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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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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망설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0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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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무너진 성당 벽에 몸을 바짝 기댔다. 어둠 속에 있다 밖에 나오니 눈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손으로 눈을 가리고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비벼댔다. 아찔하기도 하고 넘어질 듯 현기증도 일었으나 말수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그러기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몸으로 느끼는 바깥 공기는 시원하면서도 음산했다. 어떤 소리도 들기지 않았다. 겨우 눈을 뜨고 서서히 사방을 관찰해 보니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그런데 코 만은 충실히 제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역한 냄새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풍은 말수를 자극했다.

거대한 시체의 섬은 부패의 냄새로 가득했다. 냄새는 섬주위를 떠돌뿐 바다쪽으로 빠져 나가지 않았다. 코를 쥔 손을 푼 말수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담장은 바리케이트 삼아 서서히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는지 일본이 패망했는지 미국이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는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어 말수는 답답했다. 이렇게 더 가다 보면 판단을 내릴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성당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말수는 어쩌면 이 섬밖으로 탈출의 기회가 올 수 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기회를 엿보는 것을 일지 않았다. 그는 깃발을 찾기 위해 눈을 땅이 아닌 위쪽으로 돌렸다. 성조기인지 일장기인지만 확인하면 된다. 깃발은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증명해 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쉽게 그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깃발을 꼽을 만한 높은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승리자의 표식은 이 곳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수는 조심스럽게 몇 발짝 걷다가 왔던 길을 되짚었다. 돌아오는 길은 어지러웠다. 공기도 세상도 머리도 한없이 빙빙돌았다. 세상에 첫발을 디딘 어린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이 말수도 벽에 드러난 벽돌에 겨우 의지했다.

며칠 굴속 같은 성당 지하에 갇혀 있다 나온 세상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현기증이 가신 뒤에야 말수는 겨우 원래 있던 여순이 있는 근처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허탈했다. 여순에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괴로웠다. 아직 미군인지, 일본군인지 승리자가 누구 편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더 멀리 갔더라면 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수는 그러지 못했다. 파괴된 무덤의 흔적앞에서 말수는 살펴보는 것을 포기하고 뒤로 돌아섰던 것이다.아직 떠나기는 이른 것 같아. 겨우 이 말이 말수의 입에서 나왔다. 당장 내일 아니 모레는 아니라는 말이죠. 얼마를 더 있어야 하죠. 여순은 재촉했다. 안전한 곳에서 죽을때까지 살자고 다짐한 적도 있었으나 막상 떠나기로 하자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좀 더 기다리자. 아직 어느 편이 승자인지 확인이 안돼. 말수는 체념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여순은 그런 말수가 갑자기 안쓰러웠다. 보챈다고 될 일이 아닌데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그를 더 걱정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다독이고 싶었다.

그래 그는 어젯밤 살인을 고백했어. 그리고 아직 마음도 정리가 안된 상태야. 그를 몰아붙이기 전에 마음의 정리가 필요해. 괜찮을까. 그가 죽음을 무릎쓰고 밖으로 나간 것은 살인 고백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그는 탈출할 마음보다 살인고백을 더 원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얹어진 마음이 무게를 털어내는 것이 먼저다.

용서 어쩌구 하는 것보다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 하는 것, 이미 심판을 받아 죄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잘못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더구나 그것이 살인이고 한 두 건이 아니라면 더 그렇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살리는 일보다 쉽다. 그것은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말수에게는 그런 정신무장이 필요한 것이다. 선장의 일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난파선이라면 순수한 아이들도 살기를 느낄수 있지 않은가. 여순은 말수가 어제일로 저렇게 풀이 죽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골똘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던 것은 여순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에서 봐야 했다. 말수는 살인고백의 심적 부담을 완전히 잊었다. 아예 그런 것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순은 괜한 걱정을 한 것이다. 

말수의 고민은 섬을 탈출하는 것이다. 내일은 함께 나가보자.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네가 볼지도 모르니. 다만 나가면 몸이 휘청이다 쓰러질지 모른다. 눈을 바로 뜨지도 못하니 미리 연습을 해두는 게 좋아. 그래야 겠지. 여순은 말수의 목소리가 다시 생기를 띄자 자신도 거기에 화답했다. 말수는 포도주를 마셨고 여순에게도 주었다.

촛불을 하나 더 켜서 주변은 더 밝아졌다. 통조림은 얼마든지 있었으나 깡통을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손으로 그것을 따기 위해 마개 부분을 위로 들어 올릴 때면 벌써 아랫배에서 신호가 왔다. 그만큼 역겨웠다. 생각해 보라. 며칠인지도 모를 날들을 모두 깡통 음식으로 배를 채웠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 말수나 여순의 입장도 이해할 만하다. 전쟁통에 배부른 고민이 결코 아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아니 먹을 수 없다. 말수는 어제보다 오늘 술을 더 먹는 것 같다. 여순은 말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다. 술기운으로 푹 자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만사를 잊고 싶은 마음이 더해졌다. 

여순이 말수에게 기댔다. 그런 상태로 눈을 감고 잠이 들고 싶었다. 그런데 말수가 말을 꺼냈다. 나 또 할 게 있다. 또 있다고. 뭐가. 뭐가 있어. 여순이 잠결에 말했다.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척 하면서 잠이 빠지면 그의 말은 그대로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가 아닌가. 할 게 더 있어. 여순은 무시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살인 고백. 그 소리를 듣고 여순은 자던 잠을 다시 현실로 불러 들였다. 뭐, 아직도 있어. 도대체 몇사람이야. 여순은 그러나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그러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 더구나 여기는 십자가가 있잖니. 만일 내일이라도 나간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거야. 할 거면 틈들이지마. 바로 시작해. 여순이 고개를 약간 들고 어둠에 대고 말했다. 그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다해. 남기지 말고. 내일 또 하기 없기다. 내일도 나 있어.  하지 않은 게 남았단 말이야. 이런 말 없다. 여순이 입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을 말수가 봤다면 귀여운 아이의 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냥 살인이 아니다. 살인에 방화. 그래 해봐. 당신이 했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선장을 해치기 한 해 전 이었다.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 왔다.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이 통영 촌구석에 그들이 온 이유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 입구에 오래전에 부서져 방치된 성황당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수리해 집으로 사용했다. 돈을 제법 줬다고 했다. 동네 부자가 골칫거리를 처분할 기회를 얻자 싼값에 처분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떠들었다.

