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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18:59 (수)
지나는 행인들이 몸을 숨기며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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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행인들이 몸을 숨기며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0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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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는 거짓이었다. 도쿄에 그런 주소 명은 없었다. 고바야시는 속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종로서의 고바야시를 급하게 찾았다. 총독부 고바야시와 종로서 고바야시는 동명이인이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종로서 고바야시 이름 뒤에 탁이라는 별칭을 붙여 둘을 구분했다. 완용의 창시개명이 고바야시였고 침을 잘 뱉기 때문에 고바야시 탁이라고 둘을 구분했다. 그 무렵 완용은 순사부장으로 승진한 가운데 서장까지 노리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차기 서장으로 낙점해 놓고 기회만 보고 있었다. 조센징으로는 최초로 종로서장이 되는 것을 놓고 이견은 없었다. 그만큼 완용의 수완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진짜 고바야시의 전화를 받은 완용은 상대가 보이지 않음에도 차렷자세로 경청했다.

다 가짜다.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놈을 체포해라. 분명 상하이 임정에서 보낸 독리군이 틀림없다. 하이, 하이, 완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바야시를 사칭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양 몸둘 바를 모르면서 반드시 체포해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너, 똑바로 해라. 하이. 이 놈 잡으면 바로 서장 달아줄게. 종로서장 말이야. 고바야시가 대놓고 흥정했다. 완용은 그러리라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휴의 이놈. 네 너를 잡아 찢어 주마.갈기 갈기. 그가 닭웃음같은 소리를 내려 이를 갈았다. 반드시 그래야지. 내 앞길을 막는 놈은 누구라고 가차없어. 

그래, 이 필체를 이용하자. 그렇지 않아도 신의주에서 평양에서 휴의 일당을 놓친 완용은 분풀이를 제대로 하기 위해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이라니. 그는 제법 붓글씨를 썼다. 경주 최부자집을 찾아서는 선생님의 글씨가 좋아 배우러 왔다며 서너달을 찾아 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그에게 최선을 다했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며 정말로 붓글씨를 배우는 학생답게 열을 올렸다. 그 결과로 최부자의 글씨체를 완벽하게 모방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엎드렸다. 팔자에도 없는 붓글씨를 쓰기 위해서였다.

정성 정성 한글자 한글자 써나갈 때 그는 발이 저렸으나 다 쓰기 전까지는 자세를 바꾸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지막 글자를 정말 끝냈다. 발이 저려 쥐가 나는 정도였으나 그는 텅 빈 한지에 빼곡히 드러난 글자를 보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참아내길 잘 했어. 그까짓 쥐 쯤이야. 발이 끊어지기야 하겠어. 그는 자신이 쓴 글씨를 보고 정말로 제대로 썼다고 감탄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휴의를 못잡으면 그 년이라도 잡자. 그 년 말이야. 밀양 사는 놈의 여자 말이야. 그래 그년도 휴의처럼 갈가리 아주 갈가리 찢어줘야지.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쓴 서체에 만족하면서 끝까지 죽 읽어 내려갔다.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서 필자가 간추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네가 상해에서 고생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 군자금을 보내려고 하는데 밀정이 하도 많아 내가 직접 글을 썼다. 이 글을 가지고 오는 자와 함께 동행해라. 모일 모시에 종각에서 만나기 직전에 중국인은 먼저 보내라. 네가 혼자 있으면 우리 사랑채 김서방 알지? 그 사람이 전달해 줄 것이다. 너는 수령 즉시 네 임무대로 활동하고 김서방에게는 잘 전달했다는 말을 전하고 즉시 경주로 내려오라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 부디 몸 건강히 잘 있어라. 

완용은 만주에서 마적질을 하다 잡혀 자신에게 속한 중국인을 불러 들였다. 이것을 가지고 상하이로 바로 떠나라. 거기서 김씨 성을 가진 여성 독립군과 접촉해서 이 글을 보여줘라. 자기 아버지 글씨체를 보면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혹 그 여자 옆에 젊은 사람이 따라붙는다면 사양하지 말라. 사양하기는커녕 그자가 함께 조선땅에 들어온다면 더 없는 환영이다. 네 임무를 수행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마. 순사가 하고 싶으면 순사를 주고 헌병에 가고 싶으면 군인 계급장을 달아주마. 이도 저도 싫으면 원하는 돈을 줄 테니 마적질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마에 십자로 찢어진 흉터를 가진 마적은 완용이 써준 붓글씨를 소중히 싸서 바로 상하이로 떠났다. 일이 잘 풀리면 두 연놈을 다 잡아들일 수 있다. 여자와 사는 남자는 일제가 노리는 거물 가운데 최고위 거물이었다. 의열단인가 뭔가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하는데 임정의 선생보다 더 과격해 일제는 그에게 가장 높은 현상금을 걸었다.

일제에게는 그만큼 눈에 가시거리였고 독립군에게는 사기를 높여주는 단비와 같은 존재가 이들 부부였다. 특히 여성 독립군은 그 가치가 현저히 높았다. 부녀자를 상대로 군사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아녀자라서 검문검색을 피하는데도 용이했고 일본 영사관의 정보를 빼내는데 여러번 성공했다. 더구나 군자금의 상당 부분이 이 여성의 부모에게서 나왔으니 완용의 분노는 알만하다.

