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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8 18:04 (목)
이 추천서는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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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천서는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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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교육을 받고 휴의는 만주의 한 부대로 투입됐다. 열차 안에서 그는 배운건 없지만 사상이 건전한 시골 청년이라는 완용의 추천서를 읽었다. 친구는 친구다.

휴의는 점례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를 불편하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미안했다. 이 추천서는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런 친구를 둔 게 얼마나 든든한가. 그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이런 상념에 잠겼다. 그는 추천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어디로 배치될지 어느 전선으로 갈지는 이 붉은 인장이 찍힌 종이쪽지 하나로 갈리게 돼 있었다. 도장의 옆 공란에는 천황을 위한 애국심이 각별한 조선 청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 난 천황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돼 있어.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일본군은 휴의를 항일 독립군을 색출하는 토벌대의 일환으로 발탁했다. 이 정도로 뚜철한 애국심이 있는  조선인이라면 동족이라는 하찮은 이유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실제로 교관이 대한 휴의는 말을 잘 듣고 의심하지 않으며 시키는 일은 제대로 해냈다. 배우는 능력도 빨라 소대원의 이름을 외우거나 암호를 치는 것도 다른 병사에 비해 쉽게 적응했다. 처음에는 손을 꼽아 계산했으나 어느 순간 머리로 척척 해냈다. 배운 것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휴의에 교관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총도 잘 쏘고 체력도 나무랄데 없었다. 완전군장으로 한 시간 구보도 힘들지 않게 해냈다. 같이 간 동기 300명 중에서 10등 안에 들을 만큼 우수한 성적을 보이자 부대안에서도 휴의를 각별히 관리했다. 따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협도 있었다.

훈련 중 넘어진 동료가 일어나지 못해 위험에 처하면 뒤돌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부축해 함께 뛰었다. 대검을 꺼내 들고 달려드는 교관은 그런 그를 화난 눈으로 노려 봤으나 군인정신을 높이 샀다. 이런 자가 조선에도 있었나 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구보 중에 눈이 돌아가 더는 뛸 수 없는 동료를 비틀거리면서도 등에 엎고 달렸다. 그는 동료의 수치를 감춰주고 자존심을 지켜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여기서 지지 말자고 쓰러진 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넌 앞서간 그들보다 못한 게 없어. 그러니 힘을 내자고 다독였다.


완전군장으로 10킬로 미터 행군을 마치는 붉은 벽돌 건물을 돌아서 연병장에 집할 때는 낙오병이 꼭 서 너 명씩 꼭 나왔다. 그는 쓰러진 자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선두 무리에 섰던 그는 감점을 각오하고 낙오병과 함께 꼴찌로 들어왔다.

어떤 때는 함께 매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죽게 내버려 두라고, 이런 놈은 전쟁터에 가면 그날로 죽을 놈이라고 다음 부터는 죽더라도 그냥 두라는 욕바기를 얻어 먹었다. 

그것도 힘들고 귀찮으면 교관은 나중에는 머리를 땅에 박도록 하고 발로 걷어찼다. 단상의 상관은 그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그 모습을 빼놓지 않고 지켜봤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는 좋을 만큼 훈련은 지독했고 고됐다. 

도열한 나머지 훈련병들은 숨소리를 멈추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불똥이어디로 뛸지 모르는 삼엄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동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을 염려했다. 염려는 현실로 돌아왔다. 

교관과 조교는 훈련병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권투선수처럼 상대를 한방에 끝장 내려는 듯이 주먹진 손을 뒤로 밀었다가 앞으로 당기면서 명치를 가격했다. 제대로 맞은 병사는 혀를 내밀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끝내 일어서지 못하면 벼린 대검의 칼끝이 꿈뜰거리는 허벅지를 노렸다. 관동군 사령부에서 안된다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더구나 지금은 본보기가 필요했다. 저러다가 사람죽겠다는 상황에 오면 나서지 말아야 하는데도 휴의가 나섰다.

