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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1:48 (금)
참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거짓에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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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거짓에 말하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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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원은 말을 아꼈다. 그에 따른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 정계의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과 총독이 맺은 언약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육사 출신의 참의원은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거짓대신 참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침묵하는 것은 정의가 아닌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가는 순간 자신의 정치 생명은 끝장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기 위해 그는 다른 불의를 저지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것은 조선총독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나를 실행하면 다른 하나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일이 잦았다.

혈색 좋은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건강을 염려할 단계는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가. 참의원은 성급했던 조선행을 한탄했다. 하필 그 시각에 총독관저에 자신이 있었던 운명을 저주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몇 번이라도 되돌렸을 것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능력없음을 자조했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큰 소리치면서 총독을 소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무라 의원, 우리 이 사건을 비밀로 부칩시다. 의원은 잠자코 있었다. 자신이 먼저 말해야 할 것을 총독이 먼저 말하자 고마웠으나 그는 화장실을 갔다고 오고 나니 체면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아직 시체들은 널부러져 있는 현장이다. 피 비린내는 진동하고 있고 부상병들의 신음은 그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충분히 감을 잡고 었다. 그래서 그는 비밀이라는 말에  일단 안도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함구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숨어 있었던 것만 감추자는 것인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비밀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었다. 그럽시다라고 말을 하려는 짤라에 총독이 급한 나머지 말을 했다.

우리가 쪽방에 숨어서 적들의 공격에 무력하게 대했던 사실을 숨기자는 말이오. 조선 총독은 그말을 하면서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낮췄다. 그 와중에도 그는 참의원처럼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고 위치에 맞는 처신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사건 현장은 수습하기 위한 자들과 뒤늦게 사태파악을 하기 위한 자들로 시끌벅적했다. 지휘해야 할 총독은 우선 자신의 안위부터 챙겼다. 현장 지휘는 나중 일이어서 여전히 쪽방에 몸을 쭈그리고 있었다. 답답하오, 참의원이 말했다. 이것은 여기서 나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나가서 어떻게든 좀 해봅시다. 그것은 제 3자의 언어였다. 참의원은 자신은 뒤로 빠지고 당사자인 총독에게 지휘권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라 총독은 머뭇거렸다. 목숨은 여러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쪽방에서 여실히 간파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됐다. 안심하기는 이르다. 총성이 멎고 자신을 찾는 죽지 않은 하급 비서의 이제 상황은 끝났다는 말을 듣고도 총독은 비서 말보다는 자신의 감을 더 믿었다. 아직 나가서 적을 추격하라는 작전지휘를 내릴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장 요원이 잘 알아서 판단할 겁니다. 그러니 의원님은 여기 안전한 곳에서 옥체를 보존하시지요. 총독은 의원에게 깎듯했다. 옥체니 뭐니 하는 발언을 통해 자신도 그런 대접을 받을 많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이러니 총독부가 공격을 받지. 육군 대장 출신이라는 자가 이렇게 물러서야 어디 쓰겠나. 자신의 육사 선배만 아니어도 죽빵을 날렸을텐데. 

참의원은 그러나 꾹 참았다. 그의 입장이나 자신의 입장이나 처한 위치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비슷했다. 총독의 다짐은 자신을 위한 제의이기도 했다. 숨어서 쥐새끼처럼 오들오들 떨던 일은 두고두고 치욕이 될 것이다. 그 치욕을 비밀로 함으로써 벗어주겠다는 것이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니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총독의 판단이었다. 

참의원,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했소. 계단을 올라오는 적에게 일본도로 맞섰소. 내가 먼저 적을 처치했고 뒤이어 의원이 나머지 한 명을 처리하지 않았소? 참의원은 멀뚱히 조선총독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둠속에서도 총독은 눈을 부릎뜨고 이제 제정신이 돌아온 듯 육군대장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숨어서 떨지 않고 파렴치한 적과 당당히 맞서 싸웠던 것이오. 그리고 승리했소. 알겠소. 살아서만 나가게 해달라고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오그라들었던 기세는 사라지고 조선총독의 위치에 다시 선 그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는 당당해져 있었고 그 당당함은 목소리에 위엄을 더했다.

참의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다른 장면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외였다. 총독이 말한 장면이 실제로 자기들이 행한 행위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손을 꼭 움켜쥐었다. 정신을 차린 총독이 독 안에서 나와 제일 처음 한 일은 벽에 걸린 장검을 꺼내 손에 쥐는 일이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나머지 한 개를 내려서 의원이 자신과 같은 포즈를 취하라고 눈짓했다. 참의원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아직 혼란스러운 아래층 현장으로 총독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는 쓰러져 벽에 기댄 조선독립군을 향해 장검을 들어 날쌔게 그었다. 이어 참의원에게 다른 시신을 향해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 저 자의 목을 베시오. 기회는 한 번 뿐이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은 참의원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도 들고 있는 일본도를 들어 총독과 같은 행동을 했다. 그가 들고 있던 장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모습을 총독이 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들은 서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것도 보시오. 총독은 자신의 피 묻은 칼을 바라보는 생사의 동료에게 자신이 앞서 한 말을 상기시키듯이 우리는 해냈소, 자신있게 적을 물리친 것이오. 하고 의기양양했다. 이 칼은 애도 막부 시대 왜의 위대한 장인이 무려 삼년에 걸쳐 만든 명검이오. 한 번 쓸어버리는 천하가 태평하게 됐소. 역시 우리 일본 육사출신들은 용감하게 조국을 위해 싸웠고 이겼소. 우리는 자랑해야 합니다. 만천하에 알려 천황의 신민으로 떳떳하게 나아갑시다.

