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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걱정은 말고 그림에만 집중하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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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걱정은 말고 그림에만 집중하라고 당부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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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올라탄 순간 점례는 눈을 감았다. 모든 잡념과 망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보이는 모든 것이 꼴 보기 싫었다. 이렇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을까. 조국에 왔다는 기쁨은 어느새 사라졌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편하게 점례를 대해줄 너른품이 조국에는 없었다. 어찌 이럴 수 있었다. 살았다고 외쳤던 순간은 어디가고 죽었다는 느낌이 가슴을 압박해왔다. 이국만리 타향보다 조선이 더 남의 나라처럼 엉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눈을 더욱 꾹 감았으나 점례는 눈을 뜨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보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혀를 내둘렀으나 경성의 모습을 아니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보는 것들은 모두 처음이다. 그 전에 본 기억이 없다.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저 경성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경성역 말고 경성시내를 본다는 것은 만주 시내를 거니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점례는 감은 눈에 힘을 줄수록 반대로 떠야 한다는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보이는 모든 것을 사진을 찍듯이 뇌에 저장해야 한다. 정으로 찍어 바위에 새겨넣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이곳이 지금부터 내가 생존할 터전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점례는 넘쳐나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번쩍 떴다. 보따리를 안은 소녀들은 벌써 사라졌다. 군인들처럼 나란히 줄선 여자들에 온데간데 없어졌다.

마차안에서 점례는 그런 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경성역과 연결된 끈은 느슨하다 못해 아예 끊어졌다. 점례는 그런 마음으로 눈을 떴다. 점례는 뒤돌아 보았다. 경성역이 눈에 잡혔다. 멀리 오지 않았다. 마차는 불과 100미터 정도도 이동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짧은 시간과 거리 사이에서 점례의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마침내 결단했다.

마차는 저녁 시간과 맞물려 조금 지체되고 있었다. 막 도착한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차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만주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어서 점례는 이곳이 조선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맞다고, 조선이 틀림없다고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점례는 그 생각을 더 오래 했을 것이다.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들과 검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한군데 섞여서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차리면 차를 타지 못한다고 여겼는지 차례를 기다리는 대신 문 쪽을 향해 개미 떼처럼 뭉쳐 있었다. 줄서 있는 군인들과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있던 여자들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마차는 조금씩 움직여 그들 가까이에 다가갔다.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타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타기 위해 앞다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갓이 비뚤어지고 옷고름이 틀어지기도 했다. 여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시간에 쫓겼다.

기차가 떠나고 마차가 속도를 냈다. 커다란 기와지붕을 인 남대문 사이로 짐 마차가 들어가고 있었다. 점례는 그 모든 광경에 반응했다. 한 번 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는 듯이 눈에 힘을 주어 가슴에 담았다. 그래, 이게 조선의 모습이야.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소란스럽지.

저것들의 이름은 무엇이지. 저 큰 대문의 이름은. 그리고 그 사이로 난 좁은 길로 수많은 사람이 이동하는데 그곳은 시장인가. 시장이라면 어떤 시장이지. 천웅의 오일장처럼 이름이 있을 터이고 여기는 더구나 경성이니 그 이름또한 크고 멋지겠지.

점례는 눈에 보이는 것의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세련된 그녀가 촌사람처럼 마구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기 좀 막히네요. 아씨, 저녁 이 시간 남대문은 복새통이요. 언제나 그렇지요. 남대문을 빠져나가도 마찬가지고요. 덕수궁 앞이나 종로통도 그래요.

점례는 마부가 뱉는 말에서 남대문과 덕수궁의 이름을 외웠다. 저게 남대문이고 덕수궁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거기를 지나면 종로통 인가보지. 그래 말로만 듣던 종로통이 어떤지 보자. 그래도 서두르세요. 요금은 넉넉히 드릴테니. 요금이라는 말에 마부는 고삐를 당기더니 인파와 다른 마차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나갔다.

점례는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았다. 앞으로 늘 볼 풍경이지만 지금 이 풍경 만큼 기억될 풍경은 없을 것이다. 경성부청은 아직 멀었나요? 다 왔습니다. 저기 보이네요. 마부가 뒤를 보며 말했다. 서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점례는 알은 체를 하면서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마부를 상대했다. 마부는 세련된 젊은 여성이 말을 받아주자 신이 났는지 경성부민관 앞이 오늘은 좀 한산하네요. 우편국 건물 주변도 그렇고요. 마부는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는 건물을 차례로 말했다.

