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4 23:04 (수)
하루를 쉰 기차는 다음날 예정대로 출발했다
상태바
하루를 쉰 기차는 다음날 예정대로 출발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1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차에 앉은 점례는 만감이 교차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일년도 채 안되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 일일이 손꼽아 보다도 헤아릴 수 없다.

죽 마을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아 점례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마치 백 살은 산 노인처럼 그녀는 환희보다는 여기 저기 금이 간 인생전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쁜 기억은 오래가지만 사라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자 기차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익숙하기도 했으며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점례의 의식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점례는 성장해 있었다. 기차는 느렸으나 쉬지 않고 달렸다. 점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를 생기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분은 계속이어지지 않고 자꾸 샛길로 빠졌다. 의식의 혼란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점례는 멈추기를 포기하고 중간쯤에서 구경꾼처럼 서성였다. 두려움이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런 것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금 전에 가졌던 희망같은 것도 가지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자신을 들뜨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그대로인 지금 상태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의 내면이 더 다듬어 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지난 시간의 시련이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일들이 점례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예고 없이 닥쳐도 점례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보다 더 한 일이 있을까 싶은 의구심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인생은 현재를 받아 들이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그런 이유였다. 받아 들이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 점례는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 운명이 자신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던지 순응하려고 마음먹었다. 

잘 가던 기차가 뜸을 들였다. 역의 어느 곳에서 멈춘 기차는 언제 출발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소음만 내면서 하염없이 그대로 있었다. 참을성 없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나 하고 두리번 거렸다. 귀를 세우고 누가 하는 말이 기차 출발과 연관이 있나 살폈으나 헛고생이었다. 그래도 연신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인가? 하고 말하고는 자신의 말을 들고서 대답해 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만큼 어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있었다. 시간에 쫓겨 막 올라탄 사람은 식식 거리면서 기차가 떠나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기색으로 초조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빈자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자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긴 시간 동안 덜 고생하게 될지 기댈만한 장소를 찾아 눈을 번득였다.

어떤 이들은 일행이 없으면서도 행여 알고 있는 사람이 그쪽에 있는 듯이 밀치면서 막무가내로 앞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벌였다. 짜증을 내는 소리, 무언가 자랑할 게 있는지 왁지지껄하게 옆사람과  큰 소리로 대화하는 목소리로 기차안은 그야말로 난장판과 다를바 없었다.

시골장터가 이랬지. 천웅읍내의 오일장. 그래 2일과 7일이 장날이었어. 점례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대에 부풀어 어디론가 떠나는 자들의 소음을 무심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난듯이 가방을 열고 유마 호사카가 준 책을 펼쳐 들었다. 유마 호사카. 왜 내가 여태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았지. 놀랍다는 듯이 점례는 미안한 기색으로 그를 떠올렸다. 

그는 내게 내내 친절을 베풀었다. 책을 주었고 연필과 물감과 스케치 북을 선물했다. 과자 그래 일본 과자도 그가 아니었으면 입속에서 녹아 들었을 리가 없다. 그는 점례의 모든 것이었다.  유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점례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이 기차안의 따뜻하고 소란한 기분을 점례는 맛볼 수 없었다. 기차로 끌려와 기차로 해방된 기분을 점례 말고 누가 알까. 

점례는 책의 중간 부분을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산 속 관사에서 대장과 함께 했던 그 날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친절했어. 친절했다고. 그 말을 점례는 되뇌었다. 친절. 얼마나 다정한 말인가. 그 말을 생각할 때 점례는 자신도 그래야 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친절했던 적이 있었던가. 유마처럼. 

점례는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책을 조심스럽게 처음부터 펼쳤다. 첫 장에는 유마가 떠나올 때 준 그의 부모가 환하게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 들어 있었다. 신사복을 입은 아버지는 근엄했고 통통한 어머니는 인자해 보였다. 정치를 한다고. 아버지는 참의원이라고 했다.

내조는 어머니 몫이었다. 유마는 자신은 정치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군인 체질도 아니고. 아마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어머니는 여행을 좋아했고 그림을 보는 안목이 있었으며 이야기를 잘도 지어냈다. 어머니의 피를 유마는 받았고 그 때문에 점례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 

서로는 앞쪽을 응시했으나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듯이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이었다. 사진 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을 점례는 짐작했다. 그는 왜 이것을 부적처럼 간직하라고 나에게 주었을까.