이번에는 놓쳤으나 반드시 조만간 다시 경성에 들어온다. 보따리를 받았으나 보따리 안에 든 물건이 돈이 아니라 헌 옷가지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안절부절못할 때 이 편지는 바로 너를 낚아채는 좋은 미끼가 될 것이다. 너에 네 남편이 오던지 지난 번 휴의와 동행해라. 한 번 속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완용은 벌서 잡아 들인 듯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편 중국인은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위장해 어렵지 않게 임정과 접촉했고 상해의 한 다방에서 여성 독립군을 만났다. 그는 말 대신 편지를 보여줬고 틀림없는 아버지 글자체를 확인했다. 글자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아버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여성 독립군은 다시 조선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서방이 동행한다고 했으니 틀림없어. 가야지, 지체 말고 가야지. 임무 완수에 실패한 책임감 때문에 괴로웠던 그녀는 이번에는 단신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임정의 뜻이기도 했다. 신분이 노출된 휴의는 배제됐다. 남편은 임정과 끈이 닿지 않았다. 그는 어디선가 게릴라 전술을 익히고 있다. 여성 독립군 조차 남편의 위치를 파악하기 못하고 있다. 그래서 휴의에게 혹시 내가 잘못되면 이 편지를 남편에게 전해 주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중국인은 떠나 올 때 남편과 함께 가면 좋지 않겠느냐고 남편은 어디 있느냐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물었으나 여성 독립군의 남편은 부재중이라는 말을 하면서 혼자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국인은 어쩔 수 없었다. 더 물었다가는 편지의 진위마저 의심을 살 만했기 때문이다.

긴 여행 끝에 여성 독립군은 경성역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제대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연막작전을 쓰지 않고 바로 만남의 장소로 이동했다. 믿을 만한 사람과 동행했으니 이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종각의 한옥식 건물 밖에서 약간 서성였다. 김서방은 어릴 적부터 봐 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알 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쪽에서 서넝이는 사람이 보였다. 하인 복장을 하고 등을 보이고 있는데 구부정한 것이 얼핏 보면 꼭 김서방을 닮았다. 그녀는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보니 김서방이 아니었다. 김서방은 아파서 누워 있고 자신이 대신 왔다면 여러 번 싼 두툼한 봉투를 내 밀었다. 아버지는요. 잘 있어요. 그는 여성 독립군의 눈을 피하면서 서툴게 말했다. 안부를 전해 주시오. 저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네, 아씨. 그는 기어 가는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물건을 주고받았다.

여성 독립군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바로 경성역으로 가는 마차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마차에 오르기도 전에 고바야시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지금까지 행적을 지켜보던 고바야시가 그녀 말고 다른 용의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불러 세운 것이다. 아가씨, 물건을 떨어트렸어요. 이것이 아가씨 것이 맞지요? 그는 손에 양산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 앞으로 갔다.

네, 이년 너를 잡지 못해 안달한 것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 그러나 우리 대일본 제국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아. 그래서 너를 체포해 서로 데려간다. 얌전히 있어라. 발광하지 말고. 여성 독립군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았다. 완용의 뒤로 서너 명의 사복 경찰이 다가왔다. 피할 수 없다. 짧은 순간 그녀는 결정해야 했다.

끌려가는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장할 뿐이었다. 비참한 죽음을 택하느니 여기서 결판내야 한다. 고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편은 늘 말했다. 잡히면 죽어야 해. 나도 마찬가지고. 일제는 고문을 하고 고문을 해서 알아내면 반드시 죽여. 그러니 우리 둘은 언제나 작별을 생각해야 해.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렇게 해 어서. 손에 수갑이 채워지면 죽을 수도 없어.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는 거 알지. 망설이지 마. 우물쭈물하다가는 그렇게 되고 마는 거야.

여성독립군은 결단을 내렸다. 손에 든 돈뭉치를 다가오는 완용에게 냅다 던졌다. 완용은 얼굴에 그것을 맞고 잠시 틈을 보였다. 그 사이에 여성 독립군은 가슴속에서 권총을 꺼내 완용을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완용은 피했으나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여성독립군은 순간 번개처럼 반대쪽으로 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완용의 부하들과 독립군과의 거리는 십 여 미터로 벌어졌다.

여성 독립군은 그 순간 남아 있는 권총 총알의 갯수를 생각했다. 그녀는 연달아 세 발을 발사했다. 두 발이 다가오는 형사의 가슴에 명중했다. 이제 남은 발이 몇 발인지 그녀는 셀 수가 없었다. 그녀는 권총을 상대가 아닌 자신의 머리를 겨냥했다. 전신주의 까마귀가 하늘을 날았다. 지나던 행인들이 몸을 숨기면서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순은 말수의 말에 위안을 받았다. 어둠이 그렇게 만들었다. 혼자 있었던 공포가 침묵과 고요가 그랬다. 불쾌한 기분은 사라졌다. 다시 살았다. 그가 와서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죽음이었는데 그가 와서 둘이 되자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안도감은 가려움증을 수반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생채기난 상처에 딱지가 지면서 생기는 가려움증이 올라왔다. 손등에서 시작한 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다리를 긁다가 긁은 손으로 다른 손을 긁었는데 아무리 긁어도 좀처럼 시원해 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긁는 걸 포기한 여순은 꿈틀거렸다. 몸을 비비 꼬았다. 세상에나, 이처럼 가려울 수 있을까. 가려움증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아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에게 속한 것은 모두 가려웠다. 얼굴만 빼고는 정말 신기하게도 몸의 모든 곳이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징조가 아니었다. 살았다는 삶의 기운이 보내는 신호였다. 그래서 여순은 긁으면서도, 손에 피가 묻어나서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삶의 충동을 느꼈다. 