70대 부부와 30대 부부로 2대가 함께 왔는데 행색이 초라했다. 돈을 제법 줄 위인들이 못됐다. 품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뱉는 말은 거칠었다. 마을에 와서 동화하면서 살려는 의도가 없다는 듯이 걸리는 사람 누구나 시비를 걸었다. 마을 길을 마치 자신의 땅 인듯이 사용했고 어구를 함부로 늘어놓았다. 말수네가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집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자들은 어떤 날은 길을 아예 막기도 했다.

치우라고 해도 되레 남의 땅으로 다니니 돈을 내라고 소리쳤다. 늙은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아들 내외도 가세해 이런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따지는 말수 아버지에게 욕설을 해댔다. 어쩌구니 없었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들을 상대하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행여 자신들이 헤코지 당할까봐 거리를 두었고 집을 오가는데 큰 불편을 겪는 말수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말수 아버지가 보기에 대대로 내려온 길을 자신의 땅이라고 다니려면 돈을 내라고 길을 막는 행위는 온당치 않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다들 쉬쉬했다. 자신들은 그 집 앞을 지나갈 이유가 없었다. 대립은 이사 온 자들과 말수네가 직접적으로 부딪쳤다.  하루는 말수 아버지와 젊은 아들 내외와 대판 싸움이 붙었다. 논을 갈고 늦은 시각 서둘러 오는데 사람 하나 비켜 갈 공간도 남겨두지 않고 그물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놓았다.

말수 아버지는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늙ㅂ은 부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젊은 부부가 나서서 내 땅 내 마음대로 하는데 영감이 왠 잔말이냐고 대들었다. 말수 아버지도 지지 안았다. 이 길은 내가 젊었을 적에 품을 내서 낸 마을 길이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길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그런 말은 듣지도 않고 내 땅을 지나가려거든 돈을 내라고 소리쳤다. 언성이 오가는 와중에 젊은 부인이 욕설을 퍼부었다. 남자도 따라나섰는데 세상에 그런 욕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안 보이던 늙은 부부도 가세했다. 그들 네명이서 달려들었다. 멱살을 잡지는 않았지만 낫이나 어구를 들고 위협했다. 네 깟 놈 하나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다. 읍내 순사가 내 오촌 당숙이다라고 소리쳤다. 말수 아버지는 그날 몸저누웠다. 삼 일을 앓고 일어났을 때 말수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는 헛소리를 했다.

말수를 불러 놓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말수야 네 말 신중하게 들어라. 네, 아버지. 네 엄마 말이다. 돈을 갖다 바친다. 누구에게요. 저 앞집 이사 온 놈 있지 않니. 그 놈들에게 준다.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줘요. 그리고 있다 손 치더라도 그 원수 같은 놈들에게 줄 이유가 없잖아요. 말수는 펄쩍 뛰었다.

아니다,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낌새라는 것이 있다. 틀림없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요. 그 놈들한테 엄마가 돈을 주다니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 놈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 놈은 돈은 커녕 상대도 안해요. 

밖에서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준비하는 엄마가 내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는 말을 뚝 그쳤다.그리고는 조용히 말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가 쌀독에서 쌀을 퍼서 장에다 내다 팔려나 보다. 엄마를 잘 살펴라. 말수는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말 이후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말수는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어머니가 그들에게 무슨 약점을 잡혀 돈을 뺏겼나 걱정했다. 그리고 다시 삼 일이 지났고 아침상을 물리고 어머니가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에 아버지가 다시 말수를 불렀다.

말수야, 너 아버지 말 진지하게 들어. 네 아버지. 네 엄마가 저놈들하고 친하게 지낸다.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 안다. 보셨어요.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니 보지는 못했다. 보지 못한 것을 왜 상상을 해서 말을 하세요. 낌새가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는 이때까지 그런 낌새로 세상을 살아왔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말수야, 너 가족이 뭔지 아니? 말수는 머뭇거렸다. 뜬금없이 가족이라니. 

가족은 말이다. 어려울 때 같이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네 엄마는 아니다. 길을 막고 낫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말이세요, 아버지. 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것을 아버지가 봤어요? 보지는 않았다. 그럼 왜 지어내서 하세요. 지어낸 것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그놈들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네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아니? 뭐라고 했는데요. 왜 그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해요, 하고 말하더라. 어처구니가 없더구나. 이 말을 하면서 아버지는 손을 조금 떨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조금 지나면 그 사람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길을 풀겠지 하는 생각을 했겠지요. 생선 몇 토막 가져와서는 그동안 잘못을 사과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할지 모르니 대립하는 대신 조금 기다려 보자, 이런 의미 아니겠어요. 아시잖아요. 어머니 마음 여린 거.아버지가 행여 그 사람들과 싸우다 주재소 같은데 잡혀 갈까봐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요. 

너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버지,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세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도 알잖아요. 그래 너도 네 엄마와 한패구나.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놈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다니. 그 이후 아버지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몸도 예전만 못했다. 어떤 날은 가다 쓰러져서 한 참 만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밤에 자다 일어나서는 등긁개로 마루를 치면서 뱀이 달려든다고 소리쳤다.

말수야, 이번에는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망령 들렸나 보다. 뜨끔했다. 망령이라니. 그 전까지 말수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말을 듣고는 정말 그렇구나 생각했다. 노망이 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을 아버지가 하고 있다. 한 번은 마루에 앉아 새끼를 꼬고 있는데 아버지가 다가왔다. 그 날은 그냥 평범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설걸이를 끝내고 밭일을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네 어머니와 65살 까지 관계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림없다. 나도 이제 늙었다. 말수는 귀를 의심했다. 관계를 했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자식에게 할 수 있나. 정말 제대로 망령이 들었구나. 이를 어째, 말수는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을 모두 새로 이사 온 사람들 때문으로 돌렸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이사 온지 열 달이 지나도 그들은 여전히 길을 막았고 지나는 아버지에게 욕을 멈추지 않았다.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급하게 늙었다. 몸이 쇠약해지자 머리도 따라 약해졌다.

