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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6 17:15 (화)
그는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헤아려 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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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헤아려 보려고 애썼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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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은 간호일외에도 할 일이 더 있었다. 막사에 있는 여성들의 위생관리도 그녀 책임하에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간호병동을 떠나 막사로 내려갈 때면 여순은 가슴이 옥죄어 왔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기 까지 했다.

지금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목구멍에 무언가 걸려 있는 거 같았다. 내가 있는 곳은 저기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 오기도 했고 언제 다시 저곳으로 끌려 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순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순이 검사 장비를 챙겨들고 아래쪽 막사로 내려가고 있다. 여성들은 막사 한 곳에 이미 집합해 있었다. 그녀들은 남자 의사가 아닌 여순이 오는 것을 반겼다. 특히 조선여자인 것이 마음에 들었고 그 여자가 한 때 자신들과 같이 생활에 것에 동류의식을 느꼈다. 여순은 그들은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다.

아침 일찍 부터 서두렀기 때문에 급할 것은 없었다. 조장 언니는 여순의 입만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뛰었다. 혹시 병이라고 걸렸다는 낭패다. 모든 여성들이 그랬지만 그녀도 자신의 차례가 오자 두근 거리는 심장을 달랠 수 없었다. 여순은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어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담담하게 알려주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고 억양도 차분한 것에 여순은 자신이 의사가 다 됐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약을 먹어야 한다거나 아직은 괜찮다는 말을 전할 때마다 여순은 당사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피했으나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약을 드셔야 해요. 빠지면 안 되고요. 콘돔을 꼭 쓰세요.

이런 말을 전할 때 여순은 그녀들의 사정이 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딱한 여성 가운데는 병에 걸리는 일을 하루 이틀 쉬는 경우도 있어 약을 받아들고는 웃기도 했다. 조장 언니도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지긋지긋해. 다행이지 뭐니. 하루라도 쉰다는 게.

그녀는 여순에게 기회가 되면 지난번 가봤던 해변에 가자고 했다. 고래가 지난번에 더 많이 왔다 갔어. 군함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언니가 사라지면서 한 마디 했다. 그래, 저렇게라고 버텨야지. 어쨌든 살아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거든. 힘들어도 주변을 챙기는 조장 언니가 믿음직스러웠다. 너스레를 떨면서 다독일 때는 심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안이 됐다.

여순이 처음에 어떤 상황인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도 삶의 용기를 준 것이 그 언니였다. 이번에는 여순이 그래야 할 차례가 왔따. 언니 조금만 참아. 약 잘 챙겨 먹고. 그래야 나아. 안 그러면 위험해. 언니가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여순아 고마워. 우리 전쟁 끝나면 신나게 달리기 시합하자.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이런 대화는 여순은 물론 막사 전체에 위안을 주었다.

여순이 떠나 올 때면 그들은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손을 내밀면서 꼭 잡아 주는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안 좋은 여자들은 일에서 배제됐으며 광산에 끌려 가기도 했고 다른 모르는 곳으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병균이 몸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자신의 생명 위협은 물론 군인들에게까지 위험을 초래했다. 그래서 군 상부는 그런 여자들은 걸러냈다.

여순은 거기에 드는 여자들의 최후가 어떤 지를 알기 때문에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약을 더 세게 더 많이 주는 것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항생제 주사를 마음 놓고 놓을 수도 없었다. 주사는 아껴야 했다. 그래서 심한 경우보다는 치료 가능한 초기 병자에게 투여하는 게 원칙이었다. 간혹 여순은 그것을 어기기도 했다.

특히 조장언니에게는. 두 번 낙태까지 경험한 언니는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병까지 얻었으니 곧 위험이 닥칠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언니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 그 약속 꼭 지켜. 해변에서 달리기 시합. 희미한 웃음을 뒤로 하고 여순은 가방을 챙겨 병동으로 올라갔다.

의사는 여순의 보고를 듣고는 특이사항이 없는지 형식적으로 물었다. 여순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는 여순이 검사를 담당한 이후로도 간혹 의사 참견이라는 이유로 검진 시 동행하기도 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했다. 한 번은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인도주의니 베푸는 삶이니 하는 뜬금없는 이야기로 여순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뭔지 아니? 바로 인술이야. 환자를 대하는 태도 말이야. 넌 조선에서 왔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거야. 그래서 내가 알려주는 거야.