그런 여순에게 말수가 용기를 보탰다. 기력을 대부분 찾은 그는 여순을 달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르고 달랬다.여긴 안전해. 가려우면 맘껏 긁어. 피가 나면 좀 나을 거야. 더 세게 긁어도 좋아. 덫나면 어때. 살아 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해주니 좋았다. 그는 어느 새 거친 말수에서 다정한 말수가 되었다.  그래서 그 말을 여순은 따랐다. 정말로 피가 나니 좀 나은 듯 했다. 피묻은 손을 여순은 코 끝으로 가져갔다. 냄새를 맡기보다는 이번에는 코가 가려웠기 때문이다. 코를 긁다가 여순은 이러다가 얼굴까지 긁게 생겼다면서 긁는 것을 포기했다. 얼굴은 그럴 수 없다. 상처가 나면 곰보처럼 얽을 것이다. 여순은 여자인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여순이 큰 용기를 내 체념하자 말수가 바스락 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찾던 것을 찾았는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여순은 어둠속에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상상했다. 잠시후 차가운 것이 차가우면서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병의 주둥이였다. 달짝 지근한 냄새가 올라왔다. 피비린내와는 사뭇 달랐다. 부패로 썩어 가는 것이 아닌 막 피어나기 위한 봄의 새싹 같은 것이 코를 간질였다. 보리새싹인가. 갑자기 여순은 봄보리 새싹을 가지고 놀던 때를 기억해 냈다. 그래, 그것은 가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간질이는 거고 그 다음에는 웃음이 터졌어. 

여순이 병의 주동이에 입을 제대로 대고 벌렸다.  말수가 제대로 된 것으냐고 물었고 여순은 주둥이를 입에 댄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포도주 한모금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말수가 병의 뒷부분을 들어 올렸다. 더 많은 양의 포도주가 여순의 입을 타고 목젓을 타고 위장을 타고 종아리를 타고 발바닥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광야에 쓰러진 선지자에게 입에 들어간 바로 그 생명수였다.

꿀꺽 소리가 났다. 제소리에 놀란 여순은 이제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말수는 한 모금 더 그녀가 먹을 수 있도록 여순의 목을 받쳐 들었다. 급하게 말고 편하게 먹어. 먹다 체하면 약도 없다. 말수는 이런 농담을 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양이 목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순간은 짤라 였으나 길고 긴 폭포수가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렸다. 용희는 이제 자신이 병을 잡아 들었다. 뺏듯이 그렇게 한 것은 남은 것을 한꺼번에 마저 먹기 위해서였다.

말수는 말리지 않았다. 자신도 깨어나서 한 일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말수도 정신을 차렸다. 여순도 그런 과정을 밟고 있었다. 가려움은 잊었다. 사라진 것인지 어디 숨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포도주의 달콤함 만이 여순을 지배했다. 목을 타고 내려간 물줄기는 갈라진 논을 금세 흠뻑 적셨다. 말랐던 모들이 그 순간 푸른 잎을 달고 위로 곤추섰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 과정은 빨랐다.

그와 동시에 여순이 등뼈를 세웠다.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이곳은 포격으로 무너진 성당의 지하실이었다. 삼 일은 지났을 거야. 잘도 자더군. 다른 누구도 아닌 말수의 목소리였다. 어쩜 그렇게 자니. 어떤 때는 죽은 줄 알고 코에 손을 댄 적이 있어. 숨결이 느껴지면서 안도를 거듭했지. 난 네가 깨어날 때까지 깨우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 푹 잘 수 있거든. 나 잘했지? 말수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실은 완벽한 피신처였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가 됐다. 그곳을 빠져 나가려던 신부와 신도들의 시체는 계단에서, 창가에서 그대로 거꾸러져 있었다.부패한 시신의 흔적이 간혹 갈라진 틈으로 들어왔으나 촛농이 그것을 해결했다. 초가 타는 냄새는 좋았다. 시체 썩는 냄새를 말끔히 지웠다.

그래서 말수도 여순도 그런 촛불을 사랑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가정을 해보자고. 말수가 농담을 걸어왔다. 만약에 말이야, 촛불이 없다고 쳐. 내가 너를 볼 수 없고 너도 나를 볼 수 없겠지. 안 보이는 것은 그렇다고 쳐. 냄새는 어쩔건데. 이 냄새가 아니라면 우리는 냄새 때문에 죽을 거야. 안 그래.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촛불이 타는 냄새가 아니라면 우린 자다가 죽었을 거야. 여순이 응수했다. 

적들은 혹은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는 더는 성당을 폭격하지 않았다. 시체위에 포탄을 쏟아 부을 이유가 양쪽에게 없었다. 공격지점에서 성당은 지워졌기 때문이다. 너무 비참해 군인들도 그곳을 외면했다. 그래야 된다고 믿었다. 행군하던 그들은 기습공격을 받아도 그곳으로 피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당 주변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엎드리면 바로 앞에 눈을 뜬 시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이 없는 시체는 백골이 된 상태였다. 

