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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고미술에 관심을 보이면서 연락해 달라고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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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에 관심을 보이면서 연락해 달라고 메모를 남겼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3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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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장은 이를 갈았다. 얼마나 세게 갈고 있었는지 옆에 있는 신임부관이 뿌드득거리는 소리를 닭의 날갯짓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부관은 그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면 자신이 잡아 오겠다며 상관의 심기를 살폈다.

대장은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척 자세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기를 기다렸고 예상대로 부관이 움직여 주자 그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자신의 인간이해도에 만족했다.

그런다고 오냐, 하면서 얼굴을 바로 누그러뜨리면서 덥석 달려들수는 없었다. 다만 대장은 닭 날갯짓을 멈추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 같은 것이 무슨 일을 해내겠느냐는 비아냥에서 금방 그게 너라면 가능하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에 변화를 주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엄한 명령보다도 작은 믿음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것을 대장은 지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관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는 말이 아닌 행동이었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감사함의 표현이었다.

조금 후 그가 고개를 들고 대장을 바라봤을 때 대장도 마침 그를 보고 있었는데 대장은 그에게서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각오가 단단해 지고 있음을 느꼈다. 너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내의 간절함이 담긴 그 표정은 낯이 익었다. 휴의에게서 보던 것이었다.

그도 나에게 저런 눈으로 충성을 맹세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배신하고 나를 구렁텅이로 몰고 있다.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럴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러나 여기를 떠나는 즉시 달리 마음을 먹는다. 그래,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여기 있던 마음이 밖에 나가서도 변치 않도록 해야한다. 전쟁터에서는 모두 믿을 수는 없는 놈들 뿐이니. 

대장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관을 대했다. 그 느낌을 부관이 모를리 없었으나 어쨌든 자신은 휴의를 잡아 공을 세우고 싶었다. 총독부까지 보고된 이 사안은 토벌대장의 위치를 흔들었고 그가 해임되거나 떠나면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끼어들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한 발 한 발 내딪자는 것이 부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간절한 호소를 담았고 대장 역시 그 눈빛에 서린 의도를 읽었다. 배신의 기회가 오기 전에 그를 써먹어야 한다. 둘은 이런 생각으로 서로 눈치작전을 폈쳤다. 선수는 대장이 먼저 쳤다. 대장은 종이와 펜을 부관에게 내밀었다. 휴의를 잡는데 필요한 것을 적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종이를 내미는 손길에서 무엇을 적든 적은 내용을 다 해결해 주겠다는 대장의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 육사시절, 만주군관학교 시절 스승에게서 배운 태도였다. 그것을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토벌대장은 이틀 전 자신의 학교 직속상관에게 불려갔었다. 그는 그 일을 떠올렸다.

대장은 스승을 만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실책으로 독립군 잔당의 토벌이 미뤄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따끔한 질책을 내려달라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너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만 일어나거라. 스승은 제자를 일으켜 가슴에 안았다. 네 충성심 부족이 아니다. 조센징이 잔혹한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토벌대장은 그의 가슴에 안겨 눈시울을 붉혔다. 반드시 섬멸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그리고 조용히 스승의 책상 앞에 놓인 종이를 자기 앞으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 눈을 들어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스승을 위해, 천황을 위해 몸 바치겠다는 혈서를 썼다. 단 두 글자, 대일본 제국에 충성합니다. 스승은 제자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그리고 피묻은 손을 잡아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싸매 주었다. 토벌대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했다. 종이한 장은 이렇게 해서 신임부관 앞에 오게 된 것이다. 

대장은 부관이 잡은 펜을 보았다. 그가 여전히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저리도 오래 고민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왜 펜으로 쓰고 있을까. 혈서는? 나처럼 손가락을 찌를 순 없을까. 그러면 선명하고 보기도 좋을텐데.

그러나 대장은 부관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거기에 까지 그가 미칠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는 대장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두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바치듯이 쓴 것을 들어 올렸다. 깔끔하게 1번부터 3번까지 번호를 매긴 종이를 대장은 들고 읽었다.