피묻은 장검을 들고 차례로 내려오는 모습을 본 일본군 장교와 종로서 간부들은 총독과 참의원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그 중 제일 크게 감동한 것은 종로서 경부 완용이었다. 사건 수습 후 완용은 종로서장으로 승진했다. 승리한 싸움이니 용감하게 앞장선 자에게 필요한 절차를 총독은 단행했다. 죽은 자들에게는 일계급 특진의 영광이 내려졌고 이는 천황폐하의 이름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일본 조정은 뒤집혔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격을 당하자 당황했다. 조선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혼란은 더 시끄러웠다. 승진 축하잔치는 조선에서 벌어졌고 피의 숙청은 일본에서 일어났다. 먼저 조선 총독에 대한 문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사전에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었다. 그러나 참의원이 왕실에 힘을 쓴 결과 여론은 뒤집어졌다. 전쟁터에서 장수를 바꾸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우리 사전에 패배는 없다. 술취한 조센징이 총독부에 난입했으나 용감한 황군과 경찰이 쉽게 제압했다. 조선총독에게 천황의 하사금이 전달됐다. 총독과 함께 적과 싸웠던 참의원에게는 일본 최고 훈장이 하달됐다. 기무라의원은 날개를 달았다. 처음에 조선에 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제는 온 것이 천운으로 작용했다. 상황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선총독은 뒷수습을 해야했다. 자신의 안위는 보장됐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잔당들의 추격은 성과를 냈는가. 그들의 배후는 누구인가 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을 요구했다. 조선 민심은 어디로 가고 있고 상하이 임정은 어떤 대책을 세우는지 총독은 안달이 났다. 조선 총독은 조선내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도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을 원했다. 그래서 그 현장에 있었던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조선민 사이에서 총독관저가 공격을 당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됐다. 그러나 의원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수군거림은 군부에서도 진위파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사실은 드러났다. 그들은 분노했고 당장 상하이에 있는 조선 임시정부를 박살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배후를 없어애 한다. 근거지가 살아 있으면 제2 제3의 공격이 있다. 그러니 이번에 완전히 뿌리를 뽑자. 이 기회에 임정뿐만아니라 조선독립에 가담하고 있는 몇 몇 당과 독립분파들을 섬멸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아예 중국 본토를 쓸어버려 종자까지 제거하자나는 말도 흘러 나왔다.

감출 수 없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짓은 어리석었다. 총독과 참의원은 뒤늦게 의회와 군부에 자신들도 피해를 일부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원래는 감추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사태를 마무리 짓고 보고하려 했다고 둘러댔다. 이른바 선조치 후보고를 중시한 현장 경험이라고 해명했고 그 해명은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그것대로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에 여기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었다. 의원 가운데 하나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관저가 습격 당할 당시 총독과 참의원이 만찬 중이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 이후는 당연히 두 사람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모아졌다. 용기있는 한 의원이 참의원은 어디에 있었소? 그리고 총독은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질문을 이제서라도 했다는데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들도 그런 질문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태도를 보였다. 참의원은 인상을 썼다. 그는 요즘 인상 쓰는 것이 취미인양 뚝 하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답은 미리 준비해 뒀기 때문이다.

뭐, 그런 것을 다 묻느냐는 투였으나 대답하지 않고는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하나씩 마중을 하면서 알았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어물쩍 넘어가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그는 대 정치인답게 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 사실은 총독이 사전에 써준 각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다. 기침을 하면서 목소리를 고른 총독은 일행들을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으로 불러 모은 다음 여기에 모인 사람 외에는 누구라도 들어서는 안 된 다는 듯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싸웠소.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장인 듯 한 자를 작살냈소. 바로 이 손으로 말이오. 그는 들었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총독 각하가 장검으로 올라오는 조선 독립군 대장의 머리를 잘랐고 뒤이어 내가 다음으로 쳐들어오는 부대장의 어깨를 둘로 쪼갰소. 참의원은 이 말을 하면서 칼을 휘두를 때 튄 피가 얼굴로 날아왔으므로 이를 닦는 시늉을 하기 위해 내리쳤던 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일행들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몸을 원래 위치로 돌리면서 정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담은 표정으로 참의원에게서 떨어졌던 시선을 일제히 돌렸다.

내가 적의 몸을 두개로 갈랐을 때 적들은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보이면서 도망치기에 바빴소. 그것으로 침입자들의 운명은 끝난 것이오. 그리고는 피가 흘리는 장검을 들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극구 사양했으나 천황께서는 저의 이런 작은 용기에 보답으로 훈장을 보내주셨소. 보이지요. 이것이 바로 일본 최고의 훈장이오. 의원은 주머니에서 훈장을 꺼내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대보였다. 그의 계파에 속한 의원이 급히 다가오더니 대신 자신이 그 일을 했다. 

이 사실을 여기 있는 사람 말고 그 누구외에도 해서는 안 되오. 특히 조선 총독과 본의원이 과연 일본 사관학교 출신답게 앞장서서 기관총을 쏘면 달려오는 적의 목을 벤 것을 말하지 마시오. 자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이같은 전과는 매일 전선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오. 자신이 내뱉는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기무라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으나 모여 있던 사람중의 두 서너 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의원은 부연설명했다. 잘 새겨 들으라는 투였다.

총독의 행위는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총독이 직접 칼을 휘두른 것은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해 다른 식의 질문을 던져 줄거요. 요즘 백성들은 머리가 잘 돌아가서 처음에는 총독의 용감함을 칭찬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상황을 맞은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것이오. 여기 있는 의원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소? 대체 조선의 상황이 어떤 지경이길래 기관총을 든 괴한이 총독관저에 난입해 총독과 결전을 벌였느냐고 혀를 찰 것이오. 그러니 당분간 총독과 나의 무용담은 함구해 주시오.

의원의 세심함에 동료 의원들은 그가 과연 대정치인 다운 노련함을 보이고 있다고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훈장을 받을만 하지요. 기무라는 대정치인이오. 자신의 성공을 감추고 남의 성공을 드러내면서 백성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있어요. 다음 총리는 기무라 입니다. 아첨하는 듯한 얼굴 하나가 앞으로 나가서면서 이렇게 외쳤다. 허어, 그만 두시오. 다 천황폐하 덕분이지요. 여기서 조촐하게나마 만세 삼창을 외칩시다. 덴노 반자이. 기무가 의원이 선창하자 모였던 의원들의 따라서 외쳤다. 덴노 반자이, 덴노 반자이. 