의사는 은근한 눈길로 그렇게 말하고는 이 정도로 내가 인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강제로 하지 않고 인격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공손한 여순은 언제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권위에 여순이 복종하자 의사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어느 날 차트를 뒤지던 의사는 필리핀행 군함에 타지 않겠느냐고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인격만큼이나 느닷없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여순은 잠시 얼어붙은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의사의 말은 그것이 권유라 할지라도 명령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여순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 망설였다. 한편으로는 기다리는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순은 망설였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물었으니 대답해야 한다. 그녀는 편한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가라면 가야지만 어떤 피치못할 이유가 있는지요. 여순은 복종하는 사람답게 공손했다. 그러면서 의사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준 선물에 상대가 만족하는지 알아 보기 위해 그도 여순의 표정을 살피고 있어 특별한 표정변화는 없었다. 

일이 되려는 조짐이 보인다. 그러나 기쁨을  그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

거기서 할 일이 있어. 여기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너 없을 때도 돌아갔어. 안 돌아가도 할 수 없고. 어, 뭐 그런 서운한 모습 보이지 마.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니 너무 아쉬워 할 필요는 없고. 아마 한 달 후면 다시 여기 오게 될 거야. 그러니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미리 상상해봐. 

그녀는 그 순간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거절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기 생활이 만족까지는 아니어도 정착돼가고 있어 잠시 탈출의 생각을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다. 그런데 알아서 배를 타라니. 배를 타고 섬을 떠나라니.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섬을 벗어 수 있다는 생각에 여순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여기서는 뚝하면 가슴이 뛰었지만 지금의 뛰는 가슴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의사가 싫으면 관두라는 듯한 태도로 재차 물었다. 

여기 일은 어떻하고요? 의사가 부연 설명 대신 묻기만 하자 여순은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이렇게 질문 형식으로 자신이 난처함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왕 나왔으니 여순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놔두고 어디를 간다고요? 이 순간 만큼은 여순의 마음이 진실이었다. 내가 빠지는 살 수 있는 환자들 가운데 여러명이 죽어 나갈 수 있다. 여순은 정말로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그것은 말수가 한 말과 같은 변명이었다. 둘은 기회가 오면 언제나 일을 우선으로 내세우고 떠나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거부하는 것으로 하자고 미리 서로에게 다짐을 한 상태였다. 섬의 인력이 간혹 필리핀행 군함에 오르는 것을 봐왔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의심을 사지 않고 빠져나가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여순은 인원이 충원된 것도 아니고 환자가 준 것도 아닌데 급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은 빠지고 싶다고 했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이곳 사정이 얼마나 험한지. 

천연스러운 말에 여순은 순간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그가 알아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쌓였다. 다행히 의사는 여순의 이런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동안의 여순에게 보냈던 신뢰는 어쩌면 맹목적인 것인줄도 몰랐다.

말수는? 내가 가면 말수는 어떻게 되지?

여순은 순간 말수를 기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말수가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말수 혼자서는 부족하다는 말을 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말수와 동행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련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그래, 이제 새로운 시작이야.  여순은 제가 안 갈 수가 없군요. 선생님 죄송해요. 일이 끝나면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여순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그 일에 찬성한다는 것을 알렸다.

의사는 이제서야 말귀를 알아 들었느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심하라고 했다. 여기보다 군함이 더위험해. 폭격을 피할 수 없거든. 도망갈데도 없어. 그러니 우리 살아서 만나자. 

의사는 이동 중에 군함이 간혹 적의 폭격을 받아 인명 피해가 난다고 말했다. 이곳에 처음 상륙했을때는  흔치 않았으나 근래 들어 적의 공세가 더욱 빈번해 졌는데 우리가 수세에 밀려서라기보다는 단지 적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의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폭격에 대비해 숙련된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 갑판 위의 쓰러진 병사들을 급한 대로 돌봐야 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했고 말수와 여순이 낙점을 받은 것이다. 의사는 두 사람을 보내면서 호의라는 것을 강조했으나 실상은 이런 위험에서 자신이 빠지고 싶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의무병만으로는 안됐다. 군의관도 부족하다. 숙련된 민간인 의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폭탄이 떨어지는 갑판 위에서 부상병을 돕는 일은 총을 잡고 돌격 앞으로를 하는 병사들처럼 위험한 일이기도해 그 위험한 일을 조선인에게 맡긴 것이다. 

지난번 유능한 의사 둘을 한꺼번에 잃은 사건에 대해 책임자였던 이곳 의사는 질책을 받았다. 의사는 전쟁터에서 병사처럼 흔하지 않았다. 장교보다 더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치거나 죽어도 타격을 덜 입을 수 있는 조선인을 선택했던 것이다. 