부적이라면 나도 또 하나가 있다. 떠나올 때 엄마는 다니던 암자에서 받아왔다며 흰 창호지에 붉은 그림이 그려진 작은 종이 쪽지를 주었다. 엄마도 유마처럼 이것을 잘 간직하라고 했다. 그래 잘 간직해야지.

점례는 속옷의 안쪽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낡은 종이에서 나는 특유가 냄새와 함께 붉은 색이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났다. 간직하면 나에게 행운을 줄까. 안 그래도 괜찮아. 불행만 없다면. 

점례는 부적을 다시 제자릴에 넣고는 사진 뒤에 적힌 경성의 한 가게 주소에 눈길을 주었다. 머릿속에 달달 외웠던 그 주소.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잊을 수 없다. 삼촌을 찾아가. 경성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어. 잘 챙겨 줄거야. 그 분은 나에게 아버지와 마찬가지 존재야. 

떠나 올 때 유지는 삼촌이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 삼촌에게 쓴 편지는 봉투에 담겨 있었으나 밀봉되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무슨 말을 했을까. 말한 것과 같은 부탁한다는 내용일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점례는 열어 볼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전해 주라고 하면서 읽어도 된다거나 그러지 말라고 하지 않은 이상 언제든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읽을 시간은 많고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다. 급할 게 없다는 말이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면 그 때 열어 볼까.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그녀는 경성역에 도착하기 전에 그것을 꺼내 읽어 볼 것을 확신했다. 마음 속에 이미 그렇게 결정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었다. 삼촌이 운영하는 화실은 인사동에 있다고 했다. 인사동은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화실을 어떻게 생겼을까. 아늘의 고희 화실 같을까. 혼자 사용할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을까. 점례는 그런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넌 조선 최고의 화가로 성공할 거야. 또 모르지. 파리 화랑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지도. 점례는 가슴이 더 부풀어 올랐다. 내가 화가가 된다고. 그것도 최고가 되고 심지어 프랑스 파리까지 간다고.

점례는 장밋빛 스카프를 목에 걸고 세느 강변을 활보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 강을 사진에서 조차 본 적이 없지만 강이 뭐 별건가, 물이 있고 둑이 있으면 강이지. 점례는 그렇게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강물 처럼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례는 그 말을 곱씹었다. 화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녀는 소학교 미술 시간에 화가라는 말을 처음 들은 이후로 그것이 자신에게 붙어 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주에서 그 짓을 하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화가는 점례의 인생에서 어떤 예비동작도 없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그것이 화가를 예비하는 전주곡은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의 연속이다. 점례는 경성에서 생활이 안정되면 기록으로, 그림으로 자신의 일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는 책 갈피에 낀 연필을 만지작 거렸다. 그가 잘 그릴 수 있도록 대검으로 깎아 준 연필심의 촉감이 살갗을 찌르는 듯이 느껴졌다. 유마, 그래 난 철저하게 유마에게 속해 있어. 이상한 일의 연속이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해.

점례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고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죽마을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부모님도 뵙고 싶고 휴의의 소식도 궁금했다. 완용은 순사가 됐는지 여순은 어디로 갔는지 수소문 해 보고 싶었다.

알 수 있는 단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생전에 고향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순수한 곳을 더럽혀진 내 발로 밟을 수는 없다, 뭐 이런 이유는 아니다. 그냥, 그곳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그런 곳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모를 대할 용기가 없었다. 다 숨길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하다 보면 드러날 것이다. 점례는 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거미나 더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 소름이 확 끼쳤다.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나는 조선땅에서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나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사람이다. 어린아이였거나 만주로 가기 전의 점례는 대명천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태로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나, 바로 점례여야 했다. 

설명을 해야하는 일이 점례는 싫었다. 이런 저런 했다고 거짓말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눈 더 말해보라고 다그치는 그 눈동자들은 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선땅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그런 일을 한 사람이라고 떠벌일 이유가 없다. 내가 왜? 굳이 왜? 점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됐다. 과거는 없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가 진짜다. 가짜는 가고 진짜가 오고 있는 것이다. 복대 속에는 유마 호사카가 준 약간의 돈이 있다. 경성까지 갈 여비와 혹시 잘못되면 당분간 써야 할 필수품이다. 목숨같은 돈이다. 왜 그런 생각이 이제야 났지?

점례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허리에 여러번 둘러서 맨 복대안에 든 현금을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배쪽을 눌러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띠나자 않게 가볍게 몸을 푸는 것처럼 하면서 묵직한 손의 맛을 확인했다. 