아직 살점이 붙은 곳에는 개들이 달라붙었다. 차라리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적에게 달려가는 것이 나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역겨웠다. 그래서 적이든 아군이든 성당 주변을 차지하고도 그 쪽으로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오줌도 싸지 않았다. 총격이 와도 그쪽으로는 엎드리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포기할 만큼 성당 주변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버려진 곳에서 생명이 꿈틀거렸다. 다행히 그곳 지하에는 바깥에서 산소가 들어왔다. 일 층으로 오르는 통로 사이로 작은 틈이 생겼고 바람은 그곳을 통해 지하로 내려왔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계단을 찾았고 그곳에 쌓인 잔해들을 치웠다. 안전 통로도 확보했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공기 통로만 남겨둔채 다시 매웠다. 이제 성당의 지하는 그들의 안식처가 됐다.

전투 식량도 있고 물도 있고 포도주도 있고 통조림도 있었다. 누구도 살지 못하는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멀쩡했다. 다 죽었는데 살았다는 안도감이 두려움을 저 멀리 밀어냈다. 말수는 이 곳에서라면 일년도 너끈히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섣부른 행동을 자제했다. 밖으로 나가 동굴에 숨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벗어나면 죽고 가만히 있으면 산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여길 떠나면 죽어, 죽은 목숨이라고. 

말수는 포도주로 속에서 불이 나고 있는 여순을 다독였다. 물 좀 줘. 말수는 움직이지 않고 손만 뻗어 그것을 대령했다. 어둠 속에서도 물과 술과 음식이 어디 있는지 말수는 한 번도 실수 하지 않았다. 자기 주변에 그것을 배치해 놓고 수시로 손을 뻗었다. 물은 포도주와 달랐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갈 때 편안했다. 깡통 따는 소리가 들렸다. 한 입만 먹어. 한꺼번에 배부르면 죽거든. 

한동안 잊었던 죽는다는 말을 여순은 몸을 떨었다. 그래 죽음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순은 알았기에 죽음의 소리는 그녀에게 살아야 겠다는 강한 용기를 주었다. 여기서 한 발작도 안나가. 등 떠밀어도 그럴거야.  여순이 말했다.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절대로. 말수가 받았다.

두 사람은 이 생각에 다른 이견이 없었다.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난다. 말수는 직감으로 그걸 알았다. 끝날 수 밖에 없다. 오래 끌었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끝나면 그 때 나가자. 오케이. 여순이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 여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말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내 과거를 말해줄까. 네 과거말고 내 과거. 내가 어떤 놈이었는지 알고 싶지. 그렇지. 말수는 여순에게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통영 뱃놈의 생활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또 그 소리. 아냐, 이번에는 달라. 또 그 소리 아냐. 처음 듣는 소릴 거야. 그렇다고 놀라지는 마. 말수도 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 말을 해야 겠다고 결심한지 모르겠어.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왠지 그래야할 느낌이야. 고향이라면 난 지긋지긋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어. 모르겠어.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하지만 난 해야돼. 고향이를 해야 한다고. 

여순은 또 그 소리라고 싫은 소리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혀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매번 다른 이야기로 그녀를 자극했다. 말수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 줄때 처럼 편했다. 그가 들려주는 뱃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 마치 천국의 세상이 하늘이 아닌 바다에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늘 노래부터 먼저 불렀다. 

뱃사람들끼리만 아는 노래를 부르면서 먼저 죽은 넋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까지 자신들의 생명을 길게 가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비는 대목에 이르면 말수는 저절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가 부르는 뱃노래는 구성지고 갸날프고 힘이 셌다. 그때는 신성한 그 무엇이 말수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는 진지했고 담담했으며 의욕이 넘쳐 흘렀다. 노래가 끝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통영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사제를 찾아 고해성사를 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다. 교황청의 교황보다도 이름을 날렸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십대 초반이었다. 우스웠다. 그의 입에서 하느님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그 하나님을 여러 분 부르기도 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추어 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건 하느님 덕분이었다. 그가 하도 하나님을 외치자 처음 들어보는 공포에도 사제는 모두 용서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수는 살인을 저질렀다. 한 번은 과실치사였다. 통영에서 배를 탈 때 파도가 심했다. 항구를 바로 앞에 두고 배가 침몰 위기에 몰렸다. 선장은 사색이 됐고 선원들은 공포에 질렸다. 배는 제어 할 수 없었다. 돛은 부서졌고 옆구리에서 물이 들이찼다.

죽음의 순간 앞에서 선원들은 이성을 잃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평소 불만이 많았던 선장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어했다. 가만히 나둬도 죽을 목숨이지만 그동안 사무친 원한을 그런식으로 풀고 싶어했다. 말수라고 다를리 없었다. 종보다도 더 심한 학대를 당하고도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의 분노가 더 심했다.

그러나 그는 예리한 낫으로 선장의 뒤를 치려던 선원을 밀쳤다. 그런 식으로 사적 보복에 대한 결론이 일기 전에 우선 배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래도 이런 때는 선장이 있어야 했다. 그라면 가라 앉는 배를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탕을 본 울던 아이처럼 바람이 뚝 그치는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말수는 바라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뚫린 듯 비가 쏟아졌고 파도는 더 거셌으며 그로 인해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마을의 불빛마저 사라져버렸다. 멀찍이서 손을 까부는 것이 엄마의 손인지 낫을 든 청년 아버지의 손인지 알지 못했다. 말수는 눈을 비볐다.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죽더라도 죽여야 한다.

선장을 살린 것은 그가 살아야 할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부터 살고보자. 우리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다. 그는 선장을 향해 달려드는 선원을 밀쳤고 그 바람에 쓰러진 달려들던 그는 죽어야 할 대상이 선장에서 자신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챌 무렵 저승길로 떠났다.