조선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자가 질책을 받을 일은 없다. 그가 호의를 베푼 것은 이런 이유도 있었다. 의사는 뒷걸음질 칠 생각 말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가라고 조언했다. 그는 요즘들어 무슨 책을 읽는지 뜻모를 말들을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그 앞에서 싫어하는 내색을 할 수 는 없었다.

그즈음 광산에서는 폭동의 조짐이 일었다. 인부들의 일은 고되고 다치고 죽는 일은 허다했다. 그러나 먹고 자는 것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노예 생활도 이처럼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수는 그 자신이 그것을 보고 직접 겪었기 때문에 참상을 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수술칼 대신 곡괭이 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폭동은 벌써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전쟁이 심해지면서 군수품은 물론 식량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돌아가는 배급은 열악했다. 뼈만 앙상한 몸으로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자포자기 심정에 빠져들었고 폭동까지 생각하게 됐다. 

말수는 그런 낌새를 그들의 숨기는 듯한 눈초리에서 감지했다. 폭동이 일어나면 조선인인 말수도 힘들어진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가 사건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노무자들을 늘 치료하면서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았다면 밀고하지 않는 죄가 클 것이다. 

말수는 그런 일이 일어 날지 모른다는 분위기를 상관에게 전하고 조선인들의 처우에 대해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폭동까지는 아니어도 일본인을 해치거나 도주하면 전투력 손실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자 의사는 네가 그 일에 나서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며 그들의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조선인들은 너무 욕심이 과하다고 했다. 나중에 고향에 들어가면 수북한 군표로 부자가 되지 않으냐고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말수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미리 보고했으니 나중에 일이 벌어져도 책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배를 타기 전에 폭동이 실제로 발생하면 어떤 사태로 발전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하는지 그러기 전에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전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의사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전투보다는 부상병 치료가 우리의 책무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늘 한 쪽 귀는 다른 쪽에 열어 두고 있었다. 부상병을 통해 전황을 짐작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도 하면서 전쟁이 어느 쪽에 유리한지를 가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도 목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즈 대신 총을 집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을 그는 두려워했다. 새장을 벗어나려는 본능은 말수나 여순이나 일본인 의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의사는 그 자신이 배를 타는 것을 꺼려했다. 원했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든지 필피핀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섬을 나가는 것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와 여순의 생각은 달랐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지상의 지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여순은 일과를 설치고 있다. 군함 승선이 확정된 이후로 몸이 붕 떠 있었다. 그렇다고 환자를 대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열심히 그들을 돌보는데 진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시간은 더디게 지나갔다. 

환자들은 더했다. 임시로 수술하고 진통제로 버티던 그들은 밤에 고래고래 소리칠 것이다. 자신도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젖먹던 힘을 다해 고함을 친다. 그런 병사는 하루 이틀은 더 살 수 있다. 아무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한다.

여순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리치는 병사보다는 숨죽인 병사들을 더 챙겼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손 한 번 잡아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취약을 줘요. 너무 아빠요. 정말 너무 아픈 목소리조차 들이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그 축복하는 약이 부족하다. 그래서 여순은 이곳 생활이 끔찍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윽고 죽음이 찾아온다. 자신의 생이 다했다는 것을 아는 환자는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한다.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내 이름은 와타나베입니다. 고향은 오사카고요. 그곳에 어머니가 살고 있어요. 전쟁이 끝나면 이곳으로 편지나 보내줘요. 주소를 적은 종이를 전해 주기도 전에 병사는 숨을 멈췄다.

이것이 인간이다.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의 죽음이 지나가는 밤이면 여순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자문에 빠져들었다. 의사처럼 여순도 철학자가 되고 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나온다.

인간은 뭐지? 사는 것은 또 뭐고. 의사의 뜬금 없는 말은 자신이 지껄이고 있다. 이러다 미칠거야. 제정신이 되레 이상한 거지. 여순은 정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에 아침을 맞았다. 어두워서 보지 못한 밖의 풍경을 보리라. 여순은 그런 기대로 이미 해가 들어찬 막사 밖으로 나왔다.

습한 공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축축한 기분이 들었으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해는 불쑥불쑥 불 위에 떠올랐다. 마치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그것은 밖으로 나와 크게 요동쳤다. 

그녀는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을 단단히 붙잡고 그것이 오늘 저녁 일지 아니면 다음 날에 찾아올지 기다렸다. 기다림으로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해변 저 멀리 정박해 있던 군함이 그 배는 아닐까. 괴물처럼 음산하게 보였던 그것이 이제는 애타게 기다려지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 날 오후 말수의 예상대로 조선인 노무자들의 반란이 있었다. 말이 반란이지 단순한 소란에 불과했다. 일본인 당직자는 그 날의 일지에 서너 명이 고함을 치며 달아난 작은 소요 사태라고 적었다.

