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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같은 말들이었지만 패색이 짙은 그들은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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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같은 말들이었지만 패색이 짙은 그들은 믿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4.0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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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색의 짙은 그림자를 그들도 느꼈을까. 일제는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었다. 상해의 독립군이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입수한 후부터는 더 그랬다. 미군 특수전단의 훈련을 받은 수백 명 규모가 한꺼번에 경성에 들어와 시가전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일선 순사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더구나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는 자신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일당백을 한다는 무시무시한 훈련을 견뎌낸 인간병기라서 일제 정도는 우습게 본다는 것이고 간혹 그들이 대항하기 위해 쏘는 총알은 독립군을 피해간다고 했다.

미신 같은 말들이었지만 일제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코너에 몰려 있었고 들려오는 태평양 전황은 이런 분위기를 부채질 했다. 대일본 제국이 질 수 있다는 불안삼은 밑에서 부터 올라왔다.

상부는 언제는 겉으로는 연전연승한다고 외쳤으나 속내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공기는 스멀스멀 담배 연기처럼 위로 솟았고 경성의 일제는 만에 하나 닥쳐올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사전 차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거리의 아무나 붙잡아 검문하고 끌고가고 매타작을 했다. 한 때 문화정치라고 쓰던 유화책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포심으로 지배하겠다는 전략은 급하고 막장에나 쓰는 방법이었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고 휴의는 생각했다. 고비를 넘기면 기회는 있기 마련이다.

휴의는 이렇게 판단했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비를 넘기는 일은 어려웠다. 일경은 소문대로 본진이 들어 오면 큰 일이 난다며 그 전에 임정의 본대와 연결된 하부조직을 체포하기 위해 날을 세웠다.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중요했다. 기민한 행동은 정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고전적 수법은 물론 새로 들여온 기발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경성과 만주를 잇는 독립군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칼을 갈았고 간 칼로 마구 살점을 찔렀다.

지나 가는 행인은 아무나 잡아다 문초했고 아무 집이나 들어가 수색했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때로는 포상을 내걸었다. 수상한 자를 신고하거나 잡는 데 공을 세우면 쌀가마를 던져 주거나 누런 봉투에 싼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편은 살고 적은 죽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자. 이것이 그 즈음 일경이 내거 구호였다. 휴의는 말발굽이 바로 코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태연했다. 그들의 습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대처하는 방법도 상세했다. 하나가 꼬이면 다른 하나로 풀고 다른 하나가 들어오면 또 다른 무기로 쳐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휴의를 불러 세웠다.

어이 거기 너, 서. 불러세운 그들은 하는 일을 당연히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무언가 새로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에 얼굴이 불거졌다. 꿩아니면 닭이라고 잡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들은 신분증을 요구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이것은 휴의에게 가당찮은 질문이었다. 그는 맞받았다. 너의 소속은 어디고 어디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임마, 네 소속 부터 말해. 아예 대놓고 하대하면서 아예 명령조로 나왔다.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으면 강한 상대라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치다. 그들은 그의 능숙한 일본어와 품위가 섞인 단어사용, 그리고 위엄있는 태도에 일단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강자에게 숙이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질문했다는 것도 잊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상대가 질문한 것에 대해 술술 불었다. 네, 저희들은 종로서 소속 순사로 지금 순찰중입니다. 불순한 자들이 하도 많아서...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임마, 그건 나도 알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말꼬리를 내렸던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확한 어조로 군기가 바짝들어 있었다. 네, 저희는 종로에서 출발해  광교를 거쳐 경성역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 니들이 수고가 많다. 항상 묻는 말의 요점을 파악해야 한다. 나 같은 바쁜 사람을 불러 세웠으면 너희의 신분은 물론 무슨 일을 하고 어디로 가는 것쯤은 물어보지 않아도 보고 의무 사항 아닌야. 앞으로는 이 점을 잘 명심해야. 휴의는 이렇게 말하며 고생한다고 어느 새 말에서 내려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들의 그어깨를 차례로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람 봐가면서검문해라. 다음에 또 걸리면 한 대 맞고 코피가 흘려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말을 마친 휴의가 점잖은 걸음을로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려고 할 때 그 중 한 명의 순사가 무슨 미련이 남아 있다는 듯이 휴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돌아보는 휴의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았다. 그래도 신분을 밝혀 달라고 그것이 우리 임무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뭐 이런 개뼉따귀 갈아먹는 소리일 것이다. 이 정도는 휴의의 머릿속에 다 들어차 있었다. 

