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렁거리던 개 한 마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여순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던 그 개는 피 묻은 혀로 쓰러진 여순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뜯어 먹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그 개는 이미 굶주림을 벗어난 개였기 때문에 먹기보다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숨 쉬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을 개는 알고 있었다. 실눈을 어렵게 뜨고 여순은 또한번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몸의 감각, 자신을 핥는 끈적한 개의 혀를 느꼈다. 혀가 다가올때 마다 개는 거친 숨소리를 냈고 여순은 그 숨소리를 고스란히 개에게 돌려 주었다. 개도 여순도 서로 살아 있음에 안도 하면서 서로를 의지했다. 전쟁터에서는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았다.
여순이 생과 사에서 헤매고 있을 때 말수는 강한 정신으로 그런 혼란한 상활을 겪지 않았다. 그는 삶과 죽음을 헷갈려 하지 않았다. 폭발이 자기 바로 옆에서 터져 잠깐 정신을 잃을지언정 깨어나면 살아있음을 깨지 못하면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방금 전의 엄청난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몸을 거기서 그대로 둔채 앞으로 혹은 뒤로 가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빠르다고 해서 혹은 느리가도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아서 전쟁을 기억했다. 말수는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자 통영에서 뱃놀이 하던 버릇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그는 갑자기 윗옷을 위로 끌어 올려 배를 훤하게 드러낸 것이다. 시원한 바람이 마른 배를 슬쩍 치고 지나갔다. 땀 냄새가 뜨거운 열기에 섞여 훅하고 끼쳐 올라왔다.
그래, 이 냄새야. 역겹지만 반가운 나의 냄새. 말수는 그 냄새를 기억하고는 히죽 히죽 웃었다. 거울이 있다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자신이 잘 웃는지 거울을 알고 있다. 말수는 그런 기분으로 몸이 마를 때 느끼는 서늘한 기운을 동시에 느꼈다. 말수는 이제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삶은 운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면서 총알이든 폭탄이든 그 무엇이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구덩이가 파여 흙이 흘러 내니는 그 자리에서 아예 조금 눈을 붙이기로 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고 일어나야 맨정신이 올 것이고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판단이 설 것이다. 간밤의 불야성은 잊어 버리자, 그는 누워서 등 밑에 있는 작은 돌을 골라냈다. 자세가 잡혔고 금세 눈은 감겼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다시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발음이 산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축을 흔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 말수의 몸은 생기가 돌았다. 짧은 수면이 그에게 다시 삶의 의욕을 방아쇠처럼 당겼다.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굉음이 터졌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비행기가 맞아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장기가 선명한 비행기 한 대가 꼬리에 연기를 물었다. 경험상으로 저 정도면 추락이 분명했다. 빙글빙글 돌다 급하게 떨어질 것이다. 말수는 그 지점을 눈으로 따라갔다. 산으로 향하던 비행기는 기수를 바다로 급하게 바꿨다.
아직은 계기판이 일부 작동하고 있었다. 조종사는 살아서 자기가 움직일수 있는 힘으로 비행기를 마지막까지 조종하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겠지. 얼굴은 일그러지고 마지막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만 남았겠지. 자신이 죽는지 뭐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돌진하겠지.
기수를 바꾼 곳에는 커다란 군함 두 척이 섬 쪽으로 무수한 포를 발사해댔다. 비행기는 곧장 거기를 조준했다. 애초 목적지가 그곳이라는 듯이 한치의 망설임없이 배의 중앙부를 향해 급하게 떨어졌다. 비행기가 목표물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군함은 화염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붉은 것과 검은 것이 섞여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말수는 다시 누웠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를 포처럼 맞은 군함의 갑판위는 피바다가 따로 없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말수는 미군 군함에는 의사가 몇 명이나 타고 있을지 궁금했다. 적어도 저 크기라면 두 세명은 있어야 겠지. 간호원도 그 정도가 필요하고. 그래도 죽음을 막기는 어려울 거야. 살릴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는 의사의 마음은 착잡하겠지. 자신 직접 겪어 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니 말수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열기로 뜨거운 갑판 위에서 붕대를 들고 뛰던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까.