1.8명 지원

2. 소총, 병사수에 맞게 각각 1정 씩 지급, 수류탄 각 3발 ( 권총도 한자루)

3. 돈

간단 명료했다. 이걸 적는데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나. 권총은 네가 찰 거고. 대장은 요즘 젊은 애들은 이처럼 신선해. 우리 때와는 다르단 말이야. 감히 권총을 찰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돈이라고. 나 때는 말이야, 돈 그런 거 입도 뻥긋 안했어. 맨손으로라도 뛰었지. 굶으면서 잡았다고. 제 피를 먹고 독립군과 싸웠어. 대장은 혀를 찼다. 젊은애를 믿고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 할 지 고민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임 부관의 요구사항은 그대로 실천됐다. 다음날 부관은 만주경찰서를 방문해 그곳에 파견돼온 종로경찰서 순사부장 완용을 찾았다. 완용은 일면식도 없는 토벌대 부관이 찾는다는 말에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과 경찰이 같이 모여서 무슨 일을 할까. 그러나 만나자고 하니 아니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관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휴의의 사진을 본 것이다. 

이 자를 알고 있는지요? 말은 존대하고 있었으나 시건방을 떨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군인이 경찰보다 한 수 위라는 듯이 거만하게 나왔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용은 같이 맞붙기보다는 휴의 사진을 보자 마자 얼어 붙었다는 표현이 걸맞게 이게 뭐요? 뭐하는 자요? 하고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다. 

완용이 보기에 부관은 원래가 거들먹 거리는 스타일이었다. 완장을 찼으니 경찰쯤은 우습게 본다는 투였다. 그러나 완용이 누구인가. 하지만 오늘 완용은 마음이 뒤숭숭하다. 휴의라니. 그래 내가 찾는 자가 바로 이 자야.  그가 무슨 정보가 있을까. 그러니 장교 군복을 입고 나대는 것을 용서하자. 여기는 분명 그들의 관할이었고 자신은 이곳에 파견나온 일용직 아닌가. 그래 이정도 대우도 나쁘지 않다. 

이 자를 아느냐고요? 부관은 완용이 망설이자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다면, 이 자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내 놓으시오. 이렇게 완용을 을렀다. 마치 피의자 대하듯이 하는 태도가 주객이 전도 됐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완용은 참았다. 자신이 하던 짓을 이 자가 하고 있으니 꼴 값을 떨어도 유분수가 있지. 완용은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자는 같잖았다. 겨우 완장을 차고 폼이나 내려는 초급 장교 딱 그 수준이었다. 아직 완용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토벌대장의 부관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이 자가 누구요? 부관은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어이없다는 듯이 순사부장을 노려보면서 토벌대를 배신한 조센징 아이인데 그것도 모르냐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래 아이 하나 못잡아서 꼭두새벽에 찾아 왔단 말이오. 완용이 면박을 주었다. 완용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그런 배짱이 있었다. 장교가 발끈했다. 기분이 상한 그는 그러면 경찰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따졌다. 만주까지 파견을 왔으면 성과를 내야지요. 더구나 토벌대 지원부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탈영병을 잡는 것은 군인이 먼저였다. 경찰에게 자신의 임무를 떠 넘긴 것 같아 장교는 조금 머쓱해졌다. 장교는 이번에는 말투를 바꿔 협조를 요청했다.

군경이 손을 하나로 잡지 않으면 독립군 수괴는 물론 잔당들 잡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러니 우리 손 잡고 조선인끼리 일 한번 내보자고 악수를 청했다. 상대가 수그리고 들어오자 완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대했다. 이것으로 완용은 장교의 기를 꺾고 휴의에 대한 토벌대가 알고 있는 모든 자료를 불과 한 시간 만에 확보할 수 있었다. 완용은 토벌대의 자료를 읽으면서 인상을 치를 떨었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충격을 받은 완용은 휴의가 이 정도까지 타락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극도의 분노감을 키웠다. 그는 타락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불타올랐다. 타락한 놈이네, 용서가 안돼. 내가 어떻게 해서 너를 군대에 넣었는데. 탈영을 하다니. 그것도 용의자를 풀어주고 함께 탈출했다고. 이거 단단히 미쳤어. 마귀가 씐 거야. 그렇다면 내가 해야지. 내가 넣었으니 잡는 것도 내가 해야지. 

휴의가 배신을 때렸어. 뭐, 독립군이 됐다고. 독립군을 잡는 토벌대의 이인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지. 기가 찼다. 이건 아냐. 휴의는 조국 일본을 배신했어. 망한 나라를 위해 일하다니. 세상 천지에 이런 바보가 어딨어. 대세는 일본이야. 일본은 조선은 물론 만주와 중국 전역 나아가 동남아까지 쓸고 있어. 종국에는 구라파는 물론 미국도 손에 넣을거야. 한심한 놈이 있다면 이런 세계정세를 모르는 휴의 같은 놈이지. 