휴의는 돌아섰다. 아, 참 내가 깜박했구나. 네 직속 상관인 고바야시는 잘 있지? 광교통에서 만난 미스터리가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라. 그 제서야 순사는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는 듯이 하이, 하이를 연속으로 외치면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고바야시라는 이름이 나온 이상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상관을 아는 자는 그와 친분이 있거나 적어도 총독관저에서 일하는 본국의 파견 관리임에 틀림 없었다. 그런 사람이 적과 내통할 리는 없다. 검문에 걸려들 불순분자는 아니었다. 우리 편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들은 휴의가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휴의는 빠져나왔다. 독자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일경이 그 정도로 순진한가. 그러나 그 상황에 처했다면 그 반대인 의심덩어리 순사라도 휴의를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한 자에 약한 것은 강한 자들의 특징이 아니던가. 

자신들 보다 힘이 센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납짝 엎드리는 것은 그들의 생존전략이었다. 이번에도 그 전략을 쓴 것일 뿐이니 순진하다고 손가락질 할 필요는 없다. 휴의는 광통교를 지나 남대문의 혼란한 시장통에 들어가고 나서야 안도하는 심정으로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당하게 행동했으나 속으로는 떨려오는 것을 그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막무가내로 나와 서까지 같이 가자고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휴의는 먹기전에 눈으로 말린 가락이 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이자 코가 아래로 따라 내려오면서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서 입맛을 당기는 냄새가 기분좋게 스며들었다.

식욕을 당기는 모양과 냄새, 먹음직 스러운 것이 맛도 좋을 것이다. 검문에서 벗어난 탓에 긴장이 풀렸는지 휴의는 젓가락을 집자 마자 한 번 감아올려서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면발을 끝지 않고 끝날 때까지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일명 면치기 기술이다. 그는 이 기술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할 때 익혔다.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휴의는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들었다. 이 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그와 동시에 찰진 면발이 적당한 온도와 만나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돌았다. 춥고 사납던 바람이 불던 국경의 겨울 초저녁 어느 날 먹던 그 맛이 갑자기 생각났다. 일경에게 쫓겨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가 삼일 만에 먹던 그 국수 맛이었다.

맛이라는 것은 이렇게 위급을 벗어났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편하고 느긋할 때라면 진정으로 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먹다 말고 휴의는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탐색했다. 그러다가 훗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옆 사람도 눈치채지 못한 가벼운 것이었으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경을 따돌린 만족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애초 휴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숱한 경험으로 순사들이 어떻게 나오고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겪었던 그를 순사 정도가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휴의는 잠깐 긴장했었다. 그 순간이 또 오면? 휴의는 먹다 말고 그때는 이렇게 하지 뭐, 하고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닥치지 않은 일을 먹다 말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 수법을 한 번 정도는 더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임마. 참 좋은 우리조선 말이었다. 이놈, 하고 불렀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제국의 경찰이 이놈으로 불릴 때면 상대가 누구인지 감히 저절로 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임마라니. 순사는 듣는 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속으로 임마를 따라 부르면서 잘못 걸려들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사람을 보고 검문을 해야 했어야 했다. 아무나 붙잡고 신분증을 요구한 자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탓했다. 낮잡아 부를 수 없는 존재는 과연 얼마나 큰가. 그의 입에서 고바야시가 나왔을 때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바야시가 누군인가. 다음 종로서장으로 유력한 조선인 완용이 아닌가. 그는 현재 수석 순사부장으로 있다. 순사들도 그 이름을 들으면 몸을 바짝 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무서운 존재가 고바야시 였고 휴의의 입에서 감히 고바야시가 나왔을 때 잘 못 걸려든 것을 알고 후회할 수밖에. 