그때처럼 똑같이 사이렌이 울리고 의사들이 분주하고 비명소리는 거친 파도를 압도하겠지. 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안돼. 제발 그러지들 말라고. 그때 또 한 대의 비행기가 고사포에 맞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이번에도 일본기다. 일장기가 선명할 정도로 바로 말수가 있는 산의 중턱에서 아래로 급강하 하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수는 그 광경을 마치 미술품 감상하듯이 바라 보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 누구라도 있다면 같이 놀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모습에 감탄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했다. 저것은 실화인가. 순간포착이 가능하다면 비행기의 밑면에 붙은 화염이 위로 치솟는 저 모습은 분명 잡지에 실린 만한하다.
말수는 조종사를 생각했다. 죽을 맛이겠지. 살아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그래서 두 번다시 겪고 싶지 않아도 중얼거리겠지. 그 순간에도 이런 여유가 있는 자신이 참으로 멋지다고 스스로에게 칭찬 세례를 퍼붓겠지. 그래 그래야하고 말고. 지금 이 순간 자신말고 자신을 추어 올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편대장일까. 노, 그는 조금 전에 자신보다 먼저 추락했다.
말수는 즐기고 있다. 아래서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일종의 연출되지 않은 극적인 순간을 즐길 권리가 나에게는 있다. 이것은 전쟁에서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었다. 말수는 죽음의 순간이 뜨겁지 않았으면 했다. 차지도 않고 그저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땀을 식히는 그런 상태라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이런 공상에 빠진 나를 야만이라고 불러도 좋다. 야만인의 상태로 말수는 바지를 까고 그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그리고 수습할 생각도 없이 추락하는 비행기의 궤적을 좇았다. 비행기가 배와 접촉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어, 내가 가미카제 특공대를 직접 보네. 그것도 두 차례나. 살아서 나가면 인터뷰 해야지.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사이판에서 미군이 격추한 일제 비행기가 자신을 맞춘 군함을 향해 돌진한 그 장면을 나 처럼 실감나게 연출할 사람이 있을까.
말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사의 최후는 저래야 하는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비굴함은 그들에게 없었다. 포로가 돼서 조국을 배신하거나 구차한 삶을 살지 않는다. 어디서 저런 정신이 오는가. 한 젊은이의 의식을 완전히 사로 잡는 것이 무엇인지 말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들에게 하찮은 것은 죽음이었다. 삶은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 앞으로 달려가는 용기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침을 거칠게 뱉으며 말수는 씩씩거렸다. 그나저나 여순은 안전할까. 여순에게 생각이 미치자 말수는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음은 빨라져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왜, 그 생각이 이제야 났지? 그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여순이야. 그는 순간이동이라도 하듯이 어느 새 여순이 걸었던 마을 앞길에 와 있었다. 그는 어딘지로 모르면서 계속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은 처참했다.
보도 블럭이 길을 가로막았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성당도 파괴됐다. 십자가가 깨진 창문 사이로 삐죽 솟아 나왔다. 여순이 있다면 아마도 저 근방일 것이다. 그래, 그녀는 성당문을 열고는 신부님을 찾았을 것이다. 간호사가 접니다. 내가 부상병을 도울게요. 그녀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예상대로 무너진 성당의 한쪽에는 그녀가 오고 나서 부상병들로 북적였다. 최종 집결지인 것처럼 꽉 들어찬 병사들 사이로 홀로 누비는 그녀가 미군함으로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로 보였다. 말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안보여, 아직 그녀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어. 말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팔뚝에 찬 십자가 완장을 위로 끌어 올렸다. 행여나 적이든 아군이든 보면 쏘지 말고 가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라는 의미였다.
쓰러진 시체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말수는 코를 막았다. 참기 힘들었다. 이런 냄새가 있을까. 지옥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 때문에 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상병의 섞어가는 살에서 나는 보다 더 지독했다. 그는 발로 채이는 시체들을 애써 외면했다.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 없었다. 산 자들은 이미 떠났고 죽은자들만이 제세상인 것처럼 누워있을 뿐이었다.