다음에는 낙오가 없도록 하겠으니 이번만은 용서해 달라고 구타가 더 이어지면 죽을수도 있다고 말했다. 교관은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신병을 받았으나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생각같아서는 권총을 꺼내 머리에 구멍을 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때로는 벌보다 아량을 보는 주는 것이 훈련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꺼냈던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딸깍하고 단추 잠그는 소리를 들으며 휴의는 충성을 다짐하는 경례를 크고 우렁차게 올려 붙었다. 그것으로 그날 일과는 끝났다. 깜깜한 밤이 곧 왔고 훈련병들은 짐승처럼 쓰러졌다.

오늘은 무사했으나 다음날에는 사망자가 나왔다. 애초 나약했던 그들 가운데 일부가 견디지 못 했던 것이다. 살려고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실려가는 그들은 병원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연병장에 이웃한 유격장 옆의 공터였다. 차출된 조선인들은 땅을 파고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묻었다. 의사의 검시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떤 무덤에는 두 팔이 밖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팔을 감출 흙이 부족해서인지 훈련병들은 알지 못했다. 상관이 지시가 없다면 두 팔은 그렇게 계속 나와 있을 것이다. 

땅을 파고 나서 돌아서는 훈련병들은 힘이 빠지기 보다는 되레 힘이 솟았다. 애국심이 부족하면 저 꼴을 당한다는 사실 때문에 애국심을 더욱 고취했던 것이다. 교관은 늘 말했다. 애국심이 부족한 자는 낙오한다. 각자의 신체 조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모든 것은 애국으로 통했다. 살아남은 자는 애국심이 투철한 자로 인정받았다.

묻히고 묻는 자들 가운데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없었다. 따라서 죽은자가 아직 전투조차 해보지 않은 훈련병들이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동무덤은 자꾸 늘어났고 나왔던 두 팔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국 팔도에서 온 장정들은 씩씩하게 시작했으나 처참하게 마무리됐다. 하라는 대로 했으나 끝내 살아남지 못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관의 말에 반대 방향으로 갔다면 죽은 자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명령을 따랐다가 그렇게 됐다. 쫄쫄 굶고 얻어터지다가 죽어 나갔다.

숨이 끊어진 그들은 바짝 말랐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났다. 얼마나 말랐는지 두 겹으로 겹쳐도 겨우 한 사람 분량이었다. 교관이나 조교는 훈련병을 적처럼 대했다. 잡혀온 포로도 이 정도는 대우는 받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만주의 일본군 훈련장은 보급사정이 열악했다. 

훈련병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도대체 애국이라는 것이 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싸우려면 먹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오지 말것을. 도망가서 숨어 살아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자괴감이 밀려 들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교관들은 죽음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살리기 위해 죽인다거나 죽어야 산다는 알 수 없는 말들을 수시로 내뱉었다. 교육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됐다. 날이 밝으면 시작돼서 어두어서야 끝났다. 아니 끝난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야간 훈련이 시작됐고 내무반에서도 교육은 끝나지 않았다. 훈련병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기진맥진한 입술에는 쟁기질로 지친 소처럼 허연 거품이 품어져 나왔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면 전선에서 견딜 수 없다. 휴의는 죽은 동료를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시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침울한 그들을 다독이는 것도 휴의의 몫이었다. 그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는 몰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이런 훈련을 받아서 살 수 있다는 말에 휴의는 공감했다. 

그런 휴의를 교관들은 눈 여겨보다가 훈련병 소대장으로 임명했다. 어깨에 붉은 견장이 올라왔고 계급장도 달렸다. 그에게는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총이 지급됐다. 그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꼈다. 견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교관은 소대원이 잘못하면 그를 닦달했고 잘하면 칭찬으로 사기를 높였다. 소대 끼리의 경쟁도 심했고 잔인했으며 혹독했다. 훈련소에 들어온 일주일 후부터는 쓰러지는 병사는 찌르려고 대검을 꺼내들었다. 교관은 권총을 쏘면서 이를 갈기도 했다. 일주일이 일년하고 맞먹었다. 앞으로 일주일을 더 버텨야 한다. 이 주간 훈련은 정말로 길고 오래갔다. 

살려면 일어나야 했고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다. 기특한 것은 이런 훈련을 받고도 훈련병들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봤자 소용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도 있었으나 일주일만 참으면 된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래 겨우 일주일이다. 그러나 그 일주일이 지났어도 전선 투입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유일한 불만은 지체하는 전선 이동이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혹독하기도 했지만 싸우고자 하는 갈망 때문이었다.

