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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6:01 (금)
청년의 메모를 보고 그는 잊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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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메모를 보고 그는 잊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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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그가 입을 열었다. 휴의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 때문일 것이다. 그를 믿어서가 아니다. 그저 죽기전에 해본 말인지도 몰랐다.

나는 조선사람이오. 나도 그렇소. 내 나이 젊소. 나도 그렇소. 날 따라 하는 것이오? 놀리기로 작정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오. 아니오. 놀리려는 의도가 없었소.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 않소? 당신과 같은 조선사람인 것과 나이 젊은 것은 당신이나 나나 인정하는 바 아니오?

간단한 몇 마디 말이었으나 조선인 둘이 좁은 공간에 있으니 조금은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조선청년은 자기를 무안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휴의는 청년이 입을 열자 심문자의 위치가 아니라 비슷한 나이 또래가 겪는 고민 거리를 서도 상담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청년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는 유언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집중했다. 휴의는 그가 말 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가급적 질문을 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인내심이 필요했으나 어차피 휴의는 달리 할 일도 없었고 오늘 저녁은 이 사람과 함께 대화하고 싶은 욕구에 빠져들었다.

내일이면 부대장이 온다. 부대장이 오면 이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모른다. 그가 오기전에 자신이 신병을 처리하고 싶었다. 풀어주든지 아니면 가두든지 그도 아니면 처형이라는 극형을 내리든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려고 했다. 

이곳은 독립운동 하기에 최적지요. 여기서 나는 내 안에 가득찬 독립의 의지를 느끼고 있소. 선혈들의 기운이 내게로 오는데 그것을 거부할 힘이 나에게는 없는 것이오. 몸속의 기운이 펄펄 끓어 오른단 말이오, 당신은 그것을 못느끼오. 다만 내가 아쉬워 하는 것은 잡혀서 그 일을 더 는 할 수 없다는 것이오. 

청년은 그 말을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렇게 긴 말을 해도 이상이 없는 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입술에 침을 묻혔다. 마른 침이 꿀꺽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괜찮겠다 싶었던지 더 많은 말들을 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끊기고 휴의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질문도 해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휴의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해 못할 부분에서는 그냥 넘어가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청년의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청년의 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나라 잃은 백성이 해야 할 일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당연한 것에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며 이는 망국인의 당연한 권리요 의무라고 했다. 거꾸로 우리가 일본을 흡수했다면 일본 국민역시 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을 거라며 조선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거듭말했다.

그것이 죽음보다 더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청년은 잠시 휴의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이내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가는 일이라고 했다. 독립도 좋고 조선인의 기개를 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살고 나서야 독립도 있고 해방도 있는 것 아니냐고 휴의는 또 끼어들었다.

이 대목에서 조선청년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자기 생명이 소중한 것을 지금 처음 느낀 것이라도 하듯이 그래서 분하다는 것이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잡혀서 죽게 됐으니 오죽 분하고 원통하겠느냐고 내 심정은 지금 복장이 터져 스스로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누구나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요. 나는 독립을 당신은 독립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소. 나는 내 신념에 따라 하는데 당신은 당신 신념에 따라 하는 일이오? 조선청년이 휴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 신념 말이오? 휴의는 약간 당황했다. 내 신념이라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고 완용과의 경쟁심이고 진급하는 것이고 나를 알아주는 부대장을 위해 독립군 토벌에 나서는 것인데 그것이 신념이라면 신념이겠지. 대답대신 휴의는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청년에게 주면서 자신도 한 대 입에 물었다.

휴의가 시계를 보았다. 새벽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구료. 나는 여명이 밝으면 당신 신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오. 당신이 살아 나갔으면 좋겠소. 인간적으로. 그러나 당신이 잡혀서 내가 풀어준 것이 들통나면 내 인생은 당신 인생보다 더 비침해질 것이오. 내가 당신 때문에 그래도 되겠소?

이렇게 말하는 휴의의 표정은 평화롭고 억양은 부드러웠다. 마치 선생이 아끼는 제자에게 대화술을 가르키는 모양새였다. 청년은 즉각 아니라고 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오. 서로 가는 길이 달라 이렇게 운명이 달라졌으니 이것은 어쩌면 신의 뜻인지도 모를 일이오. 다만 아까 내가 질문했던 신념에 대해 답변해 주시오. 나의 신념을 말했으니 당신의 신념이 궁금하오.

나는 잘 살고 싶소. 잘 먹고 잘 살고 조선사람들도 그랬으면 싶어서 이 일에 뛰어든 것이오. 잘 사는 일본밑에 있으면 조선도 잘 살게 되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도 독립보다는 내 밑에서 토벌대 활동을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럴리도 없겠지만 설사 잘 살게 된다고 해도 왜놈의 압잡이로 배를 불리고 싶지는 않소.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오지 않았소. 말은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차별하고 잘 살게 해준다고 하면서 수탈하고 조선말과 글을 지키게 해준다고 하고 다 빼앗지 않았소? 나도 처음에는 당신처럼 일본에 부역하는 편한 삶을 원했소. 그러나 어느 날 양심이 불현듯 찾아옵디다. 나 혼자 잘 살자고 조선인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갑자기 개안이라도 한 듯이 어느 날 나는 독립군을 찾아 이곳 만주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리고 내 임무를 성실해 완수했소. 평양의 후원자를 만나 독립자금을 확보해 무사히 선생님께 전달하는데 성공했소.

그게 내 첫임무였고 첫 임무를 수행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홀로 중국집에 갔던 것이오. 짜장면을 먹으면서 내 수고로움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그 집 짜장면 맛은 당신도 잘 알 것이오. 부드러운 면발과 간장 소스를 먹을때 나는 내 임무가 하나 성공하면 나에게 주는 칭찬의 표시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겠다고 다짐했소.

그렇게 잘 먹고 있는데 당신 부대원들이 쳐 들어왔고 나는 다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잡혀 왔소. 내가 억울한 것을 말해 줄까요? 먹은 짜장면이 다 소화도 되기 전에 고문으로 토해져 나올 때 였소. 정말 아까웠고. 할 수만 있다면 토해나온, 삭기전의 면발을 다시 먹고 싶었단 말이오.

짜장면 먹을 날은 앞으로 많을 것이오. 아니오. 중국집 주인장을 작살낸 것도 당신들 아닌가요? 그곳 주인장은 엉망이 된 얼굴로 자기 집 앞에 버려진 뒤로 어디로 떠난지 모르게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소. 짜장면 집은 거기 말고도 쎄고 쌨소. 그 사람 만큼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은 없었소. 죽기 전에 짜장면 그 사람이 만든 한 그릇 더 먹고 죽었으면... 그럴 기회는 틀림없이 올 것이오. 휴의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내가 또 한가지 재미난 일을 해줄까요? 어디 한 번 들어 봅시다. 내가 만주에서 특명을 받고 평양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탔지요. 그런데 기차가 출발을 하지 않지 뭡니까. 뭔가 잘못됐다 싶어서 하차 하려고 하는데 일제 경찰이 양쪽 문으로 밀고 들어 오지 뭡니까.