이만한 게 다행이다. 그들은 휴의가 돌아가고 난 뒤 이런 마음으로 경성역으로 가지 않고 종로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쭉 처진 어깨를 보는 행인들은 그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으러 가거나 좌천된 것으로 알았다. 선생님, 하고 얼른 받은 것은 순발력이었다. 그 말을 한 순사는 내가 그렇게 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다른 일행을 윽박질렀다.

그들은 이날의 사건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실수를 드러내 위신을 추락시킬 이유가 없었다. 의기투합이 끝난 기마순찰대는 더는 심문을 하지 않고 교대 시간을 기다렸다. 그 시각 식사를 마친 휴의가 막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누군가의 시선이 등 뒤에 박혔다. 뒷자리의 신사 두 명을 휴의도 의식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휴의는 잊은 것이 없나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잠깐 뒤로 눈길을 주었다. 그들 중 하나가 아리 아리, 아리랑.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내기 위해 그들이 입술을 움직이는 모양새를 휴의는 보았다. 소리라기보다는 이 사이로 나온 의미 없는 재채기 같은 것이 한 번더 반복됐다. 아리 아리 아리랑.

입술을 약간 벌리고 혀가 입천장을 가볍게 세 번 가볍게 때리고 한 번은 혀를 둥글게 마는 동작을 휴의는 재미있게 지켜봤다. 정확하게 아리를 두 번 부르고 아리랑을 한 번 외친 후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식사에 열중했다. 휴의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사람이었거나 혼자 중얼 거리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을 것이다.

국수 가락을 넘기는 쩝쩝거리는 소리가 방금 전에 했던 아리 아리 아리랑과 겹쳐 묘한 소음으로 순식간에 변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라면 들을 수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이상한 소리.

아리 아리 아리랑. 그러나 그 소리는 백만금의 가치가 있었다. 바로 상해에서 받은 암호였던 것이다.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휴의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눈짓을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광화문 쪽을 향해 발길을 천천히 돌릴 때 오른 손을 위로 한 번 들어올렸다 내렸다.

그들이 계산을 하고 따라 나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휴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드디서 자신이 경성에 온 목적을 달성할 기회가 왔음을 실감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나 두 명의 신사도 국숫집을 나와 따라 온다는 것을 휴의는 알았다. 경성우체국 못미쳐 인황 찻집으로 가야한다.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접선자와 접촉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면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묵직한 권총의 쇠뭉치가 차갑게 느껴졌다. 그것은 위험에 빠트리는 물건이기도 했으나 위험으로 부터 지켜주기도 했다. 

휴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우체국 쪽을 향해 걸었다. 누가 옆에서 보면 서두르거나, 아무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목적한 대로 움직이고 있는 의지가 엿보였다광화문 쪽에 있는 사복 경찰이 보기에도 그는 단정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으로 의심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휴의는 그런 몸가짐으로 주변의 시선을 받지 않고 우체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휴의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뒤를 밟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상해서 출발한 또래의 여성 동지였다. 그녀는 아주머니로 변신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60대 노파처럼 늙었다. 지팡이를 짚은 구부정한 어깨를 펴지 않은 것이 영락없는 늙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속은 팔팔한 이십 대였다. 훈련으로 단련된 그녀는 휴의가 위험에 빠지면 도울 유일한 경성의 조력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부호의 글씨체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전의 성공에는 그녀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경성에 들어온 후 휴의와 여성 투사는 서로 은신처를 바꿔 가면서 떨어져 생활해 왔다그러나 이 삼일 연락이 없으면 특정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으므로 근황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오늘 휴의는 그녀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도 당황했었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그녀가 노련했다. 나이가 어려도 그녀는 독립운동 경력이 휴의에 앞설 만큼 일찍 부터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륜은 무시할 수 없었고 그 점을 상해 임정은 인정했다. 부자이면서 어려운 일을 하기는 어렵다. 특히 목숨을 거는 일에 부자들은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 최고 부자이면서 가장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늘 휴의를 그립자처럼 따라붙었다. 진심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전을 위해 이중막을 설치했을 뿐이다. 인사동에서 잠깐 멈춰서서 낯선 여자와 대화를 나눌 때도 그녀는 휴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그녀는 그가 만난 여자를 그가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공작원에게 사랑은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임정에 휴의의 여자에 대해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휴의라는 요원을 정말 믿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미행을 더 열심히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바로 조금전 광교통에서 기마순사의 검문을 받을 때도 그녀는 불과 십 여 미터 후방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정말 믿을만 한가. 임정이 밀정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휴의가 적당히 따돌리지 못했다면 그녀가는 개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휴의에 밀착했다. 독립자금을 받아 인수한 후 최종 목적지인 상해까지 가는 것은 휴의의 몫이었다. 그녀는 경성에 남아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로 임정과 사전에 모의했고 이를 휴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임정의 선생은 이같이 철저하게 이중 공작을 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역할과 임무가 막중했기 때문이다. 