점례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도착할 때 까지 계속 그렇게 말해 주세요. 내가 깜박 졸수도 있어요. 자고 싶지 않거든요. 예, 예. 아씨 이제 마차가 종로통으로 접어듭니다. 생각보다 막히지 않네요. 종각 건물은 언제봐도 기품이 있어요. 점례는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멋진 한옥식 건물을 지나쳤다. 저기 매달린 종이 보신각 종이렸다. 종소리가 아름답지요. 그래요, 한 번 들어본 사람은 그 소리를 평생 잊지못하지요. 마부가 거들었다.

생각보다 날은 쉽게 저물지 않았다. 아직 거리는 사물의 식별을 뚜렷이 할 만큼 밝았고 어둡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와이엠씨에이 건물입니다. 요새 저기서 시국선언이다 뭐다 해서 시끄러워요. 보이죠. 일본 경찰들이 늘 순찰을 돌아요. 잡혀가면서도 조선사람들은 독립을 외쳐요. 참 끈질기지요.

점례는 그 말에 몸을 움찔했다. 독립이라니. 만주에서 헤어진 그 조선청년이 떠올랐다. 그가 준 주소가 있지. 그래 쪽지는 버렸지만 머릿속에는 주소가 있어. 그도 여기 와이엠씨에이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연설을 할까. 점례는 자신이 청중속에서 그가 열렬하게 연설하는 모양을 지켜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화신백화점이라는 말은 점례의 생각을 거기서 멈추게 했다. 화신백화점은 문을 닫지 않았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또 일부는 그 문으로 나왔다. 마부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모처럼 만난 숙녀분에게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 잡힌듯 했다.

떠드는 것이 자신의 주특기이고 그것을 살리고 있으니 마부는 신바람이 났다. 그럴 때마다 점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아, 그렇군요 라고 화답하면서 마부의 의욕을 복 돋았다.

그러면서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점례는 열심히 듣고 외웠다. 남대문, 덕수궁, 부민관, 경성부청, 종각, 와이엠씨에이 순서대로 외웠고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연결시켰다. 행인을 피해 잠깐 서기도 했으나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해가 지려고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양식 건물과 한옥과 초가 등이 섞여 있는 풍경을 점례는 보고 또 보았다. 길게 일렬로 늘어선 전신주와 전선들이 얽기 설기 섞여 있는 모습에서 점례는 경성이 생각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고 느꼈다.

점례는 이것들을 스케치해보고 싶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치맛자락에 감추었던 손을 꺼내 점례는 그리는 시늉을 해봤다. 사각의 도화지 위에 눈으로 구도를 잡았고 건물을 배치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런 다음 그것을 머리에 넣었고 넣은 것을 복기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쓱쓱 그려 낼 듯 싶었다. 그런 다음 삽화 위에 물감을 덧칠해 나가면 제법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경성의 1940년대 풍경이라는 제목은 평이했지만 그것만큼 어울리는 제목도 없을듯 싶었다. 그래 지금 경성의 풍경을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그려봐야지. 여러장 그리자. 그래서 유마 호사카를 만나면 보여줘야지.

어때 나 많이 늘었지요. 하면 유마가 어떤 대답을 할까. 점례는 그림으로 생각이 옮겨가자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마음에 점 찍은 것을 따로 집어넣은 풍경도 구상해 놓았다. 그것은 유마가 늘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나 보는 것은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화가만이 가질 수 있는 색다른 것이 더해져야 진정한 그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대로 그리는 것에서 무언가를 더 넣어서 독특한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미술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그림을 너는 그릴 수 있어. 유마는 이렇게 점례의 솜씨를 높게 보았다.

그 말을 떠올리고 점례는 머리에 찍힌 것과 찍히지 않은 것을 함께 구상했다. 그 원칙이 지금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삼일문 공원에 도착할 무렵 점례는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우선 편지를 쓰고 남은 공백에 삽화를 곁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곱게 접어 유마에게 보내야 한다.