한 손에 쥔 낫을 겨누면서 다가오던 선원은 말수가 밀치던 그 순간 더 큰 파도가 치는 바람에 뒤로 나가떨어졌고 하필 뒷머리가 어망의 뾰족한 곳에 박혀버렸던 것이다. 그가 지르는 비명과 눈을 뚫고 나온 쇠붙이에 붙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말수는 빗물 사이로 설핏 보았다. 선장은 자신을 구한 것이 말수인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왔던 자가 말수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살려 주세요. 저는 선장대신 선원을 죽였어요. 용서를 구하는 말수의 목소리는 떨렸다.신부님은 그런 일은 직접 살인이 아니니 충분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만하다고 안심시켰다. 말수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살인에 대해 말을 할 때 신부는 그가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 요지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말수는 감정을 추스르고 가능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술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고해의 와중에도 말수는 사람의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받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야 온전히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날따라 빨리 고해성사를 마치고 쉬고 싶었던 신부는 그런 말수 대신 언제 죽였나요, 어디서 죽였지요. 누구를 왜 죽였나요, 의 세 마디 질문에  짧게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말수는 신부의 의도를 눈치챘다. 신부님, 오늘은 더는 못하겠어요.’

신부는 자신의 말을 곧 후회했다. 그가 멈춘다면 자신만이 알고 싶었던 살인의 비밀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내일은 자신의 당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부는 내일 대신 오늘 저녁에 하자고 말수에게 역제의 했다. 말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신부가 간청하는 바람에 덜컥 수락할 뻔했다. 그러나 말수는 입 밖에 다 나오려다 만 그 말을 주워 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바로 전주로 가야 한다고 핑계를 댔다. 신부는 전라도 전주라는 말에 멀리서도 왔다며 그렇다면 계속해서 두 번째 살인의 고백을 털어 놓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멀리서 온 게 아니고요. 이곳 통영이 고향입니다. 전주는 그냥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볼 일이 있어서 가려고요. 그는 딱히 그곳에 갈 목적이 없었다. 다만 그곳에 유명한 성당이 있어 그 곳 신부에게 또다른 고해성사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주행을 제의한 친구는 친구는 전동성당에 깊이 관여했는데 신부는 고해성사 받는 것을 매우 좋아해 누구라도 좋으니 하루에 한 명은 반드시 고해실에 오도록 만들었다. 신도들은 모두 돌아 가면서 두 어 차례 있는 것 없는 것, 다 만들어 가면서 신부의 욕심의 채워줬다. 그러나 신부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도만으로는 곧 한계에 다달았다. 그래서 일가친척들이 동원됐고 말수까지 차례가 온 것이다.

선생의 기지 때문이었는지 배는 침몰하지 않고 묻에 닿았다. 선원들이 정신없이 배에서 내리고 나서야 배는 제 스스로 부서졌다. 그제서야 말수는 자신이 선장을 죽일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구사일생으로 배에서 살아난 말수는 그 이후로 더는 배를 탈 수가 없었다. 선장은 무슨 용쓰는 재주가 있는지 금새 새로운 배를 장만했고 말수에게 다시 자기 배로 올 것을 요구했으나 말수는 거절했다. 살아 남았던 나머지 선원들은 다시 선장의 노예 신세가 됐다. 

감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말수에게 선장은 분풀이를 했다. 이래도 내 놈이 내 말을 거역해, 하는 심사였다. 앙심을 품은 선장은 말수네가 하던 소작을 억지로 빼았았다. 소작이 없다면 말수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다. 이판사판 심정으로 쫓기다시피 전주의 먼 친구집으로 야밤 도주한 말수는 그러기 전날 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로 풀 베던 낫을 여러 번 갈았다.

낫보다 숫돌이 더 반질거릴 정도가 돼서야 말수는 엄지의 안쪽으로 갈린 낫의 상태를 확인했다. 벼린 날이 제대로 서 있었다. 그때만 해도 말수는 선장을 정말로 죽여야 할 지 망설였다. 죽인다고 생각했다고 다 행동에 옮기는 세상에 남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다만 아직 받지 못한 선원 품값을 받으려고 했다. 선선히 돈을 주면 그대로 가겠지만... 말수의 눈이 번쩍 하고 번개처럼 빛났다. 

품값도 주고 소작도 전처럼 해주세요. 이렇게 점잖게 말수가 나왔을 때 선장은 그 말을 따랐어야 했다. 나는 이곳을 떠나요. 이제 나를 볼 일은 없을 게구먼요. 그러니 목숨을 걸고 한 품값을 주고 우리 늙은 부모 목숨값으로 소작일을 계속허게 해주시우. 그러면 고히 가겠시우. 미리 여러번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되풀이 한 말수는 새벽녘, 선장이 자고 있는 집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낫을 목에 들이댔다.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이 깨서는 사태를 확인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나 공포가 심했던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전신 마비 환자처럼 무의식적으로 몸만 꿈틀댔다. 부인을 봐서도 차마 낫질을 할 수 없었다. 말수는 망설였다. 그러나 선장은 목숨을 재촉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는 그는 되레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말수를 겁박했다. 내가 이놈이 굶어 죽게 생긴 걸 살려죽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사태를 파악한 선장이 되레 큰 소리를 질렀다. 