돈은 제자리에 있다. 그럼 그렇지. 그게 어디 갔을까.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을 알았는지 기차는 손님들의 속을 더 애태웠다. 무슨일일까. 혹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점례는 기차가 폭발하는 상상을 했다.

중국 항일 단체들이 설치한 폭약이 바퀴아래서 재깍 거리면서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건 이후로 철도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 심해졌다. 첩보를 받은 일제가 일일히 바퀴 하나 하나를 뜯어서 살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소란이 일어났어도 점례는 차분하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얻은 행운인데. 그녀는 유마의 말처럼 그림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곧 멈췄다. 다급한 호각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점례는 일이 터진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런 불안은 만주역에 도착해서도 실감했다. 일경은 역의 도처에서 수상한 자를 물색했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검문을 했다. 세련된 옷차림에 서양 백을 든 점례는 다행히 그것을 피하기는 했지만 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선과 후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점례는 여차하면 꺼내들 유마 호사카의 증명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고 지켜줄 유일한 무기였다. 이 자의 신분을 보증한다. 이 증이 이 증 하나가 나의 목숨을 책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 목숨이 이 종이 한장 보다 못한 것이 전쟁이 현실 아닌가.

호각 소리에 이어 한쪽에서 또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헌병이 검문을 위해 기차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또다시 호각을 불었다. 안에서 듣는 호각은 밖에서 나는 것과는 달랐다. 더 크고 더 위협적이었으며 마치 이곳에 호각을 분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는 것처럼 위험했다.

기차안의 시선이 일제히 헌병들 있는 그쪽으로 쏠렸다. 뒤이어 모두 꼼짝말고 제자리에 있으라는 고함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움직일 공간이 없을 것 같은데 헌병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일시에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모세의 기적이 따로 업었다. 헌병들은 사이로 거침없이 지나갔다. 

그들 가운데 세 명이 먼저 들어왔고 다시 세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맞은 편 통로에서도 같은 인원이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도합 12명이 한 객실을 점령했다. 그 많던 시끄러움은 일시에 정지됐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점례가 탄 호실에 수상한 자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긴박한 순간이었고 모두가 땀을 죽여 그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지켜봤다. 

그 때 한 남자가 점례에게 아는체를 하면서 급하게 인사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점례에게 조선사람이냐고 물었고 점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작지만 간결하고 위엄과 두려움 등 온갖 것이 섞여 있는 말투였다. 

점례는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 대신 위험에 빠진 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채도 좋고 인상이 부리부리한 그는 검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눈에 띄는 복장이었고 젊었으며 누가봐도 투박한 촌사람은 아니었다. 세련된 그가 일제의 표적이 된 것이다. 그도 알고 점례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 것이다. 아직 헌병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점례는 자신이 헌병이라면 바로 이 자를 끌어 내리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그만큼 그는 기차안에서 헌병이 찾는 불순범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라는 인상을 주었다. 깔끔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그가 조선 사람이고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내게 보호자가 돼달라고 간청한다. 자신도 헌병의 검문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 점례는 당황했으나 호흡을 고르며 곧 진정했다. 

천봉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순간 점례는 자신은 천점례여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결정했다. 그 남자는 감색의 작은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만주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고 고향 경성으로 가기 위해 탑승했다고 그는 말했다. 점례 귀에만 들릴 정도로 아주 나직한 소리였다.

점례는 비밀을 연달아 털어놓는 그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성은 천씨고 아버지 장례 때문에 왔으며 집은 경성이다. 그녀가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헌병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헌병은 점례의 코 앞까지 와서는 낯선 사내를 응시했다. 

점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헌병대신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다. 저런 눈빛을 점례는 알고 있었다. 더 갈 곳이 없어 구석에 몰린 조선 여자들의 표정이 바로 저 모습이었다. 나도 저런 표정이었지. 그래 저 남자의 눈에서 내 눈을 본거야. 

자신의 처지와 조선 청년의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자비를 받을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신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그를 점례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애완동물처럼 보살펴 달라는 간절함이 청년의 얼굴 전체에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점례는 흔들리지 않는 감정 조절이 필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청년의 이마에 작은 땀이 맺혔다. 헌병들은 앉은 사람은 서게 하고 선 사람은 몸을 수색했다. 그들의 눈빛 역시 간절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글거렸다. 간절한 것은 청년이나 헌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는 잡히지 않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잡는다는 주체만 다를 뿐이었다.