아버지가 망령 들렸다면 다 이사 온 놈 때문이다. 말수는 분노를 키웠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의심이 더해갔다. 돈을 갖다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의처증까지 더해졌다. 증세는 심해졌다. 밤새 잠을 안 자고 어머니를 볶았다. 가족을 들먹이다가 들어주지 않으면 밤에 어디 갔다 왔느냐, 그놈 어디서 만나고 왔느냐. 나는 썩은 고기다. 한 탄을 하다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어는 날은 우는 소리가 말수가 자는 사랑방까지 들려왔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도 이러다가는 큰 탈이 날 것만 같았다. 

뱃일을 하고 들어온 어느 날 말수가 마당에 도착하자 짐꾸러미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모자를 쓰고 말끔한 새옷으로 갈아입은 아버지는 급하게 대문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네 엄마와 갈라서러 간다. 말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네 엄마와는 살 수 없다. 이혼하기 전에 경찰에 고소하러 가겠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내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데도. 아버지, 제발. 그래 너는 누구 편도 들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나와 네 엄마의 문제다.

말수는 겨우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주재소에 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주재소에는 왜 가려고요? 네 엄마를 간통죄로 고소해야지. 말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미친짓 그만하세요. 말수는 버럭 화를 냈다. 그래, 내가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네 어미를 고발하겠니. 그 심정은 너는 모를 거다. 네 여자가 바람피는 것을 보고도 눈이 돌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니? 바보 천치 빼고는. 너도 내 심정이라면 아마 그럴걸. 말수는 이를 갈았다. 미친 아버지보다도 이사온 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말수가 심하게 노려보자 아버지는 그만 꼬리를 내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나와서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올라오면서 조카네를 들렀다. 작은 아버지 집에서, 조카네 집에서 아버지는 말수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놀랐으나 그 다음 날도 다음날도 같은 말을 하자 작은아버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던 조카는 삼촌이 망령 들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런 말 하려거든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날 이후로 마을에는 아버지가 노망에 들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는 앓아누웠다. 아버지가 며칠 모습이 보이자 않자 이사 온 사람들은 아예 길을 삽으로 뚝 잘랐다. 마치 무 자르듯이 잘라서 사람이 건너뛰어야 갈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땅이 자기네 땅이니 가려면 통행세를 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인심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사람이 좋아서 여태 공짜로 봐줬지 앞으로는 어림없다고 삿대질을 했다. 

마을 사람가운데 측량을 해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대대로 그 땅이 서울로 떠난 아무개 땅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측량은 돈이 드는 일이었다. 말수 네는 그런 돈도 없었고 돈을 내서 측량할 마음도 없었다. 대를 이어 백 년 넘게 사용해온 길이었다.

말이 안 나왔으나 우격다짐으로 나오는 그들을 말수네는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날뛰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가운데 한 명이 그들과 친척인 것이고 다음은 인간이 워낙 안 되 먹었기 때문이다. 천하게 태어났다고들 했다. 특히 젊은 아들 내외의 행태가 더 심했다. 자기 부모뻘인 아버지에게 말수가 없는데서는 마구 욕을 해댔다. 그들도 자기 또래 보다는 어리지만 사리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말수 앞에서는 차마 욕설을 하지 못했다. 

주재소에 친척이 있다. 대들려면 대들어라. 그들은 말끝마다 주재소를 들먹였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다들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쉬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어울리는 마을의 못된 사람들은 자꾸 그들을 충동질 시키면서 말수네와 이간질에 앞장섰다. 어느 마을이나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끼리끼리 알아 본다고 못된 놈들은 서로에게 있는 악마의 마음을 공유했다. 

허우대가 크고 말술을 하는 말수네 이웃집에 사는 악마는 싸움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이 이사를 오자 길부터 끊으라고 종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말수네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원수진 일도 없었다. 나중에 사주한 자가 허우대가 멀쩡한 악마인 것을 알고 말수 아버지는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들은 작당을 하면서 말수 네를 고립시켰다. 바다를 가거나 일을 나가려면 반드시 그 집 앞 길을 통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끊긴 길을 보면서 말수는 울분을 삭였다. 누구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분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들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슬슬 뒤꽁무니를 뺐다.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말수는 시무룩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은 고착되고 되돌릴 수 없다는데 있었다. 말수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작은 아버지나 사촌형은 너무 착하고 나약해 그들에게 눈짓은 커녕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일가친척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고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고 어머니는 그냥 저냥 살자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그냥저냥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노망과 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말수는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이 알게 됐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 다음 날 허우대를 불러들인 악당은 집앞 길거리에서 술판을 벌였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길을 돌아서 집으로 왔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웃는 모습은 모욕적이었다.

그날 밤 말수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계획한 것을 실천하려고 두 주먹을 쥐었다. 당장 달려들어야 한다. 더는 참을 수가 없다. 기다리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엄마의 판단은 틀렸다. 그들은 이웃이 아니고 원수다. 연놈 네 명을 감쪽같이 해치울 방법은 간단했다. 불을 질러 형체도 없이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이제 막 청년기를 벗어난 말수의 심장은 세게 뛰었다. 야심한 밤, 그는 가져온 석유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여 문틈으로 흘려 넣었다. 석유가 나오면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전등불로 쓰는 비싼 석유가 마구 흘러갔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옆방에도 석유를 쏟아부었다. 불길이 번지면 먼저 깨어난 놈은 뒷문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걸 예상해 미리 나무 작대기를 받쳐 놓았다. 괴어 놓은 작대기를 힘을 주어 땅에 조금 박았다. 이렇게 하면 열리기는 하겠지만 단번에 열 수는 없을 것이고 허둥대면서 나오면 그때 손도끼로 찍으면 된다.

석유 대병을 골고루 쏟아붓고 나서 말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멈추고도 싶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는 성냥을 그었다. 불길이 흘러간 석유를 따라 불이 붙었다. 삽시간에 불은 방을 덮쳤고 술에 취한 남녀들은 뒷문으로 나오지 못했다. 도끼를 쓸 일이 없었다. 한 십여 분만에 초가지붕에 붙은 불은 서까래를 아래로 쏟아냈다. 그때까지 마을은 쥐죽은 듯했다. 아무도 불이 난 것을 알지 못했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말수는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뺐다. 달은 높이 떴고 바람은 동풍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낭패다. 달빛에 드러난 몸을 감쪽같이 숨기기 위해 말수는 달렸다.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급했다. 애초 산속에 숨어 있을까 생각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서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백구 럭키가 꼬리를 흔들었다. 뒤돌아보니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래 묵은 나무집이 삽시간에 불길을 먹었다. 그때쯤 돼서야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백구도 미친듯이 짖어대며 밖으로 나갔다.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지르는 소리인지 작은 일에도 잘 놀라는 마을 아낙이 내지르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날이 밝아왔다.

