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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6-18 09:25 (화)
그녀에게 봄바람 같은 따스한 예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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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봄바람 같은 따스한 예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1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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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일지 빨리 만나고 싶어 했으나 정작 만나고 나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꼭 그런 꼴이었다. 여순은 윤사장 내외에 대한 인상이 만족할만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자 그런 마음을 품었다.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선인을 처음 만난다는 이유 때문에 조금 덤벙댔던 것 같고 그래서 자신에게 조금 실망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순이 만남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있지 못한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를 바랐던 기대감을 줄이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이웃을 옆에 두고 세상 사는 이야기쯤 나눈다면 잠시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순이 자신이 요즘들어 부쩍 커졌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 대한 마음의 변화라든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고 나자 윤사장 내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여순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편은 어떨까. 말수도 그들과 나눈 대화가 썩 좋지는 않다고 여겼다. 여순처럼 무엇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남에 대한 만족감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저런 수확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낯선 곳에서 조선말로 그것도 아내의 고향 보령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살붙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애초 그들과 우리는 다르고 앞으로 가는 길도 다를 것이니 너무 정을 많이 주지도 그렇다고 아주 무시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은 여순이나 말수나 동일했다. 그러나 말수에게는 독립운동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를 줬다. 소문이 사실인 것을 직접 들었을 때는 다소간 떨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정기 모임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갖자는데 흔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말수와 여순은 서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그런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로에게서 확인하고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곳에 들어서자 둘은 위험한 곳에서 빠져 나온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니 전쟁이 더 격화되고 있다는 불안한 관심조차 거둘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상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일어 설 수 있는 기회를 내리 눌렀다. 언제 끝날까. 평화로운 세상은 오기는 올까. 조선독립은 가능할까 같은 상상이 꼬리를 물었고 환자가 없는 한가한 시간은 대개 이런식으로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은 여순이나 말수가 걱정한다고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신경썼다.

때로는 음악에 빠지고 영어공부에 빠지고 돈을 모으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어디서든 그것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말수는 흥얼거렸고 여순은 박자를 맞추었다. 서로는 경쟁하듯이 자신을 가꾸는데 노력했고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면서 둘은 점차 서로가 커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면에서 둘은 만족했고 의지했다. 하지만 라디오는 그 시간에도 전황을 전하기에 바빴다.

일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방송의 남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는 다른 소식통 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었다. 대일본 제국이 승승장구 있고 곧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그날 까지 모두 천황을 위해 만세를 부르자고 독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었기에 방송은 더 열을 올렸으나 적어도 말수는 아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전하는 사람의 목소리나 어떤 단어 하나만으로도 유리한 지 불리한 지 전황의 전개를 알아 맞출 수 있었다.

라디오의 남자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불러주는 대로 마이크 앞에서 읽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나운서도 말수처럼 본능이 발달해 있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식구도 살았다. 그를 탓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해도 용서되는 것이 전쟁의 상황이고 보면 그는 말하기 전에 이미 용서를 받았다.

실체를 보면 전쟁은 일본의 기대와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라디오를 끈 말수는 팔뚝을 쓸어 내렸다. 피부가 감지하는 느낌은 일본의 패주였다. 상해나 만주 혹은 북경의 분위기도 일본 이후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초조한 자와 쫓기는 자는 얼굴에 나타난 그 표정을 감출 수 없고 말수는 환자를 보는 노련한 의사답게 진단을 제대로 내리고 있었다. 정보에 밝은 고위 관리들 처럼 말수는 일본의 패망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식인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었다. 

말수는 다시 끈 라디오를 다시 켰다. 습관이었다. 그거라도 해야 다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나와 더 호들갑을 떨었다. 일제가 미제를 전방의 어느 전선에서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전황을 언급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세세한 내용이 전파를 탔다. 어디서 얼마만큼 진격했고 그 과정에서 적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라고 수치를 나열했다. 이 때가 진실을 가려내는 중요한 잣대가 됐다.

이것은 적이 아닌 일본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였다. 그렇다고 아니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이 돌아설까. 아니다. 일본은 곧 패망의 길로 갈 것이다. 말수는 그렇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아직 확정 하지 못했다. 누가 승자가 되든 아직 모르는 것은 너무 많았고 알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다. 일본의 패망이 반드시 자신의 신상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포목점 주인에게 처음 들은 조선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서도 놀랍기는 했지만 큰 동요는 없었다.