헌병들은 하나의 수색이 끝나면 다른 하나로 옮겨 갔다. 그 동작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얼마나 많이 했으면 저런 유연함이 나올까. 의심이 가는 사람은 바로 현장에서 체포했다. 손을 묶고 한 줄로 세웠다. 두 명이 그런 자세로 엮여 있었다. 엮인 사람들은 나는 아니라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통할리 업었다.

누구도 헌병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이 정해 놓은 질서였다. 질서를 깨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이 헌병과 같이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그들의 생은 돌이킬 수 없이 변질되는 것이다. 아마 형체마저 사라질지도 몰랐다. 

점례는 나 하나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짐을 하나 더 얹었다는 무게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묶인 채 끌려 나갔다. 아니라고 무언가 항의하는 그는 권총으로 뒷머리를 맞고 피를 흘렸다. 살벌한 풍경이었다. 으스스한 기운이 기차안을 맴돌고 떠돌았다. 

공포는 이처럼 순식간에 찾아와 기차안을 점령했다. 조선 청년이 점례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품에 든 것을 꺼내 앉은 점례의 의자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빨리 어떻게 해보라고 그는 눈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점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총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속성의 차가운 느낌을 점례는 싫어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게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복대 아래에 넣은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의 검문 차례를 기다렸다. 어쩡쩡한 태도는 되레 의심을 살 만 했으므로 점례는 가능한 한 태연하기로 마음 먹었다. 할 게 있으면 하라는 당당한 태도였다.

조선청년이 허물없는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점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는 사람만이 취할 행동이었다. 무엇에 쫒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그가 점례의 어깨에 손을 댔다. 점례는 손을 들어 그 손을 맞잡았다.

점례는 그가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과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는 두 가지 가정에서 자신은 빠져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더 위험한 것이 자신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점례는 어서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매를 먼저 맞았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선택권이 없어 아쉬웠다. 

마침내 헌병이 조선청년에게 다가오자 그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웃음 짓지는 않았다. 웃음으로 모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볼 것이 무었인지 말하면 대답할 자세를 취했다.

어떤 경우도 속이는 일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자신감을 헌병은 읽었다. 그런 표정은 위험한 자들에게서 늘 있는 일이었다. 일급 수배자도 다 저렇게 한다는 듯이 헌병은 어떤 동정도 베풀지 않겠다는 듯이 아주 사무적으로 나왔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기선제압으로 상대를 몰아 부치기 위해 작은 눈을 더 반짝였다. 그 사이 다른 헌병 하나가 점례에게 통행증을 요구했다. 그는 기차표를 꺼내 보여 준 다음 유마 호사카의 신분 증명서를 내보였다. 차표외에 증명서를 내 보인 것은 기차안에서 점례가 유일했다. 

청년을 검문하던 헌병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는 표정을 지었다. 점례가 입을 열었다. 저 신사분은 제 오빠고요. 그 말에 따라 점례에게서 청년으로 시선을 돌린 그들 중 하나가 이번에는 그에게 신분증과 탑승권을 요구했다.

그때 점례가 다시 나섰다. 제 오빠라고요. 친오빠. 신분증을 돌려 주지 않고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헌병이 대장님과는 어떤 사이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미 한풀이 꺾인 상태였다. 점례는 목소리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더 세게 나가야 한다. 혼인을 약속했다. 헌병에게 향하는 그녀의 말은 반말이었다. 

이것은 사전에 준비된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먹혀 들었는지 헌병은 잠시 주춤했다. 기차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더 확인한 단 말인가. 다른 사람처럼 체포해서 끌고 갈수는 없다. 자신에게 닥칠 경고를 그는 포승줄을 받듯 덤덤하게 받았다. 더는 질문을 하지 않고 헌병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정을 이야기 했으니 이제 앉아도 되느냐고 점례가 몰아 부치듯이 말했다. 그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겠다는 명령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헌병들은 약간 당황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대장의 보증은 그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몰라. 그들은 서로에게 이런 눈짓을 교환했다. 

지금 전황이 어떻고 유마 대장이 있는 곳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그들은 더 묻는 대신 경례를 올리는 것으로 대장에 대한 예를 점례에게 했다. 점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 것으로 경례에 대한 답을 보냈다. 

헌병은 청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더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는 투였다. 앉았던 점례가 앉은 자리에서 그 분은 나의 친오빠라고 한 번더 말했다. 네 오빠라고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점례는 묻지도 않은 이름을 대면서 천봉출이 우리 오빠 이름이라고 했다.