말수는 종종 걸음을 치다다 개 한 마리가 서성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충분히 배부른 개는 말수를 보자 경계하기보다는 천천히 저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짖는 것도 먹는 것도 다 귀찮다는 듯이 몇 걸음 걷다가 배를 드러내고 벌렁 드러누웠다. 불룩한 배가 숨 쉴 때마다 위로 아래로 흔들렸다.
거대한 군함이 엄청난 파도에 이리저리 쓸리는 것처럼 위로 아래로 헐떡였다. 그 옆에 여순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직 개의 침이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여순의 뺨을 흔들었다. 여순아, 내다. 내가 왔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말수가 흔드는 손의 감촉을 느꼈다. 말수는 수통에 남았는 마지막 물을 얼굴에 조금 부었다. 그리고 손으로 마사지 하듯이 문질렀다. 말수의 손길이 지나간 자국은 땟국이 벗겨져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말수는 일단 부서진 성당의 잔해 쪽으로 그녀를 옮기기 위해 최단 거리가 어디인지 살폈다. 움직이는 동작은 위험했다. 그래서 빨리 가야 한다.
서두른 탓인지 그는 성당의 부서진 구석으로 여순을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곳에서 보니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이 문틈으로 보였다. 말수는 일단 자신이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여순을 흔들어 깨웠다.
가자, 저기 들어가 있으면 괜찮다. 그래야 산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기적처럼 사람 하나 지나갈 통로가 생겼다. 그 통로 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지하실은 깊고 넓었다. 껌껌한 지하공간에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여순을 뉘어 놓고 지하실에서 다시 올라온 말수는 출입문 쪽을 일부러 허무러 뜨렸다. 벽돌을 하나씩 빼냈다. 지나왔던 공간은 말수가 뒤로 물러나자 작은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이제 출입구는 봉쇄됐다. 추격자들은 이곳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멋지게 따돌렸다. 이곳이라면 여러날 숨어 있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꼬박 하루를 잤어. 이제 괜찮아. 눈을 깜박이며 여순이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디서 비처 드는지 한 줄기 가려린 빛이 여순의 얼굴에 머물렀다. 지금은 낮이다. 말수는 귀를 기울였다. 주변은 조용했다. 아니 적막했다. 애초에 소리가 없는 것과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고요였다. 끔찍한 소음은 어디로 갔나.
이것이 가능한가. 꿈일 거야, 동화속 이야기겠지. 그러나 꿈도 동화도 아닌 현실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곳에 냄새가 스며 들었다. 약하게나마 다시 후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촛농이 떨어져 내릴 때 나는 그런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절망로 위에서 촛농같은 물이 한 두 방울씩 아래로 흘렀다.
그 냄새를 여순은 기억하고 있다. 접골 아주머니가 춤을 출 때면 박자를 맞추듯이 촛불도 일렁였다. 눈물처럼 흘러 내리는 촛농에서는 싫지 않은 냄새가 났다. 바로 그 냄새였다. 익숙한 것에 여순은 용기를 냈다. 그 덕분인지 시각도 점차 돌아왔다. 여순은 눈에 힘을 주고 이물질을 손으로 빼내려는 듯 손에 눈을 대고 여러 번 깜박임을 계속했다.
그것 때문인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여순의 눈앞에 과연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밤하늘의 은하수가 새벽녘에 잠을 자기 위해 떠나는 행위였다. 물체는 선명해 지고 있다. 다가온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나중에는 두 명이 그 다음에는 여러명이 등장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춤을 추는 사람은 여러 명이 아닌 혼자였다. 착각이었다. 혼자서 이리저리 홀을 휘젓고 다녔다. 여순은 넋 놓고 그 모습을 응시했다. 누군가. 누가 저렇게 멋진 폼으로 춤을 추는가. 여순은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 까지는 아직 허용되지 않았다. 마음은 여러번 박수를 쳤지만 지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대는 사라졌다. 댄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음악은 계속 울리고 있다. 여순은 박수가 아닌 머리를 감싸쥐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순이 어둡고 긴 터널의 끝을 통과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빛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무르자 여순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지상의 어디에도 없는 안전한 곳을 발견한 기쁨에 몸은 들떠 올랐다. 그것은 살았다는 원초적인 안정감이었다.