일단 조정은 이런 식으로 정리해 두었다. 황실이나 군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으나 그들도 일을 키워봤자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수면 아래로 밀어 내렸다. 적과 싸우기도 바쁜데 내부총질를 하다 역적으로 몰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쟁을 일삼을 일도 아니었고 책임을 물을 일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안보다는 밖이 더 중요했고 의원은 이것을 간파해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여론은 그렇게 순식간에 밖으로 쏠렸다. 이때다 싶어 기무라 의원은 애국심을 강조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합심해서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피자의 마지막 안식처인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략은 먹혀 들어갔다. 전선을 더욱 확대하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원의 주장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애국심이 바닥 깊은 곳에서 부터 열도 전체에 넘쳐 흘렀다. 의원이 입에 침을 흘리면서 열변을 토할 때는 모두가 숨죽였고 울음지었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군중을 보면서 의원은 자신 앞에 적이 있다면 당장에 박살 낼 듯한 기세로 주먹을 휘들렀다. 격한 분노가 뜨거운 공기를 타고 도쿄 하늘로 퍼졌다.

그러고 나서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집이 아닌 술집으로 찾아든 그는 대취한 상태로 료칸에서 죽은 곤충처럼 뻗었다. 그 순간 의원은 분노와 회한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양심은 속일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의원의 마음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한 번 뻗은 그는 오래도록 그 자세를 유지했다. 의원들은 속였으나 기무라는 총독의 형편없음을 기억에서 지울수 없었다. 약자들 위에서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죽음의 목전에서는 소변까지 지리지 않았던가. 

그 냄새, 암모니아 썩는 냄새가 나는지 그 와중에도 의원을 코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역겹다, 더럽다. 그는 제대로 발음을 하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조선총독이라는 자는 나약한 자다. 결코 강한 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그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던가. 권총을 들고 적과 맞서 싸우지 못한 소심함이 앞섰다. 일본 육사 출신이 보여야 할 위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겨우 한다는 것이 거짓 연출을 따라한 것 뿐이다. 그런 것을 시키다니. 자신의 육사 선배인 총독을 생각할 때 더욱 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가 이렇게 숨어 있지 말고 나가서 싸우자고 했으면 의원은 기꺼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의원의 가슴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것이 총독책임인가? 내가 왜 먼저 앞서지 못했을까. 그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비서가 놀란 듯이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의원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한참을 지나서야 멈추었다. 총독이든 나든 둘 중 누구라고 숨기보다는 숨겨둔 권총을 꺼내 들어야 마땅했다. 이런 일에 순서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반성도 하고 참회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처참한 죽음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는 위로의 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이 내렸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매일 술을 먹었고 취하면 씁쓸한 기분을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울었고 잠이 들면 울기를 멈추었다.

그 무렵 총독은 자신이 한 뒤처리에 만족감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비록 죽은자 였지만 적의 목을 쳤고 참의원도 그것을 보았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이 참에 아예 산 자의 목이라고 단정짓자. 누구도 이런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본국의 정계나 황실에서도 나의 이런 자랑스런 무용담이 지금쯤 널리 퍼졌을 것을 생각하니 총독은 절로 마음이 푸근해졌다.

턱수염을 연신 쓸어내리면서 죽을 때까지 조선 총독은 자신 것이라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참의원은 눈치 빠른 인사답게 일을 잘 처리했고 그런 기무라를 시간이 지나면 한 번 더 초대해 그때는 제대로 유흥를 즐기리라 다짐했다. 열도에서는 느끼는 못하는 맛을 반도에서 보여주면서 으스대고 싶었다. 과연 본국에서는 칭찬의 소리를 담은 서신이 속속 도착했다. 용감한 행위를 치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맨 뒷줄에 걸친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사전에 적발하지 못한 것과 총독 관저까지 괴한이 들어온 것에 대한 문책 비슷한 문장이었다.

어쨌든 옥체를 보존한 것은 잘한 일이며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무장관리를 해두시오. 백번 지당하고 옳은 지적이었다. 그는 그런 서신을 받기도 전에 벌써 총독 관저를 이중 삼중으로 방어하는 시설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에는 10미터 간격으로 참호를 세웠고 이십 사 시간 삼교대로 경비를 서도록 했다. 경비병은 착검을 하고 착탄을 한 상태에서 접근하는 누구든 사전 경고 없이 찌르거나 발포해도 된다는 총독의 허가를 받았다.

호기심 어린 흰 옷입은 백성 하나가 그 옆을 지나다가 정말로 죽여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많은 병사의 총에 그 자리에서 죽는 일이 발생했다. 병사는 놀랐으나 놀라움은 곧 칭찬으로 이어졌다.제군들은 이 병사를 본받으시오. 모아 놓은 총독부 경비대 참모장은 살인자를 불러 세운 후 이런 칭찬의 말을 한 후 일주일간 포상 휴가를 살인의 댓가로 주었다. 부러운 눈으로 동료들은 자신들의 총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나도 쏘고 나서 이런 칭찬을 받고 휴가를 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날 이후 흰 옷 입은 사람들은 광화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개미들도 피해 갔고 새들고 그 앞으로는 날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독부의 철통 경비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총독은 자신의 수모를 의원 못지않게 겪은 것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혼자 있지 않고 참의원과 같이 있으면서 약하고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더군다나 체신머리 없이 오줌을 지리다니.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사람이 없자 오른손으로 사타구니를 잡고 세게 꼬집었다. 스스로 내린 벌이었다.

아픔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그는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보면서 3층 관저에서 쪽방의 구석진 곳에 숨기보다는 대항해서 싸우지 못한 것을 참회했다. 만회라도 하듯이 그는 서부의 사나이 처럼 혼자 쏘고 몸을 숙이고 다시 연발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과정을 흉내냈다. 이런 식으로라도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은 싸우고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얼마든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서고 있는 지금 이 마당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것이었다.