검문을 하던 헌병은 더 실랑이 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려 붙이고는 다른 사람 앞으로 갔다. 그러나 곧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넘어가는 찜찜한 기분은 떨쳐 내기 어려웠다. 

오랜 경험에서 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가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한번 했다고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대신 한 번 더 검문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그래서 뒤로 돌아 점례쪽으로 몸을 향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점례는 복대쪽의 권총을 의식하면서 손을 배에 가져갔다. 그것이 헌병의 의심을 샀다.

그가 다시 와서 배쪽을 보면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헌병은 말끝을 흐렸다. 순간 점례는 일어나는 반동을 이용해 헌병의 따귀를 갈겼다. 가타부타 없는 행동에 다시 소란할 준비를 하던 기차안이 얼어 붙었다. 대일본 제국 대장의 아이가 여기 있다. 그래 확인해 볼테냐. 너 어디 소속이야. 점례 소리쳤다.

선수 치는 법을 그녀는 유마 호사카에게서 배웠다. 위기를 탈출할 때는 먼저 선공을 날여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 내고 현실에서 써먹은 것이었다. 헌병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얼얼한 얼굴을 달래려는 시도도 없이 죽을 죄를 졌다며 용서를 빌었다. 오빠가 나서서 사람을 제대로 보고 검문하시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동생이 흥분한 것은 임신 때문이니 당신이 이해하고 얼른 용의자 색출을 마무리 지으라고 충고했다. 몸에 벤 군인정신을 가진 그 헌병은 그것을 상관의 명령으로 알고 따랐다.

네게 일어난 이 일이 행운일까, 불행일까. 모든 것이 정리된 즈음 점례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유마가 준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보낸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글에는 그림도 섞여 있어 기분을 전환하는데 더 없이 괜찮았다. 

오빠는 자신이 지금 목격한 그 광경에 기가 막혀 자신이 따귀를 맞은 듯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믿어지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점례에게 묻는 듯한 눈에는 당황과 존경 어린 눈빛이 교차했다.

소란은 멈췄다. 그러나 다시 이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내용으로 열차 안은 웅성거렸다. 서로를 쳐다보며 기차 테러라는 둥 테러범이 도망갔다는 둥 시끄러웠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러고는 또 잠시 조용해졌다.

테로는 없었으나 기차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출발이 지연되자 청년은 다시 불안해 졌다. 그러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데는 도움이 됐다. 이제 헌병들은 다시 기차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안심한 그는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적당한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망설였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당찬 여자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여자의 이미지가 깡그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결코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은 소녀의 단단한 심장에 주눅이 들었다. 이국만리에서 자신도 어느 정도 맷집이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초라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고맙다고 둘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빠르게 말했다. 망설일수록 다가가기가 더 어려워 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점례는 살짝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좋은 물건을 싼 값에 샀을 때 느끼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으로 됐으니 그만하라는 식으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 눈빛이 꼿꼿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 했다는 자부심이 여자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고 더구나 그대로 있기가 거북스러워 창밖으로 무심한 듯 청년은 눈을 돌렸다.

이런 일 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그런가. 책을 보고 있는 여자를 청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청년은 그녀가 자신의 삶 속에 들어와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직감했다. 바람 부는 들판의 불꽃처럼 그의 눈길이 그녀를 저절로 따라갔다.

눈이 멈춘 곳에는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반짝이는 까만 두 눈과 그보다 더 진한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 주위를 늘어진 버드나무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청년은 온 몸의 뼈가 새싹을 받치는 줄기처럼 곧추서는 것을 느꼈다. 진정으로 살아사 숨쉬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주는 충만한 생명력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혼이 창공의 별처럼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끝에 그녀가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청년은 자신의 운명도 거기에 맞춰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다가 너무 성급하게 나간 것을 알고는 잠시 부끄러워 눈을 감았다. 청년은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은 평생 두 번 찾아 오지 않는다고. 생명을 건지는 기적 같은 것은 결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눈을 뜬 채로 가벼운 한 숨을 내쉬었다. 검문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과 정보가 사전에 새 나간 것은 모두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이 자책했다.밤을 세운 계획이 아침에 탄로난다면 그것을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심하지 못한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없었다.

바보 노릇은 오늘 하루로 충분했다. 자기 한 몸 알아서 챙기지 못했다. 그가 한탄으로 마음을 괴롭게 하고 있을 때 점례는 청년이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궁금했다.