완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살짝 혀끝에 감돌았다. 네가 마음먹은 대로 했으니 나도 마음먹은 대로 하겠다. 입안에서 나는 비릿한 맛을 음미하며 완용은 다짐했다. 자신 때문에 입대했고 입대 후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대장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는 은근히 시샘도 했다. 내가 경찰서장이 되기도 전에 먼저 장교가 되다니. 한 턱 내라고 해야지. 뜯어 먹을 구실은 남많아. 하하하 웃던 기억이 새롭다. 

친구의 성공은 완용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그것은 좋은 것 같으면서 싫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선의의 경쟁을 하고 싶었고 어떤 때는 괜한 추천이다 싶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독립군이라니. 그 허접한 것을 왜 하니? 춥고 배고프고 도망다니고 잡히면 일족이 멸망하는 그 싸구려 짓을 하다니. 

이제 그와 제국의 성공을 위한 경쟁은 끝났다. 하나는 제국의 파멸을 원했고 다른 하나는 부흥을 원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 시작됐다. 완용은 아직 배신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엇이 휴의로 하여금 장미꽃 길을 버리고 가시밭 길을 택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애국심은 아닐 터였다. 조국에 대한 독립 같은 것이 휴의에게 생길 이유가 없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속단했다.

어떤 개인적 원한이 개입한 것일까. 그러나 이유 같은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지나간 일은 어찌됐든 결론은 나왔다. 배신자는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 완용은 마치 자신이 배신한 것 같은 모멸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서류철을 손에 쥐고 붉은 얼굴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죽마을로 순사를 급파했다. 가족을 체포해 심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족 역시 휴의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군인으로 입대한 후 편지 한 통이 가족들이 받은 전부였다.

부모님 전상서. 저는 잘 있어요. 그러니 부모님은 걱정마시고 건강하세요. 성공해서 돌아가면 마을 앞 제일 좋은 논을 사드릴게요. 그것이 다 였다. 그런 것을 완용도 알고 있었다. 죽마을을 떠난 사람의 생사가 확인된 경우는 자신말고 휴의가 처음이었다. 가고 나면 모두 함흥차사였다. 점례가 그렇고 여순이 그랬다. 그나마 편지 한 통이라도 받은 것은 휴의네가 유일했다.

한 번은 휴의 어머니가 서로 완용을 찾아왔다. 종로서와 발령받기 한 달 전이었다. 인절미를 한 말 이고 온 어머니는 완용을 보고 말없이 꾸러미를 밀었다. 잘 봐달라는 인사였다. 친구 아들에게 지나치게 공손했고 얌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사가 된 후 완용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윗사람이든 그 누구든 함부로 했다. 휴의 어머니는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아들의 안부를 묻는 일에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완용은 가져온 보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냉소 띈 얼굴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말 대신 고갯짓으로 물었다. 휴의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군인으로 갔는데 편지 한 장이 고작이야.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몰라요, 낸 들 알겠어요. 알면 알려 주리다. 그러니 아주머니 여기서 그러지 말고 얼른 집으로 가. 그는 매몰찬 이 한마디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서를 나오며 휴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매정한 자식이다. 알든 모르든 좀 친절하게 해줬으면 아니면 말이라도 조금 더 길게 해줬으면 이 정도로 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없는 돈으로 인절미 한 말을 해 보냈더니. 나에게는 피 같은 떡이다. 

없는 살림에 인절미 한 말은 큰 돈이었다. 성의에 대한 보답치고는 형편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완용은 그런 휴의 부모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후배를 시켜 크게 야단치라고 닥달했다. 만주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 자신이 직접 심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삼일 간 심문 후 만주로 보내온 보고서는 의심사항 없다 였다. 나올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완용은 다 계획이 있었다.

나중에 화살이 자신에게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휴의가 친구라는 것을 왜경에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 심하게 나왔는지 모른다. 친구라고 봐줬다는 인상이 남아서는 안됐다. 보고서를 받은 휴의는 일단 그것을 구석에 쳐 박아 놓고는 그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골머리를 썩였다. 