여성독립군은 휴의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는 동안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아직 의심을 살만한 다른 행동은 없었다. 이미 그는 신분을 세탁한 적이 있지 않은가. 독립군을 잡는 토벌대에서 활동하다 독립군이 된 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독립군에서 토벌대로 가는 길은 쉬워도 토벌대서 독립군으로 넘어오는 것은 어렵다. 누구나 아는 공식인데 그가 이런 것을 깨버렸다. 토벌대 일호 귀순용사가 바로 휴의라는 것을 여성 독립군도 알고 있었다. 밀양출신인 그녀의 남편이 경성으로 파견할 때 조심하라면서 전해준 휴의에 대한 전력이었다. 

이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휴의가 일경에게 미행당하는지 살펴보면서 근거리 경호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인사동에서 휴의에게 실망을 했다. 젊음의 패기가 자칫 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고심했다. 독립이라는 큰 일을 하면서 여자를 만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실망한 그녀는 이번 작전의 실패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실망은 수표교 다리 위에서 일경을 멋지게 따돌릴 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작은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그녀는 휴의가 들어간 후 일 분 정도 시차를 두고 우체국으로 안으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휴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성 독립군은 반대쪽 출입문을 순간적으로 응시했으나 여닫는 문 사이로 휴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임무를 마치기도 전에 벌써 우체국을 빠져 나갔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도망치기 위해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그 안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둘러 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몸과 소음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순간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달려들었다. 광화문 쪽에서 내려오던 바로 그 사복 경찰이었다. 그는 돌아본 여성의 눈에서 두려움 혹은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발견했다.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물었다.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여성독립군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대신 품 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도쿄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냐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동경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편지를 받아든 그는 주소지를 한 번 쑥 훑어보고는 어디로 보내는지 동경의 주소를 말해보라고 했다.미심쩍은 마음을 해소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동했다. 남편이라면 주소 정도는 당연히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여성독립군은 능숙한 일본어로 주소지를 말했다. 편지지 대신 일경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그리고 남편이 와세대 법대를 졸업하고 막 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첫 근무지로 조선을 희망한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소속이 어디냐고 이번에는 여성이 거만하게 다가섰던 그에게 공손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물었다. 남편이 경성에 오면 당신의 친절에 대해 이야기 하겠어요. 일경은 머리를 숙이고 편지를 돌려주면서 자신은 총독부에 근무하는 고바야시라고 했다. 고바야시. 여성 독립군은 순간 뜨끔했다.

