 잘 아물 겁니다. 윤사장은 말수의 실력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아들 병문안을 핑계로 남자는 한 달새 세 번이나 말수를 찾았다.

하루는 그가 말했다. 의사 선생, 의사 하나가 필요하지 않소. 듣자하니 일전에 두 명의 환자를 한꺼번에 살렸다면서요. 대단한 의사라고 이곳 한인촌에도 소문이 자자해요. 그러나 세 명이었다면 어쩔 뻔했소. 환자 하나는 죽었지 말입니다. 말수는 남자의 입을 쳐다봤다. 다음 말이 궁금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괜찮은 의사 하나 소개할게요. 월급은 일반 노동자보다 조금만 더 줘도 될 것 같고... 능수능란한 의사가 아니라 초보예요. 가르치면서 데리고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단번에 선생처럼 그런 경지에 오를수는 없지만 조선에서 성실했다고 합디다.

그가 말한 의사는 자신의 황포군관학교 동료의 조카라고 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왜놈들 꼴 보기 싫다고 무작정 상하이로 온 젊은이였다. 한 번 만나보시지요. 지금 우리 집에서 숙식하고 있는데 본인도 어서 떠나고 싶어하고...아마 미안해서 겠지요. 수술을 해 본 경험이 있기는 있는 모양 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말귀는 알아들을 것 같아요. 말수가 뒷머리를 긁으며 남의 병원일에 오지랖이 넓다는 듯이 즉답을 피하자 쓰고 안 쓰고는 의사선생 마음대로이니 한 번만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만나달라고 남자는 사정조로 말했다. 사실 말수는 당장에 오케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순이 정해둔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 망설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순의 답변은 명료했다. 한 번 만나나 보지요. 여순이 이렇게 나오자 말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윤사장이 말한 젊은 청년이 왔다. 둘이 같이 면접을 보기로 했다. 처음에 거절했으나 말수가 꼭 참석하라고 해서 여순은 차를 내온 핑계로 그대로 잠시 눌러앉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말수가 여순을 참석시킨 것은 관상에 대한 그의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 작용했다. 전장에서 숱한 사람의 얼굴을 봤던 말수는 관상과 생명과 신의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고 봤다. 과학까지는 아니어도 절반 이상은 관상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말수의 생각이었다. 젊은이가 떠나고 나서 말수는 여순이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배신할 관상은 아니고요. 더구나 남을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얼마나 성실히 병원 일을 할지는 조금 걱정이 들어요. 너무 열정적인 얼굴상이거든요. 그건 걱정마. 보조 역할만 해주면 돼요. 간혹 내가 없을 때 오는 환자를 일단 살려만 놓고 보는 일이 중요하잖아. 그일 정도는 할 수 있게다 싶어. 그럼 사람을 보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할까? 말수가 내친김에 서둘렀다. 여순은 마침 의사가 필요한 마당에 잘됐다 싶으면서도 선뜻 찬성할 수 없었다. 살림하는 여자의 벽이었다. 내일이라고요? 안돼요. 너무 빨라요. 다음 주 월요일은 4월 첫날이니 월급을 계산하는 데도 편해요. 그리고 그 사람도 하루 이틀 정도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 당신 말이 맞군.

이렇게 해서 면접을 본 젊은 조선 청년은 말수의 병원에서 월급받는 의사가 됐다. 여순은 일요일 내내 초조했다. 안절부절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킬 정도였다.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는 사람이 아닌 여순이 이런 것은 어떤 큰 이유가 있었다. 어떤 것이 와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여순의 이런 태도는 뭔가가 그녀를 심하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강한 타격이라기 보다는 마음 깊은 곳을 할퀴고 간 상처였다. 아니면 혈연과도 같은 어떤 치명적인 것, 남자가 아닌 여자가 지녀야 하는 타고난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번 면접 본 의사가 체한 것처럼 자꾸 마음에 걸렸다. 왜 내가 흔쾌히 승낙했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알고 있었다면 대체 그는 누구인가. 여순은 이런 자문을 하면서 심장이 울리는 고동소리를 귀로 듣고 있었다. 보이차를 내오면서 슬쩍 본 그 인상이 자꾸 파리떼처럼 귀찮게 눈 앞에 어른 거렸다. 당시는 몰랐으나 그가 가고 나서 부지불식 간에 들었던 그 생각이 밤을 새고 나서도 여전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 넓은 중국땅에서 여순이 알 만한 조선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세상이치였다. 그런데 어딘지 낯이 익은 듯 하고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남자.누구지? 그녀는 이층의 자기 방을 나와 창밖으로 밖을 내다 보면서 가볍게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문득 설마, 설마 그가. 그럴리 없다. 그가 여기 올 일이 있을까. 더구나 의사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다. 잘못 봤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렇게 부인할수록 여순은 자신이 본 사람이 휴의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사로잡혀 이제는 그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순간 든 생각은 휴의라면 나에게 낭패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이내 그렇다는 답을 내놨다. 그렇다 낭패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커다란 돌멩이다. 파문이 일 것이다. 어쩐다. 그가 맞다면 자신은 일요일 오후에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니면 월요일 그가 출근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휴의라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마가 넓다. 긴 머리로 감췄다고 하지만 얼핏 본 관상은 큰 이마가 아니었다. 코도 오똑 하지 않았고 광대뼈가 들어갔다. 목소리도 사내 답지 못하고 조금 여성스럽다. 아닌 쪽으로 여순은 자꾸 남자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그러나 눈빛은 아니다. 그대로다. 이것마저 부인할 수는 없었다. 죽마을에서 봤던 바로 그 눈동자다. 그 눈동자,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의문은 사라지고 확신만이 여순을 지배했다.