그래 어서 붙이자. 경성우체국까지는 걸어서 가자. 돌아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이제 목적지에 다와 가지요? 지레 짐작으로 점례는 이렇게 물었고 마부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우체국까지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요. 마차나 전차를 타지 않고요. 날이 좋은 요즘은 걷고 싶다고 점례는 덧붙였다.

한 사십 분 넘게 걸릴걸요. 물론 마차를 타면 지금처럼 십오분 정도면 가고요. 이번의 대답은 작고 차분했다. 마부에게는 힘이 되는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 정도 거리라면 어느 때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익히고 길을 외우는 데는 걷는 것이 최고다.

그녀는 짧은 만주 체류 기간 동한 걸어서 보고 배운 거리를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차만 탔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화실에서 나와 여기까지 걸어온다. 그렇지. 걸으면서 볼 것이다. 느낌도 오겠지. 조선의 땅과 하늘과 가옥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조선의 미래 모습도 그릴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삶에 대한 억척스러움을 놓치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생의 활력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손에 꼭 쥔 편지를 보낸다. 심장이 뛴다. 그녀는 유마가 그립다. 그가 편지를 보고 기뻐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는 나의 편지를 읽기 위해 잠시 피 묻은 손을 놓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전쟁을 잊고 나를 사랑해 줄 것이다. 그 순간 날아온 총알은 나폴레옹의 네잎 클러버처럼 그를 피하고 그는 행운의 편지가 나를 살렸다고 고마워한다. 이제 유마의 목숨은 점례의 손에 달려 있다.

점례는 뛰는 심장을 가만히 두었다. 점례의 편지를 읽는 유마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생동쳤기 때문이다. 유마는 글씨보다 그림을 먼저 볼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틀림없다. 유마는 전쟁터에서 점례의 그림 솜씨를 여러번 칭찬했다. 넌 소질이 있어.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뜨게질이든 그림이든 음식이든. 넌 그 중에서 그림에 특히 뛰어나. 

하나를 가르키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라고 너는 그림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될 거라는 말은 격려의 말이나 칭찬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평가라고 그러니 자신감 있게 치고 나가라고 앴다. 그는 점례의 그림을 놓고 한 번도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보라고 코치는 했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비웃지 않았다.

점례는 유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었다. 그의 모습, 웃음, 몸 그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세상의 어딘가에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자체가 그녀가 지금 살아 있는 존재 이유였다. 자신을 돌봐줬고 구해줬고 살려서 조선 땅에 보내줬다.생명의 은인. 그는 잘 있겠지. 점례가 떠나 온 후 일주일 후에 유마는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자진해서 떠났다. 그곳은 이전의 곳보다 위험하다고 했다. 그는 왜 위험을 자초했지. 군함을 탄다고 했다. 그는 답답한 육지생활보다는 넓은 바다를 누비는 군함이 좋다고 했다. 그래, 그의 가슴에는 악마보다는 낭만이 있어. 그래서 바다로 갔을 거야. 

그래서 안전한 후방 대신 전방을 원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의 깊은 고뇌에 대해 점례는 다 알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이런식으로 이해했다. 그가 먼저 편지를 나에게 보내야해. 그가 간 새로운 전선의 주소는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주소가 찍힌 편지를 삼촌의 화실로 보내야 해. 그렇지. 일주일이라면 일주일 정도만 더 기다리면 받을 수 있을거야. 아무리 바빠도 그는 나에게 편지부터 쓰겠다고 했지. 총알이 빗발치는 현자에서 그가 입에 담배를 물고 편지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자 점례는 웃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점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두세 점의 삽화와 그 위에 칠할 물감의 색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덧칠에 덧칠을 하면 둔중한 느낌이 들거야. 그런 느낌이 오래가지. 난 가벼운건 싫어. 뭐든 오래 남을 수 있는 게 좋아.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금 보기 좋을 겁니다. 주변에 사쿠라를 많이 심었거든요. 한 일주일 정도면 만개한 꽃을 볼 겁니다. 연중 행사이니 한 번 꼭 들러 보세요. 장관이 따로 없어요. 마부는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커다란 회색 건물을 지나칠때 왜 말씀이 없지 생각했어요. 깜박했어요. 저도 가끔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가 있거든요. 마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오른손에 잡은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두워져 있었으나 저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차를 돌리면서도 마부는 입을 닫지 않았다. 저쪽 위로는 될 수 있으면 가지 마세요. 아가씨.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놈들이 잡아챌지 몰라요. 요즘은 아무나 잡아들여요. 제 눈에 의심스럽다 싶으면 마구 끌고 가요. 왜놈들의 행패가 여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가씨는 애국을 부르짖다가 끌려가서 몸을 망치지 말아요.