배신한 조센징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완용 자신에게 쏠릴지도 몰랐다. 언제 자신의 목에 올가미에 씌워져 휴의 대신 처벌을 받을지 완용은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휴의 부모에 대한 심문은 가혹했어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사전 포석은 잘 마무리 됐다. 완용은 그 일 때문에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출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본토인이 아닌 반도인이라는 것.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열심히 더 눈에 띄게 활약을 펼치는 것이었다. 완용은 그 이후로도 휴의 부모를 한 차례 더 불러 한 달간이나 서에 가두고 몹쓸짓을 하면서 왜경에 자신의 충성심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풀어준 것은 왜경이 이 자들에게서는 더 나올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실 완용은 더 묶어 두거나 아예 옥사시킬 계획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풀어주면서 완용은 친구 부모님이라서 이렇게 조용히 끝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위태롭게 된 것에 대한 보상을 따로 준비하라고 했다. 세상에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다. 

고문으로 휴의 부모는 겨우 아기 걸음을 옮기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을, 살려 줘서 고맙다며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완용에게 인사했다. 우리는 당해도 마땅하다고, 그런 죄인을 풀어줘서 고맙다고 노 부부는 고개가 땅에 닿도록 연신 주억거렸다.  완용은 그런 부모 앞에 그러모은 침을 탁 하고 뱉어냈다.

같잖은 것들. 의자에서 등을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완용은 좀처럼 불쾌한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자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지껄였다. 그러다가 이러지 말자며 가끔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자 잊었던 여순과 점례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휴의의 변절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완용은 여순과 점례가 어떤 상황인지 갑자기 궁금했다. 그는 그녀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일본으로 보낼 여자들을 모집하라고 일본을 맨 앞에 내세웠다. 그래 반도인이 본토에서 일하면 얼마나 영광스럽겠나. 그는 여자 모집에 열성이었다. 그래, 햇수로 몇년이나 됐지. 손가락을 꼽다 완용은 그러기를 그만 두었다. 점례 요 고약한 년.  완용은 여순보다 점례가 좋았으나 점례는 휴의와 죽이 맞았다.

그것이 분했던 완용은 점례든 여순이든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랐다. 꼴보기 싫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모집책의 연락을 받았고 그래서 주저 없이 둘을 추천했다. 그때만 해도 완용은 조금 순진했다. 일본이든 어디든 가면 돈 벌어 온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았든 몰랐든 지금와서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나중에야 점례와 여순이 잘못된 길로 들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으나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통에는 뭐든 일어나니. 여자들이 근로정신대나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그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몸을 바삐 움직여야 할 처지였다. 
 

그날 이후로도 완용은 애써 그녀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애당초 없던 존재인 것처럼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과는 엮일 일이 없는 일로 골치를 썩을 필요가 없었다. 휴의라는 놈이 문제야 문제. 괜히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가 군인을 추천하다니. 이게 무슨 낭태야. 

죽마을 순사 생활을 끝내고 경성으로 왔을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런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하는 일도 벅차고 능력밖의 일도 있었으나 노력하나만큼은 정말 가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거니 완용이 꼭 그런 꼴이었다. 그러다 보면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일이라는 것이 불순분자를 색출해 내는 것이 만만할리 없었다.

하나의 일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를 잡으면 또 하나는 어디선가 사고를 쳤다. 끈질긴 조센징 놈들. 그는 이 말을 달고 다녔다. 일본인이 들으면 저 놈은 본토인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과 조센징을 달리 취급했다. 그는 조센징을 말하고 나면 꼭 침을 탁하고 뱉었다. 그래서 왜경들은 완용에게 ‘끈조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끈질긴 조센징이 탁하고 침을 뱉는다는 뜻이었다. 그 별명을 완용은 달게 받지 않았다. 조센징에 자신이 포함됐기 때문이다.그는 완용대신 히로마시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이 버젓이 있었다. 그러나 동료 왜경들은 히로마시라는 말보다는 끈조탁으로 부르기를 즐겼다.

너는 아무리 잘 나도 조센징이야. 거기에는 깔보는 의미가 있었다. 완용은 끈조탁을 버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침을 뱉지 않아야 한다고 했으나 무의식 중에 그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씩 튀어 나왔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은 늘 침을 딱하고 뱉은 뒤였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최근에는 침을 뱉는 횟숙가 더 늘었다. 휴의라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뜻밖의 걸림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자신의 발목을 잡자 완용은 하루에도 여러번씩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예의 조센징을 외치면서 침을 탁하고 바닥에 뱉었다. 화가 났다는 표현을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야 했다. 