대기실의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서로 수군대고 있었고 자신이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을 서로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자신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에 대해서는 상상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에 바빳고 전쟁이후의 삶은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라는데는 의견이 같았다. 

하지만 대개는 만주까지 장악한 일본이 태평양전선에서 밀린다고 해도 이곳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어 일본에 대한 언행은 늘 신중했다. 말수도 그런 여론에 동조했다. 한 눈은 전쟁에 두고 다른 한 눈은 환자에게 두면서 말수는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현재를 즐기면서 삶을 꾸려나가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환자들은 꾸준했다. 병원 걱정은 덜었다. 개업할 때 빌린 돈은 육 개월 만에 거의 다 갚았다. 의료기기 값으로 남은 것은 한 해를 넘기지 않았고 새로운 의료기는 현금으로 덜컥 구입했다. 그만큼 값을 자신이 있었다. 곳간에 여유가 생기자 말수는 가난한 환자에게는 일부러 값을 깎아 주기도 했다. 부자라고 해도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거의 공짜에 가까운 실비로 치료를 했다. 실력도 좋고 가격도 만족했기 때문에 상하이에서 병원은 날로 인기가 높았다. 

간혹 외상 환자도 나왔으나 떼일 염려는 거의 없었다. 시간의 문제였지 한 달 후라도 그들은 반드시 값을 치렀다. 병원이 순조롭게 돌아가자 여순의 피아노 실력은 점점 늘어갔다. 기타 솜씨도 이제 코드를 잡을 만큼 익숙해졌다. 말수는 그런 여순이 대견스러웠다. 도대체 못 하는 것이 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둘은 행복했고 그 순간에도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언제나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했다. 

언제 무엇이 들이닥쳐 병원을 그만두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늘 가정해 두고 있어서 인지 둘은 가능하면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닥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여순은 말수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늘 그렇게 위로했다. 맞아. 대개의 걱정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걱정이지. 말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위험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치중했다. 현재가 어려울 때면 과거를 끄집어 냈다. 그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었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체득한 경험이었다. 

말수는 성질이 점점 더 죽어갔다. 어디서든 화를 내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목소리가 커질 때도 스스로 억제했다. 통영 뱃놈은 천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성현들의 말을 거부했다. 군자의 학문에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이다. 천성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말수는 자신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아주 드문 예외적 상황을 말수가 만들었다. 그런 말수가 여순에게는 엄청난 인간으로 보였다. 어쩌면 인간이 저렇게도 변하니. 여순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떤 때는 생각한 것을 겉으로 드러냈다.당신은 변신에 성공했어요. 그것도 완벽하게. 난 당신이 대대한 존재로 보여. 닭살 돋는 말들은 부부는 간혹하면서 서로를 응원했다.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힘을 발견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었다.

말수는 한동안 아기 이야기기를 하지 않았다. 전쟁통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아이들 역시 죽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차마 우리 아이를 낳자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은 이렇게 변하고 있었다. 여순은 그런 말수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술을 자제했던 말수가 술을 먹고 오는 일이 늘어났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태생이 술을 좋아했고 술맛을 알았으나 자제했던 것이 병원이 안정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조금씩 횟수와 주량이 늘어났다. 그렇다고해서 아무 술이나 막 퍼먹지는 않았다. 혀에 감기는 달콤함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느끼는 진짜 술만이 그의 위장을 덮혔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완전히 빠져 들지 않았다. 작심을 하고 먹어도 적당한 선에서 딱 그만두었다. 더 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혀가 꼬부라지고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말수는 알았다. 자제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말수가 아직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에 취했다 싶으면 바로 자리를 털었다. 잔을 덮고 일어서도 술자리의 누구도 그의 그런 태도를 비웃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내일 아침에 수술이 있다고 말하면 두 번 다시 술을 권하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권하는 술을 마다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의사는 참 좋은 직업이야, 말수는 술자리를 빠져나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옛날 뱃놈으로 돌아가서 쌍욕을 하던 거친 사내의 모습을 말수는 기억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워진 다음 어느 것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지 아직 말수는 알지 못했다. 정말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그는 물론 여순도 답답했다. 죽을 때는 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금 살고 있으니 그에게 어떤 목적이 있는지 여순은 알고 싶었다. 당장은 없다면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지? 같은 질문을 하면서 그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여순이 그런 심란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오면서 지난번 배 아픈 환자가 다시 찾아왔다고 말했다.

