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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배냇점(1926)- 니콜카를 죽인 아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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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배냇점(1926)- 니콜카를 죽인 아타만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4.13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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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아들과 놀아주는 남편이 사랑스럽다. 말하지 않아도 지구 공통의 표정이다. 1차세계대전, 볼셰비키 혁명, 내전으로 엉망이 된 러시아라고 예외는 아니다.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 아들 니콜카는 아버지의 군마에 올라탄 적이 있다.

부엌에서 어머니는 행여 떨어질 까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들 니콜카의 작은 발과 고삐를 잡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아들 니콜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추억이다.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일과의 전쟁 와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물속에 빠진 것처럼. 어린 아들은 부모가 죽은 것으로 알고 성장했다.

도망친 농도의 후예인 카자크족 출신으로 그렇지 않아도 변변하지 못한 살림인데 부모마저 잃었으니 어린 니콜카의 인생이 어떨지는 뻔한 이치다. 그는 부모로부터 말에 대한 사랑, 무한한 용기 그리고 비둘기 알만한 크기의 배냇점을 왼발 복숭아뼈 바로 위에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교를 갈 수 없고 배울 수 없어 문자도 제대로 해독할 수 없었다. 나이 18세가 되서도 말이다. 그런데 니콜카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용맹스러웠고 반혁명도당과 싸우는 족족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자신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겨우 그 나이에 러시아청년 공산당원이며 기병 중대장이 됐다. 열다섯 살 때까지 막일을 하면서 비참하게 떠돌다 운 좋게도 긴 군용 외투를 입고 니콜카는 적위군 연대와 함께 브란겔리(볼셰비키 혁명이후 벌어진 러시아 내전 당시 반혁군을 조직하여 적위군에 대항했던 남작 출신의 육군 중장)를 쳐부수러 가면서 군대에 입문했다. 이후 그는 앞서 말한대로 승승장구했다.

그런 어느 날 급전이 날아들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소식을 가져온 말은 사십 킬로미터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내용은 기병중대의 지원을 요청하는 국영농장 의장의 메모였다. 니콜카는 이제 유혈에 신물이 나서 새로운 전투가 달갑지 않다. 지쳤고 실증이 났고 무엇보다도 못다한 공부를 해 군사위원이 떠드는 중대장이 단어도 제대로 못쓴다고 핀잔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그는 전투 채비를 차렸다. 한편 반혁명도당의 수괴 아타만은 소비에트 정권에 불만을 품고 50여명으로 구성된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를 끌고 사흘 밤낮을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은 병사출신으로 악명이 높고 경험이 많은 자들이라 늑대처럼 꾀가 있고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하다. 마침 돈강은 고요하고 짙고 투명한 하늘 아래 부쩍 자란 호밀은 위로 솟아서 사람의 키를 넘버고 있다. 아타만은 그런 호밀을 보면서 처녀의 눈물보다도 더 맑은 밀주를 생각한다.

▲ 어느 나라든 전쟁은, 내전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만큼 잔혹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극이 일어난다.
▲ 어느 나라든 전쟁은, 내전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만큼 잔혹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극이 일어난다.

하루라도 그는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술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 상태로 아타만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 아들과 부인과 헤어진지도 헤아릴 길이 없다. 독일군의 포로, 브란겔리의 백위군, 뜨거운 콘스탄티노플, 철조망이 처진 수용소 생활, 터키의 작은 범선 그리고 지금의 반혁명도당.

아버지의 삶도 아들의 삶만큼이나 치열하고 처절했다. 한마디로 바짝 말라버린 말발굽처럼 그의 영혼도 바짝 말라 있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서는 특히 알 수 없는 통증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온몸은 혐오감으로 가득차 있다.

아들처럼 그도 이 싸움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늙은 농부 루카치도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괴롭다. 허리는 바늘로 콕콕 찌르른 듯이 아프고 다리는 무쇠처럼 무거워져 땅에 착 달라붙을 정도였다. 루카치는 잠시 쉬려고 하늘을 보고 누웠다. 깨어나서 보니 말 탄 병사 두 사람이 위협했다.

노인은 여러 해 동안 군인들이 나타나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사료와 밀가루를 제멋대로 가져가 이편저편 가리지 않고 군인들을 싫어했다. 오늘도 마침 그 군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음식을 뺏기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나 아타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노인은 적위군을 좋아하고 거짓말한 죄로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서 죽기대신 흙을 먹었다. 군사들이 떠나고 난 뒤 그는 보초병의 눈을 피해 니콜카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고자질했다.

니콜카는 연습한 대로 기병들을 흩어지게 한 후 적의 양쪽 날개와 후방을 치는 라마 전법을 썼다. 초반 전투는 끊임없이 기관총을 퍼붓는 니콜카 부대의 승리였다. 여세를 잡은 니콜카는 긴 칼을 휘두르면서 아타만을 따라왔다.

아타만이 언뜻 뒤돌아보니 가슴에 흔들리는 쌍안경과 몸에 걸친 망토가 예사롭지 않았다. 적의 대장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아타만은 그가 모두 실탄을 소모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모젤 권총을 허리띠에서 뽑아 달려오면서 점점 커지는 검은 망토를 향해 발사했다.

적은 말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야생마, 애송이, 성급한 놈, 어린애, 풋내기 그러니 죽음의 마수에 걸려들지. 아타만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장검을 뽑아 솔개처럼 달려들었다. 그 순간 상대의 몸이 물렁해 지면서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젊은 기병대장 니콜카는 이로써 18살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 니콜카를 죽인 아타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신고 있는 크롬 가죽 장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한쪽 발의 것은 쉽게 벗겨냈으나 다른 쪽 발은 양말에 걸렸는지 잘 벗겨지지 않자 화를 내고 욕지기를 하면서 어렵게 마져 벗겨냈다.

투두둑 소리가 났다. 죽은 사람의 무릎을 한 발로 눌러낸 것이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양말과 함께 벗겨진 드러난 복숭아뼈를 보았다. 그곳에는 비둘기 알만한 배냇점이 있었다. 아타만을 죽은 사람을 깨울까 봐 조심하면서 차갑게 식어가는 얼굴을 들어올렸다.

머리를 받쳐든 아타만의 두 손은 죽은 시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놓아 울었다. 내 아들 아타만.

자,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렇게 묻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동족을 죽이는 내전은 이보다 더 한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모젤 권총을 들어올려 입안에 넣었다. 영화의 한 장면도 이처럼 비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이렇게 외친다. 내 자식, 내 피붙이. 아버지는 자살했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이런 일이 방금 전에 일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숲속에는 여전히 군마의 박차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지못해 죽은 고기를 먹는 솔개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솔개는 가을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저 멀리 사라졌다.

책의 내용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면 미콜로시 얀초 감독의 1967년 영화 '적과 백'을 추천한다. 의약뉴스 '내생애 최고의 영화'에도 소개한 바 있다. 거기에는 "반전영화로 흑백으로는 최고의 작품으로 찬양할만 하다"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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