그는 떠나가면서 조선놈들 중에 일본 앞잡이가 많으니 조심하라면서 마차의 고삐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점례가 멈칫했다. 그러다가 자신은 잘못을 저질러 쫓기고 있는 몸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순간 일었다. 일주일 후면 창경원 벚꽃이 볼 만할 겁니다. 동물들도 많고요. 종로서 대신 차라리 거길 가세요.

글쎄 꽃이 지기전에 그곳에 갈 시간이 있을까. 꽃구경이라면 나쁠 게 없다. 점례는 시간이 되면 창경원을 가야지 이렇게 가야할 곳을 꼽아 놓았다. 그러다가 고향의 완용이 일본 순사인 것을 기억해 내고는 혹시 가지말라는 종로서에 그가 근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은 손님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 넉넉하게 요금을 지불했다. 손에 들린 돈을 보면서 마부는 채찍은 놓지 않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수고의 대가치고는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부가 떠나자 점례는 배가 고팠다. 가마솥을 밖에 걸고 해장국을 끓이는 주점에서 배부터 채워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은 화랑을 찾아 들었다. 미쓰유 삼촌을 먼저 만나야 한다. 어두워서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해야 일의 순서가 맞다. 그녀는 아무 화랑이나 찾아 들었다. 화랑 간판은 점례의 눈에 쉽게 띄었고 점례가 들어간 화랑 옆에도 화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 간판이 보였다.

점례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한 발 들어섰다. 그리고는 주인장을 찾았다. 두리번거리지 않는 침착한 태도였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례는 한 번 더 주인장을 불렀다.그러면서 눈은 조용히 좌우를 살폈다. 출입문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의 빈 공간에는 몇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위에는 일장기가 눈에 띄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서 너개의 그림이 포개져 세워져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 유화였다. 한눈에 보아도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팔기 위한 완성품이었다. 표구된 것도 있고 아직 그러기를 기다리는 작품도 있었다. 조선에서 그림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점례는 한 발 더 들어설까, 아니면 돌아서 나갈까 망설였다.

그때 안에서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례는 미쓰유 삼촌의 가계를 찾는다는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래도 되는지 순간 어색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눈짓으로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점례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어 마쓰이 삼촌의 화랑이 맞느냐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힐끗 보더니 안색을 바꾸고 표정을 부드럽게 지었다. 마쓰이 삼촌을 찾는다고요. 유마가 내 조카요. 그럼 당신은 점례 마사코? 내가 그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제대로 찾아왔으니 이제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그는 점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면서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점례는 어렵지 않게 삼촌을 찾은 것이 반가워 웃음 지으며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맞아요. 제가 점례 마사코에요. 전선의 유마가 보내서 왔어요. 늦은 시간 실례가 될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점례는 바로 앞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맞췄다. 삼촌이라고 해서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을 넘긴 초로의 사내로 생각했으나 3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젊은 남자였다. 체구는 작았으나 자기 관리를 하는지 약하지 않고 단단해 보였다.

점례의 눈을 보면서 그는 유마가 말한 그 여자가 이 여자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했다. 그는 한 번 더 눈여겨보았으나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와 서양식 옷을 입은 점례를 보고 사내는 점례가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유마가 가까이에 두고 있을 만한 기품이 있는 조선 여자였다.

위에는 흰옷 아래는 검정 치마의 한복 차림이 아닌 양식 옷을 입을 세련된 조선 여자를 삼촌은 반갑게 맞았다. 잘왔어요. 여행중에 피곤하지는 않았어요. 아, 그것보다 내 화랑이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래뵈도 조선최고의 화랑이지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자랑스럽다는 듯 화랑 주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대일본조선일등화랑이라는 자신의 가게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다 마다요. 저도 나중에 이런 화랑 있으면 좋겠어요. 마쓰유 삼촌이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유마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을거요. 아니, 그보다도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은 점례 아가씨가 이 화랑의 주인이 셈이지요. 그가 이번에는 미소대신 호탕하게 웃었다. 