휴의를 잡아야 한다. 꼭 내 손으로. 그는 토벌대의 자료를 여러 번 복기한 후 휴의가 임정 산하 독립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군대서처럼 그는 치밀한 두뇌와 성실함으로 독립군의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를 잡으면 개인적 복수는 물론 임정의 조직을 와해 할 수 있다.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자.

휴의는 만주에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만주는 여러 차례 초토화 작전으로 한인 사회가 절멸했고 독립군도 거의 명맥이 끊어지고 있다. 외부의 긴급 도움 없이 활동은 이제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고 조력자들은 씨가 말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휴의는 상해나 아니면 조선으로 돌아가 다음을 도모할지 몰랐다. 완용은 기차역을 중심으로 그물망 작전을 폈다. 처음 신의주로 파견 근무를 왔을 때 효과를 봤던 기억을 되살렸다. 기차가 멈추면 승객을 그대로 가두고 검문을 하는 방법은 매번 효과를 봤다. 용의자는 도망치기 어렵다. 선로 주변에는 미리 경찰력을 배치해 놓고 있어 설사 객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바로 체포되거나 사살된다.

그렇게 해서 독립군에 여러 번 타격을 입힌 적이 있다. 휴의가 만약 조선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기차역이었다. 완용은 그 즉시 끄나풀을 역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모든 기차에 검문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각 서에 내렸다. 한동안 뜸했던 역은 다시 검문검색으로 살벌해졌다.

그 시각 휴의가 탄 열차는 경성에 도착했다. 완용이 그물을 쳐 놓기 전 용케 빠져나왔다. 사전에 미리 알고 서두른 결과는 아니었다. 예정대로 진행했고 완용이 늦었을 뿐이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독립자금을 준다는 사람과 접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첫날에 이어 둘째 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줄을 대놓고 종로 화랑을 돌아 다녔다. 그림을 사려는 척했다.

골동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미술이 나오면 연락해 달라는 메모도 남겼다. 화랑 주인이나 종업원들은 그가 동경에서 온 골동품 중개상으로 여겼다. 돈 많은 중개상은 곧 종로통에 조용한 소문거리로 등장했다. 그 말은 점례 삼촌에게도 들어갔다. 그는 새로운 중개상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자신말고 조선고미술과 골동품에 관심있는 자라면 본국 박물관 소속 문화재 요원인지도 몰랐다. 기회가 되면 만나겠지. 마쓰유 삼촌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먼저 자신이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 나온 휴의는 오전에 입었던 옷을 오후에 갈아 입었다. 잡히지 않으려면 변장이 필요했다. 중절모를 썼다가 벗었다가 지팡이를 들었다가 우산으로 바꾸기도 했다.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이십대 젊은이였다가 60대 노인의 변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외부 접촉을 최대한 줄였다. 그러나 움직일 때는 확실하게 신분을 세탁했다.
 

본국에서 온 거상의 이미지가 필요할 때는 말끔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한가지 모습보다는 자꾸 바꾸는 것이 신분을 위장하는데도 용이했다. 붉은 넥타이를 매고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각지게 다린 휴의가 밖으로 나섰다. 허리에 찬 비싼 회중시계의 금줄은 상대가 볼 수 있도록 양복의 앞 단추는 채우지 않았다.

잘 닦은 검정 가죽구두는 반짝였고 안경 너머의 눈은 여유가 넘쳤다. 이런 여유때문인지 접선은 지연되고 있었다. 독립군에게 거금을 지원하겠다는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주에서 경성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상해 임정에서는 연락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실패를 염려했다.

사전에 정보가 누설된 것은 아닐까. 만일 발각됐다면 휴의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회의를 거듭한 임정은 일단 본부를 다른 곳으로 급히 옮겼다.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지에는 요인 하나가 가끔 들러 도착 여부를 확인했다. 전화를 할 수 없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휴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곳 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일경의 검문은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됐다. 

작전은 성공했다. 열흘 후에 도착. 휴의는 보낼 암호문을 여러번 확인했으나 그것이 자꾸 뒤로 미뤄지자 거금을 댄다는 독립군 후원자에 대한 의심의 마음도 들었다. 일경이 놓은 덫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의는 몸가짐을 더 조심했다.

그렇다고 숨어서만 지낼 수는 없어 오늘도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출타를 했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줄 댄 접선자가 먼저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휴의는 인사동 고물상들과 일부 안면을 텄다. 

화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도 여러 장 샀다. 받아온 자금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점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일등 화랑의 점원이 점례가 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등 화랑의 주인과는 아직 정식 인사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런데로 소문이지만 흥미잇는 소식을 하나 가지고 왔다.