여순은 그 환자가 맹장 환자라는 것을 바로 기억해 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포목집 주인장이 한 말 때문이었다.그 환자가 다시 오면 잘 해 주시오.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긴 것은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고 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독립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여순 앞에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을 때 여순은 아차 싶었다. 내가 잘 못 들은 건 아닌가.여기에 내가 있을 자리인가. 일단 호기심이 일었으나 책임을 져야 할 지 모른다는 당시의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 환자가 왔다는 말에 말수도 여순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괜히 엮여 지금까지 이뤄놓은 것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가졌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였고 누구인지 모르고 한 치료행위에 대해 그들이 잡으려는 용의자라고 해도 일제는 추궁하기 어렵다. 말수는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대했다. 이번에도 그 환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보호자겸 경호요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호요원 말고도 늙은 여자도 동행처럼 보였는데 그 늙은 여자는 환자의 어머니 정도로 추측됐다. 

중연의 남자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기 전에 안경을 벗어 가슴에 놓인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말수는 배를 이리저리 문질렀다. 촉진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약을 먹은 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아프지도 않았고요. 배를 문지르는 의사의 손길을 느끼면서 환자가 말했다. 그는 중국말을 했다. 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인 것을 지난번처럼 확신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유창한 중국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순간 그는 그가 조선인인 것을 대번에 알았다. 중국인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해 그런 사정이 있을 것으로 말수는 짐작했다. 말수는 환자를 의식하면서 조선말로 대꾸하지 않았고 조선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환자는 덧붙였다.수술하지 않을 수만 있으면 하지 말아 주시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꼭 그렇게 해달라는 듯이 두 눈에 부탁한다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다. 늙은 여자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하찮은 수술이라고 하더라도 배를 째고 하는 수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만약 수술해야 하면 입원해야 하지요. 그렇게 있을 시간이 없거든요. 남자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사정을 봐달라는 투였다. 일시적 복통이 아닐까요, 의사 선생님? 젊은 남자가 반문하면서 말수를 쳐다봤다. 대답 대신 말수는 배를 이리저릴 쓸어보고 눌러보고 밀쳐보고 잡아 당겨보는 것을 계속했다. 맹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급체했다가 회복됐을 것이다. 말수는 이번에는 일주일 치 안정제를 처방하고 아프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좋다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남자는 안도한 눈 빛을 보이면서 어느 새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앉았다. 의사 선생, 잘 치료해 줘서 고맙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혹시 조선사람 아니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말수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상대가 무안하거나 놀라지 않을 정도로 지나가는 투로 말했으나 거기에는 너는 조선사람 맞다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꼭 우리 고향 사람 같아서 말이요. 고향? 말수는 속으로 고향이라고 되 내었다. 말수는 대답 대신 선생님은 중국 사람 아니신가요?하고 물었다. 맞아요. 중국인이오. 연변에서 오래살다 3년 전에 이곳으로 왔지요. 그 전에 우리 아버지는 북간도에서 살다 함흥에서 결혼했고 평양이나 경성에서도 살았어요. 그래서 조선 물정을 훤히 알지요.

남자는 하지 말아도 될 말을 부지런히 주어 삼켰다. 친근감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선은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조선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자기만의 방식인지 모를 손을 뻣어 악수를 청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늙은 여자는 맹장은 아니지요? 하고 두어 번 더 물어보았다. 자신보다도 자식이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신발을 신은 환자는 실내를 유심히 바라봤다. 천장이며 복도며 삼층으로 가는 계단 등이 그의 눈에 박혀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말수는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숱한 전투 경험과 전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환자와 일본군의 진료 과정 등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고 사람의 관상을 살폈다. 작은 상처에도 어두운 그림자의 환자는 죽어 나갔고 큰 부상인데도 환한 얼굴은 살아났다. 치료의 기술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얼굴에 나타난 관상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했다.