말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가슴은 벌써 진정됐다.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서 무슨 일이냐는 듯이 호기심 어린 눈을 두리번거렸다. 불쌍한 그들을 위해 어른들처럼 혀를 끌끌찼다. 그날 오후 늦게 주재소에서 순사 두 명이 나왔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 네 구의 시체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마을 사람들은 화재가 아닌 방화라면 의심을 살까봐 묻는 말에 서로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시체의 주인과 오촌 간인지 아닌지 사람들은 순사들이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조사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알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조사를 마친 그들은 부엌에 있던 잔불로 인한 화재로 사건을 종결했다. 귀찮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황신이시여, 용서해주세요. 한꺼번에 네 명을 죽였습니다. 말수는 딱 한 번 그렇게 용서를 비는 말을 했다. 

그래, 정말로 딱 한 번만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빌었어. 말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잘했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은 살아서는 안 되거든. 그러니 걱정마, 여순의 손이 말수의 어깨에 닿았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이제라도 했으니 됐어. 속이 시원하지? 그래 정말 오래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야. 하느님이 참 필요한 존재야.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찾겠어. 고해성사만 해도 그렇지. 십자가 매달린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잖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오라, 그 말 아니겠어? 왜 아냐,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처럼 유쾌한 살인 고백이 또 있을까. 여순은 또 이렇게 말해서 말수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앞으론 절대 말아지 않기. 더는 없지? 뭐? 살인? 지겨워. 이젠 누구든 내 손으로는 죽이지 않을 거야. 심지어 군인이라고. 맹세는 하지마. 어쩔 수 없는 때가 오거든 반드시.  대신 이런 건 어때. 될 수 있으면 안 하기로. 할 때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뭐, 이런 단서가 필요해.

그렇지. 정말 우리 여순은 대단해. 내가 모르는 것을 알잖아. 사람 마음 깊은 바닥까지 파고들어가니. 운명이 장난이 치면 그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알아, 알아 모시겠어. 여순아, 졸려? 응. 그래, 나도 졸려. 눈뜨면 여기를 뜨자. 그래. 약속. 두 사람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이곳에선 더 할일이 없어. 맞아.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거든.

여순은 말수와 자신이 맞아 간다고 생각했다. 한 성질 하는 그에게 어떤 때는 소심함과 여린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그것이 여순의 마음에 들었다. 코 고를 소리가 들렸다. 찍찍 거리는 쥐소리는 약과였다. 세상 모르게 자는 말수가 여순은 부러워 잠을 쉬 이루지 못했다. 

마음은 자려고 해도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자신만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을 안고 산다고 했으나 말수는 그 이상이었다. 도대체 몇 명을 죽였지. 그 영혼을 내가 책임져야 해. 그가 때로는 성질이 더럽고 욕을 해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나. 그러나 여기서는 성질도 욕도 하지 않는다. 갑판위에서 보였던 거칠고 성질 잘 내는 사내는 어디로 갔지. 야수의 마음도 시간과 장소 앞에서는 무뎌지기 마련이야. 좋아, 좋은 쪽으로 변하거든. 그것이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야. 

말수는 변하고 있다. 살인 고백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의 말수는 달랐다. 심지어 얼굴까지도 바뀌고 있다.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고 빠른 말은 또박또박 끊어져서 나왔다. 날카로운 살인자에서 눈매가 부드러운 청년이었고 말투나 걷는 폼이나 말하려고 입을 열 때 내는 입술 모양도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 있었다. 그래, 잘 된 일이야. 여순은 자신도 말수처럼 그러기를 바랐다. 

그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신 앞에서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다른 삶을 살기로 약속한 것이다. 오늘의 고백을 통해 여순은 말수에게 더 기대고 싶었다. 그런 용기 있는 과거를 들추어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믿음이 갔다. 그녀는 몸을 돌려 말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작게 내던 코 고는 소리가 멎었다.

쥐가 올라타서 자신을 깨우는 것으로 알았던지 말수는 여순의 손을 뚝 쳤다. 여순이 깜짝 놀라면서 나야, 나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팔까지 길게 뻗어 말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말수는 가만히 있었다. 안 잔 거야.잠이 안 와.그래도 자야지.자고 일어나서 가기로 했잖아. 때가 되면 자겠지.그래 잠은 네가 알아서 해. 네 잠까지 내가 대신 자 줄수는 없어. 그런데. 응. 그 허우대는 어떻게 됐어. 살고 있겠지 뭐.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저냥 살겠지 뭐. 

이사온 사람을 충동질 했던 허우대는 순가가 가고 나자 죽은 자들을 강하게 성토했다. 새로운 길을 내줘도 모자랄 판에 대를 이어온 길을 끊은 행위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천벌 받아 죽었어. 그런 놈은 그래야 해. 안 그래요, 동네 분들. 내 말이 맞지요. 그래서 불타 죽었다고요. 하늘은 공평하다니까요. 그동안 말수네가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죽지만 않았으면 내가 라도 죽였을지 몰라요.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은 살다살다 처음 본다니까요. 그가 이렇게 열을 올릴 때 마을 사람들은 맞장구를 치기도 했으나 대개 먼 산을 바라 보았다. 

부처님, 하나님이 괜히 있나. 저런 놈들 태워 죽일라고 있지. 암, 암.옆에 서 있던 사람이 동조했다. 말수는 허탈했다. 쓴 웃음을 지었다. 너 같은 놈도 저렇게 될 거야. 그러나 내 손에는 아냐. 이제 말수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순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 일로 인해 자신에게 쌓아왔던 벽 같은 것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사에 놓인 벽이 무너진 거야. 