죽었다 복창하고 있었지요. 첫 임무인데 출발도 못하고 죽게 생겼으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있겠어요? 그래서요. 우리가 잡은 것은 기차안이 아니라 중국집 아니었소? 맞아요. 나는 거기서 정말 운 좋게도 체포를 면했어요.

형사들은 모든 사람의 신분증과 소지품을 일일히 다 검사했어요. 물론 나도 가짜 여행허가증이 있었소. 그러나 가방안에는 그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었지요. 권총 이었소? 맞아요. 권총. 어디 버릴 순간도 버릴데도 없이 꼼짝 없이 당하게 되는 순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조선여자에게 구원을 요청했소.

조선 여자라고요? 그래요. 우리 또래 였을 거요. 침착했으며...얼굴도 예뻣소. 그 여자는 나를 구해줬어요. 일본 대장의 허가증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휴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 대장의 허가증을 갖고 있는 조선여자라.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소. 대일본제국의 대장 허가증이 여기 있다. 얼마나 당차던지 거기 있던 형사가 바짝 기가 죽었다오. 그 표정한 번 생각해 보시오. 기세좋게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당한 꼴이라니. 그 자는 경례를 올려 붙이고는 나를 검문하기는 커녕 앞으로 여행의 안전을 보장하기까지 했소. 거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조선여자오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기차는 그날 출발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손님들은 모두 하차했지요. 그녀는 갈 곳이 없었소. 그래서 내가 안가로 신세를 갚을 겸 해서 모시고 가서 하룻밤을 재워 드렸던 것이지요.

당당하던 그녀는 그녀는 말을 아꼈고 나도 그녀가 말하지 않는 한 묻지 않았소. 생각같아서는 일본대장의 여자이니 잡아서 선생님께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를 구해준 생명의 여자에게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소.

그것이 인간 아닌가요? 적이라도 대우를 해줘야 하는. 그래, 여자의 신원은 뭐랍디까? 모르겠어요. 다만 아직도 기차안에서 일이 생생할 뿐이오. 그녀는 신원을 묻는 형사의 따귀를 올려 붙였어요. 내가 위기에 처하자 내 친오빠라고 하면서 일본 대장이 준 허가증을 갖고 있는 사람의 친오빠를 의심한다면서 자신은 물론 내 몸에 손도 못대게 했어요.

얼마나 대단하던지 형사들은 정말로 내 몸은 커녕 가방을 뒤지지 못하고 하차했던 거지요. 그녀가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던가요? 왜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내가 묻지 않은 것처럼 내 신분에 대해 끝내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대신 경성에 간다고 하니 혹시 어려움이 있을 경우 이 곳에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내가 아는 형님의 주소를 주었소. 아니 일본대장의 여자에게 주소를 주면 당신도 위험해 질 수 있잖소? 그래도 여자에 대한 고마움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소.

설마 나를 살려준 의인이 나를 함정에 빠트리겠소? 그런 식으로 독립운동을 한단 말이오? 정말 순진하군요. 휴의는 이 청년이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더 배워야 해. 인정사정 없어야 하는 것은 저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저런 인정을 베풀다니.

휴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것이 분하단 말입니다. 내가 일본놈한테 잡혀서 고문을 받거나 죽는다면 덜 억울하겠소. 그런데 말입니다. 같은 말을 하는 조선사람에 이렇게 당하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청년이 눈을 감았다. 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이제는 자신이 말할 차례였다. 휴의가 질문했다.

부모님은 이 일을 아시오? 청년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모르지요. 안다면 찬성했을까요. 청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반대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와는 다른 대답을 했다. 그야 모르지요.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부모님은 당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나요? 모르지요. 안다면 찬성할까요? 그야 모르지요. 처음처럼 따라하는 말이 되었군요. 휴의는 씁쓸했다. 심문은 심문이 아니라 대화로 이어졌다. 조선 청년은 좀 더 과감해졌다. 자신이 포로의 신분이라는 것도 잊고 감히, 함부로 라고 할 만한 말들을 했다.

민족을 배산하는 자의 말로는 비참할 것이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가. 졸지에 민족 배신자가 된 휴의는 얼떨떨했다. 매질을 해야 하나. 아니면 한 방에 끝내야 하나. 그러나 휴의는 이미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구타보다는 대화가 더 필요했다. 그래 지금은 일제가 점령하고 있어 조선백성들이 힘들다고 합시다. 그럼 조선왕일때는 편안했소? 수탈당하지 않고 제 몫을 백성들이 다 챙겼냔 말이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끌려가지 않았고요? 억욱한 일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죽는 사람 조선 천지에 없었단 말이오? 

그래 당신은 독립을 하기 전에 조선민이라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있었소? 만족 이라고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어요. 다만 나라를 뺏기고 나니 그 전에 행복했다는 것은 말하고 싶소.

행복이라고요? 나는 늘 불행했소? 열심히 일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들었소. 집은 대대로 가난했고 나 역시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소. 그러다 기회를 잡았군요?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요? 일제가 있으니 독립군도 있는 것 아니요? 좋소, 다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내선일체인데 왜 일본놈은 높고 조선인은 낮은데 있어야 하오. 일본인이 지나가면 조선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표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휴의는 자신이 떠나올 때 순사가 완용을 데리고 죽마을에 온 것을 상기했다. 

이번에는 휴의가 잠시 머뭇거렸다. 차차 좋아지지 않겠소. 그리고 나서 뜬금없이 고향에 대한 이야가 나왔다. 대화가 샛길로 빠진 것이다. 휴의는 충남 보령이라고 했고 조선 청년은 홍성이라고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우린 동향이네요.

둘은 그 말을 동시에 했다. 동향. 그런 것이지요. 나라가 같고 사는 곳이 같으니 이렇게 서로 웃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느낌 일본인은 알지 못하지요. 죽었다 깨나도. 그래요. 좋은 세상이 오면 광천에서 그래, 광천이 홍성과 보령의 중간이니 광천 배다리에서 만나 새우젓에 막걸리 한 잔 합시다. 일이 이렇게 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청년이나 휴의는 꺼림칙한 기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휴의는 이제 마무리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그가 맺었으나 일은 내가 끝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풀어주면 어떻게 할 것이오? 풀어준다고요? 놀랍군요. 동향에 대한 예의 인가요? 아니면 조선여자 이야기에 감명 받았나요? 이제 질문할 시간도 답변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묻는 말에 대답하시오. 

그 길로 다시 독립군에 들어가야지요. 다음에 잡히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텐데도요. 그것이 운명이라는 따라야지요. 어쩌구니 없군요. 독립된 나라에서 무엇 하고 싶은가요? 수상이오, 장관이오, 아니면 군인이나 경찰이오. 군인이나 경찰은 독립이 없어도 가능하오. 나를 모면 모르겠소. 우리 부대장도 조선인이오. 서천 사람이지요. 그래요? 부대장까지 함께 모여 향우회 한 번 합시다. 