마치 봄의 햇살이 푸른 들판을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그런 모습을 따라가면서 정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바싹 말라 타는 여름날의 갈라진 논처럼 세로의 줄이 여기저기 얽혀 있어 말을 하려고 입을 떼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물을. 물 좀 줘요. 물 말이에요. 여순이 할 수 있는 간청의 말은 여기까지 였다. 그 말을 하고 나자 갈라진 입술에서 세 갈래로 피가 맺혔다. 나야, 여순아, 말수, 네가 찾는 말수가 왔다고. 말수는 이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네가 찾는 말수라니. 정말로 여순은 말수를 애타게 찾았을까.
말수의 부드러운 음성은 이어졌다. 내가 왔다고 말수가 왔다고. 마치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부르면서 말수는 여순을 일으켜 안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말수의 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살았다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촛불이 흔들렸다. 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기가 드나들고 있었다. 말수는 촛농이 그녀 주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초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불빛이 여순의 얼굴을 한 번 더 가볍게 스쳤다.
혈색이 좋다. 희지 않고 촛불처럼 붉다.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경험으로 말수는 그것을 알았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그는 자신이 이제야 철들고 있다고 느꼈다.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여겼다. 툭 하면 욕설을 하고 침을 뱉던 노무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이제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완전한 남자를 말수는 보았다.
그것은 너무 늦게 왔지만 지금이라도 왔으니 얼마나 좋은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되레 나빠졌을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운명을 따랐고 운 좋게도 그 운명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다. 안도감에 말수는 울컥했다. 그녀를 놔두고 혼자 산으로 도망친 것이 괴로웠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홀로 둘 수없어.이렇게 작고 여린 여순을 내버려 두다니. 미안해 여순아, 다신 그러지 않을 게.
지금 그는 한 여자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다. 용서를 빌고 있다. 느닷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파도처럼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마침 장소도 그러기에 적합한 예배당이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하나의 질긴 끈으로 묶여 있었다. 까만 밤의 어둠은 지나갈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월의 달콤함 뿐이다. 말수는 온기가 차오르는 여순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때 그녀는 작은 제단 앞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았다. 왜 그가 나를 쳐다보는가. 여순은 살아 있는 예수가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살아 있는 진짜 예수였다. 성당 안에 가짜가 아닌 진짜 예수가 있었다. 예수는 엄청한 소란이 아닌 정적 속에서 왔다. 그가 여기서 부활했다. 못이 박힐 때 지었던 험상궂은 표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순은 자신에게는 예수를 구원할 힘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난 그럴 힘이 없어. 내 꼬라지를 보라고. 옷은 찢어지고 얼굴은 상처 투성이야. 잘 차려입어야지. 행색도 바르게 하고. 그래야 구원을 하지. 그래, 난 그럴 상태가 못돼. 한마디로 이 광경을 즐길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모든 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갔다.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그녀에게 없었다. 이곳은 주인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고 자신에게 구원을 바랐던 바로 그 예수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내민 손을 잡아야 한다. 여순은 또 한 번 안간힘을 썼다. 의식의 저편에서 조금 더 힘을 써보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고 뒤를 밀었다. 그러나 미는 힘은 약했다. 그녀 스스로 바닥을 치고 있는 몸 상태를 끌어 올려야 한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벽을 집고 일어서려고 용을 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였다. 의아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다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달라질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은 부러진 돛 때문이 아니다. 항해사는 필요 없다. 그 정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 여순은 쓰러진 것을 어깨에 매고 무엇을 매달기에 좋을 만큼 똑바로 세웠다. 돛이 서자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배가 움직였다.
그 순간 여순은 정신의 돌아옴을 느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말수인 것도 알아차렸다. 말짱한 상태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괜찮다. 괜찮아. 봐, 손도 움직이잖아. 손을 꼽아 숫자를 셀수도 있다고. 더구나 이곳은 성당이고 안전하기도 하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좋다. 소리로 깨우칠 것도 없으니. 어둠이 더 깊은 곳으로 잡아끌지도 않았다. 도와달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듯이 애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렇지, 그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어. 내가 해야지. 그래 무엇을 할까.