참을성 있는 말수는 그 말에도 겨누고 있던 낫을 바로 선장의 목 쪽으로 찔러 넣지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은 말수의 그런 침착함 때문이 아니었다. 선장 부인이 그때 말을 했던 것이다. 어서 저놈을 죽여요. 낫을 뺏어 저 놈을 쳐 죽이라고요. 저 쌍놈을요. 말수는 어이가 없어 부인을 쳐다봤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부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양반에게 대든다. 어서 죽여요. 여보. 말수는 지체하지 않았다.무식쟁이가 그 낫을 휘둘렀다. 그 말을 듣던 차양 너머에서 순간 신부가 헉 하는 소음을 냈다. 낫이 자신의 목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목을 부여잡고 이런 식의 고해성사는 처음이라 식은땀을 흘렸다. 이 자를 바로 신고해야 할 지 신부를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말수는 성당을 떠나고 있었다. 그만큼 신부는 넋을 잃고 있었다. 사람을 둘씩이나 죽인 말수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정처 없이 여기 저기를 떠돌던 다음 날 그는 조선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일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전갈이 떠돌았다. 말수는 익숙한 배에 몸을 실었다.

기억나요. 갑판에서 시끄럽게 굴었죠. 하지만 그런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 네,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람요. 신부님이 다 용서했다. 그래 난 죄가 없어. 살인을 했으나 살인하지 않은 사람 처럼 깨끗하다고. 그래요? 선원도, 선장도 선장부인도 용서했을까요? 그것까지는 몰라.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좀 무서워요. 어둠 속에서 여순이 말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해요. 그렇잖아도 가슴 떨리는데. 

지금이 그때야.이런 때 해야 쉽게 말문이 뜨여. 이런 이야기를 이런 곳 말고 대명천지 어디에서 할까. 하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네. 신부님은 용서한 것 맞나요. 진짜로 용서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라고 신부가 있잖아. 그렇군요. 아, 정말 성당은 꼭 필요해요. 당신도 용서해 주고 우리 목숨도 살려주고.

다른 살인이 있는지 말하지 않고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살인이 있는지 여순은 묻지 않았다.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말수의 살인은 더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그녀도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은 없어요. 하고 싶은 말 다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요. 이런 식으로 여순은 돌려 말했다. 

말수는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 직접 묻지 그래? 다른 살인은 없냐고. 겨우 세명 밖에 안 죽였냐고? 그런 뜻이 아니라. 여순은 아차 싶었으나 늦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말수도 조용히 있자 여순은 아무 말이나 듣고 싶어서 그랬어요. 하고 말수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 표현이 말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여순을 버리고 간 동굴 속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수는 여전히 버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여순이라고 믿고 있었다.

같이 가자한 여순의 권유를 뿌리치고 떠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하산 후 말수가 여순에게 했던 말은 괜찮아 대신 내가 많이 피곤해, 였다. 아니 내가 사람을 죽였어, 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맞다, 맞아. 사람을 죽였어가 첫 마디였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의 안부보다 내가 죽인 사람에 대한 보고가 우선 순위에 있었던 것이다. 

극적인 재회의 순간에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시체 더미 속에서 한 두 사람 더 죽어 나갔다고 해서 역사책에 기록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살아왔다는 반가움은 금세 뒷전으로 밀렸다. 여순은 놀라서 혹은 너무 지쳐서 말수가 보기에 조금 심드렁했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죽였어, 하는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 속의 먼지처럼 여순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말수가 소설책을 읽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다 싶은 동굴 속에숨어서 가뿐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일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찾았는지 내가 있는 깊숙한 어둠속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들도 나처럼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목숨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말수에게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들어온 자들은 그 누구든 해치워야 할 대상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말수가 하지 않으면 그들이 말수에게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들이 조심해, 조심하란 말이야 이런 말을 주고 받으면서 말수의 코 앞 까지 다가왔을 때 말수는 절대 살려 둘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는 가지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어온 순서대로 머리를 박살냈다. 첫 총성이 울리고 두번째 총성이 났을 때 세번째 사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몸을 돌려 굴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말수는 똑같은 이유로 그를 살려 두지 않았다. 그가 살면 내가 죽는 다는 원칙이 이번에도 작동됐다. 

달려나가던 자는 머리가 아니라 등 뒤에 총알을 맞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으나 그런 날렵한 행동도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내가 신부님이야, 그러니 살인의 고해 성사는 모두 끝났어. 오빠는 이제 자유야. 용서를 받았다고. 신이 용서했는데 인간이 뭐라고 시비를 걸겠어. 여순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둠속에서 말수의 얼굴을 만졌다. 손에서 촉촉한 느낌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수는 울고 있지는 않았다. 

하느님의 용서면 끝난거지? 그런 거지? 죽은 자들도 그렇고. 말수가 여순의 손느낌을 입술로 느끼며 그 입술을 억지로 벌려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나라도 용서했어. 다른 수가 없거든. 그들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수가 담배 연기를 품어 내듯이 휴우 하고 한숨 소리를 길게 냈다. 이번에는 여순 차례였다. 말수는 말하지 않았고 다른 누구도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됐다. 살인의 고백은 이어졌다. 여순도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숨을 잠시 멈추었다. 말수는 서두르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것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말은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말수는 자신이 한 것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순에게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곳 성당의 지하실만 아니었어도 말수는 끝내 비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하고 나자 속이 시원했다. 죽기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한 것은 그의 영혼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말수는 여순도 자신처럼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막사에서 였어요. 그날은 다른 날도 그랬지만 유독 피곤했어요. 군인들은 그런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지요. 신부님도 남자이니 그 상황을 이해할 거예요. 듣는 대상은 말수가 아닌 신부로 바뀌었다.