나는 내 힘을 믿어요. 내 몸의 빛으로 조선을 밝히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오. 손대지 못한 인생이 아깝지 않소. 남은 인생은 길어요. 아주 길다고요. 당신 정도의 신념이라면 앞으롷 손댈 인생은 찬란할 것이오. 다가올 인생을 어떻게 꾸려나가느냐 마느냐는 나의 자유요. 알았소. 알았다고요. 

이것으로 조선청년과 휴의와의 대화는 끝났다. 휴의의 결정만 남았다. 그를 풀어줄 것인지 더 잡아 둘 것인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인생의 풋내기 인것은 분명했다. 아직 익지도 않은 인생을 여기서 끝맺기는 너무 억울했다. 내가 그 처지라면 어떨까. 정말로 분해서 잠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없는 그만의 철학이 있다. 

어디서 누군한테 무엇을 배웠기에 그는 고문자 앞에서 이토록 자기 주장을 당당히 할 수 있는가. 휴의는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그런 말을 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중국집 주인장과 이 조선청년은 어찌 이리도 다른단 말인가. 아무말이나 하면서 심지어 없는 거짓말까지 지어내고 처자식까지 팔아 먹으면서까지 빠져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자와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조선독립군의 길을 가겠다는 이 청년은 도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인가. 

휴의는 음식을 주라고 불침번에게 지시하려다 말고 그 자신이 직접 음식을 주고 밖으로 나왔다. 나이도 같고 동향이라 죽이기는 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선인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도 들었다. 다른 죽음과 달리 이번에 그를 죽이면 틀림없이 후회한다. 그래 후회. 휴의는 후회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일본인에게 잡혀 죽으면 덜 억울하겠다는 말이 자꾸 귀에 거슬렸다. 조선인이 왜 조선인을 죽이느냐고 할 때는 울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그가 갖고 있는 신념이 옳은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고 청년은 조선을 택했다. 천웅역의 교장은 황국신민인 자의 의무를 이야기 했다. 황군을 위해 죽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총을 잡지 않고 뒤로 빠지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조국? 내 조국은 조선이 아니고 일본인가?

휴의는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들었다. 살려줄까. 그래서 그 뒤를 염탐해 독립군 대장을 잡아들일까. 미끼로 삼을까. 조선여자의 행적을 쫒아 경성으로 들어갈까. 그러면 뭐가 더 큰 것이 나오지 않을까. 그냥 놓아줄까.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그냥 놔줄까.

잡은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면 아주 신나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고기처럼 조선청년도 신바람을 울리면서 바다 깊숙히 재빨리 사라지겠지. 세상밖으로 나가 이번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겠지. 설마  나를 비웃지는 않을테지. 몰라, 모르겠서. 왜 이 자 앞에서 내가 이런 고심을 해야 하지. 

휴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년은 이미 신분이 노출됐고 잡혀간 이후 그와 독립군간의 모든 접선은 차단됐다는 사실이다. 놓아준다고 한들 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당장에 없을 것이다.

마음이 흔들렸다. 새벽의 봄바람이 분것도 휴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차갑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닌 봄바람. 고향 죽마을에도 이맘때쯤 그 바람이 불었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휴의는 바닥의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희미한 전등불이 깜박였다.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다. 낮은 낮은 포목으로 적군처럼 은밀히 다가오고 있다. 

부대장은 내일 올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깨끗한 자리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해애지. 그런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손으로 해야지. 휴의는 그런 마음으로 취조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부대장의 문을 열었다. 문을 닫을 까 하다가 조선청년이 심심하지 않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닦고 쓸고 문질렀다. 그러다가 조금 열려 있는 서랍에 눈길을 돌렸다.

그냥 닫았다가 궁금해서 다시 열고 그 안의 내용을 꺼내 들췄다. 독립군 타격 일지였다. 봐서는 안될 것 같기도하고 봐도 별 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한 번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지는 하루 일과를 시간순서대로 나열한 다음 마지막에 총평하는 것으로 끝났다. 내용이 짧았기 때문에 서너 달 치를 이십분 정도에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나서 휴의는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누가 보고 있는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 거렸다. 그는 숙소를 나와 태연히 연병장을 가로 질렀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 벚꽃이 의자 위에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고민했다. 자신이 단독으로 돌진했다 놓친 사건에 대한 평이 마음에 걸렸다. 부대장은 조선인들의 무모함과 전략없음을 휴의탓으로 돌리면서 조센징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조직으로 침투하지 않고 단독으로 실행해 실패한 것은 성공해서 열매를 혼자 독차지 하려는 조센징의 나쁜 습관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 일부 작전 성공이라고 보고서에 올렸다는 말은 거짖이었다. 말로는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달리 쓴 것이다. 자신을 믿는다고 하더니 철저히 그 반대로 적었다.

일주일 뒤에 적은 보고서는 자신의 직속 부하는 아직 애송이인데 열의만 있을 뿐 지략이 떨어져 고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자들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예의 주사하고 있다며 경계 인물로 휴의를 지목했다. 소대장이란 자가 마음이 여리다. 마음이 여린 자는 반드시 배신한다. 요주의 인물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이 것으로 독립군 토벌의 먹잇감으로 그들에게 넘길조센징을 물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휴의는 자신이 독립군에 잡혀 고문 당하는 상상으로 머리가 갑자기 어지러웠다. 나를 팔아 넘길 속셈이었구나. 역공작의 대상이 나라니. 

죽자 살자 일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이런 대접이었구나. 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어쩔 것인가. 휴의는 고향의 부모를 생각했다. 득의만만할 때는 떠오르지 않던 모습이 궁지에 몰리자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떤 굴욕에도 참고 견뎠으나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자 휴의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점례는 어디있을까, 문득 그는 점례를 보고 나서 죽어도 죽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고 자신과 미래를 언약했던 점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차에서 조선청년을 구해주었던 그 조선여자가 점례는 아니었을까. 

일본가면 공장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 온다는 말은 사실일까. 잘못된 길로 끌려 간 것은 아닐까. 휴의는 심란했다. 잠깐 사이로 자신의 처지가 뒤바뀐 것을 알고 그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마음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부대장이 돌아오면 선택할 시간은 없다. 자신은 무모한 작전에 희생될 것이 뻔했다. 조선청년이 문득 떠올랐다. 그와 함께 도망치면 어떨까. 이곳을 벗어나자. 그래 도망치자. 어디든 살 곳이야 없겠는가. 아예 고향 죽마을로 숨어 들수도 있고 만주나 상해로 갈 수도 있다.

아니면 러시아로 가서 평생 농사만 지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살고 나서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에 휴의의 마음은 바빠졌다. 심장이 가빠졌다. 상기된 그가 다시 청년 앞에 섰다.