그러나 틈은 있었다. 내가 확신하는 만큼 그도 나를 확신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나처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치지도 않았다. 그저 고맙다고 찻잔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처음 본 사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뭐지? 이건. 나와 달리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순은 종잡을 수 없었다. 평정심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차분하자, 마음을 진정시키자며 자신을 위해 커피를 내렸다.

검고 뜨거운 것이 식기도 전에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여순은 목이 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뜨끔했다. 한 대 세게 맞은 듯이 얼얼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내 일상에 왜 이런일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분주히 거실을 서성였다. 잔이 조금 흘러 손등을 적셨다. 데일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뭐가 걱정이지. 휴의라고 해도, 휴의가 나를 알아 봤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지? 여순은 문제가 아닌 쪽으로 주문을 계속 걸었다. 그러자 정말로 조금 진정이 됐다.

휴의가 아닐수도 있고 휴의라고 한들 말수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를 만큼 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라야 누군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혼사가 오간 것도 아니다. 내심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괜히 마음을 졸였다. 그 사실을 설사 말수가 안다고 해도 나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마을 사람을 만났다고, 조국에서 사람이 왔다고 되레 환영할 지 누가 알겠는가. 

애초 조금 있었던 불신도 사라질 것이고 서로 의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손을 잡고 흔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휴의였다. 내가 여순인 것을 알면 휴의는 지난 5년 동안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가 물으면 적당히 둘러대면 되고 묻지 않으면 그냥 저냥 넘어가도 된다.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여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물을까.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나에게서 그에게로 생각이 정리되자 여순은 문득 점례와 완용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들은 살아 있을까. 조선에 있을까. 아니면 자신처럼 중국땅으로 건너왔을까. 고향이 그리워졌다. 의식적으로 떨쳐냈던 고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부모님 그리고 어린 동생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여순은 늘 그렇듯이 애써 지웠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은 가족이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고향 따위는 잊자고 했다. 굳이 잊은 것을 되살릴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정도만 기억하자. 여순은 느긋하게 잔을 들었다. 식기 전이라 커피 특유의 신맛이 올라왔다. 뜨거움 대신 딱 먹기 좋은 상태였다. 여순은 이 상태가 좋았다.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딱 이같은 상태.  맛있어. 향이좋아. 커피맛을 안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커피가 자신의 일상에서 조용히 파고 들어왔음을 느꼈다. 즐거운 순간이었다. 

한편 독자들은 휴의가 어떻게 용희네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게 됐는지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할 것이다. 포목점 집 주인의 소개라는 것과 조선에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다 불현듯 중국으로 건너온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조카 였다는 것은 앞서 밝혔다. 그러나 와전이 됐는지 말수와 여순은 휴의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 휴의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국민당이 만든 중앙정치학교를 일년 남짓 다닌 정도였다. 인재양성기관인 이곳을 휴의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들어갔다.

졸업하지 못한 것은 그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지시로 총독부 급습에 필요한 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경성의전 졸업도 사실과 달랐다. 그는 그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다. 중국에 와서 잠깐동안 병원에서 시중을 들던 중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였다. 짧은 기간 이었으나 간단한 수술은 의사처럼 해냈고 증상에 따른 처방도 나름대로 내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직업에 임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해냈수 있는 실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휴의는 열성이 대단한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 덕분에 면접도 무사히 통과했고 의사 노릇을 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가 됐다.