말수는 남자의 관상에서 어떤 빛을 보았다. 보통 사람에서는 찾지 못하는 빛이 강하게 얼굴을 관통하고 있었다. 특히 좁은 이마에서 시작해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넓어지는 하관에 이르면 빛은 더욱 커졌다. 저 사람은 어려서는 죽을 고생을 하고 힘든 여정을 보냈지만 커 갈수록 큰일을 해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다고 말수는 생각했다.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지금 말수는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영원히 그래도 문제없다. 그러나 조선사람이냐고 물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포목집 사장도 맹장이 의심되는 환자를 언급했다. 여순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내과는 여순 담당이었지만 남자는 여순에게 보이기보다는 말수가 봐주기를 원했고 말수도 여순에게 환자를 떠밀지 않았다. 여순이 약을 건네면서 한마디 했다.하루 세 번 복용 잊지 마세요. 열흘 정도 지나도 이상 없으면 괜찮을 겁니다. 그는 말수가 했던 말을 되풀이 하면서 환자를 안심 시켰다. 남자는 여순을 안 보는 척하면서 한 번 보고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여순도 그 남자를 보았다.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혔으며 안경 너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여순도 그가 조선 독립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환자들이 떠났다. 젊은 남자가 계산을 했다. 그리고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서너 명의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의사 양반을 찾는다는 사환 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그 목소리를 말수도 듣고 여순도 들었다. 둘은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실 쇼파에서 그 환자에 대해 잠시 각자의 느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난 급성 맹장인줄 알았거든. 나도 그랬어요. 그 정도로 아파한 경우는 배탈과는 다르거든요. 어쨌든 잘 일이야.

이런 이야기 중이었다. 사환 애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을 타고 오르는 둔탁한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말수는 소리만 들어도 계급장까지 알아 맞출 정도로 군홧발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군인이 아니고 순사들이었다. 초급 순사 한 명과 순사부장이 앞서 들어왔고 두 어명이 뒤따라 그들 뒤에 섰다. 당신의 이곳 의사요. 그렇소이다.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접수하고 아래층에서 기다리세요. 내가 아픈 게 아니고 아픈 환자 가운데 수상한 자가 여기 병원에 왔다는 첩보를 받았소. 입원 환자 가운데 4, 50대로 보이는 남자 환자가 있소? 말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니 없소 하고 말했다.

그럼 외래 환자 중에 그런 환자는 있소?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소. 가장 최근에 온 것은 언제요? 여순은 말수를 쳐다봤다. 말수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수가 말을 꾸며대면 자신도 거기에 맞춰야 했다. 있었소. 바로 전에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환자가 다녀갔어요. 복통 때문이라고 왔는데 어디 멀리 간다면서 한 달 치 약을 달라고 했소. 멀리 간다고.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소. 그 말은 듣지 못했어요. 순사부장이 여순을 힐끗 보더니 이내 소리를 내면서 병원 복도를 두어 발자국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그자가 이 자인가요? 하면서 사진 한 장을 들이 밀었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 영락없이 바로 조금 전에 다녀간 환자였다.

아니오, 이런 사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안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머리도 이보다는 길었고 눈매도 이처럼 날카롭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순사부장은 사진을 여순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이 자를 본 적이 있어요? 여순은 순간 망설였다. 틀림없이 조금 전에 왔던 바로 그 남자였다. 아니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입원 환자라면 익숙하겠지만 잠시 왔다가 가는 환자들은 일일이 다 기억을 못해요. 더구나 방금 왔다 간 환자는 안경 없는 맨얼굴이었고 머리도 제법 길었던 같아요. 머리야 자르면 되고 안경이야 벗으면 되고. 순사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는 그가 아니라고 단정 짓지 못한다는 투였다. 얼마든지 변장할 수 있고 변장의 수준도 평범하다고 보았다.