만주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조선 처녀가 이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데 벌써부터 특등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녀는 만주에 가기 전에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일등 화랑에 취업했고 일본인 주인의 지원 아래 유화 13여 점을 한꺼번에 내놓게 됐다고 했다.

휴의는 직감했다. 만주라는 단어 한마디에 그는 점례를 떠올렸다. 일등 화랑에는 그도 서너 번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가게에는 주인과 병색이 짙은 주인 아내 말고는 점원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방문했을 당시 점례는 심부름을 갔거나 다른 이유 때문으로 부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그래서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멀찍이서 화랑에 들고 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한 끝에 드디어 점례로 추정되는 인물이 화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챙이 큰 모자를 썼고 양옷을 입고 안국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휴의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옆으로 벌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걷는 폼이 점례와 비슷했다. 체형도 그랬다. 보아왔던 점례가 틀림없었다.

점례다. 점례. 속으로 점례를 두어 번 부른 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아직 까지는 동행자 없이 홀로 걷고 있었다. 가다가 누구를 만나 거나 목적지로 불쑥 들어 갈지도 몰랐다. 휴의는 급해 오는 자신을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오고 가는 인파가 많아 그녀를 뒤따르는 것이 어려웠으나 그런 와중에도 휴의는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급하게 몇걸음 걸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워 졌다. 그는 당장 불러 세워 볼까 하다가 멈칫했다. 그녀를 확인하는 일은 뒤로 미뤄졌다. 그녀가 또 다른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녀는 나왔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화랑이 아니라 화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을 나와서 일등 화랑으로 가는 대신 가던 방향으로 계속갔다.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능과 경험으로 휴의는 지금이 말을 걸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겼다. 길을 하나 건너면 이쪽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종로경찰서 주위를 감시하는 일경들의 순찰이 자주 일어난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든 이쯤이라면 잠깐 대화하기에 무난했다.

이름을 불러 확인하기 전에 휴의는 그녀를 앞서 지나갔다. 용의주도한 행동이었다. 어깨를 스칠 때는 옆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10여 걸음 앞선 다음 잠깐 멈춰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늉을 했다.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러면서 눈은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이마를 가린 챙 아래 반짝이는 그녀의 큰 눈을 확인해야 한다. 점례는 다른 누구보다도 눈이 컸다. 호기심 많은 눈으로 그녀는 휴의를 간혹 쳐다봤고 그럴 때마다 휴의는 그녀 눈 속에 담긴 의미의 속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했었다. 그녀가 그런 눈으로 힐끗 휴의를 쳐다봤다. 

그 순간 휴의는 서로 눈을 마주보고 대화했던 그 어느날의 시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런 대화였으리라. 뭘 그렇게 봐, 사람 무안하게. 네 눈속에 들어가고 싶어. 무슨 미친 소리야, 눈 속에 눈이 들어오다니. 그럴 수 있어. 네 눈은 크거든. 같잖은 소리 하지두 마. 무슨 소리, 작고 가는 내 눈은 네 큰 눈 속에 풍덩 빠져. 푸하하하. 마지막 웃음은 점례의 것이었다. 

아니다. 결코 이런 말을 섞은 적 없다. 그는 지금 점례와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다. 꾸며내고 있다. 왜 그때는 이런 멋진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더 근사한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너, 그거 알아? 갑자기 질문을 하자 그녀가 당황했다. 준비하지 못했는데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휴의가 점례는 미웠다.

뭘 말이야. 몰라서 물어. 어. 그 말을 하고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을 때 그녀는 곧잘 이렇게 했다.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게 뭔데, 말해봐. 그게 뭐냐니까?무안하게 꼭 말해야 하니. 어.