더구나 참의원 앞에서 오줌을 지린 사실이 치욕으로 남았다. 그가 입이 무거운 것은 알겠지만 술김에 혹은 저도 모르게 총독이 오줌을 쌌다고 소문낼 것이 두려웠다. 총독 자리를 노리고 일부러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는 오줌을 지릴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차라리 자기 손으로 참의원을 살해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사건이 끝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장검을 꺼내기보다는 권총으로 참의원을 저격해야 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아닌 격멸해 마땅한 적이 한 일이어야 했다. 그 적은 자신이 처치했다. 이런 식의 시나리오를 생각하자 총독은 또다시 화가 나서 이번에는 발을 굴렀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총독이 제풀에 지쳐 화를 멈출 휴의는 죽은 소년 병사를 남산 아래 절의 스님에게 맞기고는 신촌을 거쳐 마포를 지나 노량진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포 나루에서 휴의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관 한 명도 같은 자세로 서서 같은 곳으로 시선을 멈추고 있었다. 

휴의는 해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오자 부관을 핑계로 술 한잔을 기울였다. 한강물은 풀리고 있었다. 그늘진 구석에는 얼음 덩어리가 뭉쳐 있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깨졌고 아직 그러지 않은 얼음은 이따금 깨지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부관은 휴의가 왜 마포로 왔다가 다시 노량진에 머무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장소를 자주 옮겨 적의 추격을 피하려는 목적도 아닌 것 같았다. 최근들어 추격당한다거나 미행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한 곳에서 잠자코 있어도 되는데 자꾸 외출하는 것이 되레 불안을 재촉했다. 옮겨 다니기를 수시로 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곳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었다. 거촤 이동은 전적으로 휴의 판단이었으나 때로는 자신의 의견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부관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무엇이 불안한지 시도때도 없이 자는 곳을 옮겼다. 잘 때는 헛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악몽을 꾼 날에는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런 날에는 새벽임에도 다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일어나 앉아서 책을 읽었다.  방에만 있는 날에는 두통 때문에 참을 수 없었고 어쩌다 잠을 자면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날 묻어줘요, 추워요. 대장님. 옆에 있는 총을 잡고 벌떡 일어나면 식은 땀이 범벅이 됐다. 날 묻어줘요. 스님이 장사 지내준다고 했는데 아직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건가. 휴의는 다급했다. 그래서 날을 잡아 신수가 좋은 날을 정해 신촌을 거쳐 산을 오르기로 했다.

스님의 선한 눈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 무슨 일이 절에 닥친 걸까. 소년병도 나와 스님과의 대화를 들었다. 그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휴의의 꿈속에서 보챌 일은 아니었는데 일이 꼬여가고 있다. 휴의는 꿈을 꾸고 나면 어디든 움직여야 했다. 터질 것 같은 두통은 밖으로 나오면 잠잠해졌다. 노량진에서 마포로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때로는 영등포 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나 휴의는 대개 한강을 넘나들었다. 강물을 보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절에가자. 그 절에 가면 이 두통도 나을 거야. 소년병도 보고 오자.  그는 부관에게 말을 하면서 지긋이 눈을 감았다. 죽음의 그림자. 슬픔이 아무리 크고 진해도 이제는 헤어질 결심을 한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소년병도 자신이 죽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부대장에게 어서 피신하라고 재촉했으나 숨이 떨어질 때까지 휴의가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에 그런 호소가 가득 들어 있었다. 부대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휴의는 허리춤의 권초을 풀어 소년병에게 주었다.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아니요. 대장님, 전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할 수 없어요. 저를 처리해 주세요. 그리고 대장님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그의 눈에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눈을 한 번 꿈벅한 그는 이내 고통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발을 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보니 군화 사이로 피가 번져 있었다. 발에도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휴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게, 친구. 저승에서 만나면 날 원망말게. 총성 한 방이 산의 골짜기를 타고 올라갔다가 메아리가 되어 경내로 돌아왔다. 서까래에 매달린 풍경이 소리에 놀라 종을 쳤다. 진달래 피는 봄에 다시오마. 

휴의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성 독립군도 나 때문에 당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고 있겠지. 종로서 완용의 고문에 못이겨 제발로 형무소에 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소 달구지에 실려 형무소에 앞마당에 버려진 여성 독립군. 조선청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여성독립군의 처참한 상황을. 삼월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어쩌자고 이렇게 푸르기만 한가. 아직 찬바람이 냉골을 휘감고 돌지만 보름 후쯤이면 산골짜기의 눈을 녹인 바람이 기온을 끌어 올릴 것이다. 그는 다른 생각 없이 제일 먼저 그 일을 하려고 했다. 진달래 하나 꺾어 가야지. 그리고 맛을 보았는지 모르겠네. 막걸리도 하나 사고 소고기 반근도 사자.  휴의가 상해로 가는 일정을 자꾸 미룬 것은 그같은 이유도 한 몫했다. 살아서 돌아간 동료들은 임정과 떨어진 끈을 찾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수가 복귀했으나 애초 계획에 어긋나게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은 대원들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산 속으로 숨었고 일부는 야밤에 고향에 들러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다행히 조선특공대는 타격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살아서 복귀한 인원도 상당수였고 나머지는 상해의 지령을 기다리면서 반도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일제가 발표한 공식문서에 따르면 특공대원의 희생은 모두 14명이었다. 현장에서 죽은 대원이 8명 나머지는 후퇴하거나 교전 중에 사망했고 한 명이 체포됐다.

그중 한 명은 부상 정도가 심해 심문조차 받지 못한 채 죽었다. 온전히 잡힌 포로는 한 명이었고 그래서 일제는 이 한 명의 취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처음에는 윽박지르고 손톱을 뽑고 인두로 지지는 등의 가혹행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특공대원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불지 않았다. 조직도를 그리지 않았고 최종 명령권자가 누구인지도 침묵했다. 소지한 무기의 구입처나 후퇴한 자들이 어디서 합류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함구했다.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간다. 일본 헌병사령부의 수장은 그를 살리기 위해 작전을 바꾸었다. 강압이 아닌 환대였다. 그러나 이 방법도 신통치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모른다, 알지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급병이어서 침투로나 도피로 같은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해도 침투 규모와 그들이 공격을 위해 잠시 머물렀던 창의문 일대, 북악산 뒤쪽이나 북촌 방향의 인원 배치 등 아주 간단한 것까지 모를 리 없었다.