그동안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휴의가 나타나자 다짜고짜 같이 손잡고 독립운동하자고 제안했다. 토벌대 군인에게 잡힌 항일 투사가 이런 제의를 했다. 소설속 이야기라고 독자들은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아무리 짜맞추려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고 따지지 말자. 사람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다. 조선 청년이 휴의의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청년의 어이없음을 꾸짖어서는 안 된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하면서 혀를 찰 일도 아니다.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기 마련이다. 

보아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휴의가 반응을 보였다. 풀어주면 숨어 살 곳은 있고? 다음에는 잡히지 않을 만큼 허술하지 않을 자신은 있냐고요? 살아서 오래도록 독립운동 할 묘책은? 휴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안전한 곳에 머물 곳을 청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덥석 휴의의 손을 잡았다. 

그는 이미 잡은 손을 한 번 더 잡고는 나와 같이 손잡자. 나이도 같고 고향도 같은 조선사람이 끼리끼리 뭉쳐서 일해보자.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가 말을 놓았다. 친구, 한 번 폼나는 인생을 살아보자. 한 번 사는 인생 일본놈 밑씻개 역할 말고 조선놈 기살리는 일을 해보자고. 휴의는 말없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청년의 묶인 손을 풀었다. 그럽시다. 까짓것 죽기 밖에 더 하겠어.

내가 방금 생각한 것인데 여기 조선인 일본군이 나 말고도 7명이 더 있다. 그중 세 명은 내 말이라면 똥으로 된장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다. 그들과 함께 나가면 어떠냐. 휴의가 반말로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냐. 나중에 접선해서 빼오는 것은 몰라도. 

청년이 단호히 반대의사를 보였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동선이 노출되고 그러면 오늘의 도원결의는 그야말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는 것. 휴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자신이 신임하는 한 명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실탄 창고에서 무기와 권총 기관단총 수류탄을 닥치는대로 챙겼다. 휴의는 아침 점호를 시작하기 전에  막사밖으로 빠져 나왔다.

잡혀온 조선 청년은 죄가 없어 무죄방면 한다는 내용은 미리 고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하들이 설령 지하에 들어와서 청년의 부재를 확인한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사안이었다. 휴의는 용의주도 했다. 내일 부대장이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든 시달림이 있을 터이니 오늘은 자유 시간을 주는 아량을 보였다. 일본군 초급장교가 부하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이것은 또한 의심을 미리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날이 밝아왔다. 불침번은 들어갔고 후임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희미한 빛 속에서 그림자 셋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늘의 달과 별은 스러졌고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제지하는 사람도 뒤따라 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듯이 가뿐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머뭇거렸다. 애초 장소는 변경됐다. 조선 청년은 괜찮다고 했으나 휴의는 못 미더웠다. 그가 알려준 주소는 휴의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추격부대가 일 순위로 습격할 장소였다. 청년의 아지트는 일본군에게 노출됐다.

휴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곳이 일본군 손안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초조한 눈빛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휴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추격대는 그곳을 급습했다. 그는 청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지체하지 말고 떠나자는 의미였다. 허비할 시간이 한시도 없었다.

셋은 이번에는 그림자를 등뒤에 두고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내달렸다. 달리는 뒤로 청년의 근거지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휴의도 이곳을 안다. 늘 다녔던 길이다. 익숙한 길이 지금은 낯설었다.

낯선 것은 쫓던 것과 쫒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추격자에서 신분이 바뀐 휴의는 도망자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등 뒤가 따끔거렸고 그 순간 총알이 가슴을 뚫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근거지를 한참 벗어났는데도 휴의는 더 북쪽으로 가자며 쉬기를 포기했다.

아까보다 더 빨리 움직이자 부하 하나가 뒤에 처졌다. 멀리서 사냥개의 짖는 소리를 휴의는 들었다. 조만간 총소리가 따라 올 것이다. 누가 일선에 서고 있는지 휴의는 그 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자비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쌍욕을 뱉는 그 녀석을 휴의는 평소에도 못마땅했다.

다가오면 죽여버려야지, 휴의는 이를 악물었다. 조선인 토벌대는 이제 독립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첫 전과는 그 녀석의 죽음이 될 것이다. 휴의는 득의만만했다. 그에게 더 이상 독립군 토벌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휴의의 배신은 부대장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자신이 없는 틈을 노린 그의 계획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더 분노가 치솟았다. 우발적이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부대장은 마치 자신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며 자책했다. 더구나 체포된 끄나풀과 함께 도주한 것은 일본군의 수치였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동족의 배신 앞에 베이징에서 복귀한 부대장은 갈가리 찢기는 심장의 고통을 느꼈다.일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토벌대의 전과를 올렸던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 육사 출신 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심지를 더욱 세게 했다.

여기서 더 허물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신속히 처리해야 한다. 사령부가 알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던 부대장은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 휴의 일당의 뒤를 쫒았다. 수색견을 앞세우고 민가를 급습했다. 사전에 알아둔 청년의 아지트는 두세 겹으로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러나 방에는 이불 가지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청년의 살림은 단출했다. 언제든 두고 떠나도 상관없을 만하게 쓸만한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가져갈 것이 없는 홀가분한 방이었다. 추격의 단초를 찾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휴의의 판단은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추격대는 마을 인근에서 도주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마을을 넘어서면 일이 꼬이게 된다. 추격대는 그쪽 경찰과 무전으로 연락하면서 휴의 일당을 구석으로 몰았다.

셋은 맞대응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휴의의 부하 하나가 심장을 관통당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즉사했다. 부상 정도를 살피려던 조선 청년은 다리에 총알을 맞았다. 그가 맞은 곳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또 다른 총알이 기댄 나무옆에 박혔다.

휴의는 그를 끌고 간신히 언덕 뒤로 숨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둔중하게 들렸다. 청년은 이생은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손에 든 새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는가. 그는 가슴속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휴의가 그러는 동작을 쳐다봤다. 겨우 스쳐지나간 거야. 걱정마. 피도 나오다 그쳤어. 왜, 죽는 줄 알았어.

청년은 옷을 걷어 종아리를 살폈다. 정말이지 슬쩍 비켜 지나갔다. 총을 맞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넘어져서 돌에 스친 상처 같았다. 자랑스런 훈장이군. 이건 일본군 총알 아니라 넘어져서 다친거다. 그럴리가. 이렇게 길게 훓고 지나갔어. 휴의는 대꾸하지 않고 옆의 소나무 가지 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맸다. 그들은 다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추격대는 더 쫓아 오지 않았다. 

둘은 빠른 속도로 유지했다. 몇 개의 산을 넘었다. 달리기라면 해볼 만하다. 더구나 산은 익숙했다. 고향의 산과 이곳의 오르막 산이 다르지 않았다. 조선청년과 휴의는 마치 달리기 시합에 나선 경주선수처럼 지치지 않고 산을 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을을 지났다. 마을을 지나자 시내가 나타났다. 인파가 제법 있었다. 집도 건물도 사람도 제법 도시다운 움직임이 활발했다. 둘은 멈추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땀도 닦았다. 쫓기는 신세가 아니라 여유있는 군중속의 인물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거의 하루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달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 곳에서나 들어가 눕고 싶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격려하면서 두 눈을 억지로 떴다. 몇 군데 주막이 보였고 그 중 깔끔한 곳을 찾아들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독립군 토벌대는 자금이 달리는 독립군이 허름한 곳에서 주로 묵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싸구려 여인숙이 주로 검문 대상에 들었다. 둘은 그 와중에도 도망자의 본능을 발휘했다. 