순사부장은 돌아서다가 다시 원래로 돌아와서는 의사 양반, 도쿄에서도 경성에서도 훌륭한 의사였다는 소리 들었어요. 그리고 일본 장교를 여럿 살리는 의술을 보여 줬다고 상부에서 기록한 것도 보았어요. 대일본제국이 지금 전쟁 중인 건 알지요? 말수가 대답 없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런데 조선이 말썽이요. 조센징이 감히 독립한다고 나대니 말이오. 한 몸으로 뭉쳐 일본, 중국, 조선이 하나가 되어 적들과 싸워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오. 그가 마치 독립운동가를 앞에 두고 있기나 한 듯이 말수를 보고 나무라듯이 말했다. 나를 책망하다니, 내가 독립운동과 연관이라도 있고 그 자를 놓친 것이 내 책임이라도 된 다는 말인가. 말수는 어이가 없었다. 진작 와서 언질이라도 했다면 더 신경썼을텐데요. 말수는 순사부장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제라도 선생은 미심쩍은 환자가 있으면 즉시 신고해 주시오. 순사부장은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바탕 소송이 끝나고 병원은 이내 일상을 찾았다. 긴장했던 말수는 그것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책상에 발을 올리고는 눈을 감았고 잠깐 동안 졸았다. 꿈속에서 말수는 어떤 알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어서 걱정이 됐다. 누구나 처음 가는 곳에 대한 사람이 갖는 두려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구름 위 같기도 했으며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곳은 어디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가고 있는 그곳이 정확히 어떤 곳 인지를 알고 싶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안경을 쓰고 복통을 호소했던 그 환자. 바로 그 사람, 중년에 이마가 좁고 하관이 발달 된 뿔테 안경 너머로 눈매가 사나웠던 그 사람. 말수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기운을 떠올리면서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사람의 배후가 그 사람은 아닌지, 그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배를 위아래로 누르고 압박하면서 느꼈던 작은 반동과 그 반동뒤에 오는 어떤 강한 의지 같은 것으로 뭉쳐진 그 사내의 정체가 말수는 궁금했다. 그리고 배꼽 위에서 보았던 총상 같은 흉터.

그가 소문으로 떠돌던 독립운동의 뿌리이면서 기둥인가. 임정의 선생이 바로 그 분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말수는 자신이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곳은 구름 위도 검은 지하의 세계도 아닌 바로 발을 얹고 있는 자신의 사무실이었다. 이곳에서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말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지는 못해도 멀찍이서 그들이 가는 모습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고 싶었던 일이라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 틈새에 끼어들어 가서 그들의 일원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기. 이마가 좁은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도 더 험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말수는 침착했다. 덤벙대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고 그것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운명에 맡겨야 할 것이다. 피할 수도 피하려는 노력을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다고, 그렇게 부산을 떤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수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운명 말고는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때보다 심장의 고요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말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운명을 부여 잡았다. 그것말고는 그녀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포목점 주인 윤사장과 조선독립과 중년 환자의 치료는 어떤 끈으로 연결됐고 그 끈의 일부를 자신이 잡고 있다고 여겼다. 잡은 손을 놓을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고 그대로 잡고 놓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러나 스스로 어떤 행동을 주체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잡았다면 잡은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어쩡하게 한 다리만 걸친 상태라고나 할까.

바람이 불어 걸친 다리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것이고 더 큰 동아줄이 와서 강하게 엮이면 엮이는 것이었다. 누가 잡아끌면 끌리는 데로 가면 그뿐이었다. 여순은 상해의 삶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태평양의 먼바다에서 이곳에 도착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했으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정해진 운명으로 해석했다.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썰물에 빠지면 빠지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과거보다 더 나빠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오지도 않은 어려움 때문에 미리 고뇌에 빠져서 허둥댈 필요가 있을까. 없다. 여순은 그렇게 물었고 그렇게 대답했다. 여순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원래 태생이 부지런했으나 남는 시간은 영어와 의학 공부로 피아노와 기타로 그리고 운동으로 시간을 채웠다. 가만히 있는 꼴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싫어했다.

운동은 새로운 취미였다. 환자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몸으로 대하기 위해서 추가한 것이 운동이었다. 그녀는 병원이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알았다. 무게도 늘었고 뱃살도 나오려고 한다. 말수는 임신했어? 그런 거야? 하고 배를 눌러가며 핀잔을 주었다. 그 말은 싫었다. 그래서 한 번은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알잖아요. 하고 크게 쏘아 붙였다. 농담도 그런 것은 축에 들지 못했다. 아기를 대놓고 말하다니. 내 마음을 알면서도. 여순은 말수가 실수한 것이라고 여겼다. 