실제로 보름만에 그들은 눈이 달라졌다. 번쩍이는 살기가 가득했고 누구든 걸리면 죽인다는 의욕이 앞섰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살인의지가 채워졌고 피의 향에 길들여진 자들의 태도였다. 피 냄새를 맡지 않은 날에는 다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 두들겨 맞고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야 제대로 잠을 잤다. 꽉 조여 맨 가죽 혁대로 얼굴이 찢어져야 그날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피맛은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됐다. 짐승처럼 대했던 교관들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늑대가 그들이 원하는 최종 인간이었다. 훈련은 순전히 거기에 집중됐다. 효율을 위해 인간은 거세되고 그 자리에 짐승이 들어찼다.

넘어진 자는 불의한 자이며 그런 자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였다. 넘어지지 않고 찔리지 않는 자들은 정신적 승리감에 도취됐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 같은 것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순진한 조선 청년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주면 먹고 때리면 맞았다.

훈련의 마지막 날 저녁 교관은 휴의를 따로 불렀다.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순사 완용과는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같은 마을 친구로 자랐다고 했다. 그는 완용의 추천서가 마음에 든다며 특수부대로 차출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적은 외부에 있기도 하지만 내부에도 있다고도 했다. 같은 신민끼리 적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증오하면서 그런 놈들을 완전 소탕 하는 임무를 네게 맡긴다고 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했다. 아무나 맡는 일이 아니었다. 내부의 적은 잘 보이지 않고 숨어서 게릴라 전을 한다고 했다.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지고 저격하고 숨는다고 했다. 그런 자들을 잡는 것은 애국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다고 교관은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은 완용의 추천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인 순사 완용을 본받아 너도 훌륭한 군인이 돼라고 손을 잡았다. 거친 그 손을 잡을 때 휴의는 깜짝 놀랐다. 잡은 그 손이 얼마나 자주 자신의 뺨을 때렸고 목을 쳤는지 알기 때문에 잡는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잡은 손은 거칠기는 했으나 따뜻했다.

교관이 그 손을 흔들었다. 너를 믿는다는 눈초리가 가슴에 박혔다. 잔인한 얼굴은 사라지고 인자한 얼굴만이 남았다. 두 얼굴이 한 얼굴이 됐고 그 한 얼굴이 활짝 웃었다. 휴의는 그 순간 대일본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비로소 만났을 때 느끼는 남자의 감정을 휴의도 똑같이 받았다.

이 순간 자신은 이미 훈장을 받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완용이 고마웠다. 자신이 잘 된 것은 전부 그의 공이었다. 그는 그날 부로 독립군 토벌대의 특수소속이 됐다. 군복을 입을 때도 있었고 만주 시내를 돌때는 사복 차림이었다. 현장을 급습하고 의심분자를 색출하는 일은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했다.

그는 조선인이 조선인의 마음을 잘 알고 행하라는 교관의 말을 늘 되새겼다. 그리고 같은 신민이 돕지는 못할망정 무슨 독립이냐고 이를 갈면서 자신이 반드시 그런 자들을 일망타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독립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그들이 말하기도 전에 빨갱이를 때려 잡자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독립군 토벌은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덫을 놓고 기다리기도 했고 깊은 산속이나 밀집한 민가를 덮치기도 했다. 때로는 진창을 기어가거나 오물 속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총을 겨눴다. 사람이 아닌 짐승을 잡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그에게 이제 그런 것은 없었다. 디딜 곳은 확실히 정해졌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대일본 조국을 위한 일이었다. 휴의는 그런 일에 자신이 끼어든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그는 교관의 말에 무조건 따랐고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만주는 휴의와 어울렸다. 그가 애초 목적했던 훌륭한 군인의 길로 가는 적합한 곳이었다. 이 일에 일생을 바치기 위해 그는 흠뻑 빠져들었다. 고향과 몹시 떨어져 있어 잡념을 떨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휴의는 최전선에서 때로는 육박전을 벌여야 하는 그런 곳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그는 대규모 적과 싸우기보다는 밀정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숨어 지내는 자를 찾아내거나 그들이 밖으로 나와 무언가를 도모하기 전에 처치하는 임무였다. 그것은 엄청난 정보력과 상대의 마음을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애초 계획했던 대로 딱딱 떨어졌다. 사상 무장도 더 들어찰 곳이 없을 만큼 충만했다.