휴의가 써먹은 바로 그 고바야시가 이 고바야시라는 말인가. 그녀는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고 티를 내지 않으면서 아이가 몇 명인지 물었다. 아빠를 닮았다면 분명 잘생긴 아들이거나 딸이라고 했다. 사복 경찰은 누가봐도 중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성독립군은 이렇게 지레짐작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긴장했던 고바야시의 얼굴이 풀리면서 잠시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들 하나인데 경기중학교에 올해 입학했다고 말했다경기중이라면 조선 제일의 학교지요그녀가 받았다. 왜 일본 학교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여성독립군은 묻지 않았다. 고바야시는 아들이 일본어와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야 조선에서 한 자리 크게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경기중에 보낸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서투른 조선어로는 조선인들을 제대로 알 수 없지요. 알 수 없으면 다룰 수 없고요. 일본어로 학교 수업을 하고 일본어가 공용이 됐어도 상당기간 조선어는 은밀하게 조선에서 쓰일 것이다고바야시는 그렇게 판단했다. 맞아요. 조선말을 알아서 조선인을 다룰 수 있어요. 그는 머리를 또한 번 깊게 숙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총독부에 찾아오라고 했다. 여성 독립군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볼일을 보러 접수계 쪽으로 갔다.

능숙하게 업무를 보는 그녀를 지켜보던 고바야시는 조선에서 커다란 끈 하나를 잡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주소를 외웠다. 편지를 집어 들었을 때 발신자의 주소를 이미 머릿속으로 암기해 놓았던 그 주소를 다시 상기했다처음에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나중에는 출세를 위한 기대로 외웠던 주소지였다.

한 번 찾아갈 것이다. 고시에 합격한 법대 졸업생이 조선에 오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에 고바야시는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라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고바야시와 헤어지고 난 후 여성독립군은 우체국을 뒤로 두고 황실 다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휴의가 다방을 지나쳐 경성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다. 접선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이 다시 요동쳤다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그러나 다방으로 들어가는 발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보따리 하나를 들고 다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왔을 때 휴의의 뒤를 고바야시 일행이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고바야시가 필경 휴의를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휴의가 더 위험해 보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녀는 품안의 권총을 만지작 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그는 휴의를 구해야 한다면 고바야시와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나야 한다. 그 능글거리는 구렁이 웃음을 보는 것은 싫었으나 좋은 일을 위해 싫은 일을 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일지도 몰랐다. 

제발 너를 다시 볼 수 없기를, 그녀는 금속의 쉿덩이를 만지면서 자식을 대하듯이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접선은 적이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애초 목적은 일경 한 두 명을 죽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 성공을 위해 은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휴의가 죽든 아니면 내가 죽든 둘이 죽든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나 나의 죽음은 작전의 실패를 의미했고 임정의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어떻게든 돈 보따리를 받고 무사히 상해로 잠입해야 한다. 그 순간 여성 독립군의 발걸음은 무겁기도 했고 가볍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해서 요인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이 겹쳐졌다.

다행히 그는 고바야시를 따돌렸다. 고바야시는 자싲이 조선땅에서 대를 이어 출세하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휴의를 등한시했다. 휴의가 자신의 이름을 팔고 위기를 모면한 사실과 여성 독립군 역시 자신을 이용하려는 속셈을 모른 체 고바야시는 자신의 꿈이 조선땅에서 무르익고 있는데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 

바로 황실 다방을 들르지 않은 것은 휴의가 내린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그가 그곳에 들어갔다면 접선자는 물론 그도 체포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다방의 모든 시선은 흉악범에 쏠리고 그는 포승에 묶여 대로변을 따라 끌려가고 있다. 몸을 부르르 떤 휴의는 수인으로 감방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털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휴의는 최악의 상황을 염려했다. 

다행히도 조선총독부의 상금에 눈이 먼 내부 고발 건은 없었다. 접선이 탄로 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경은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를 매일 이잡듯이 검문하고 있었고 특히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을 집중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오늘도 고바야시 일행은 조선인들이 자주 들르는 황실 다방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불시에 검문을 진행했다. 

한바탕 소란을 겪고 한 황실 다방은 다시 활기가 넘쳐났다. 일경이 들이 닥치기 건에 그곳을 빠져 나온 휴의는 어쩌면 운이 좋은 남자였다. 그 대신 그녀가 먼저 다방에 들렀고 그녀는 옷가지를 싼 보자기를 챙겨 들고 나올 수 있었다. 앞 가슴에는 보자기를 등 뒤에는 보채는 아기가 혹처럼 붙어 있었다. 그녀는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국수집에서 뒤늦은 요기를 하고 있었다.