울 듯한 여순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보고 말수는 그 이후로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되레 여순이 그 말을 상기시켰다. 미안했던지 아니면 그래도 이제는 상관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말수는 이미 아랫배의 일부가 쳐졌다. 당신이 임신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말수는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했던 말에 상처를 받았을까 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말수는 그런 남자였다. 여순은 병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틈틈이 군인들이 했던 것을 따라했다. 구보는 병원에서는 어려웠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벌칙으로 가해졌던 엎드려 뻗쳐나 앉았다 일어서기의 반복, 오리걸음 걷기 등으로 하체를 단련했다.

여군 납셧네, 입대할 거야. 말수는 여순이 취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칭찬인지 농담인지 한마디 했다. 그래요, 의사가 아니었으면 여군이 됐을 거예요. 여순이 씩씩하게 받았다. 그러면서 당신 뱃살도 집어넣어야지요. 옷감이 많이 드는 거 내가 싫어 하잖아요.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럼 시키는 데로 따라 하세요. 이 방법이 최고예요. 그래야 날 밤을 세워 수술 해도 지치지 않아요. 여순은 운동을 자신들의 직업과 연관시켰다. 말수는 그런 여순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불평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맹세와 함께 평생을 옆에서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리 와요, 오늘은 삼 십개만 해봐요. 어서. 말수가 여순 옆에서 비슷한 자세로 팔을 짚고 엎드렸다. 하나 둘 셋 넷...숫자 십 삼에서 말수는 배를 땅에 깔고 엎어졌다. 그도 한때는 오십 개는 식은 죽 먹기였다. 군함의 갑판 위에서 군인들을 따라 그는 쿠샵을 했었다.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그가 군인들보다 체력이 약할리가 없었다. 그물 한가득 올라오는 물고기를 뱃머리로 끌어 올리던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예전만큼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우리 매일 반복해요. 내기 어때요. 지는 사람이 업어 주기로요. 퍼대기도 있어요. 퍼대기? 말수가 반문했다. 포목점 주인이 선물로 준 걸로 뚝딱 만들 었어요. 말수는 웃었다. 이번의 웃음에는 어떤 쓰라린 것이 담겨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탄을 그런 식으로 넘어 가고 있는 여순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그리고 자수를 뜨면서 이겨냈던 막사의 추억. 말수는 여순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나 열심히 해.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말수는 그러면서도 열 개를 더하고 일어났다.

여순이 옆모습으로 보니 그의 팔뚝에 붙은 가느다란 근육이 움찔거렸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그러기 전에 근육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 여순은 말수가 따라주는 것이 고마웠다. 싫은 것이라도 말하면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이 말수였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도 당장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만큼 말수는 여순을 배려했고 그 마음을 여순은 알고 있었다. 나이 차가 나고 그녀의 과거를 그가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안았다.

한 달이 지나도 윤사장은 오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은 혹시나 그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기대감도 두려움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보름이 지나자 윤사장은 말수 부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못 돼서 그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배를 앞으로 디밀면서 들어온 포목점 주인은 의사선생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자신이 온 것을 미리 알렸다. 그 뒤에는 부인이 한 발 떨어져 서 있었다.말수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이 왔구나 생각했다. 말수는 일어서서 아주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응급환자가 아니었고 부인도 환자라기보다는 방문객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포목점 주인은 안사람이 진료를 받고 싶다고 말수를 보면서 아까와는 달리 조신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료 받을 사람이 자신이 아니고 아내라고 뒤를 돌아보면서 이 사람을 진료좀 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말수는 직감적으로 어떤 중병이나 그것이 의심스럽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그러시지요, 요즘은 부인병 환자들도 많이 와요. 하면서 환자를 안심시켰다. 이층으로 부인을 안내하고는 일층에서 말수는 남자와 진료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환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수는 그동안 그 남자가 어떤 일로 지냈는지 궁금한 것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조선말이 아닌 중국말로 사업은 그런데로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아내가 임신인지 달거리가 세 달이 지나도 없다고 자신이 온 목적을 먼저 말했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직 삼십대 초반인데 임신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임신이라고 해도 더 낳을수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말수가 진료가 끝나고 나서 그 문제는 이야기 하자고 했다. 윤사장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는 무슨 볼일이 있는 것처럼 말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혹시 그 남자가 수술했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라니요? 말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남자가 부연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아, 그 남자 말이오. 안경을 쓰고 복통인지 맹장 때문에 한 번 왔던 사람 말이오. 아, 그 분요? 아니요. 오지 않았어요. 아마 급체 했던 모양이예요. 맹장은 아닌 것이 확실하니 더는 병원에 올 일이 없지요. 그런데 그 남자가 어찌 됐나요? 말수는 일경들이 들이닥친 것은 말하지 않고 대신 남자가 답을 할 수 있도록 질문을 건냈다. 그 자신도 알고 싶었던 것인데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자연스럽게 뿔테 안경의 남자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다. 아니, 뭐 별 거 아니요.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말수가 되받았다. 조금 불쾌하다는 투였다.