점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정도 화랑이면 이름에 걸맞게 조선에서 최고가는 화랑이라고 화답했다. 그 때 배에서 꼬드륵 소리가 났다. 점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정 구두를 내려다봤다. 저녁은 했어요? 그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점례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안을 향해 소리쳤다. 

나나미...저녁은? 그 소리를 듣고 안에서 작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요. 이제 하려고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어 그럼 됐어. 우리 나가서 먹읍시다. 시장기는 참으면 안되요. 사정을 이해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못했어요. 먹고 오려다 삼촌을 먼저 뵙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아, 그런 말 마시오. 유마가 보낸 사람은 유마와 마찬가지요. 나는 조카를 형님 만큼이나 사랑해요. 그 말은 진심인 것처럼 점례의 귀에 들어왔다. 

배가 푹 꺼졌네요. 하하하. 그가 호탕한 웃음을 이어갔다. 삼촌은 어서 나가자며 점례를 등 떠밀었다. 당신도 빨리 나와. 이렇게 빨리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준비를 했을 텐데, 지난 번 편지에서 유마가 도착날짜를 말하지 않았어요. 만주 사정이 워낙 좋지 않거든요. 하루 연착하기도 했어요. 점례는 유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점례 마사코. 어서 갑시다. 안사람은 원래 늦어요. 우리가 가면 알아서 찾아오니 먼저 갑시다. 창씨개명한 이름에 삼촌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점례 마사코를 부르며 앞장섰다. 유마는 조선에 가면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이 좋다며 점례 이름 뒤에 마사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줬다. 

삼촌은 애국심이 강해. 그래설 점례보다는 마사코라는 이름을 자주 부를 거야. 유마는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새삼 그가 고마웠다. 점례는 앞서가는 삼촌을 불렀다. 아직 뒤따라오는 숙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촌은 괜찮다며 알아서 오든지 아니면 혼자 먹을 거라고 했다. 

가면서 삼촌은 아내가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몸이 아파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고 지금쯤 겨우 일어나 앉아 있을 거라고 했다. 국밥집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자주 가는 식당인지 마쓰유가 들어설 때 주모는 환하게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유마는 묻지도 않고 국밥 둘을 주몬했다. 조센징들은 아니 조선인들은 국밥을 좋아하지. 안그래요? 삼촌이 조센징이라고 말했다가 얼른 거둬들이고는 점례의 눈치를 살폈다. 점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못들은 척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은 맛있었다. 배고픈 점례는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시장했지. 더 시킬까. 아니 됐어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점례는 입을 닦으면서 이제 밥을 먹었으니 묵을 곳에 대해 걱정했다.

유마는 삼촌이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그 말을 꺼내기가 어색했다. 먼저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가 어떤 제의를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이 맞았다. 눈치를 챈 삼촌이 입을 열었다. 삼촌은 이 층에 방이 세 개나 있으니 당분간 거기에 머물라고 했다. 유마가 편지에 미리 말해 둔 모양이다. 그는 거기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편이 있으라고 했다. 고는 고향에 갈때까지는 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고향이라니. 점례는 죽마을에 갈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도 뵙고 휴의나 완용이나 여순의 안부도 확인하고 싶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떠나 올 때도 유마가 올 동안은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점례는 다짐했고 유마도 그것이 좋다고 동의했다. 실제로 만나본 삼촌은 그런 결심에 힘을 주었다.  같이 지낼 수 있다고 판단이 들었다. 

점례는 삼촌 곁에 있으면서 화풍을 익히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것은 유마가 바라는 바였다. 삼촌이 알려줄 거야. 그림도 인생도. 그는 이런 말로 삼촌에 대한 신뢰를 보였었다. 돈이라면. 점례는 유마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나 생활비는 그림을 팔거나 화실의 자질구레한 일을 돕고 가사를 하면서 보충하면 덜 미안하겠다 싶었다. 유마는 돈 걱정은 절대 하지 말하고 삼촌도 그런 말은 입에 꺼내지 않을테니 그림에 집중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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