여순은 말수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잡은 손의 온기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말수를 미워했다가도 그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마음 때문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말수를 보고 맨 처음 마음이 움직여서 보인 행동은 눈물이었다.
눈물은 용서를 의미했다. 이제야 왔느냐는 타박이 아니었다. 고마움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 여순은 이제 그 어떤 것이 와서 마음을 흔들어도 중심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말수도 진실이었고 여순도 진실이었다. 진실앞에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둘은 서로에게 존재가 선명한 사람이 되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두 사람에게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이런 자신은 자신을 끝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자도 막아낼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러나 며칠을 굶주인 여순은 다시 정신줄을 놓았다. 매달린 예수가 자신을 또다시 내려다보는 눈길과 마주쳤고 이어서 어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여순은 말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을 누구한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다시 찾아왔다. 지금까지는 잘 막아냈으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이것이 동화 속 이야기라면 꿈에서처럼 깨고 나면 지나가겠지.
말수는 안은 여순의 두 팔을 내려 놓지 않았다. 그래, 이 두 팔. 나는 결코 두 팔을 내려 놓지 않을 거야. 두 팔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지 않을 거야. 두 팔을 옆으로 벌리지도 않을 거야. 말수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여순을 세게 안아다. 아, 그 모습. 나는 보았지. 두 팔을 벌리고 우뚝 솟은 바위를 향해 몸을 던지는 많은 사람들. 그때 바위 주위에는 흰 포말이 성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어.
그것은 전투기의 돌진과는 다른 것이었다. 살 수 있는데도 그러는 것은 어떤 집단 최면 말고는 이해될 수 없었다. 번지점프에 나선 연예인들처럼 그들은 반자이, 덴노 반자이, 반자이 하면서 쉴 새 없이 낙하했다. 떨어져 내리는 것은 생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꽃잎도 하물며 그럴진대 사람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뛰어내리고 있다. 그것도 수도 없이. 수도 없단 말이야.
달려가서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그러나 말수는 그들을 돌봐줘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오금이 저려오자 말수는 소변을 참기 위해 다리를 꼬았다. 저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다. 말수는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그들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기까지 했으나 헛수고 였다.
군복입은 사람과 치마 잎은 여자와 우는 아이들이 지르던 불과 하루전의 그 함성에 대해 말수는 오만 인상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빨리 잊을 수 있을지 머리를 가로젓기만 했다. 여순은 살아날 것이다. 그가 돌봐야 할 대상은 뚜렷했다. 봄의 꽃처럼 낙하한 사람들이 아닌 온기가 있는 여순이었다.
그날 밤 말수는 흰 포말 위에 붉은 피가 일렁이는 절벽이 벌떡 일어서서는 자신을 덮쳐 오는 꿈을 꾸었다. 절벽처럼 벌떡 일어난 그는 이마가 온전한지 손으로 집어 보았다. 그만큼 꿈이 현실적이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꿈을 꿔 본 사람들은 안다. 제일 먼저 깨어나서 하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행이 피 대신 땀이 흥건하다. 괜찮아, 말수는 그런 말을 입으로 되풀이하면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을 위해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경성에 발을 디딘 점례는 뛰는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고향도 이런 고향이 없었다. 지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점례는 이제 자신은 살았다는 것에 확실한 안도감을 느꼈다.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왔으니 제나라에 온 것이다. 지나온 것은 고통마저 기꺼이 받아드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점례는 기차역에서 내린 사람답게 일단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대했던 경성역이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들고 나는 사람들은 그때처럼 분주했고 하늘은 더 맑고 푸근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가운데 아는 사람의 얼굴은 없었다. 어디에도 자신의 손가방을 받아 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혹시나 기다렸던 사람을 발견하고 나에게 달려오지 않을까, 그녀는 그런 설레는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점례는 혹시 마중 나온 사람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부러 몇 차례 더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미리 나와 기다리지 않은 상대에게 보여주는 그런 언찮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나를 맞이하는 그의 태도가 불만인 것처럼 점례는 반짝이는 가죽구두의 끝으로 땅을 몇 번 차기도 했다. 그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만족감이 듬뿍 묻어 있었다.