아, 나중에 내가 다 말해줄게요. 지금은 아냐, 의사양반. 그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때 다리를 다친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오면서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이층에서는 여순이 포목점 주인 여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편처럼 달거리가 세 달이 지나도 없다고 했다. 혹시 애를 임신한 것은 아닌가 하고 궁금해서 왔다는 것이다. 여순은 그것말고는 다른 증상은 없는지 물었다. 입덧 같은 것은 없어요. 첫째 애 낳을 때도 그런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요. 워낙 장사가 급하기도 했고 사는 것이 팍팍하다 보니 힘들어도 그냥 넘어간 것 같아요. 여자는 임신을 전제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순은 임신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달거리가 세 달 멈췄다고 해서 바로 아기를 가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름 후에 다시 오세요. 그러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아기 움직이나 뭐 그런 게 보일 수 있거든요. 알았어요. 그리고 나서 둘은 화제를 바꿨다. 아랫층에서 남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지난번에 마저 하지 못했던 수다를 떨자고 했다.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순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포목점 집 여자는 중국말이 아닌 조선말을 썼다. 여순도 그렇게 했다. 조선말이 편해요.맞아요. 나도 그래요. 둘은 엷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말이예요. 지난 번 얼 핏 들으니 무슨 조선독립운동 같은 이야기를 하던데 그것과 윤사장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아이, 아니에요.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그이는 그런 것 몰라요.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나요. 아니 뭐, 딱히 이유는 없고요. 지난 번 방문 때 그런 애기를 해서요. 그렇군요. 우리 남편이 황포군관학교를 나왔잖아요. 그 기세가 있어요. 그래서 군대 이야기라거나 무슨 운동 같은 것에 관심이 있지요. 조선 사람들이 여기서 독립운동을 많이 해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소문도 돌아요.

이 말을 하면서 포목점 집 아내는 누가 들을까 조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참, 주책없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이제 가봐야겠다고 일어섰다. 가게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둘은 같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남자들과 합세했다. 다리 환자를 치료한 말수가 손을 씻고 진료실을 나왔다. 목발 환자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절뚝 거리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포목점 남자가 앞으로 나오면서 제수씨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를 까닥했다. 여순은 미소를 지으면서 답례했다.

먼길을 오셨어요. 아니요, 제수씨. 한 달에 한 번 보자고 하고서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뵙지도 못했어요. 병원가자는 말을 듣고는 치료 솜씨가 단연 최고라서 다른 곳 다 제쳐 두고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차 한잔하시고 가세요. 여순이 모자를 집어 드는 남자를 붙잡았다. 말수도 환자도 없는데 그러시지요. 하고 거들었다. 남자는 바쁘다고 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눈길은 피아노 옆에 세워진 기타를 보았다. 음악을 하는 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곡 신청하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괜찮을까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자문을 구하려는 듯이 여순과 함께 간이 주방으로 가는 아내를 불러 세웠다.당신도 기타좀 배우시구려. 아니면 피아노라도. 그의 아내는 대답없이 사라졌다. 차는 커피였다. 구수한 냄새가 진료실의 소독약을 대신해 네 사람을 감싸고 돌았다.