세상은 넓고 하는 일은 많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중이지만 아직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휴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그는 왜 조선땅에 있지 않고 만주에서 사는지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강인하지만 선한 눈빛은 타고나기를 악한 것과는 멀리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라도 때려 눕힐 듯이 달려들던 헌병과는 사뭇 달랐다. 상대에게 고통을 줘서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점례는 인간을 헌병과 청년 두 조각으로 갈라 놓고 청년의 앞날을 걱정했다. 오지랖 넓은 행동이었다.

벌써 한 시간 째 열차는 기침환자처럼 쿨럭 쿨럭 거리는 소리만 간혹 울릴 뿐 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떠나지 못하면 못한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객차안은 심란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내용을 알고 있는 기관사는 발빠른 사람이 아니었다. 승객을 알뜰히 챙겨주는 타입도 아니어서 상부로부터 당분간 기차는 역에 대기한다는 전달을 받고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부하에게만 알리고는 자신은 용변이 급해 먼저 하차했다.

그런데 부하는 아침에 부인과 다투고 나서 화가난 상태였으므로 화해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궁리중이었다. 그래서 승객은 사실 안중에 없었다.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고의성이 다분했다. 그러다가 그도 용변이 급해 밖으로 나왔고 마침 점심을 먹기 위해 대기하던 기장과 함께 하면서 기차가 늦어지고 있다고 남의 일처럼 말했다. 

기장은 승객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도 나무라지 않았다. 인내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그런다고 해서 자신에게 손해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두 세시간 더 기다린 승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기차는 내일 같은 시간에 출발한다. 역장은 이런 고지를 내렸다.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안 기차안 사람들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화를 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멋적은 악수를 하면서 옆사람과 화해를 청했다.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각자 모른척 했다.

점례는 내 몸이 많이 피곤해 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렸을 때 어디서 쉬어야 할지 걱정됐다. 예정에 없는 사고로 일정이 틀어지자 점례는 갑자기 길을 잃은 아이처럼 역에서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그래도 살 만 했다. 하룻 밤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때 조선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사정이 점례와는 달랐다. 청년은 자신이 여기서 삼십 분 쯤 떨어진 거리에 거처가 있으니 거기서 쉬었다가 내일 떠나는 기차를 타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아무 생각없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빚진 것을 갚는다는 투로 청년의 얼굴은 갑자기 활기가 넘쳐 흘렀다.

기차 안과는 달리 전세가 바뀐 것을 알고 점례는 그 호의를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오자 점례는 어쩌면 이것은 또다른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관계는 유마 호사카와 그랬던 것처럼 위험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해 점례는 거부하기 보다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나, 나쁜 사람 아닙니다. 알아요.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걸. 

망설이는 것으로 보아 혹시 자신의 제의를 거절 할 까 두려웠던 청년은 점례의 말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드리고 싶고요. 점례는 일어섰다.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말보다 먼저 몸이 답한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그가 하는 조선말이 거슬렸다.

일경이 쫙 깔린 역 구내에서 조선말은 생소했고 낯선 것은 경계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일본어를 쓰자고 제의했다. 청년은 머리를 극적이며 하도 반가워서 그랬다, 나도 모르게 뛰어나왔다면서 그런 지적을 받아 들였다. 

자신보다 섬세하고 조심성 있는 그녀에게 청년은 자신이 오빠가 아닌 동생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지 않고 위험을 걸고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을 할 수 있어 청년은 좋았다. 청년이 마련해 준 안가에서 점례는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그는 점례에서 경성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 어려울 때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그 말을 하면서 청년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자신을 구해준 것에는 턱 없이 못미친다는 투였다. 점례는 그만하면 됐다는 뜻으로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하루를 쉰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했다. 비록 시간은 지체됐지만 어제처럼 불발되지 않았다. 청년은 타지 않았다. 점례는 책 대신 청년을 생각하느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넓은 만주 벌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무모한 도전을 그쯤에서 멈추고 편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아직 어리고 수줍고 해야 할 일은 많은 청년은 자신의 목숨을 빨리 마치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점례가 보기에 어리석은 일이었다.

많은 것을 잃은 점례는 청년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점례는 청년인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청년이 준 종이를 펼쳐 보았다. 경성의 주소지였다. 두 개의 주소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적어도 경성에 내리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점례는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가난한 고흐가 열정을 바친 그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