경성에 도착한 기분은 이런 것이었다. 새로운 기분,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그런 산뜻한 기분이 점례의 전신으로 봄햇살처럼 파고들었다. 그녀는 삼 년 전의 점례가 아니었다.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품고 겁에 질려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무언가 다가올 공포에 질려 처분만 기다리던 점례는 거기에 없었다.
세련된 옷차림으로 가죽 가방 하나를 들고 그녀가 광장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렀다. 방금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행세로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도 이제는 싫었다. 도착한 기분을 다 냈으니 내 일을 해야 한다. 내 일, 그래 내일이 있어. 남이아닌 내가 주도하는 내일 말이야.
그녀는 외국물을 먹고 경성에 막 도착해 누군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모던 걸의 발자국을 뽐냈다. 멀리서도 그녀가 제법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잊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났다는 듯이 빠르게 몸을 재촉했다. 그래, 삼촌을 찾아 가야지. 유마 삼촌.
곧 해가 질 것이다. 아무리 제나라라고 해도 여자 혼자서 밤을 맞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여관에 들면서 허물없이 혼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해지기 전에 삼촌을 만나 유마의 말을 전해야 한다. 전선의 유마 대장이 보낸 점례 입니다. 이렇게 그래 이렇게, 나를 소개해야지. 첫인상이 중요하잖아. 유마에게 어울리는 그런 여자로 인정받아야 해. 점례는 서둘렀다. 약속에 늦은 것처럼 서둘렀다. 유마 생각이 한 번 더 머리를 스쳐 지나가자 다른 것은 시시해졌다.
그녀가 광장을 질러 종로 쪽으로 방향을 잡을 때 저쪽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군용트럭이 줄지어 들어왔다. 점례는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추 보아 십여 대였는데 그곳에는 짐대신 군인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으로는 막 도착한 트럭에서 수십 명의 여자 애들이 내리고 있었다.
타는 것도 처음이었고 내리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들의 행동은 굼뜨고 어색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나 되레 그 행동이 위태롭게 보였다.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그대로였다. 점례는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구 떨려와서 모던 걸의 걸음걸이는 어느 새 사라졌다. 그녀는 구멍이 있다면 숨어드는 쥐처럼 눈치를 살폈다.
짜증 섞인 호각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군홧발 소리가 뒤엉켰다. 겨우 하차한 그녀들은 트럭의 한쪽에 줄지어 섰다. 그때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안고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눈과 점례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뜨거운 불기둥이 갑자기 가슴을 치고 달아났다. 숨이 꽉 막혀왔고 심장의 고동이 기차 연기처럼 솟구쳐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이 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만들고 있었다. 보따리, 그 보따리를 저 소녀가 안고 있다. 저 소녀는 나인가, 아닌가.
현기증이 심해진 그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잠시 서서 머리에 손을 댔다. 이마에서 불이 났다.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깊은 바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할 수 없어.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 있지 않아. 그녀는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어찌할 줄 몰라 가방을 잡지 않은 남은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서너 번 쳤다. 그러자 막혔던 것이 뚫렸는지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줄 선 여자들이 대오를 유지하면서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저쪽에서도 십여 명의 젊은 여자들이 마주 와서 합쳐졌다. 도합 30여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점례는 눈을 감았다. 이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경성역에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억은 줄기차게 살아났다.
사라질 줄 알았는데 기억을 살린 것은 만주가 아닌 경성이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데 마치 그런 처지에 몰린 것처럼 점례는 체념의 시선을 그녀들에게서 서둘러 거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누구도 내가 아닌 그 누구도 그녀들이 어디로 가든 상관할 수 없을거야. 낙담한 그녀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광장에 우두꺼니 서 있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들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쾌한 기분은 불쾌한 일들로 인해 급하게 식었다. 짧은 도취의 순간을 뒤로 하고 점례는 종로 3가를 조용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