이도 안 통하고 저도 안 통하자 사령관은 화가 치밀어 올라 아예 죽여 버리자고 작정하고 부하에게 숨이 끊어 질 때까지 패라고 지시했으나 지시가 실행될 즈음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포로로 잡힌 자 한 명을 죽인들 자신들의 작전에 어떤 성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간파한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떤 계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로의 마음이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자신처럼 금방 죽이라고 했다가 살려 두라고 명령하듯이 인간의 마음은 순식간에 오락가락한다. 그는 일단 감방에 가두었다. 그리고 몽둥이질 대신 삼시 세끼 식사를 제공하면서 그가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그는 포로는 포로대로 두고 특공대의 제 2차 총독부 습격 사건에 대비했다. 우선 일차로 광화문 일대를 둘러싼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아무나 드나들도록 허술하지는 않았지만 작정하고 달려들면 뚫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뜯어고친 것이다.

남산의 헌병대사령관은 총독에게 면목이 없었다. 자신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총독이 자신을 파면하거나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본국으로 추방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노심초사하면서 총독의 심기를 살피는 한편 두 번 다시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여러 루트를 통해 총독에게 전했다. 수시로 작전 회의도 열었다. 그 가운데 총독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상해 임정에 대한 원점 타격이었다. 임정뿐만 아니라 여러 조직의 조선독립당은 물론 각개로 활동하는 독립군들을 일망타진하기로 한 보고서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특공대처럼 대일본 특공대를 조직화는 것이 급선무였다. 상하이 조선특공대 규모는 대략 800명 정도로 보았다. 그는 일본 특공대는 그 배수인 1600명으로 규모로 일단 정하고 무기나 부식 기타 피복 등에 있어서 장교급으로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특별히 선발된 요원인 만큼 그 정도로 대우를 해주면서 확실히 성과를 올리겠다는 각오였다. 구성은 200명씩 4개 부대였고 그 부대를 총괄하는 사람은 당연직으로 헌병대사령관인 자신이 맡기로 했다.

그만큼 무게를 실어주는 조치였다. 그들은 경복궁 옆 공터에서 매일 훈련을 했다. 제식훈련 같은 기초적인 물론이고 누구나 저격수가 될 수 있을 만큼 사격술에 공을 들였다. 수류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위한 폭발물 설치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담금질 했다. 기한은 올 삼월까지다. 일제는 선발된 요원들을 불과 4개월 만에 인간 병기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제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특공대원들은 일진과 이진이 함께 기차로 이동했고 삼진과 사진은 다음 기차를 탔는데 특별열차를 공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 열차였다.

일반인으로 위장해 객실에 섞여 있으면서 승객들이 주고받는 말들도 하나의 정보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이같은 음모를 꾸밀 때 상하이는 축제 분위기였다. 언론 보도만 보더라도 일제의 패배가 분명했다. 조선총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힐 뻔한 상황에 처했고 마침 면담을 위해 방문한 일본 정계의 거목도 총독과 같은 저승길에 동참할 뻔 했다. 조선은 물론 일본이 발칵 뒤집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동지들, 수고했소. 그대들의 빛나는 투쟁 성과가 조선 독립을 한 발 짝 아니 여러 발짝 앞당겼소. 그러나 이제 시작이오. 독기 오른 일본이 대규모로 상하이에 잠입한다는 첩보가 돌고 있소. 그들은 닥치는 대로 한인들을 척살할 것이오. 아무 죄 없는 한인 민간인의 피해가 막심할 것인데 은밀히 쪽지를 보내 베이징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해도 실적이 좋지 않아 걱정이오.
그들 말로는 여기서 죽으나 다른 곳에 가서 죽으나 죽음은 매한가지이니 삶의 터전이 있는 이곳에서 버티겠다고 하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우리 임정이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으니 안타까움은 우리들의 몫이오.

적들은 곧 들이닥찰 것이오. 우리도 사무실을 옮기기로 했소. 축하 다음에는 언제나 다음 걱정이 밀려왔다. 이것이 떠돌이 임시정부의 운명이었다. 선생이 코끝에 걸친 안경을 위로 밀어 올렸다. 일단 흩어져야 해요. 사방으로 가야 합니다. 한곳에 뭉쳐 있으면 발각되기 쉽고 그러면 피해가 커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면해야 합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생은 지금 이 순간도 위험할 수 있다는 듯이 어서 말을 마쳐야 겠다고 다짐하고는 말하는 시간도 줄이기 위해 빠르게 몇 마디 덧붙였다.

연고지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부득이한 경우 하루 이상 머물서는 안 되요. 그리고 보름 후에 정확히 각자 훈련 받았던 미군부대로 복귀합니다. 그 사이 미국측과 비용문제를 끝내겠습니다. 자꾸 돈을 더 달라고 하는데 조만간 조선에서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대원 누구도, 단 한 명도 이탈자나 밀고자 없이 전원 복귀해야 합니다. 다 같이 맹세합니다. 선생은 손을 내밀었다. 손과 손이 포개져 손 산이 만들어졌다. 맹세한 후 그들은 말 그대로 즉시 흩어졌다. 일일이 악수를 나눈 선생은 그들에게 피해 있을 동안 도피 자금을 넉넉히 나눠줬다. 건투를 비오. 투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가고 난 후 선생은 말한데로 급히 장소를 바꾸었다. 차로 30분 떨어진 상하이 외곽이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았으나 시내 중심가여 그만금한 건물이어서 발각이 쉽지 않아 보였다. 더구나 건물의 지하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어 여차하면 도피로로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리를 잡자 마자 선생은 3명의 대장과 그들의 부관 6과 함께 둥그렇게 앉아 아까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대원 중 누구라도 왔으면 자초지종을 들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니 속상한 마음이 숨겨져 있던 얼굴의 한 편에 나타났다. 