말수는 자신이 여순과 한 곳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누가 자신의 영혼을 위로해 주나. 여순 말고는 누가 있지? 없다. 없어. 여순은 이제 완전히 내 사람이 된 거야. 그는 내 친 김에 여기서 하고 싶었다. 비록 쥐들이 하객이 되겠지만 성당의 지하실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싶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신부님 단상을 부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축복해 줄 신부님이 없으니 그런 것은 상관없다.

여순아. 응. 나랑 결혼할래. 결혼? 뜬금없기는. 우린 이미 수도 없이 했잖아. 그런 거 말고. 정말로 하자고. 그래 십자가 앞에서. 여순은 결혼이라는 말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결혼, 내가 이 몸으로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내 몸으로 결혼을 한다고. 나는 깨끗하지 않아. 누구보다도 말수가 증인이야.

여순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말수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구나. 이건 장난이 아냐.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고. 절망에 빠져서, 죽기 직전에 갑자기 사랑이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비를 함께 넘기면서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가꾸고 키웠구나. 

울먹이는 소리로 여순은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언제든 오케이라고 화답했다. 고맙다. 여순아. 나 같은 놈의 청혼을 받아줘서. 고마운 건 나야. 후회할 일인지 생각할 기회를 줄게. 하루 이틀 생각한 거 아냐. 너를 간호원으로 빼고 함께 의사질 하고 군함을 타고 생사를 넘나들고 너에게 살인고백을 할 때 나는 이미 너와 결혼을 수도 없이 약속했어.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아닌거지. 진심이라는 말이야. 

반지는 있어? 결혼 반지. 여순이 코 맹맹이로 소리 반지를 외쳤다. 다른 건 몰라도 반지가 필요해. 그래 결혼 반지는 있어야지. 양가 부모는 없어도. 정말 반지가 있는 거야. 난 그냥 해 본 소린데. 반지도 없이 청혼할까봐, 내가 그런 비열한 인간이기를 바란거야. 말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준비했다. 이런 날을 미리 대비했거든.

나의 신부는? 여순아, 내 신부 여순은 준비했어? 난 없어. 그럴 줄 알고 내가 둘 준비했다. 말도 안돼. 반지는 서로 주고 받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내 것은 보험을 들어둔 걸로 치고. 여순이 나중에 의미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그 날에 나에게 줘. 그럼 됐지? 여순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웃었다.웃고 울고 그러면 호랑이가 장가간다. 가라지 뭐. 개내도 결혼 적령기에 들었다면 해야지. 우리 상해에 가서 병원 차리자. 병원장은 내가 하고 당신은 부원장하고. 돈 벌자. 우리 돈 벌어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반지를 그 때 다시 하자. 오케이. 

말수가 여순의 손을 잡아끌었다. 약지를 찾아 손에 잡았다. 잡은 그 손에서 작은 쇠붙이가 여순의 왼손 약지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난감이 아니었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어 꼭 맞어. 손가락은 어떻게 잰 것야. 그리고 어떻게 딱 맞게 만들었어? 자기 연금술사야? 하나씩만 질문해. 재료가 궁금하지? 엉. 이거 탄피로 만든거다. 탄피로 만들었다고. 정말 대단해 대단해. 당신 손 솜씨는 정말 대단해. 외과의사로 명성을 날릴거야. 당신이 못하면 세상 누구도 수술을 못하는 거지. 그만 추어 올려. 아니야. 당신은 최고야. 

어둠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입술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식 신랑 신부가 된 것을 자축하듯이 서로의 입술을 상대의 입술에 가볍게 갖다 댔다. 우리 결혼했으니 여보, 당신으로 부르자. 당근 이쥐. 그게 뭐야, 당신이라고 불러봐. 그래 당신. 좋아 여보.여순은 신부는 예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말수가 그런 말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오늘은 결혼식 날 아닌가.

여순아, 아니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여순은 눈물을 흘렸다. 주책없이 또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조금씩 울다가 흐느끼다가 펑펑 울었다. 말수도 울었다. 둘은 껴안고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 오늘 다 울고 평생 울지 말자. 둘은 울다가 웃다가 소리 질렀다가 다시 울었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 그리고 여순을 소개해야지. 아버지의 못난 아들이 이렇게 잘난 색시를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대답 대신 돼지우리 쪽으로 눈부터 돌리시겠지. 제일 크고 튼실한 놈으로 잡아서 잔치를 벌일 생각에 입은 저절로 옆으로 벌어지고 어머니는 한 쪽에 서서 옷고름을 들고 눈물을 찍고 계시고. 어무니, 제 색시 어때유. 네가 골랐으니 오죽하겠니. 그것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었다. 말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웃음도 그런 칭찬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상주도 없이 쓸쓸히 묻힌 아버지 모습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버지의 적수가 땅속으로 사라졌어도 아버지의 의처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타 죽은 사람의 이름 대신 허우대로 시선이 바뀐 것이다.

허우대가 죽은 자를 비난할 때 어머니의 눈이 한번 그쪽에서 멈추었고 이는 공격 빌미를 제공했다. 죽은 자를 욕하는 허우대의 기세에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은 전부 허우대로 눈이 기울었을 때 아버지도 허우대를 따라가는 어머니의 눈을 본 것이다.

어머니도 그런 것인데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는 눈이 돌아 간것은 그들이 이전부터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말수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네, 아버지. 네 엄마가 허우대와 만나고 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어제는 아니라면서요. 꿈 꾼 것을 착각했다면서요. 어디서 봤건 간에 본 것은 본 것이다. 아버지,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어머니 생각을 하시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라고 내가 닦달하고 있다. 제 가슴이 찢어져 봐야 상대 마음도 안다.

밭일을 나가도 아버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겨우 잠든 어머니를 깨워서는 어디 갔다 왔느냐고 다그쳤다. 신경쇠약에 빠진 엄마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아픈 곳을 찔리니 그렇지? 아버지의 추궁은 집요했고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옛날의 이말네는 어디로 간 거야? 내가 아는 이말네는 이미 죽고 없어. 

아버지는 비웃었고 의기양양했다. 꼬투리를 잡고는 자신의 말이 그럴듯했던지 옛날의 이말네가 죽고 없어. 하면서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했다. 말네는 어머니 이름이었다. 이말네, 말수는 조용히 어머니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가. 엄마 이름을 부른 것이. 말수는 하직 인사도 없이 새벽달을 보면서 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무거워 말수는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의처증이 마을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늙은 어머니에 대한 모욕은 여기서 그쳐야 한다. 명예롭지 못한 일에 어머니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 노망난 아버지가 추궁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끔 꿈에서 보인다. 꿈속에서 두 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계시다면 부모님은 나를 반기실까. 그럼, 당연하지. 많이 늙으셨을거야. 