여관 주인의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선 휴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을 확인하고 조선청년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다. 그와 나는 헤어져야 한다. 체질이 나는 누구와 같이 다닐 수 없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이며 앞으로도 혼자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휴의 주머니에 넣고는 눈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휴의는 밤새 끙끙거렸다. 그는 여전히 잔혹한 독립군 토벌대였다. 부러진 팔을 비틀었고 깨진 얼굴에 소금을 뿌렸다. 두 눈을 파내려는 듯 손가락으로 위협했고 귀에 달군 인두를 들이댔다. 비명. 그래 울부짓는 짐승의 소리. 휴의는 잠결에 인상을 썼다. 이 정도도 못참아. 그러고도 네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이 조센징 놈아. 뜨거운 불벼락을 받아라. 휴의는 고함을 질렀고 실제로 인두를 들고 불벼락을 내렸다. 

공포. 눈앞에 벌겋게 달군 인두가 내 두눈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다. 돌려야 한다. 그래야 눈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고개는 꼼짝하지 않는다. 휴의는 그대로 인두를 가져간다. 눈은 아니다. 눈 아래 뛰어나온 광대뼈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익은 냄새가 난다. 먹고 싶다. 고기가 먹고 싶어. 독립군이 헛소리를 한다. 그래 고기좀 줄까. 휴의가 이번에는 작은 칼을 꺼내들도 익은 얼굴을 도려낼 기세다. 

장면은 바뀌었다. 이번에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발로 걷어 찼다. 노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걸지걱 거리는 것을 치운다는 심사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기세로 눌러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그러다 휴의는 어느 순간 노인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일그러진 얼굴로 휴의는 불렀다.

휴의야, 내다 아부지다. 아부지. 아부지가 여기 어쩐 일이요. 휴의는 자신이 한 행동을 감추기 위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런다고 모를 줄 아느냐 이놈, 휴의야. 휴의는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누운 상태로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그렇게 더 있었다. 악몽이었다. 도주 뒤에 하룻밤 묵은 곳에서 그는 젊은 청년과 노인을 고문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독립군 토벌대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정신은 곧 돌아왔다.

친구는 어디갔지? 어라, 이건 뭐지. 휴 동지, 건투를 비오. 살아 있다면 어디서든 만나겠지요. 해방된 조선땅 광천에서 새우젓에 막걸리 한 잔 약속은 어기지 마시오. 조철봉. 조철봉이라. 휴의는 청년이 써논 메모를 보았다. 조철봉. 그래, 그래. 나도 같이 있는 게 부담이 됐어. 만나겠지. 철봉아 너의 건투를 빈다.

휴의는 이제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는 군인답게 서둘렀다. 어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하루 동안의 복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그래 여관집이지. 허술해, 나중에는 침대가 깨끗한 곳에서 자자. 하루쯤 위험에 빠지는 것도 괜찮아. 아직 만주인가. 국경인가.

휴의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 참을 걸어서 어느 주막에서 밥을 먹었다. 돈을 계산하려고 하는데 청년의 메모가 다시 손에 잡혔다. 다 읽은 줄 알았는데 반대쪽에도 글씨가 있었다. 기차안에서 나를 구해준 여자의 이름은 점례라고 했다. 여기 주소 있지. 혹 경성에 가면. 내가 그러더라고 그 때 고마웠다고. 꼭 전해주라. 

점례라니. 그 점례인가. 내가 찾는 점례. 휴의는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마저 읽기 시작했다.  점례라는 조선 처녀를 만났다. 만주에서 그림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주었다. 그녀는 일본군 대장이 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힘을 발휘했다. 이것은 너도 알것이다. 네가 여러 차례 말했으니. 

그녀는 이곳 일이 마무리돼 경성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처럼 어렵겠지만 그림공부하는 여자가 많지 않으니 운 좋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로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삼촌이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인사동이라던가. 휴의는 더 글자가 있는지 앞뒤로 살피고 뒤집어도 보았으나 어디에도 읽을 거리는 없었다. 

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일본 군함이 은밀한 움직이기 시작했다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밤이었다. 이곳 태평양의 비는 한 번 오기 시작하면 몇 날이고 무섭게 내렸다. 갑판 위에서는 그 비의 위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바람에 섞여 이리저리 날리면 깊은 산의 폭포수 아래에 있는 느낌이었다. 옷이 흠뻑 젖는 것은 물론 몸에서도 하늘의 비가 내려오듯이 그렇게 땅으로 흘러내렸다.

말수는 갑판아래서 갑판 위의 상황을 짐작했다. 병사들의 일부는 이 비를 고스란히 맞을 것이다. 보초병들은 자기 임무를 다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있었다. 흐트러질 때면 비를 피해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면 언제나 조국 일본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도 안 되면 기미가요을 힘차게 불러 제켰다. 그러면 조금은 나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시간이지 밤새 혹은 낮동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생쥐꼴의 그들은 지쳐갔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은 끝이 없었다. 부지런히 대포를 닦고 총기를 소지하고 탄약을 안전한 곳에 이동시키는 일이 남아 있었다. 사용한 포는 잘 닦지 않으면 되레 자신들을 향한 흉기가 될 수 있다. 날아가기는 커녕 오발 사고의 위험도 있었다. 표적에 도달하기도 전에 추락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그래서 포 사격이 끝나면 청소 또 청소였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일은 산업현장에서보다 전투 현장에서 더 필요한 용어였다. 대낮에도 잠은 쏟아지고 악천후는 지속되고 이래저래 죽을 맛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갑판위 병사들의 신세였다.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서로는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자빠지기도 했다. 홀로 걷던 밤의 산길에서 갑자기 만난 산짐승을 만나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섰다가도 식은땀이 가시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군인의 신분임을 자각했다. 정신의 승리 없이는 기운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의지였다. 

함장은 결단을 내렸다. 미군의 공습이 아무리 강하고 무서워도 무작정 만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가서 싸워야 한다. 숨어 있으면 적도 우리를찾지 못하지만 우리도 적을 찾을 수 없다. 기왕 죽을 거라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게 맞다. 

본국에서는 승리의 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타전을 할 수 없는 함장은 본국대신 주변에 있는 다른 일본 군함과 연결을 시도했다. 어렵게 무전이 연결됐다함장은 자신의 결단을 알렸고 그것은 곧 명령이었다. 세 척의 군함은 따로 놀지 않고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지금 막만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말수는 움직이는 함정의 속도를 느꼈다. 굉음이 울렸다. 엔진 출력은 최대한 높이고 있는 것이 적을 따돌리거나 적의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 유리한 고지를 찾기 위한 기습활동으로 여겼다.