여순은 마치 바로 눈앞에 신부가 있는 것처럼 그가 잘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죽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그러기 전에 그놈을 죽이고 싶었어요. 지난 번에 왔던 놈을 기억해요. 이마에 상처가 났고 가슴팍에 뱀문신을 한 상등병이었는데 일은 뒤로 미루고 쌍욕을 하고 꼬집고 팼어요.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면 그것이 그를 더 흥분시켰는지 더 심하게 학대했어요. 여순이 숨멎는지 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날도 그자가 왔어요. 이번에는 그냥 하려던 일이나 마치고 나가기를 바랐지요. 그랬으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기대는 허사로 끝났어요. 참을 수 없었어요. 이날은 처음들어 보는 욕을 했어요. 얼굴을 꼬집는데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고요. 그러고도 그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자가 일을 끝내고 잠시 골아떨어졌을 때 바늘로 두 눈을 찔렀어요. 알잖아요. 자수를 뜨던 그 바늘로 두 눈을 차례로 찔렀는데 그자는 만족감에서 오는 깊은 잠에 빠져서 자신이 보는 눈을 찔린 줄도 알지 못하고 골던 코를 더 세게 골았어요. 

나는 용기를 내서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두 번씩 더 찔러넣었어요. 그러고 나자 피곤함은 사라졌고 살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지요. 그 자가 다음에도 내 앞에 나타나서 같은 짓을 하는지 두고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날 이후로 그 자는 두 번 다시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짐작했던 대로 그자는 앞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총질을 하다가 동료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던 거지요.

전투가 한 창 진행중인데 서서히 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마침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돌격 앞으로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에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가다가 넘어졌는데 그만 방향을 상실했다고 해요. 다른 병사들은 같은 방향으로 다 달려 나가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뒤쳐진 그는 일단 총질부터 시작했는데 자신이 쏘는 곳이 적군의 방향이 아닌 아군의 등뒤인 것도 몰랐어요. 그 바람에 용감하고 유능한 오장이 죽었죠.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 막 입대한 졸병이 총알이 떨어져 잠시 주춤거리는 상등병의 뒤로 몰래 다가가 대검을 꺼내 들었죠.

그건 살인이 아냐.  말을 마친 여순이 다시 컥 하고 숨이 멎는 시늉을 하자 말수가 대들었다. 그게 어떻게 살인이냐고. 넌 살인자가 아냐. 말수는 여순이 안타까웠다.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듣는 소리였다.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때 받는 충격을 말수는 고스란히 받았다. 그래서 그게 살인이야. 넌 그저 정당방위를 한 거야. 알아. 이건 신부에게 고백할 건덕지도 못돼. 그러니 용서고 자시고 없고. 

하느님이 용서하실까요? 아니래도. 이건 하나님까지 가지고 갈 문제가 아냐. 내 선에서 끝낼게. 그럼 그럼, 넌 무죄야. 어떤 판사도 이것을 죄로 묻지는 못할 거라고. 눈 멀어서 똥 오줌 못가리다가 스스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그런 건 잘한 거야. 용서를 비는 게 아니라 칭찬의 박수를 받아야지. 말수는 정말로 박수를 쳤다. 어둠속에서 박수는 울려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말수는 여순을 다독였다. 자신의 살인은 진짜 살인이고 너의 그것은 나의 것에 비해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위로했다. 촛불이 흐려지고 있었다. 거의 다 탄 촛불을 갈아야 한다. 촛불을 아낄 필요는 없다. 성당은 족히 일년을 켜도 남을 초를 장만해 두고 있었다.

하나 더 키지 뭐. 말수가 초를 들어 다른 초를 세워 불을 붙였다. 밝았다고 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산소가 부족할 거야. 두 개를 켰으니. 머리가 아프지. 산소 부족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여기 가만히 있어. 말수는 산소 핑계를 대고 일층으로 나가 벽돌 몇개를 들어내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들어오자 신선한 공기가 따라왔다. 여순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말수는 깨우지 않았다.

자는 여순을 보자 그도 자고 싶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왔다. 말수는 참으려다 참지 못하고 앉은 자리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여순 옆에 잠들었다. 그러나 곧 깨고 말았다. 깊은 잠을 자고 시원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는 상황은 아니었다.

눈을 떴을 때 겨우 잠들었나 싶은 정도의 시간 밖에는 지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찌뿌둥한 몸과 몸 주변을 무언가가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말수는 촉각을 곤두세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러다가 왼 팔뚝 언저리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급하게 팔을 휘둘렀다. 붙었던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저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찍, 쥐였다. 그전에도 간혹 나타났으나 오늘처럼 공격적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잠은 다 잤다 싶었다. 촛불을 들어 팔뚝을 보았다.이빨 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피가 나오다 멈춰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여순을 살폈다. 무언가 후다닥 달아나는 기세가 느껴졌다. 불빛에 위기를 느낀 쥐들이 잠시 안전을 위해 뒤로 물러났다. 말수도 그들처럼 앉은 상태에서 뒷걸음질 치면서 신부님이 설교 때 손을 받치는 탁자 쪽으로 움직였다. 그것을 옆으로 뉘어 그 속에 들어갈 참이었다.