어, 그런데 돌아가셨을 거야. 그렇구나. 내가 떠나올 때 그럴 거라고 직감했어. 꿈속에서도 이승을 떠난 걸로 보여. 장인, 장모님은? 우습다. 장인 장모라니. 살아 계실거야. 당신을 보면 춤을 출거고. 우리 여순이 뱃놈과 시집 간다고? 조선 땅에서 제일 잘난 신랑을 데리고 왔다고 온 동네 자랑하고 다니시겠지. 그래, 고향에 가면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여순은 자신 못지않은 가혹한 운명을 안고 사는 말수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더는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잠은 글렀다. 말수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여순은 일 층에서 대기했다. 말수가 떠나자 벽돌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고 여순은 반사된 빛이 따가워 소매로 눈을 가렸다. 눈을 떴다 감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니 주변이 눈에 익었다. 낮이구나. 우리가 밤으로 알고 있던 것이 낮이야. 알고 있는 것과 아는 것은 달라. 정말로. 낮이라니. 그래 잘 된 거야. 낮이라면 밤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수가 신호를 보냈다. 아니 소리를 질렀다. 나와. 나와봐. 밖으로 나온 여순은 말수처럼 부서진 성당 벽에 몸을 기댔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자신도 그렇고 다른 물체도 움직임은 없었다. 사방도 고요해 살아 있는 것은 이 섬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굳이 떠날 이유없지. 이곳이 전부 우리집이고 마당이니. 여순은 그 틈에도 우리집을 떠올렸다. 예쁜 집을 지어야지. 기왕이면 이층이면 더 좋고. 여순은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화 되자나 아닌 우리를 먼저 찾았다. 

이곳도 고요하구나. 쥐들은 어디로 갔을까. 성당의 지하실이나 밖의 세상이나 소란스럽지 않은 것이 좋았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군인들과 트럭과 쏟아지던 폭탄들은 꼭꼭 숨어서 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보이던 듣던 것이 사라지자 여순은 이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안심한 그들은 일단 걷기로 했다.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누가 보면 이런 기이한 장면은 화성에서나 가능하겠다고 의심을 살만 하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이런 평가를 내릴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둘은 서서히 걸었다. 힘들었다. 오래 걷지 않은 다리는 걷은데 연습이 필요하다는 듯이 간혹 두 사람의 무릎을 꺾어 넘어질 뻔 하게 만들었다. 패잔병 보다 더한 몰골로 더 힘이 없는 발걸음을 힘겹게 떼면서 두 사람은 어떤 단서라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부서진 탱크들, 뼈만 남은 시체들, 이제 막 부패를 시작하려는지 부풀어 오른 배를 하늘로 내밀고 있는 험상궂은 얼굴들 그것을 먹다 그 옆에서 죽어 같비뼈를 드러낸 검은 개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얼마를 더 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운동장이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부서진 잔해는 학교 건물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우물도 있었다. 먹는 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말수가 힘겹게 두레박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물은 깨끗했다. 우물 속에 들어가면 썩는 물질은 들어있지 않았다. 물 한 모금씩 마시고 둘은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여유가 있었다. 산은 작고 아담했고 시야는 멀리 까지 퍼져 나갔다.

둘이 앉아서 보는 풍경은 좋았다. 이 좋은 곳에서 살면 어떨까. 군인들이 없고 세상이 평온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잔해를 치우는 일은 시간이 걸려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 둘만의 천국을 세우자. 아직 우리는 젊다. 스스로 생각해서도 그렇고 남이 봐서도 그렇다. 제발 이 섬에 인간의 발자취가 사라졌으면. 동물도 없었으면. 아니, 개 한 두마리 혹은 고양이 두 세마리 정도는 괜찮다.

여순이 꿈꾸는 모습으로 하늘을 봤다.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래 새들은 까마귀라도 상관없어. 그 위에는 독수리 여러 마리가 원을 그리면서 어디로 내려야 할지 내릴 곳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래 독수리도 좋아. 새들은 얼마든지 있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말수가 어깨를 툭쳤다. 여순은 자신의 본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뭐, 내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어. 제 딴에는 제법 재치있는 답변이라고 여순이 이렇게 받아쳤다. 의자에 앉아서 푸른 하늘을 보니 사라졌던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당신도 그런 말을 해보라는 뽐내는 듯한 태도로 여순이 말수는 뻔히 쳐다봤다. 그게 아냐. 저기, 저기 봐. 말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여순이 자신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어떤 대답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여순은 건물의 위쪽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다. 희미하지만 그것은 식별할만 했다. 성조기였다. 미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본능적으로 여순은 말수의 복장을 확인했다. 일본 군복도 미군복도 아니다. 민간인 복장에 팔뚝에는 십자가를 단 민간 의사였다. 언제 저런 것 챙겼지. 정말 못말려 하면서도 여순은 말수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여순도 자신을 둘러 봤다. 왼쪽 팔에 단 붉은 열십자가 자신도 의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 이게 언제 달려 있었지. 그녀는 놀랐다. 말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여순의 옷에도 의사 완장을 달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린 의사야. 그게 중요해. 전쟁터의 피난민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의사는 의사야. 이런 복장은 아군은 물론 적에게도 불쌍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 틀림없었다. 의사 부부. 어떤 식의 시나리오를 써야 할까. 그들은 입을 맞추지 않아도 어떻게 처신할지 알고 있었다. 미군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투른 영어와 능숙한 일본어로 그들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그대로 말할 참이었다. 태생은 조선인이나 일본군에 의사로 끌려 왔고 사이판에 상륙해 의약품을 챙겨 다시 본대로 돌아가려다 실패하고 성당 지하실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그것이 소중한 목숨을 지키는 지름길이었다. 이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해 안전하게 미군들과 접촉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는데 그것은 쉽게 풀렸다.