그는 독립군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다. 독립이 가당찮았고 그래서 그런 활동을 하는 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쁜 짓에 정의감이 불타올랐던 그의 심성과도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기에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복무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자고 돈도 버는 직업에 무한한 만족을 느꼈다. 그의 팀은 최근 목숨값으로 최대치가 걸린 독립군 두목격인 인물을 사살하는 임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체포하면 좋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 아니면 홀로 사람을 만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귀신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더 전의에 불타올랐다.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우고 싶었다.

독립군 수배자는 이미 한차례 본국의 중요 인물을 암살했고 그보다 더 큰 또 다른 일을 도모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사방팔방으로 그의 행적을 좇아 종일 머리를 짜내고 시내를 염탐하면서 휴의는 문득 왜 그는 그런 일을 벌이는지 궁금했다.

조선 신민이 본국의 인물을 해치는 일과 조선독립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그 가상한 용기의 원천을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일본이 조국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신민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차별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것조차도 조만간 없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 차이마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진다. 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저 믿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자연히 될 것을 그들은 자기 나라를 찾는다고 이국만리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잘못된 결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그는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일망타진이나 발본색원 같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어느 날에는 음식점을 급습하기도 했다.

팀원이 아닌 단독으로 쳐들어갔는데 한 번 늦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미쳐 먹다 만 국그릇은 아직 따뜻한 김이 올랐고 얼마나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수저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결국 휴의는 실수를 저질렀다. 급히 뒤를 따랐으나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진 적을 찾는데 허탕을 치고 그는 부대로 복귀했다.

잡을 수 있는 것을 놓쳤다는 허탈감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심했다. 분노로 그는 얼굴이 붉어졌으며 자신의 주먹을 부대장이 부르기 전까지 시멘트벽에 마구 치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마침내 부대장이 그를 호출했다. 작고 왜소한 몸집에 안경을 낀 그는 담배를 물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가 들어섰는데도 그는 아무런 기척이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휴의는 부동자세를 유지하면서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으라면 그 자리에서 할복하겠다는 자세였다. 한참을 세워둔 부대장은 옆으로 오라는 신호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재떨이를 들어 휴의의 머리를 내리쳤다. 담뱃재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오래 묵은 니코틴 냄새가 코로 스며들렀다.

동시에 흐르는 피가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보는 피맛이었다. 이 조센징 새끼, 오냐 오냐 대해 줬더니 제멋대로야. 이 새끼야 일을 그르치고도 살겠다고 찾아왔어. 거기서 죽었어야지. 놈을 놓치고도 네가 사람이야. 조센징놈은 이래서 안돼. 분을 못이겨 벌떡 일어선 그는 벽에 걸린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배신해. 칼집을 빠져 나온 칼이 피가 흐르는 얼굴앞에서 어른 거렸다. 휴의는 죽여달라고 한 마디했다. 죽여 주십시오. 정말 죽을 각오였다. 겁에 질렸다기 보다는 잘못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부동자세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대장이 갑자기 껄껄 웃었다. 그리고는 너란 놈은 분명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서 칼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았다.사태파악을 아직 하지 못한 휴의에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다정한 눈빛을 보였다. 방금전의 성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휴의의 얼굴에 묻은 재를 털고 이마의 상처도 닦은 다음 스스로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그자의 소재를 알아 냈는지 물었다. 휴의는 자초지정을 말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저주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부대장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험란했던 여정이 떠올랐는지 그는 갑자기 부산을 가보았느냐고 말했다.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내가 그곳 출신이라고 그러니 나도 너처럼 조선사람이라고 휴의의 어깨를 툭 쳤다.