총독부 습격후 노량진에 숨어 살 때 그는 의사인 것을 숨겼다. 의가사 아니었기에 수민 것은 아니지만 그는 환자를 만나는 대신 많은 책을 읽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학식을 쌓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조선어학회 사람들과도 접촉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불의에 대한 젊은 피의 저항이라는 구조를 깨고 보다 근복적인 식민지 탈출의 이론적 근거를 하나씩 쌓았다.불만을 터트리는 단순한 머리에서 문제 해결의 원인을 찾아 나가는 복잡한 과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숨어서 나라를 찾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금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조선말을 할 수 없고 조선글을 쓸수 없고 조선이름도 빼앗겼다.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됐다. 자기 결정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흔들리던 휴의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세상이 바뀌어야한다. 그는 남들도 자신처럼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데 놀라기도 했고 힘이 됐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늘어갔다. 일경에 쫓겨 지내던 반 년의 기간은 휴의에게 자신이 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해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화가 나서 혹은 누구의 지시로 그것도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신념은 이런 것이었다. 정의는 바로 세워야 하는 가치였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시기였다. 휴의는 소변병사의 49재를 지내고 이것을 알았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은 분명했다. 나라말과 나라 글이 없어지면 민족이 없어진다고 했다. 민족말살 정책의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일제는 그것을 알기에 우리말대신 일본어를 쓰고 우리글 대신 일본글을 쓰라고 강요했다. 민족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강력한 힘인데 그것이 없어지면 조선민족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긴 세월동안 나라가 유지 될 수 있었냐고 그들은 반문했다.

독립을 위한 힘은 바로 민족에서 나왔다. 그들이 조선을 개화하는 것은 우리 민족 잘 되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수탈을 용이하게 하고 민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철길을 보고 그래도 잘 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것에 휴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어두운 길거리를 밝히는 전등을 보고 때로는 일제가 고맙다고 했으나 그 역시 아둔한 생각이었다.

일제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면서도 민족을 차별했다. 민족차별은 조선민족이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앞길을 가로 막는 행위였다. 너희 민족은 게으르고 멍청하고 그러니 맞아야 하고 고문 당해야 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운명공동체를 깨는 것이었고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는 이유였다. 그들은 민족을 배신하라고 했다. 운동가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었다. 민족은 갈라졌고 사분오열 흩어졌다. 휴의는 사라진 민족에게 저항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독립운동도 없을 것이다. 휴의는 한동안 있었던 방황을 끝냈다. 상하이로 온 그는 선생을 만나고 긴 시간동안 조선에서 있었던 총독부 습격과 조선 민중의 동태를 상세히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이차 공격을 준비 중이오. 빠를수록 좋지만 서두르다가 실패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휴 동지가 의사 생활을 좀 해야겠소.휴의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동지는 어디에 묵고 있소. 시내 장터내에 있어요. 포목점 이군요. 네, 그래요. 선생님이 주신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그런데 이젠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포목점 주인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상하이에서 이름난 외과의사가 운영하는 부부 병원인데 조선인이오. 대외적으로는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에도 관심이 있다는 첩보가 있어요. 거기 가서 일단 그 사람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한 달 후에 봅시다.

한 달 후에 보자던 약속은 삼 일 후로 당겨졌다. 임정은 급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미군 특수부대는 여러 번 거절했던 조선독립군 폭파전문가 양성을 승인했다. 장교급으로 똘똘한 녀석 한 명 급해 보내시오. 한 달 동안 무료 교육 시켜 드립니다. 간단한 문장을 받아든 선생은 급하게 휴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례하게 하루 전에 통보해서 이틀 후에 보내라니. 이런 경우는 드물어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 처지에 그런 것을 따질 게재가 아니라는 것을 휴동지도 이해해 주시라 믿어요.