저쪽에서 두 명의 미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서류철을 끼고 한 손에는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쥔 이가 옆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말하는 그가 상관인듯 싶었는데 듣는 사람이 연신 그쪽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사람과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바싹 붙어서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의 모습은 폐허가 된 전쟁터의 모습과 기묘하게 어울렀다.

그들은 폐교를 사무실로 두고 막 회의를 끝낸 부대장과 참모였다. 그들을 호위하는 병사는 없었다. 옆구리에 각각 권총을 차고 있었으나 경계의 눈빛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안전지대 안에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점심을 방금 끝낸 그들은 배부름이 가져오는 포만감 때문에 걷는데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여순쪽으로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등나무 아래 벤치가 목적지인 듯 싶었다.

그들은 먹은 음식을 삭이면서 휴식을 원했다. 여순이 말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말수는 그때까지도 운동장 쪽이 아닌 그보다 더 위쪽에서 희미하게 나부끼는 성조기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미군의 승리가 가져온 전황과 자신의 운명을 대비시켜 놓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일본의 패망은 그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말수는 담담한 심정으로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이다. 

말수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자 여순은 이번에는 더 세게 같은 자리를 찔렀다. 말수가 대답대신 정신을 차린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도 연병장을 가로 질러 오는 두 명의 미군이 자신들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말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으나 곧 총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런 일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들이 먼저 눈치채고 놀라기 전에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써, 핼로우 하면서 여순의 손을 잡고 두 손을 하늘로 올렸다. 위험한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해칠 의사는 커녕 항복하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이런 식의 행동은 미군을 당황하게 했으나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닥칠 수 있는 위험은 어느 정도 제거됐다.

그러나 그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권총을 빼고 천천히 자신들 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손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고함도 이어졌다. 그들이 겨눈 총구 쪽에 바짝 다가섰을 때 미군들은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이 위수 지역을 이탈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위장한 적의 잔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처음과는 달리 몹시 흥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양쪽으로 갈라놓고 말수의 상의를 벗게 했다. 말수가 그들의 말을 따르기 위해 옷으로 손을 가져가자 팔뚝에 걸린 병원을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이 드러났다. 미군은 눈을 여순으로 돌리자 여순도 역시 같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닥터? 예스, 닥터. 닥터. 말수가 흥분하듯이 외쳤다. 그런 짧은 영어가 이어졌고 그들 중 부관이 다가와 두 사람을 수색했다. 무기가 없음을 거듭 점검한 그들은 두 사람을 자신들이 데리고 온 사무실로 앞장 세웠다. 사무실 안의 의자에 앉아서도 말수와 여순은 머리 위의 손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의사지 병사가 아니며 누구를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서 너 명의 미군이 그들 주위로 몰려 들었다. 한 마디씩 뭐라고 지껄이더니 이내 부대장이 그만하라는 주의에 일시에 입을 닫았다. 그가 두 사람을 보면서 팔을 내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말수는 비로소 고통을 끝내고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여순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으나 바뀌고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었다. 심문에 앞서 그들은 음식과 시원한 주스를 내왔다. 적으로서가 아니라 우군으로 두 사람을 대하겠다는 태도였다. 피해를 주기보다 도움을 주는 존재로 인식한 때문이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은 결정적인 패배를 했다. 전쟁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싸움에 진 일본은 위기를 돌파할 힘을 잃었다. 두 달 정도의 전투에서 일본군 중 살아 있는 자들은 거의 다 죽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포로가 됐다. 부상병들의 극소수는 마지못해 호의를 베풀고 싶은 미군에 의해 후방으로 옮겨졌고 나머지는 다수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이곳에서 사망했다.

미군은 처음에는 두 사람을 같이 심문했으나 나중에는 따로 했고 그 다음에는 또 같이 했다. 진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두 어 시간의 심문이 끝나고 미군이 내린 결론은 이들은 부부 의사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 사람이었다. 이들이 원하는 행선지는 상해였고 종국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고 민간인 의사가 전선을 마음대로 이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들은 임시 병원에서 다른 의사들과 이들을 같이 생활하게 했다. 보름 후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수송기가 베이징으로 떠나는데 같이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말수는 또한 번 운명을 생각했다. 여순은 자신들에게 행운이 왔음을 직감했다.

베이징에서 어떤 임무가 주어지고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몰라도 일단 섬에서 탈출한다는 오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은 조선과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심리적으로 고향과 하나로 만들었다.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심문이 끝나자마자 말수가 한 말이었다.
돌 볼 환자는 어디에 있나요? 여순도 말수와 같은 말을 했다. 미군들은 이들 부부에게서 진정한 의사의 정신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잡힌 포로의 위치라는 것도 잊고 부상병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것이 미군의 신뢰를 얻었다. 말수는 빼어난 수술 실력을 과시했다. 여순도 지지 않았다. 말이 아닌 행동에서도 그들은 환자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베이징행 수송기에 올라타기 불과 한 시간 전까지도 말수와 용희는 손에 피를 묻혔다. 태어난 이유가 환자를 돌보는 것이라는 듯 그들은 한시도 피비린내와 비명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미군들은 식민지 조선태생 의사의 헌신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베이징행은 우연히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말수가 제일 처음 맞은 환자는 영관급 최고위 미군 장교였다. 부러진 미군 대령의 다리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은 썩어들어가고 뼈까지 균이 침투했다. 유능한 지휘관을 살려내려는 군의관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말수가 등장했다. 대령은 운이 좋았다. 담당 군의관이 응급환자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대령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다리를 살핀 그는 돌아온 군의관에게 한시바삐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자칫 잘못해서 고급장교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질 까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잘라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환자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말수는 대령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읽었다. 군의관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자신이 못하는 일을 한다고 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능숙한 솜씨로 말수가 상처를 열었다. 심각했다. 수술 부위가 썩어가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군의관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햇병아리. 말수는 이렇게 조선말로 지껄이면서 그를 제켜 놓고 여순을 보조로 삼아 수술을 시작했다. 여순은 부어오른 살의 이곳저곳에 마취제가 들어간 주사기를 여러차례 찔러 넣었다. 이제 째고 수술하는 것은 말수에게 맡겨야 한다. 그것은 그의 전문이었기에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뼈가 드러났다. 뼈까지 균이 침투했다. 말수는 살을 들어내고 나온 검게 변한 뼈에 붙은 곰팡이를 칼로 북북 긁어 냈다. 생각보다 심했다. 죽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한가지 희망은 강한 항생제에 의지하는 길 뿐이다. 다행히 이 무렵 좋은 항생제가 미국 본토에서 날아왔다. 이제는 항생제의 시간이다. 그래 항생제가 너를 살릴 수 있을 거야. 