군함이 속도를 낼수록 말수는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안절부절했다. 필리핀으로 가지 않는다면. 되돌려서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그러면 애초 계획은 틀어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여순은 그것 까지는 생각을 할 수 없다. 필리핀이 아니면 다른 섬의 어떤 곳이 될 것이다. 직감적으로 말수는 그곳이 사이판이라는 생각을 했다.

떠나올 때 지휘관은 사이판의 전투가 이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 미군이 비행장을 건설할 경우 한 번의 비행으로 일본 본토 타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사활을 걸고 일본 역시 죽기로 싸우는 이유를 알만했다. 

서로에게 사이판은 전략적 요충지로 절대 양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해야 하는 일본이 더 다급했다. 미군은 공중에서 강했다. 보급로도 수월한지 시도 때도 없이 포탄을 붓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짧았다. 그렇구나. 사이판이구나. 이 군함은 사이판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한 후방 지원병력이었다. 


계획이 틀어지면서 말수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순에게는 이야기 해도 될 것이다. 그녀가 어떤 묘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어차피 잠을 자기는 글렀다. 이야기를 들은 여순은 그 섬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물렀다.

필리핀 만 한가요말수는 웃었다그곳에 비하면 손바닥이다그러면 우리가 숨을 곳은요. 아무리 작아도 우리 몸 숨길 곳은 얼마든지 있어. 작다로 통영의 무인도처럼 혹은 보령섬의 무인도 같은 줄 아니. 비행기가 뜨고 질 정도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럼 뭐가 걱정이지. 필리핀이든 사이판이든 우리가 숨어서 살아나기만 하면 되잖아. 

섬의 크기 때문에 도주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걱정했던 말수는 머쓱했다. 언제나 여순은 자신을 앞질러갔다. 걱정하기 전에 여순에게 물어봐야지. 괜한 걱정을 했어. 걱정은 상륙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미리 결정한다 해도 무엇이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는데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같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말수는 멋적었다. 그러나 다행이다. 자신의 그런 표정을 들키지 않았으니. 그런 좋은 기분으로 얼핏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엄청한 굉음에 순간적으로 말수는 몸을 웅크렸다. 의식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운동장 보다 큰 군함이 흔들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선반에서 무엇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동일본 대지진의 위력이 이 정도일까. 말수는 군함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직감했다. 광산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막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곳의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되레 그곳이 덜 위험할 수 있고. 말수는이제 필리핀 행은 잊어 버렸다. 

사이판에 상륙하기도 전에 군함이 침몰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보복 공격이 시작됐는지 이쪽에서 쏘는 포가 둔중하게 갑판을 흔들었다그 다음은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부상병들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지르는 소리는 연속된 폭발음에 묻혀 버렸다.

말수는 여순을 흔들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어리벙벙한 여순이 반응했다나가자. 부상병들이 우릴 찾는다. 여순은 군말없이 일어섰다. 부상병이 찾는다는 말은 그에게 지상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도 말수나 여순에게 갑판으로 나가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서 그렇게 했다. 

과연 갑판 위는 피투성이 천지였다. 그들을 치료하는 말수나 여순도 그들처럼 똑같이 피를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부상병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나머지는 그들은 용감하게 앞으로 돌진했다. 

빈 포신에 포탄을 채우기 위해 분주한 병사들은 죽은자를 밟고 다녔다. 부러진 부상병의 다리를 부러뜨려 아예 못쓰게 만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발빠르게 움직였으나 새로운 폭탄이 갑판위로 떨어질 때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아무리 빨라도 포탄보다 빠를수는 없었다. 

이것은 부상자의 탓이 아니다. 종종걸음으로 그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떨어지는 쇠뭉치가 더 빠르게 낙하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이 눈에 보였다. 폭발음에 앞서 빠르게 대각선으로 낙하했다. 어떤 것은 눈보라처럼 날리기도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날아오는 그것들은 당당했다.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파고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적들은 악마였다. 쓰러진 일본군은 그에 맞서는 천사였다. 흘리는 피와 고통에 울부짓은 괴성은 그것을 증명했다. 공격자는 또 야만인이었다. 그들에게 온정은 없었다. 맞서야 한다. 인간아닌 자들에게 처절한 보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 군함은 힘이 없다. 반격할 기운이 다했다.

군함은 다시 만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출격했던 전투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자비한 적은 꽁무니에도 함포 사격을 가했다. 군함의 모든 사람이 당할 판이었다. 어떤 병사는 허공으로 붕 떴다가 몸통과 팔 다리가 따로 따로 떨어졌다.

이제부터는 누가 누구를 도울 형편이 못됐다. 상처를 싸맬 붕대도 떨어졌다. 진통제나 항생제를 담아두는 약통은 텅 비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파편은 멈추지 않았다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말수는 몸이 말을 듣지 않자 화를 내는 대신 여순에게 소리쳤다.

여순아 엎드려. 그래야 산다. 그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폭탄이었다. 여순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군함은 마지막 힘을 쓴 결과 적의 레이다에서 사라졌다. 멋지게 적을 따돌린 것이다. 함장은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감대신 패배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그러나 일단 군함은 건졌다.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겼으니 다음을 도모하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자신을 호위하던 나머지 두 척의 함정은 서서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함장은 승전보 대신 패배의 아픔을 본토에 전했다. 그는 늙은 사내 답지 않고 목소리가 떨렸다. 숱한 경험도 이번만큼 참담하지 않았다. 패배를 전하는 그 목소리는 태평양 전쟁 전체의 패전을 의미하는 전주곡인지도 몰랐다.

함장이 그러고 있을 때 다행히 말수와 여순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린 말수는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기 위혀서 였다. 그러기 위해셔는 혹 함장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의약품을 구하는 일이었다.  의약품이 바닥났다고 말했다. 살 수 있는 병사들도 그러지 못할 겁니다. 말수는 자신이 그런 보고를 하는 것이 미안하고 안 됐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함장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 트렸으나 이내 평온을 찾고는 상처를 묶을 붕대가 없다고 이제 자신은 치료 할 일이 없으니 총을 달라는 말수의 손을 잡았다. 의사양반,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최후의 일일이라도 미국놈과 싸워야지. 함장은 상관의 눈으로 말수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래 당신같은 의사가 진짜 애국자야. 도쿄에서 콧노래나 부르면 간호사 꽁무니나 쫒는 놈들이 무슨 의사겠어. 당신은 애국자야. 의사선생. 애국자라는 말에 말수는 목이 매었다. 진짜로 자신이 일본을 위해 싸우는 군인같았다. 

함장이 말했다. 의사선생은 총대신 칼이 필요해요. 병사들은 치료해야지요. 아직 선생이 총을 든 그런 상황은 아니오. 보트를 주겠으니 내일 새벽 사이판에 상륙해요. 미리 보급부대에게 알려 놓겠어요. 보급부대와 접선한 다음 부상병 치료용으로 의약품과 그밖의 필요한 것을 챙겨서 돌아오시오. 