휴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그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휴의는 멀찍이서 다시 점례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안보는 척 뒤도 확인했다. 자기 보호 차원에서였고 이것은 미행의 정석이었다. 미행하는 자신을 미행하는 다른 미행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휴의는 이제 그녀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몇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옷차림이 바뀌고 덩치가 달라졌어도 그녀의 걸음걸이를, 그녀에게서 풍기는 그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랑했고 처음으로 맹세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그는 용기를 냈다. 빠르게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인파에 쓸린 것처럼 했으나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점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점례야 내다 휴의다. 멈추지 말고 그냥 가. 휴의는 만사에 안전을 기했다. 만주에서 경성까지 자신을 뒤쫓고 있는 일경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이 순간도 안전하지 몫하다. 그가 잘못돼 점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점례를 확인하고 나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점례를 걱정했다.내가 잡히면 점례도 무사하지 못한다. 휴의는 옷깃을 세우면서 긴장을 감추려고 했다. 몸에 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점례는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걸으면서 점례는 휴의의 존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누구를 급히 피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면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일까. 그는 죽마을에 있지 않고 왜 경성에서 자신의 옆을 따라 걷고 있지. 내가 떠날 때 그는 가족의 생계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징집도 피하고 있었다. 완용처럼 순사의 길을 가지 않는 그를 책망했던 기억에 점례는 그가 순사가 아닌 순사를 피하는 신세라고 짐작했다.

이런 식의 만남과 이런 식의 처지에 대해 점례는 난감했다. 어두운 구석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대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그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불쑥 나타나서 하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급하게 행동할까. 이것이 한 낮의 꿈은 아니겠지. 그녀는 좀 전에 휴의가 그랬던 것처럼 아득한 정신의 기복을 느꼈으나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한시도 잊을 적이 없어. 내 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휴의는 자신이 생각해도 간지러운 말을 꺼냈다는 듯이 좀전의 불안한 기색을 버리고 히죽 웃었다. 그녀도 그렇게 히죽 웃었다. 오매불망 자나깨나 그리워했던 휴의가 아니던가. 그의 목소리, 내다 휴의다, 그 목소리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이제 그것이 이뤄졌다.

위안부 막사에서, 유마 호사카와 함께 하던 장교 숙소에서 만주 청년과 함께했던 하루의 생활에서도 휴의를 잊은 인물로 만들지 않았다. 그 허상이 아닌 실체가 바로 눈앞에 있다. 자신 앞에 나타나서 그가 웃고 있다. 감전이 늦게 온 것일까. 그녀는 온몸이 떨려왔다. 이때는 이성이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기 마련이다.

휴의 오빠, 날 좀 봐. 그녀는 멈춰서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중절모를 들어 올렸다. 틀림없었다. 언제나 내 곁을 맴돌던 그였다. 한시도 품에서 놓친 적이 없는 휴의가 또다시 살짝 웃었다. 그는 점례의 손을 짧게 잡았다 얼른 놓았다. 그 순간에도 쫓기는 자의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점례는 느꼈다. 

오빠, 무슨 일을 해? 점례가 그렇게 묻는 눈으로 쳐다봤다. 난 쫒겨. 위험한 일이야. 그러나 나쁜 일은 아냐. 점례는 뜨금했다. 속으론 독립운동, 뭐 그런 거야? 하고 묻고 싶었으나 그만 두었다. 나 지금 가 봐야해. 너무 오래 있었다. 겨우 오 분도 안 됐어. 긴 시간이야. 점례야, 이렇게 살아서 널 보다니. 몸 조심해. 나 간다. 간다고? 오빠, 그래. 몸 조심하고. 잘 가. 나 저기 화랑에 있어. 휴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인가. 점례는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갔고 휴의는 몸을 돌려 광통교 쪽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점례는 궁금한 것을 속 시원히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나 곧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잘 됐어.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면 모를까 하기 싫어하거나 감추려고 할 때는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것이 순리였다. 그 순간에도 점례는 그렇게 생각했고 끝내 묻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자. 

점례는 그가 스스로 말할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점례는 휴의가 하는 일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일이 있다. 휴의처럼 점례 역시 예전의 시골뜨기 점례가 아니었다. 큰 일이 벌어졌지만 점례는 차분했다. 그녀는 표나지 않게 일상을 계속해 나갔다.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 제일 중요했다. 전시회 준비를 차질없이 하고 유마가 돌아오면 결과를 보여주는 일.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없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작업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다. 곧 유마는 조선땅에 온다. 유마와의 재회가 삶에 어떤 변화를 줄지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닥쳐서야 해결될 것이었고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러고 저러고 생각한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유마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남자면 남고 일본으로 가자면 그러면 된다. 반면 전시회는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삼촌은 이미 심사위원들에게 점례의 그림 여러 점을 보여줬다. 그림의 배경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그림을 조선에서 본다는 것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출품도 전에 그녀는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의 특등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삼촌은 그녀의 일본 유학 생활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론과 실기가 겸비된 점례의 존재는 조선 화랑가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그녀의 그름은 그럴 가치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생활, 그것은 과장된 것이었다. 아니 거짓이었다. 일본에 가본적이 없었다. 점례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유마가 삼촌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썼고 편지를 읽고 삼촌이 그렇게 떠벌이고 다녔다. 정작 삼촌은 점례의 일본 유학에 대해 한 마디로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도쿄미술학교에 다닌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자주 듣다 보니 점례는 자신이 학교 캠퍼스를 거닐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유마 역시 도쿄와 그곳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에 대해 늘 말해왔다. 그것은 일종의 세뇌였는지도 모른다. 점례는 이제 누가 물어보면 유학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것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유학생보다 더 유학생의 실체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있을 때 향수병은 없었어? 점례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묻지 않던 삼촌이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다. 1년 넘게 있으면 고향 생각도 날 법 한데. 안그래? 용케도 잘 견디고 미술수업을 잘 받았어. 기특해서 하는 말이야. 