조선사람끼리 잘 해보자는 심사였다. 그는 조선인으로는 최고 지위에 올랐다. 일본은 두 갈래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일진은 본토인으로 구성했고 이진은 바로 부산 출신의 부대장이 맡았다. 두 조직을 경쟁시키면서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일본 육사 생도 시절 부대장은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조선인으로의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일본인으로 그랬다.  생도 가운데 으뜸으로 뽑여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대표로 썼다. 그의 책상앞에 걸려 있는 혈서로 충성한다는 신문기사를 그는 부적처럼 아꼈다.

출정을 떠날 때는 혈서로 충성을 다한다는 그 말을 만세 삼창과 함께 부르고는 임무수행을 다짐할 정도였다. 아무도 그의 충성심과 노력을 따를 수 없었다. 일본인들도 조선인인 그가 자신들 보다 나라에 더 충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생도를 졸업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소위 계급장을 단 그는 만주 험지로 자원을 했다. 

만주에서도 그는 비교 대상이 없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부대장은 언제나 그가 한 일로 평가받기를 원했고 다행히 만주군 사령관은 그와 뜻이 맞았다. 사령관은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그를 평가했다.

이런 그가 휴의 앞에 있다. 그는 애연가 답게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서랍을 열면서는 휴의를 칭찬했다. 불을 붙이고 서럽을 열고 칭찬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괜찮아, 오늘 실수를 내일은 하지마. 단독으로 치고 나가지도 말고. 앞으로 수족처럼 부릴 부하 한 명을 붙여줄게. 수족을 붙여 준다는 말은 그것이 없어서 독립군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은 휴의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고 서랍속에서 꺼낸 한 뭉치의 돈을 휴의에게 주었다. 그것은 부대장이 주는 개인돈이었다. 가서 쓰고 와. 기분 좀 풀어. 사내 자식이 주눅든 꼴을 나는 못봐. 휴의는 감격에 겨워하면서 부대장실을 나왔다. 부대장은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열정과 강한 충성심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휴의는 상관의 칭찬을 받자 힘이났다. 혼이 나고 나서 칭찬은 그에게 약이됐고 비로소 새알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알 속의 노른자가 더는 아니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젖은 날개를 말리고 비상하는 한 마리의 맹금류였다. 

기껏해야 수 백 명 정도에 불과한 독립군을 전멸시키지 못하는 것은 대일본 제국의 수치였다. 지금 조선인이 할 일은 항일이 아니라 절대복종과 충성으로 가득 차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반역하는 무리들은 휴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말로 타이를 수 없다. 오직 소탕만이 있을 뿐이다. 

부대장에 진 신세를 갚아야 하는 의무감에 휴의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부대장의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평생동안 배운 것보다 오늘 이 시간 배운 것이 훨씬 더 많고 깊었다. 꼭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득안고 밖으로 나온 그는 돈을 쓰기 위해 술집을 가거나 여자를 찾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실수로 놓친 음식점 주변을 배회했고 그 옆의 음식점으로 들어가 주인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를 여러차례 한 후 그는 편한 마음으로 시내를 걸었다. 걸으면서도 그의 눈은 놓친 독립군을 찾아 번득거렸다. 

마침 오월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그는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한 마리 독수리였다. 매일 저축해 놓은 재산처럼 불어나는 확고한 신념은 그를 더 강하고 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면 안 보이는 곳이 보이겠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높은 곳이 어떤 곳인지 아랫사람들에게 알려 주려는 의욕이 펄펄 끊었다. 손쉬운 일을 하면서 쉽게 승리를 따오지는 않겠다. 그런일은 자신이 아니어도 할 사람이 충분히 많다. 휴의의 발걸음은 늑대를 낚아챈 독수리의 발톱처럼 강인하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한편 부대장은 이번 휴의의 단독 작전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일부 성공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보냈다. 내 후계자로 삼을만한 놈이야. 잘 키워서 필요할 때 써먹자. 그는 이런 각오로 그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휴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계산했다. 

완전히 신임한 사람에게만 털어놓은 비밀도 꺼내 들었다. 넌 조선놈이 아닌 일본놈 맞다. 우린 같은 일본놈이고 일본을 위하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태어났다. 휴의는 그 말을 듣는 지금 이 시간부로 부대장을 아버지로 삼았다. 죽을 때 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을 놓치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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