핵심 인물들은 거의 다 복귀했는데 아직 휴의는 소식이 없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잘못됐을 리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도 답답한 가슴은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신문을 보면서 혹시 조선에서 휴의에 관한 소식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런 기사는 없었다. 다행이라고 한 것은 신문에 난다는 것은 그의 신상이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포됐거나 죽었거나 하는 소식은 아니 본만 못하다. 일제는 휴의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으나 그의 신변은 아직 확보하기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휴의의 안전을 위해 특공조의 앞자리가 아닌 후퇴조로 밀어낸 것도 선생이었다. 그러나 독자들도 알다시피 휴의는 진격조를 자진했다. 자신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다른 대장의 목숨도 그와 못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과감함이 휴의를 지켜내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같이 기원했으면 날이 어두워서도 소식이 없으면 가슴을 쳤다. 

그가 와야 조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후속조치를 빠르게 취할 수 있다. 빠르게 취하지 못해도 좋다. 지금 당장은 휴의의 생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휴의 소식 아는 사람 있소? 특공 대장 한 명이 머뭇거리면서 작은 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후퇴 중에 분명히 앞서 있는 휴의 동지를 봤어요. 그가 추격병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나는 그와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도피했고 그도 곧 뒤따라 인왕산을 넘는다고 했어요. 이 말을 하고 그가 입을 다물었다. 아는 것이 거기까지였다.

다른 새로운 소식이 없나 하고 선생이 두리번거리자 말을 했던 특공대장이 부관에게 눈짓했다. 네가 직접 보고해라. 지목을 받은 부관이 입을 열었다.함경남도를 지날 때쯤 그 부대 소속 병사 한 명을 만났어요. 그는 휴 대장 은 안전한데 있다고 했어요. 다만 소년병이 죽어 그것을 가슴에 오래 묻어 두고 있어요. 저는... 거기까지 입니다. 부관이 말을 마치가 대장이 아마도 봄이 오면 그 부하를 제대로 장사 지내주고 복귀하려는 심사인지 모르겠어요. 휴의는 누구보다 그 부하를 친동생처럼 사랑했으니까요. 

선생은 일단 그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그런 깊은 정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총독부 공격 이후 일제가 조선에서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고 조선민들의 여론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조선내에 있는 독립단체나 개인들과 연계해서 그곳의 운동 세력과도 끈을 맺게 된다면 더 없는 기회가 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상심해 있던 선생의 얼굴에 순간 환한 빛이 지나갔다. 무슨 계획 하나가 빠르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하이 침투조가 조선의 세력과 합쳐 동시에 총독부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단 병력이 지킨다고 해도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규모를 적어도 연대 병력 정도로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1500명 정도의 규모는 있어야 한다.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일어섰다. 한 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측근에게 미국측과 바로 만날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만남은 어렵지 않게 성사됐다. 선생은 단도 직입적으로 요구할 것을 요구했다. 미군이 운영하는 세군데 훈련장에 보름 후에 조선군 병력을 입소시키기 위해서는 뜸을 들일 시간이 없었다. 미군이 요구하는 돈이 없었으나 그는 직접 사령관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우리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은 아니오. 약속을 어긴적이 있나요? 훈련 시켜 주시오. 무기를 지원해 주시오. 우리가 총독부를 점령하고 나면 상하이 임정을 조선의 임시정부로 인정해 주고 빠르게 민심을 안정 시킬 수 있도록 미국이 도와 주시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요? 미군 사령관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너무 쉽게 일본을 깔보는 것은 아니냐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길 자신이 있소? 우리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임시정부가 그럴 힘이 있느냐고요?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이 실수 였음을 깨달았다.

선생은 얼마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습격 사격을 간략하게 브리핑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조선 특공대의 활약상을 대충 알고 있었던 그도 구체적인 전과를 이야기 하자 놀라는 태도를 보였다.  정말 그 정도란 말이오? 우리야 임정이 조선반도에서 일제에 대항하면 나쁠 게 없지요. 이쪽 병력을 반도를 지키는데 빼가면 생각할 것도 없이 미국에게는 좋은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태평양 전선이 고착상태인데 기회가 되겠지요. 독립군이 일본군을 괴롭히면 태평양에서 미군이 일본군과 대적이 수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선생은 틈을 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위한 것이오. 그러니 어서 훈련 시켜 주시오. 병력은 어디 있소? 장소만 마련되면 바로 모일 거요. 사방에 우리 독립군 지원자가 훈련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소. 그들은 조선독립은 물론 세계 평화를 갈망하고 있소. 전쟁은 일본이 아닌 미국측의 승리로 끝나야 합니다. 선생이 습관적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시늉을 하면서 코 끝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보려는 심사였다. 예상했던 대로 미국측 사령관은 바로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도 불사하고 뛰어드는 조선 독립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투력은 그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무기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 조선독립군을 결코 과소평가하면 안돼. 그러나 미군사령관은 본국의 명령 없이 자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버텼다. 돈이 드는 일, 그것도 연대 병력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데 드는 비용이 문제였다. 더구나 개인 화기를 바꾸고 수류탄이나 기관총 등을 새로 지급하는 것은 미국도 버거웠다.

당장 돈을 가져오시오. 그런 다음 다시 논의해 봅시다. 선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훈련은 필요없소. 교관도 필요없고. 단지 무기만 주시오. 우리 특공대원을 선발해서 훈련할 것이오. 설마 장소까지 돈을 요구하지는 않겠지요. 마침 빈 연병장이 있기는 한데...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난 거지요? 이제 언제 어디서 무기를 수령할지 결정합시다. 

미국인이 콧수염을 벌렁 거리면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는 듯이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다문다고 다문 입은 금세 벌어졌다. 그는 궁금증이 많은 미국인이었다. 연대 병력이라고 했소. 구체적으로 몇 명이오. 삼 천 정도는 어렵고 적어도 천 오백은 예상하고 있소. 뭐라고요. 1500명이라고요. 놀란듯이 미군 사령관이 되물었다. 그렇소. 너무 적은가요? 아니요. 그런데 그 병력은 지금 어디서 대기하고 있소? 그건 비밀이오. 안전한 연병장의 위치를 알려주면 바로 집합할 겁니다. 서둘러 주시오. 선생이 명령하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미군 사령관이 허탈하게 웃었다. 