점례는 그럴 의사가 없었음에도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인생에서 때로는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점례가 굳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고 했는데 그만 끄덕인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가 점례를 일본 유학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점례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했으니 밝을리가 없었다. 삼촌은 더는 묻지 않았다. 이처럼 점례는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 같은 체험을 간혹 했다. 그래서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그것은 때로는 경험이 됐다.

점례는 자신이 나서서 먼저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어보면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삼촌도 편지글 외의 것에는 궁금한 점이 없었다. 부끄러웠으나 그것이 절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유마의 뜻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저 소극적으로 따랐던 것뿐이고. 아무리 그림이 훌륭해도 바탕이 없으면 최고가 될 수 없어. 근본이 중용해. 유마는 그런 말도 했다. 삼촌도 언젠가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녀는 놓았던 붓을 다시 들었다. 상념을 지우는데는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붓을 들었을 때 점례는 세상사를 다 잊었다. 붓 하나로 조선 최고의 자리에 이미 올라와 있는 사람의 태도는 이런 것이어야 했다. 휴의를 만나고 조금 심란했던 마음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평온을 되찾았다. 그것이 점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점례는 벌어진 일에 대해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수년 만에 불쑥 나타난 첫사랑 휴의가 왔음에도 점례는 다음날에 그의 존재를 거의 잊었다. 종일 이 층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완성해야 하는 유화의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느라 휴의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붓을 물에 털어놓은 뒤 기지개를 폈다. 그러면서 아예 휴의가 다시 그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던 지난 생활에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되레 그가 있음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그녀는 오늘 같은 일상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인생이 그녀가 누리는 최고의 순간인지도 몰랐다. 안정적인 생활과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이런 시기가 전 생애에 걸쳐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하는 일마다 일이 척척 진행됐다.

이번 가을 전시회에서 수상하게 되면 그녀는 조선의 최고 여류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다음 해 봄에는 도쿄 전시회에도 참여하고 잇따라 프랑스에도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그녀 계획이라기보다는 유마가 짜 놓은 일정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유마는 서양 화가들 특히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생활에 대해 끊임없는 동경심을 품어왔다.

그래서 어느 날 삼촌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을 때 점례는 놀라지 않았다. 이런 일정을 점례도 고대했다. 그래서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점례는 확고한 인생의 목표가 휴의로 인해 틀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하루만에 휴의의 존재를 잊고도 마음이 편안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에 그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무시하거나 모른 척하기보다는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전시회 전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아니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됐으면 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 이후는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휴의도 동의할 것이다. 시간을 벌면서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는 차후의 일이었다.

점례가 이런 생각에 빠졌을 때 휴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 어디서 같은 약속을 잡지 않았으나 잡은 것보다 더 여유가 생겼다. 점례가 있는 곳을 알았으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 휴의는 거뜬한 걸음으로 세상을 조금은 가진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광통교의 짧은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 저쪽에서 말을 탄 일본 순사들이 다가오는 것도 휴의는 알아채지 못했다. 도망자라는 신분을 잊은 것이다. 그러다가 본능적으로 흠칫 놀랐으나 태연하게 앞을 보고 걸어갔다. 눈길을 피하거나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잡아 세워서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고 해서 당황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설사 무언가를 꼬치꼬치 묻는다고 해도 준비된 말을 술술 불면 될 것이다.

입안으로 그는 여러 질문에 답을 해놓은 상태였다. 휴의는 몸가짐의 동요 없이 다가오는 두 명의 말 탄 순사를 향해 마주 걸었고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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