피아노는 제수씨가 치고 기타는 우리 선생님이 하시나요? 남자가 한 모금 마시고는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듯히 물었다. 말수가 손을 저었다. 난 음악은 잼벵이 입니다. 다 아내 솜씨고요. 저는 듣기만 합니다. 남자의 아내가 나섰다. 그러지 마시고 한 곡조 해보시지요. 말수는 부탁받은 그 일을 여순이 해주기를 바랐다.

눈치를 챈 포목점 집 아내가 여순을 쳐다보면서 노래를 청했다. 듣고 싶어요.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라 연주를 원했으나 여순은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이었다. 그 노래는 어떤 설움을 느끼게 했고 그리운 먼 곳을 생각나게 했다. 남자가 박수를 쳤다. 세게 치고 나서는 너무 슬프니 조금은 힘이 나는 노래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너스레를 떠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말수가 재빨리 나서서 답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자는 머뭇 거렸다. 그러다가 난 반주 없이 부르겠다며 빠른 노래를 아주 느리게 불렀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노래를 끝내고 남자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순도 말수도 처음 듣는 노래였다. 유행가 가사가 아니었다. 박자로 보니 군가였다. 그런 군가를 말수와 여순은 질리게 들었다. 빠른 박자에 힘찬 구호에 젊은 병사들의 피가 끓었다. 그 피는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부채질했고 뒤로 밀리는 전선을 앞으로 당기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박자는 군가 형식이었으나 가사는 전혀 딴판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래였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여순은 노래를 마친 남자를 멍한이 쳐다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이는 흥만 나면 이 노래를 불러요. 누가 군인 출신이 아니랄까봐. 포목점 주인의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못마땅한 표정은 아니었다. 함부로 노래를 부르다가 경칠 일이 있을 거라니까. 그때는 날 원망하지 마요. 이런 말을 덧붙였으나 이때도 부인은 그렇게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남자는 흥만 나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장소를 가렸으며 때를 정확히 구분했다. 불러야 할 곳이 아니면 철저하게 피했다. 그러면 이곳 병원은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인가. 말수는 조금 언찮았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포목점 집 주인은 말수 내외를 눈여겨봤다. 이들의 얼굴 표정과 태도에서 보통내기들이 아니고 쉽게 입을 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방관자인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닌 어떤 묘한 감정 같은 것이 있었다.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먼 이국에서 동지로 함께 할 사람들이라고 포목점 주인은 판단한 것일까. 그런 가 보다. 이런 판단 근거는 또 있었다.

일본 영사관 소속 순사들이 병원을 급습한 내막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부가 그 뿔테 남자에 대해 어떤 내용도 털어 놓지 않은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심어 놓은 연락책들은 왜경이 병원에 들이닥친 것과 그들이 심문한 결과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듣고 포목점 집 남자는 의사 부부를 신뢰했으며 심지어 존경하는 마음까지 같게 됐다. 자신에게 까지 아니라고 부인했는데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노래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너무 앞서간 것인가. 남자가 후회할 즈음 여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태연하게 가락이 군가군요. 혹시 악보와 가사를 알 수 있을까요.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는 듯이 남자는 악보 같은 것은 모른다면서 탁자 옆에 있는 볼펜을 들어 자사를 쓱쓱 써내려 갔다. 여순이 웃으면서 종이를 받았다. 악보가 없어도 음악 천재이시니 칠 수 있겠지요. 내가 한 번 더 노래를 불러 드리리다. 포목점 집 남자가 다시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여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아내도 따라했다. 말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싶었으나 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다른 운명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기분 좋은 봄바람 같은 것이었고 성난 파도와 같은 것이었다. 여순은 노래에 따라 건반을 두드리다 멈췄다를 반복하면서 고개를 반복적으로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여순은 이 순간 말수와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이상하게 흥이 나는 노래였다. 똑같은 옷을 입고 수십 명이 허리에 손을 대고 혹은 박자를 맞춰 달려 가면서 부르던 노래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연병장에서 혹은 군함의 갑판 위에서 부르던 노래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배불뚝이의 노래는 고향의 봄처럼 따스했다. 독창이어서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기 때문인가. 아니면 조선말로 천천히 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말수처럼 여순은 노래 한 곡으로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지 않았다. 다만 칠 곡이 하나 더 늘어 부지런히 연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피아노도 기타도 잘 어울린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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