대령은 까무라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수술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는 수술전에 최소한의 마취를 주문했다. 전신 마취는 사절했다. 아무리 아파도 견딜 수 있다고 최소한의 마취제만을 요구했다. 마취는 회복을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말짱한 정신으로 이겨내고 전선에 다시 투입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 처음에는 다리 부분도 거절했다. 그러나 여순은 완강했다.

정신을 잃으면 회복이 더 더디다. 그는 진정한 전사였다. 통증이 심하다는 말보다 회복이 느리다는 말에 대령은 자신이 조금전에 한 말을 자신의 꺾었다. 이마의 땀을 닦고 보니 세 시간이 넘게 걸린 수술이었다. 그날 밤 대령은 밤새 앓았다. 총알이 뚫고 나가 피가 솟구칠 때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고함에도 말수는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누구라도 너 처럼 고함을 칠거야. 대령은 그 말에 위안을 얻은 듯 했다. 

그래, 현장에서 3초만 일찍 떠났어도 총알을 피할 수 있었어. 그는 자책했다. 자신이 그러지 못한 것을 적의 탓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돌렸다. 그는 항생제 옆에 걸린 권총집을 잡더니 권총을 꺼내서 자신을 쏜 자들을 쏘려는 시늉을 해보였다.어이 없는 짓이었다. 수술한 사람이라면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대령아니라 장군이라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대령은 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 든 손을 위로 치켜 들면서 퍽 큐우 퍽 큐우 하고 외쳤다.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손에서 권총은 떨어져 나갔다. 대신 대령은 아픈 다리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필 다리야, 왜냐고? 차리리 내 몸통의 다른 곳을 뚫었으면 나았을 것을. 머리라도 좋았어. 다리만 아니라면. 진정해라, 마이클. 말수가 서툰 영어로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보니 성당에서 생활이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그곳에서 말수는 신부님이 놓고 기초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여순과 둘이서 일어로 번역한 영어책으로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심심하면 그런 것이다. 

진정해, 마이클. 그 옆에서 여순이 환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너는 이겨낼 수 있어. 지르고 싶으면 질러. 겨우 그 정도야. 더 크게 질러봐. 그런다고 용감한 군인이 어디 가겠어? 죽음으로 가득찬 마이클의 잿빛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대령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삼 일째 되는 날부터 다리의 부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균이 잡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령이 말했다. 통증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어. 내가 그랬지.어쩌면 살 수 있다고. 그 어쩌면이 너에게 온 거야. 그것은 행운이야. 네가 이긴거야. 행운을 잡은 거지. 아냐, 너희들이 이겼어. 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 부부에게 행운을. 

말수는 여순을 쳐다봤다. 서로는 서로에게 우리는 이겼다고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대령은 한 동안 웃음띤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 너희들. 부탁한다면 들어줄 수 있니. 나에게 하면 가능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나에 대한 보답을 너희에게 하고 싶다.우선 우리 몸을 돌보고 싶다. 너도 알다시피 우린 끌려온 존재다. 원래의 상태로 우리 몸을 돌리고 싶다. 무슨 말이지? 처음으로 가고 싶다고? 

맞다, 베이징이 중간 기착지다. 그리고 종국에는 조선 땅 통영이 목표다. 그런 다음 보령에 갈 거야. 거기가 내 친정이거든. 여순이 말했다. 마이클은 통영이나 보령이라는 말은 알아 듣지 못했다.베이징은 왜? 그래야 상해로 갈 것이고 거기서 병원을 차릴 생각이다. 고향은?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다. 가까운 미래는 병원을 여는 거야. 너처럼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리 직업이잖아. 

전시에 개업이라고. 왜, 그러면 안돼? 거기라면 다친 조선독립군들을 치료할 수 있다. 마이클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말수는 만주와 상해에서 싸우다 다치는 독립군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지은 죄업을 씻는 길이라고 믿었다. 옆에선 여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이름도 지었다고 했다.

상하이 부부병원. 악마처럼 괴성을 질러대 정말로 입이 악마처럼 비뚤어진 마이클이 희미하게 웃었다.이름 좋다. 전쟁이 끝나면 찾아갈게. 의사를 많이 봐 왔지만 그는 이들 부부에서 가짜 의사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말수는 목구멍을 통해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마이클의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일단 믿기로 했다. 

다음 날 마이클은 더 기운차 있었다. 원래의 그로 거의 돌아왔다. 그는 비명 대신 돌격 앞으로, 를 외칠 준비 태세를 완료했다. 대령은 그들을 수송기에 태우는데 사인을 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에 그들은 수송기에 탈 일단의 미군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다. 도로는 진흙투성이였다. 임시 비행장까지 가는데 바퀴가 빠져 고생을 했다. 멈춘 곳이 바로 성당 앞이었다. 성당의 지붕은 아예 무너져 내렸다. 그곳이 성당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삐죽이 나온 십자가가 전부였다.

저곳에 계속 있었다면 우린 지금 여기에 있지 못했을 거야. 차에서 내려 뒤에서 트럭을 밀고 다시 제자리로 온 말수가 여순에게 말했다. 지면과 붙었어.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야. 여순은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은 폭삭 가라앉은 성당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겨우 버티고 있는 천장이 밤새 내린 폭우에 그만 주저앉아 있었다.

말수는 운명을 생각했고 여순은 베이징에 내리면 제일 먼저 국수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 여순이 시집가는 날에 국수를 삶아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돼지도 잡겠지. 그래 아버지는 그럴거야. 돼지를 잡아서 술파티를 열거야. 그런 생각이 왜 지금 났는지 모르겠다. 멸칫국물로 우려낸 국수를 먹고 나면 무언가 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돼지 국밥을 먹으면 온전한 나로 돌아올 것이다. 흙과 시체가 빗물에 반반씩 섞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데도 여순은 먹을 것을 생각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국수를 먹을 운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여순은 확신했다. 뼈 가득 붙은 검은 곰팡이를 긁어 낼 때 옆에서 느꼈던 역겨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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