아무리 쥐라고 해도 성경책이 놓여 있는 식탁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가 들어가서 조금 있자 나무 벽을 박박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두 마리가 아닌 듯싶었다. 그들 중 용기 있는 놈이 발톱을 세워 먹잇감이 들어있는 상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들도 따라서 행동했다.

이것들을 떨쳐 낼 수 없다고 판단한 말수는 곧장 일어나 거친 몸짓으로 탁자를 밟아 버렸다. 판자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여순이 깨어나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그는 다시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너 마리의 쥐들이 그녀 주변에서 서성였고 어떤 놈은 옷 안에 들어가 제집인들 꿈틀거렸다. 그런데도 여순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조심스럽게 말수는 그녀 주변에 붙은 쥐들을 쫓고 어떤 놈은 꼬리를 잡아 멀리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도 화를 풀지 못한 그는 닥치는 대로 판자를 휘둘렀다. 분노에 눈이 돌아간 말수는 자칫하면 휘두른 판자로 여순의 머리를 내리칠 뻔도 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쥐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앉은 무릎 위로 다시 달려들었다.

시체를 만지는 것보다 더 소름이 돋았다. 튀어나온 내장을 집어넣으면서 괜찮다고, 살 수 있다고 외칠 때보다도 더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부서진 벽돌이 생각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벽돌로 작은 집을 만들어야 한다.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벽돌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지하에서 일 층으로 분주히 오르락거리면서 잠든 여순의 한쪽에 벽돌을 세우기 시작했다.

천장은 부서진 나무판자를 활용하면 한동안은 쥐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삼 일째 되던 날 말수는 비몽사몽에 있는 여순과 관속의 무덤 같은 벽돌 속에 갇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어렵게 마친 직후 이곳도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쥐들과 살면서 며칠 더 숨 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구한 자신들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다. 총 맞아 죽으나 무모하게 버티다 쥐에 뜯겨 죽거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나가자. 나가 보자꾸나. 밖으로 나가보자 꾸나. 그는 이런 다짐을 하면서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그러는 시간은 좋았다. 그것은 긍정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이곳과 천국 같은 그곳이 대비됐다. 운 좋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지 않은가. 배를 타고 태평양에 왔고 광산에 들어갔고 의사가 됐고 여순과 탈출했고 그 모든 것이 운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저마다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더 살아갈 운이 있다면, ㅇ여순도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서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그는 한 번 더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있기 때문에 더는 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으니 시험결과는 순전히 운에 달려있었다. 그는 상해로 가고 싶었다. 거기에는 조국을 떠나 건너온 많은 이들이 함께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었다. 흰옷입은 그들의 오두막 집에서 이른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상상했다. 잠시 좋았던 통영의 집처럼.

그러나 말수는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는 그들과는 섞일 생각이 없었다. 조선말 중국말 거기다 전선에서 배운 서투른 영어는 말수에게 큰 무기였다. 그는 밖에서도 여전히 의사이고 싶었다. 다른 어떤 외과의보다도 수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수술뿐 아니라 양약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훤했다. 여순도 마찬가지다. 부부의사로 상해에서 활동하면 많은 돈도 벌 수 있다. 돈보다도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다. 이런 꿈으로 그는 몸이 달아올랐다. 여순이 깨려는지 몸을 뒤척이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악몽은 아닐 것이다. 저 정도 반응은 그저 깨도 좋다는 신호에 불과했다. 말수는 지체없이 여순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느닷없는 말이었으나 여순은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당신이 좋다면 그렇게 해요, 하고 말해버렸다. 그녀는 그를 무작정 따르기로 했다. 따르지 않은면 어쩌겠는가. 같이 있어보니 떨어져 있을 때보다 좋았다. 겨우 며칠이었지만 산에서 헤어져 있을 때 여순은 말수가 없는 삶의 처절한 고통을 맛봤다. 두 번 다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신만 좋으면 당장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당장 그렇게 해요. 그녀는 당장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은 그런 의견을 내지 못했으나 당장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도 운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런 운을 타고 났으니 그 운을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돼도 조선족 마을로 가지 않겠다는 말수처럼 여순은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절대, 이번에는 당장이라는 말 대신 절대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그래, 절대 고향엔 안 가. 죽어도 안 갈 거야. 

이제는 고향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많이 지워졌다. 부모 형제가 그리웠으나 그리움은 다른 것으로 충분히 대체됐다. 슬픔과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감정은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문제는 날짜였다. 당장이라고 못을 박았으나 포격이 계속되는 상황이거나 치열한 전투 와중에 섬의 중심부로 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성당 지하실에서 전쟁이 멈췄는지 소강상태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밖에서 두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먼저 말수가 나가서 동정을 살피기로 했다. 그런 다음 여순이 합류하는 식이었다. 둘이 움직이는 것과 날렵한 하나가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말수는 자기가 정한 날에 나가기 전에 십자가 앞에 다가섰다. 거기까지는 쥐의 공격을 피했는지 촛불을 받은 십자가는 부서지지 않은 채 위엄과 기품이 함께 벽에 걸려있었다.

촛불 잡은 손 말고 남은 한 손을 들어 올린 말수는 자신이 결정한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간혹 나타날 장애물은 앞길이 창창한 여순을 봐서라도 치워달라고 그러면 상해에 가서도 잊지 않고 기도드리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알았죠. 하나님. 난 당신을 믿어요. 나를 믿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러니 알았죠. 우리를 살려 주시오. 말수는 반 협박으로 기도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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