선생은 미안했던지 미군을 탓하면서 휴의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선생은 자신도 판단을 잘못할 수 있고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면서도 선생은 결정된 사항을 바꿀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휴의가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미군들은 우리보다도 성미가 더 급하다는 점만 알고 넘어갑시다. 휴 동지, 오랫동안 기다린 일이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는 할까요. 망설일 수 없었어요. 바로 오케이 했지요. 동지의 의사를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양해를 바랍니다. 병원을 가기 전에 통보를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디 일이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던가요. 선생이 거듭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나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빚을 많이 지고 있어요. 동지들 한테 빚만 지고 있으니 언제 다 갚을까요? 휴의는 멍했으나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이해했다. 그도 선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면접까지 보고 거기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새로운 일이 맡겨졌다. 휴의는 대답했다. 해야지요. 하겠습니다. 저도 늘 폭판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총만으로는 만족을 못했거든요. 뭔가 더 큰 화력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하늘이 돕고 있네요. 고맙소. 그렇게 이해해 주니 휴동지는 밎겠소. 선생이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그르칠 뻔 한 일에서 벗어나 무언가 해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한숨인 것을 휴의는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휴 동지의 작전은 변경됐어요. 그렇게도 원할 때는 거절하더니 이렇게 간단하게 승인이 떨어지는군요.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운명이라는 것을 꺼내 들기가 조금은 쑥쓰러웠던지 선생은 그 말을 하면서 조금 뜸을 들였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계획하지 않은 사건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독자들도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소설이라고 마구 편한 대로 쓴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난징의 모처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고만 믿으면 된다. 임정은 오래전부터 폭파전문가를 원했다. 건물 전체를 일거에 날려야 하는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선생은 실패의 원인보다는 건물을 폭파하는 계획이었다면 성공했을까 하는 가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것이 가능하냐고 신흥 무관을 통해 여러 차례 묻기도 했다.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주석은 우리측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순식간에 적을 무력화시키는 파급력 있는 공격이 어떤 것이 있을지 그날 이후 고심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군의 요청이 날아왔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임정은 바로 휴의를 낙점했다. 신뢰할 수 있고 대범하면서도 이해력이 빠른 휴의를 대체할 독립군 대장은 없었다. 조선청년을 생각했으나 그는 지금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동지이면서 부인에 대한 복수에 여념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그 일에 제격인 사람이 휴의였다. 애초 임정은 휴의를 의사로 침투시켜 그곳 병원장의 신뢰를 얻도록 했다. 그런 다음, 다음 단계로 나가는 모종의 작전을 짜려고 했다. 그 계획은 보류됐다.  첩보에 따르면 병원장은 폭파에 식견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규모와 단단함에 따라 폭약의 양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루트로 이같은 첩보를 임정이 입수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임정은 선생이 환자로 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어느 정도 말수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를 직접 투입할 수 없다면 그에게서 이론과 실제를 배운 휴의를 내세우려던 계획은 여기서 좌절됐다. 보류는 사실상 중단을 의미했다. 말수는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일본 영사관과 접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위험 부담을 무릎쓰고 휴의를 내세운 것은 그만큼 시기적으로 급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휴의는 믿을 수 있어 작전의 안전성 면에서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덜컥 끼어들었다. 미군의 개입은 미국이 독립군을 돕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거기다 최신 무기 구입에도 용이했으며 전쟁의 양상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선생이 휴의에게 새로운 임무를 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런 곡절을 휴의가 전부는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따랐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이 적임자라는데 아니라고 손을 내저을 형편이 못됐다. 다만 미안한 것은 병원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었다. 월요일 출근을 약속해 놓고 어떻게 못가겠다고 뒤집을 수 있을까. 병원장은 그렇더라도 차를 내오면서 같이 일해 보자고 웃음을 짓던 병원장 부인에게는 정말 미안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편했던 것이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열심히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졌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미행자가 없음을 확인한 휴의는 프랑스 조계지의 끝자락에 위치한 담벼락이 붉은 한 아담한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우선 급하게 전화를 한 통 해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병원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출근이 어렵다는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사전에 알려야 하는 것이 예의였다. 직접 가서 하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휴의는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장이나 병원장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되레 그 반대였기 때문에 휴의는 미안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나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장의 아내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뵈었던 의사입니다. 급한 일이,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빠지면 안 될 급한 일 때문에 월요일 날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음 목소리가 이어졌다.출근을 못한다면 화요일도 어렵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정말 면목 없네요. 그렇군요. 병원장에게는 이렇게만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래층에 계실지 모르지 잠시 기다려 주시면 바꿔드릴게요. 아니요. 아니, 됐습니다. 그냥 급한 개인 일 때문이라고만 전해 주시겠어요. 전화 통화하면 더 죄송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여순은 그렇군요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상대도 그녀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짧은 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여순이 생각하기에 그 순간은 짧지 않고 길었다. 여순은 뛰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화기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런데, 혹시? 남자가 어렵게 먼저 말을 꺼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아닙니다. 아네요. 제가 경성에 있을 때 뵙던 분이 아닌가 했어요. 착각입니다. 경성요? 저는 경성에서 산 적이 없어요. 시골에서 바로 일본유학을 떠났으니까요. 그렇군요.' 이번에는 휴의가 그렇군요를 따라하듯이 말했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어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해 거듭 죄송하고 병원장님께는 잘 말씀드리기를 부탁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해 드리지요. 이번에는 기다릴 것도 없었다. 동시에 수화기를 내려놨기 때문이다. 찰깍 소리는 휴의도 여순도 서로 들었다. 찰깍, 아니 철꺼덕이 맞았다. 철꺼덕, 휴의는 전화기를 놓고 돌아서면서 노리쇠를 전진했다 후퇴할 때 나는 바로 그 노리쇠의 전진 후퇴 소리를 연상했다. 후련하지 못하고 답답했다.