일시에 1500명의 개인화기와 기관총과 수류탄을 준비하라고요. 당신이 미국 대통령입니까. 화난 미군 사령관이 대들들이 말했다. 하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 나는 연락을 기다리겠소. 조선청년들의 패기와 우수성은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어디서 그런 병력을 얻겠소? 탐이 나면 일부는 지원하겠소. 그러나 300명 이상은 안 됩니다. 지원이라는 말에 미군 사령관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알았어요. 내가 사령관이라고 해도 세부적인 것은 부관이 알 것이오. 일단 내 대답은 긍정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바로 연락을 하리다. 잘 생각했어요. 조선 임정과 미국은 같이 가는 동지요. 끝은 이렇게 좋게 끝났다. 

선생이 베짱을 부린 것은 다 속셈이 있었다. 미군을 여러 차례 접촉한 그는 무턱대고 요구하거나 도와달라는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돕는 것이 저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작전이 먹혀들었던 것이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조선인들이 상하이에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베이징이나 다른 도시로 가는 인원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이라 해도 먹고 사는 문제는 흉흉했다. 조선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일제의 감시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전쟁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이었다. 조선 젊은이들은 세상 어디나 일제 때문에 살 수 없다고 한탄했다. 갈수록 일제에 대한 반감이 깊어 갔고 여기서 이 고생이면 차라리 고향에서 하는 것이 낫다는 자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괜히 왔다며 일부는 다시 돌아가기도 했고 여비만 마련되면 그러겠다고 결심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여비만이지 조금이라도 손에 쥐고 가야한다.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임정은 그런 청년들과도 접촉했다. 새로운 병력으로 충원하는데 가릴 이유가 없었다. 일제에 반감이 있고 이국을 전전하면서 생긴 애국심이 고조된 그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 다 받을 수는 없었다. 숫자에 집착하다 보면 조직의 누설 등 되레 큰 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의협심이 강하면서 날래고 배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가하면 독립운동이 목적 그 자체인 청년들도 다수는 아니어도 간혹 있었다. 조선독립군의 문을 제발로 두드리는 가상한 청년들은 무엇보다도 든든한 임정의 원군이었다. 그러나 그 수는 손가락을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러다 보니 천 명이 넘는 인원을 채워 연대를 구성한다는 계획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때 의열단을 이끄는 조선청년이 임정에 연락을 취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라 선생이 직접 조선청년을 응대했다.

그는 지난번 독립자금 때문에 휴의와 함께 조선에 내려간 여성독립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낙담하고 있었다. 일이 잘못됐어요. 다 내책임이오. 선생이 조선청년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했어요. 이제 영영 만날 수 없게 됐군요. 아니오. 너무 낙담 마시오. 형무소 습격 계획이 있어요. 풀이 죽은 청년에게 선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용 없습니다. 지난 주에 사망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시체는 거적에 쌓여 인근에 버려 졌다고 해요. 다행히 친구들이 나서 매장을 하고 나무비석도 세웠다고 합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그럴겁니다. 임정에서 후하게 장례를 치러 주겠습니다. 그런 날이 빨리 와야지요. 그나 저나 미국의 지원을 받아냈다면서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과 무기인데 그걸 해결 하다니. 임정은 정말로 우리 조선독립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휴의 대장이 아직 소식이 없어요. 대신 청년 동지가 연대 병력을 이끌어 주시오. 어느 정도 훈련이 되면 바로 조선으로 쳐들어 갑시다. 휴의가 조선에서 놀지만은 않을거요. 거기서 아마도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과 연합해서 총독부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접수합시다. 조선청년은 일단 놀랐다.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한 두 명의 폭탄 공격으로는 일회성으로끝나 조직이 필요했고 그래서 의열단을 만들어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연대병력을 끌고 내려간다고 하니 반갑고도 놀라웠다. 지난 번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경찰서를 격파할 때 병력이 고작 30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 명이 넘는다. 신의주 폭파가 아주 인상에 남아요. 청년 동지의 지략과 용맹이라면 충분히 연대를 지휘할 수 있을 것이오. 총대장을 맡고 대대는 따로 구성합시다. 중대나 소대 병력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번에 조선총독부 습격도 다 됐으나 인원 부족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선생이 안타까운 듯이 청년 동지를 쳐다봤다. 

무엇보다 민심이 요동치고 있어요. 삼일 운동 후 고조됐던 독립운동 열기가 홖 꺾였다가 이번 총독부 공격으로 다시 살아났어요. 조선민들의 민심은 벽으로 보였던 일제도 타고 넘을 수 있는 담장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알겠습니다. 수시로 접촉하지요. 무기 지원이 완료되면 그때 제가 바로 부대원들을 찾겠어요. 선생님께 인사를 못드릴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역기서 일단 작별 인사를 올립니다. 조선청년이 정중하게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청년 동지, 당신의 손에 조국의 운명이 달려있소. 함께 갑시다. 우리 이 길을. 둘은 짧은 만남을 하고 헤어졌다. 