함장은 말수를 믿었다기보다는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이런 꾀를 냈던 것이다. 말수는 사이판이라는 말을 듣고 짐작했던 대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트로 하선 하라니. 이것은 기회인가, 아닌가. 여순에게 물어야 하는데 여순은 없다. 어떻하나. 그는 일단 알았다고 답했다. 내일 아침, 아니 그 보다 더 일찍일지도 몰라요. 접선이 되는대로 선생은 우리특 특수공작원과 함께 내리시오. 

말수는 여순은 어쩌고요? 하는 말이 목에 걸렸으나 순간 동작으로 멈추는데 성공했다. 여순은 어떻게 되지. 함께 내리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 혼자는 어렵다. 여순의 지혜가 필요하다. 말수는 머리를 굴렸다. 의약품에 관해서는 자신보다 여순이 잘아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전쟁통에 의약품이란 뻔한 것이었다. 그것을 말수가 모를리도 없었고 그런 핑계로 여순을 내리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쉽게 풀렸다. 여순이 그때 피투성이 모습으로 함장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팔과 다리에 파편을 맞은 여순도 처치가 필요한 상태였다. 여의사 선생도 부상당했소. 함장이 돌아봤다. 뭐, 심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항생제가 없어요. 여순은 말수와 함장이 다 끝낸 애기를 알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 부상병도 중요하지만 의사선생의 건강이 우선이오. 하선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하선해서 의사 선생이 먼저 치료하도록 하시오. 의사가 건강해야 부상병을 잘 돌보지. 

말수는 여순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쉽게 풀렸다. 함장이 덧붙였다. 섬에 내려 그곳에서 간단한 치료를 하고 의약품이 확보되는 대로 군함으로 복귀하시오. 당신들을 기다리는 우리 병사들을 생각해서 말이오.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습니다. 물 먹을 시간도 아껴서 돌아오겠습니다. 말수와 여순은 이번에도 떨어지지 않고 기적적인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어둠을 틈타 보트는 해안선에 상륙했다. 예를 갖춰 마중 나오는 인사는 없었다. 안내를 맡은 하사관 두 명은 그들을 안전막사까지 안내하는데 성공했다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해안선에서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는 아군도 있었지만 적군도 있었다. 그들은 섬을 지키고 섬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포소리와 총소리가 되레 갑판위보다 더 사나웠다. 갑자기 막사 벽에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졌다. 그것을 신호로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병사들은 사방으로 총을 갈겨 댔다. 명령은 철두철미하게 시행됐다. 

막사안의 나머지 후방지원병력도 지휘관을 따라 모두 밖으로 뛰쳐 나갔다. 말수와 여순은 엉겁결에 둘 만이 남게됐다. 그 앞에는 대충 모아 놓은 의약품 상자가 있었다. 말수는 그것을 되는대로 배낭에 쑤셔 넣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시간 조차 없을 만큼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말수는 이것은 기회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여기 남는 것은 자살행위다. 말수는 막사에 남은 권총을 챙기고는  여순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일단 올라가자. 산으로 가서 숨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피자. 적당히 몸을 감출 굴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상황이 파악되면 그 때 행동하자도착한 곳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말수는 허탈했으나 여순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병사들처럼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산으로 향하는 언덕을 향해 달렸다. 

차라리 물새는 군함이 더 안전했다. 그곳으로 돌아 갈수만 있다면 그래야 하나.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우린 여기서 일단 자유를 얻었다. 어렵게 얻었으니 쉽게 내줘서는 안 된다. 목적한 것을 이루기까지 인내가 필요하다. 어쨌든 이건 뭐 시작도 안했는데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말수의 머리는 이런 생각으로 가득찼다. 

애초 목적을 달성했으나 애촉 목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혼돈이었다. 기회를 봐서 사이판의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려던 것이 싸움의 한 가운데로 떨어진 것이다. 다른 일을 모두 잊을 만큼 죽음이 코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말수는 그러나 침착했다. 그에게는 생존 본능이 있었다. 여순이 머리를 쓰는 일에 재능이 있다면 자신은 몸으로 때우는 본능적 실력이 있었다. 어디로 방향을 잡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알았던 것이다. 새로운 일, 처음 벌어진 일 앞에서는 침착이 제일이다. 그래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하자. 

뭘 그렇게 중얼 거려요. 나도 압시다 좀. 여순이 종알 거리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한 마디했다. 아직은 아냐. 아니라고 일단 올라가서 상황  파악을 하자. 엎드려. 말수가 여순의 손을 잡고 엎드렸다. 산중턱에 포탄이 떨어졌고 괴음과 먼지가 피어올랐다. 저기도 아니다. 높은 곳이라고 안전하지 않아. 일단 여기서 멈추자. 다리가 쥐날 정도야. 더 가자고 해도 못가. 여순이 그 말과 동시에 푹썩 주저 앉았다.

땀방울, 날은 왜 이리 덮지. 산 속이라 바람도 없다. 이러다 총알 맞기도 전에 죽겠다. 말수도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 앞에서 쫄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총알 앞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마음은 그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래 가만히 있자. 둘은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래도 대책이 안 선다. 우왕좌왕 해도 마찬가지다. 어쩌란 말인가. 모든 것은 운명에 맞겨졌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듯이 이 순간의 생도 그렇게 결정된다. 그래 이것은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말수가 말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축제의 장을 즐기자. 폭탄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자신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세우는데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환호와 행복만이 넘쳐 흐른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낮보다 밝은 조명탄은 갖은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다. 야광탄의 긴 꼬리는 생명선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은 다시 잔잔한 수평선과 같아졌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말수는 자신의 손을 펴고 손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생명선이 길게 쭉 뻗어 나갔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물이 흐를 정도로 깊은 고랑을 파고 있는지 눌러 보았다.

그러나 금같은 것은 없었다. 일시적으로 어둠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저녁에 어둠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화력이 잠시 멈춘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말수는 거친 호흡이 가라앉자 다시 위로 오르기 시작하는 대신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여기는 덜 안전하다. 더 낮은 곳으로 올라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한다. 이 넓고 높은 산에서 자신의 몸 하나 숨길 곳이 없겠는가. 하다못해 토끼굴이라고 좋다포탄을 막아주고 총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줄줄 흘러 내리는 땀을 닦을 시늉도 없이 말수는 더 좋다고 여겨지는 곳을 향해 위로 위가 아닌 옆으로 이동했다.

천국은 낮은 곳이 아닌 높에 곳에 있어도 지금 그곳을 방문할 이유는 없다. 여순은 그곳에 갔을까. 아직 이승에서 피를 닦으며 끊어지는 누군가의 삶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까. 여순은 말수가 가만히만 있자고 하자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졌으니 이제 이곳에 떨어질 차례라면서 아래로 가자고 재촉했다. 말수는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운을 떠보자면서 여순은 아래로 100미터 가량을 이동했다. 위에서 보이는 바위 부근이었다. 말수는 밤을 서로 지내고 낮에 만나기로 하고 서로 산속에서 헤어졌다. 