휴의가 떠난 지 불과 삼십분 만이었다. 등에서 내린 네 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제 얼굴보다 큰 그릇을 들어 마지막 국물까지 다 먹고 나서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성 독립군은 그 제서야 한 시름 놓았다는 듯이 다시 황실 다방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고 간 곳에 다시 바람이 불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모습을 이번에는 휴의가 지켜보고 있다. 그 사이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중년의 독립군은 보따리 하나 만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이 무렵 일경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그러나 실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광통교에서 임마라는 호칭으로 굴욕을 당했던 말 탄 순사는 입맛이 써 도무지 밥 먹을 기운이 없었다.

오사카에서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듣는 욕설이었다. 순사인 주제에 어느 놈인지도 모를 자에게 임마라는 소리를 듣고 그만 선생님 하면서 넙죽 엎드렸던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경찰서로 복귀하는 대신 순찰을 돈다는 명목으로 두 명의 일경은 다시 청계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바야시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을 굴복시킨 그 젊은 남자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에 고바야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와 고바야시가 정말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아야 했다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들이 국숫집으로 막 들어섰을 때 진짜 고바야시도 그곳에서 일행과 뒤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풀이 죽은 그들과는 달리 한껏 기분이 고조된 상태였다. 일본 검사의 부인을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여기면서 일행에게 점심값을 대신 내겠다고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일본 검사가 조선에 당도하기 전에 그 부인에게 쓸 수 있는 호의를 다할 작정이었다. 그 부인이 남편에게 총독부 고바야시의 친절을 이야기한다면 그 남편은 자신의 앞날을 보장해 줄 것이다고바야시의 넓은 얼굴이 더 넓어졌다어서들 들어,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고바야시가 소리쳤다.

그 옆방에는 두 명의 일경이 힘없는 젓가락질로 수치를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대화를 통해 진짜 고바야시가 자신들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오전의 실수를 만회할 절호의 찬스였다. 우연치고는 기이한 우연이지만 이 우연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고바야시 일행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조급하게 행동했다 또다른 실수를 저지러서는 안 된다. 고바야시 총감님 맞으시죠정복을 입은 순사 두 명이 구두끈을 신고 막 일어서는 고바야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고 존경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고바야시가 눈을 들었다.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순사들이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니들이 고생이 많다고바야시는 대뜸 반말을 하면서 일경의 어깨를 두드렸다내가 총감 고바야시라는 것을 니들이?’ 어떻게 아느냐는 뒷말을 더 듣기도 전에 두 명 중 한 명이 우연히 대화를 엿들은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았다.

고바야시는 호탕하게 웃었다그래 니들 소속이. 남한 헌병대 정찰본부 수색1팀입니다그래, 나중에 내가 한 번 찾아가마. 사령관을 마나면 니들 노고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하마. 말을 마친 고바야시는 볼 일을 다 봤으니 이제 가봐야겠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공손하게 손을 모았던 일경이 고바야시에게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눈짓을 주었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하기 어려운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였다. 눈치 빠른 고바야시가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잠깐이라면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들을 피해 잠시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일경은 고바야시의 귀에 손을 모으고 조금 전에 있었던 검문 과정의 일을 조용하게 그러나 상세히 설명했다젊은 청년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총감님 이름이 나와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며 혹 젊은 조선 청년을 아느냐고 물었다.

키와 몸매와 눈초리를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듣던 고바야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그래 나도 좀 전에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그는 젊은 여성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그렇다면 혹시 그 여자도 그 자와 한패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딱 쳤다.

고바야시는 넓은 얼굴에 점처럼 박힌 작은 눈을 번득이며 외워 두었던 여성의 주소를 그들에게 적어 주면서 급히 그곳이 실존 주소인지 찾아보라고 무슨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일경에게 말했다그들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이럇을 외치는 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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