선생은 청년이 가고 나서 천군만나를 얻은 것 같은 기운으로 조선 독립군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은밀하게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어떤 때는 드러내 놓고 소문이 퍼지기를 기대하는 눈치를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해 볼 만 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첫번째가 중요한 것이다. 첫 번째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자 제2, 제 3의 공격이 가능해 졌다. 모집책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장바닥을 훑듯이 세몰이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은 한인촌은 물론 다른 조계지에 퍼졌고 당연히 왜경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바심을 낸 그들은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아무나 잡아 불심검문을 했다. 그러나 잡고 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민심만 흉흉해졌다. 먹기 위해 와서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자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일경은 원점을 타격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총구는 하부가 아닌 상층부를 겨냥했다. 일본 총영사관 소속 왜경들이 포목점을 드나드는 횟수가 부쩍 는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두목을 잡으면 지금보다 열배나 큰 포목점을 주겠다고 배불뚝이에게 미끼를 깔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윤사장은 무언가를 줄 듯 말듯하면서 일경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가 성격이 그래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일제가 지목한 두목을 접선하는 일은 배불뚝이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정보를 줄수는 없었다. 주인은 혼란한 와중에 자신이 무엇가를 하는 중심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임정의 근처에서 혹은 일제의 첩자로 어중간한 지점에서 그는 서성였다. 양쪽에 한다리씩 걸쳐 놓고 저울질 하는 그의 습성을 일제도 알고 있고 임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용하기 위해 적당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한편 말수는 그날 이후 포목점을 찾지 않았다. 순사가 드라드는 집에 가는 것은 부담이 됐다. 병원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는 한 달 전 쯤 온 저녁 초대를 거절하기도 했다. 멀어지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병원은 바쁘게 돌아갔다. 환자는 끊이지 않았다. 봄이 왔으니 병원을 신축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의 이층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의사도 두어 명 더 써야 했다. 부부는 그런 문제로 힘들어했다.

포목점 집 남자는 초대를 거절당한 다음 날 멀리서 병원을 관찰했다. 그 말대로 환자 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환자가 들락날락하는 것이 자신의 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환자가 들어가서 나오기도 전에 다른 환자가 문을 열었다. 남자는 말수의 말을 믿었다. 다른 의심의 정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병원 일에만 전념하고 있구나, 나도 포목점이나 그렇게 할까. 입맛을 다시며 배불뚝이는 돌아섰다. 말수를 미행하고 접선한들 어떤 큰 정보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병원을 한다는 말수라는 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오. 한 번은 일경이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배불뚝이에게 이렇게 물었다.환자가 많으니 이런저런 소식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뭐 숨기는 기색은 없어. 너희 조선인들은 말하지 않아도 눈짓만으로도 서로 통하잖아. 배불뚝이는 그런 가당치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이 손을 까불고는 그렇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고 큰소리쳤다. 의사와 자신은 상하이의 누구보다도 친하고 흉허물없이 지내니 낌새가 있다면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콧수염을 만지던 일경은 못내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자신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해볼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조선인이지만 독립군편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우리 때문에 병원 개업이 수월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간 장군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일본을 배신하는 행위는 할 수 없다. 영사관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니 정보가 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형사는 이런 생각을 했고 배불뚝이는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자신보다 상하이 구력이 일천한 말수가 자신도 만나기 어려운 임정의 선생 소식을 알거나 접촉할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도 아니고 그 부인 역시 천상 의사였고 음악가였지 무슨 일을 도모하면서 병원을 위태롭게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환자로 안경 쓴 남자가 다시 방문하지 않는지 염탐했으나 그날 이후로 그 남자는 상해를 아예 떠난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배불뚝이의 귀에도 조선독립군 모집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을 늘 자랑하는 그에게 그 소식은 달가운 것이었고 그는 마치 자신이 소집 명령을 받은 것처럼 흥분했다. 이럴 때는 내가 정말 조선인이라니까. 참 조국이란 게 뭔지.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독립군이든 일경이든 일본군이든 장개석 군대나 모택동이 이끄는 무리 등 어떤 식으로든 제복을 입고 있을 텐데. 그는 포목이나 뒤적이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권총을 차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죽은 부하를 위해 도망가기보다는 적들의 후방을 칠 때 그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의 총상은 신경을 타고 하필 방아쇠를 당기는 오른손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그 팔로는 총을 제대로 쏘지도 말고삐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는 울화통이 터지면 늘 그렇듯이 술을 마시고 분을 풀었다. 상하이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조선에서는 휴의 부대원 중 한 명이 온전한 상태로 포로로 잡혔다. 그는 블신검문에 걸려 도망치다 운이 좋게도 여러 번 등 뒤에서 총알을 맞을 위기에 처했으나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는지 총알은 비껴갔고 불과 10여 미터 뒤에서 쏜 총알도 피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는 이를 깨물었다. 잡힌 것의 두려움보다는 분함이 앞섰다. 그는 권총 알이 귓전을 스치며 지나갈 때 피우융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더 빨리 달리려다가 그만 헛다리를 짚고 나동그라졌다. 그가 넘어지자 서너 명의 일경이 달려들어 그를 덮쳤다. 자결하기 위해 권총을 꺼낼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 병사는 되레 잘 되었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수류탄으로 폭사 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막 넘어지면서 다친 피묻은 손을 허리춤에서 가슴 쪽으로 이동시킬 때 무언가가 그 손을 딱하고 세게 치는 바람에 손은 동작을 멈추고 뚝 소리가 나면서 부러졌다. 그는 맷돼지처럼 식식거렸으나 체포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완용은 바로 그 대원을 취조하고 있었다. 말이 취조지 취조랄 것도 없었다. 완용이 너무나도 살갑게 대해줬고 무엇보다도 고향 서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에 병사는 그만 무너져 내렸다.

죽마을에서 서천은 멀리 있지 않았다. 교통수단이 나빠 어떤 사람은 평생 서천을 가보지 않고 죽는 경우가 있었으나 완용은 서천에 고모가 살고 있어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서너 번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은 포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고위 경찰인 고향 선배를 만났고 그가 따뜻한 말로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대해주니 마치 형 집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서천에 논 10마지기를 사 주마. 가서 늙으신 부모 모시고 잘 살아라. 여동생은 시집 보내고. 병사는 완용이 그 말을 하지 않았어도 다 불려고 작정했었는데 이 말까지 듣고 나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것들까지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포로가 그려주는 휴의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 몽타주는 실제 휴의와 다를바 없었다. 그 전에 사진을 찍어 놓지 않아 완용은 그것을 늘 속상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몽타주나마 확보하기 위해 포로를 구슬렸다. 몽타주를 앞에 두고 종로경찰서장 완용과 조선헌병대사령관 와타나베 신조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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