자신의 손을 뿌리친 여순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까. 아물지 못한 상처에 더 큰 상처를 입고 부상병처럼 살려 달라고 신을 찾을까.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엄마를 외칠까아니면 벌써 그 말을 하고 생을 마감한지 한 시간이 지났을 수도 있다. 말수는 여순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끝가지 책임져야 하는데 비겁했다. 그래 내가 책임을 졌어야지. 막사에서 빼냈고 함께 군함을 땄고 함께 하선했으니 그랬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말수의 말이 맞았다. 누구도 그녀가 결심한 것을 되돌려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말수의 책임이 아니다. 내려가 있겠어요. 아직은 할 일이 있어요. 여기 가만히 있다가 죽을수는 없어요. 

그녀는 단호했다. 엄마를 애타게 찾는 세 살 아이를 두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쓰러진 병사들은 모두 자식이었다. 엄마 젖을 떼지 않은 핏덩어리였다이마에 피도 안마른 것을 두고 모른체 등을 돌릴수는 없었다. 젖달라고 울고 보채는 자식을 두고 떠나는 엄마는 없다. 어디서 그런 결단이 나왔는지 여순은 자신도 놀랐다. 놀라면서도 그저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려다보는 일그러진 얼굴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갓난 아이가 아니었다. 이마의 피는 마른지 십수년이 지났다. 그리고 공유해야 할 기억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억지로 찾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아니다.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다.그들은 내 자식이다. 총성이 잠시 멈췄다. 총알도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한바탕 소동도 끝났다. 누군가에게는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다. 부상병들은 자신의 처지가 더 딱해 누구를 챙겨줄 형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상처가 크고 더 깊었다. 여순이 웅크린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난 천상 간호사야. 의사이면서. 여순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밤의 어둠이 지나고 낮의 온기가 밀려들었다.

평온은 길었다. 휴전이라도맺은 걸까. 그러나 여순은 움직일 수 없었다. 피의 냄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채 다시 엎드렸다. 방금 전 죽은 부상병의 팔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그러나 가만히 있을 힘도 사라진 여순은 팔을 치우지도 그 자시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마치 죽은 병사처럼. 그녀는 이제 삶과 죽음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방은 고요가 차지했다. 총소리 대신 종소리가 울렸다. 성당의 종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저 종소리를. 여순은 기억해 내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디서 들었던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마음의 안식만 얻으면 됐다. 종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보이는 십자가는 변함없었다. 세상 어디서고 같은 모양이었다. 여순은 산을 니려왔다. 십자가가 그녀를 아래로 끌어 내렸던 것이다. 부서진 건물은 그대로 두고 아침 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신자가 있는가. 여순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원주민 서너명과 노인 두 셋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깊게 고개를 숙인채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신부님도 보였다무엇을 주제로 신부님이 설교할지 궁금했다. 조용히 자리에 앉은 여순은 탁자 사이에 가지런히 놓인 성경책에 손을 얹었다. 작은 묵주는 다른 손으로 잡고 가만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신부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형식적인 설교였을까.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이 들리자 여순은 자신도 모르게 아멘 하고 외쳤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 말을 듣기도 벅찼는지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기침을 서너 번 해댔다. 멀리서도 손에 묻은 피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총알에 맞았는가. 객혈의 결과인가.

많이 아픈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서 있을 날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도 마지막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을 거다. 신도에게 하는 설교가 아닌 자신에게 들려줄 그 무엇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어디서 왔을까. 노랑머리 선교사는 이국 땅에서 이교도를 전도하기 위해 왔다가 전쟁 앞에 무력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자리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그는 습관처럼 하느님 아버지, 아멘을 끝으로 예배를 마쳤다. 원주민과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곳이 있는가.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그들의 거처가 있는지 궁금했다아직 파괴 되는 않은 성당 뒤편에는 부서지고 깨진 집 사이로 온전한 곳이 있었고 나간 그들은 그곳을 찾아 움직였다. 마치 시체가 움직이듯이 그들은 느릿느릿 걸었다.

여순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나가도 갈 곳이 없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곳이나 성경책을 펼쳐 들고 주님의 말씀을 찾았다읽고 또 읽으면서 기적이 사이판의 바다에 가득 펼쳐지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기적. 누구를 무엇을 위한 기적인가. 우스운 기도였다. 그러나 그것말고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죄는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순은 안간힘을 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했다. 그때 어깨에 어떤 감촉이 느껴졌다. 하느님이 강림하시어 간절한 여순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여순은 그대로 있었다. 못 느낀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신경을 어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앙상한 다섯 손가락의 위치를 감지했다. 하느님의 손길은 이처럼 가냘펐다.

마주친 신부님의 눈은 이승과 벌써 작별을 나눈 상태였다. 초점 없이 흐릿한 것이 죽음의 천사를 만나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여순에게 축복을 말씀을 내렸다신부님 고해성사를 해도 될까요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러번 저으면서 완강한 거절 의사를 표하고 싶었으나 한 번 젓는 것도 힘에 겨워 보였다.

그럴 시간이 나에겐 없어요신부는 그 말을 하고는 입을 여는 것도 힘에 겨운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는 느린 걸음으로 성모상 앞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걸었다. 늘 하던 익숙한 방법이었다.돌아가지 않고 지름길을 택한 것은 한 발자국이라도 걷는 길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한줄기 햇빛이 성당안으로 비쳐 들었다. 빛은 일직선으로 성당의 깊은 안쪽으로 뻗어 나갔다.

신부님은 성모상을 끌어 안지 못하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몇 발자국을 아꼈어도 그렇게 됐다. 도중에 그만두지 않은 몸뚱아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신부님도 전화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총을 맞고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그래, 신부님은 하늘나라로 갔어. 신통한 재주가 있으니 재명을 살다 가신 거야. 

신부님은 그렇게 길고 긴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신자가 아닌 사람도 그 명성 때문에 만나고 싶어 했던 신부는 소임을 다 마쳤을까. 이익을 챙기는데 남보다 뒤졌던 어진 신부는 높은 수준의 최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쓰러지는 것도 평범했고 쓰러지고 나서 숨을 거두는 과정도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남과 다른 것은 자신이 죽는 순간을 정확히 알았다는 것 뿐이었다.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종 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부는 아니다. 바닥에 쓰러진 신부가 종을 칠리가 없다. 성당의 종지기는 살아 있을까. 여순은 새로운 호기심으로 잠시 기도를 잊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었다. 폭발음이었다.

교전이 다시 시작됐다. 밥을 먹은 군인들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성당안에 울려 퍼졌다.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자의 지휘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서정성이 넘쳐났다. 쾅쾅쾅 이것은 큰 북이 울리는 소리였다. 바이올린의 음이 높아진 것은 따발총이 연달아 발사됐기 때문이다. 기관총이 탄피를 쏟아낸 것은 피아노 연주가 절정에 달한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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