휴의는 창가의 자리로 와 쏟아지는 마음과는 달리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누가 보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답게 아주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의도적인 한가함과 여유로움이었다. 그는 손에 쥔 펜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시각 휴의는 여순이 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볶고 서양식 의복에 세련된 말투를 하고 있어도 여순일지 모른다, 부분은 아니어도 전체로 보면 여순이 맞을 수도 있다. 조신한 행동으로 차를 식탁에 내려놓을 때 언뜻 보았던 얼굴 윤곽이 여순이 아니면 다른 누구란 말인가, 휴의는 차를 한 모금 꿀꺽 소리가 나게 마시면서 그녀가 여순이라면 점례의 소식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의 끈을 잡아당겼다.

파리로 유학을 떠났어도 우편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지도 몰랐다. 느긋하고 나른한 오후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이때까지 였다. 휴의는 여순과 점례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바로 내일 모처에서 미군 요원을 만나 특별한 장소에 입소해야 한다. 기한은 한 달이라고 했으나 보름 정도면 끝날 수도 있다. 휴의는 최대한 빨리 폭약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생각이 여순에서 점례로 다시 폭약으로 이어지자 가슴 밑바닥이 서서히 끓어 올라왔다. 요즘 들어 이런 증상은 수시로 휴의를 찾아왔다. 휴의는 눈을 감았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폭약이 정말로 터졌다. 온몸이 찢겨 허공으로 살점이 날아 다녔다. 피 묻은 건더기들이 잠자리채를 피하는 고추잠자리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자리 날개를 잡아 뜯고 좋아라,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날개를 뜯긴 잠자리는 날개에 어깨 살점을 붙이고는 몇 번 퍼덕이다가 죽어 나갔다. 명줄이 좀 긴 잠자리는 날개 대신 꽁지가 잘린 경우였다.

자른 꽁지를 버리고 그 자리에 빳빳하게 마른 풀 줄기를 넣고 날리면 그것이 꼬리 역할을 하면서 서너 걸음 날아갔다. 그러나 더는 날지 못했다. 자기 꼬리가 아닌 남의 꼬리는 잠자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온전한 내 날개를 가지고 있는가. 순간 휴의는 이런 물음과 마주했다. 나는 내 의지대로 날 수 있는가. 어쩌자고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까. 어쩌자고 나는 남보다 앞장서는 일을 할까. 나 말고도 대신 나갈 요원은 있을 것이다. 존경하는 선생의 말이라고 해도 명령은 아니었다.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병원장과 약속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버텼다면 선생도 한발 물러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선택은 휴의 자신이 한 것이다. 그러니 후회는 없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쓰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좋은 세상은 두말하면 잔소리로 조선독립이다. 그것을 하다 배에 가스를 가득 채우고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또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팔도에 후방이 있었던가. 의병이나 의열단 열사의 죽음이나 조선의용대는 열악한 환경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최상급 대우를 받고 있다. 영어를 조금 익혔다는 이유로, 선생의 신임을 받았다고 미군 특수부대의 일원이 되고 있다. 이는 정말로 특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휴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조선총독부의 거대한 석조 건물이 자신이 설치한 폭약에 의해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다. 흰옷 입은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즉시 튀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숨을 쉴 수 있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할 시간이 없다. 어디에서 죽든 조선 땅이든 중국 땅이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 아니더냐. 휴의는 갑자기 비장해졌다. 젊음은 이런 것이다. 그의 피는 여전히 뜨거웠고 가슴은 요동쳤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치우리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뒤를 잇자. 휴의는 이런 다짐을 했다. 마치 거사를 치르러 가는 대원처럼 각오를 새롭게 다지자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갑고 목이 말라왔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 나아졌다. 미군을 만난다는 설레임도 일어났다. 새로운 것은 늘 흥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코가 큰 양키들은 군 생활을 어떻게 하고 지휘체계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고 싶었다. 그들의 최신식 무기를 손에 쥐고 싶다. 휴의는 스스로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고 태극기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은 다이너마이크를 안은 채 사진기 앞에 섰다. 후레쉬 불빛이 착각하고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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