그런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적이지 못했다. 겨우 일본인 경비병 한 명을 부상입히는데 그쳤다. 반면 그들은 현장에서 두 명이 총에 맞아 죽고 달아난 한 명은 체포됐다.

조선인을 포함한 광산의 인부들이 전부 한 곳에 모였다. 본보기가 필요했다. 군인들 가운데 한 명이 총 끝에 달린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그것을 앞으로 세우자 날선 검의 끝 부분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나무에 묶여있는 그에게 다가섰다.

노무자는 그가 오는 것을 느꼈으나 무슨 짓을 할 지는 알지 못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절뚝 거리며 힘겹게 조선인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자신을 다치게 한 조선인 노무자를 쳐다봤다.

분노가 태양보다 더 크게 일렁거렸다. 그는 고함을 치면서 대검으로 닥치는대로 쑤셔댔다. 한 두 번의 큰 비명이 있고 나서 조선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부상병이 쓰는 악악 거리는 소리만이 모여 있는 군중 사이로 퍼져 나갔다. 

조선 노무자들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살점이 뜯기고 찢겨 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자는 소총의 개머리 판이 날라왔다. 처참한 광경이었고 그 모습을 말수도 담담히 바라 보았다. 

도망치다 잡혀 죽은 노무자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작업 중 부주의에 따른 부상에 의한 과다 출혈이었다. 형식적이었지만 당직자는 노무자 죽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의사는 사인했다.

반란은 막사의 의사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짐승만도 못한 그들도 사람이었고 그래서 반발했고 저항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 믿었던 그는 그 사실을 보고도 이번에는 믿기 어려웠다. 그는 싹을 잘라야 한다고 씩씩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더 세게 나가야 짐승의 본능을 꺾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전쟁도 어려운데 조센징 노무자들까지 이러니 지휘관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권총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수를 닦달했다. 네가 십장이었잖아. 십장, 십장이 그것도 책임못져. 미리 알았어야지. 몰랐으면 넌 자격이 없어. 말수는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의사인 내게 그는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네 놈이 다치면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할 텐데, 너 그러면 천벌 받는다. 그러나 지휘관은 말수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말수의 상관인 의사가 들어왔다. 지휘관은 의사에게 말수를 맡기고 나갔다. 

잘 좀 해 응. 다음에는 이러기 없기.

이 짧은 말을 남기고 지휘관은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분을 삭이기 위해 서랍장을 열어 술병을 꺼내 들었다. 분이라기 보다는 소리쳤으니 목이 말랐던 것이다. 핑계김에 술로 자신을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잔도 없이 병째 들이킨 그는 곧 취기가 올랐고 취한 기분을 또 달래기 위해 부관을 불러들였다. 부관과 주거니 받거니 하던 그는 나갔다가 곧 의사를 데려왔다.

그리고 몇 마디 의사에게 귓 속말을 하더니 돌아섰다. 의사는 정중하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지휘관이 나가는 의사를 돌려 세워 표정을 봤더라면 그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의사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무례한 놈. 뭐, 이런 것도 부탁이라고 들어줘야 하나. 

병실에 온 의사는 환자를 돌보고 있는  여순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휘관이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귓속말을 했다. 차마 마주보고 할 수 없다는 투였다. 여순은 돌아봤다. 의사는 초점 없는 여순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여순은 오늘 밤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는 내일 아침 일찍 군함을 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휘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싫은 기색도 할 수 없었다. 배를 타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지휘관의 청을 들어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는 자신의 독점물이었던 것이 타인과 공유하게 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씁씁했다. 그는 남자였고 그래서 지휘관이 미웠다. 의사는 뱀장어처럼 미끌거리는 지휘관의 얼굴에 총알을 박고 싶었다. 조국의 승리만 아니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안 그러면 말로라도 네 머리에 총알을 박고 싶다,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꽝 꽝, 그는 발로 바닥을 차면서 총알이 나갈 때 내는 소리를 입으로 내뱉었다. ‘피융 피융.’ 도대체 지휘관이라는 자는 남의 기분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가. 장교용으로 배정된 여자들을 놔두고 굳이 여순을 꼭 지목한 것에 의사는 배신감을 느꼈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당해보지 못한 경험에 의사는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분한 것은 여순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여순은 어떻게 해야 옳은지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그녀가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제의를 왜 거부하지 못 했느냐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성병을 핑계로 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는 당황한 나머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 병 있어요. 여순은 의사가 하지 못한 말을 울음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지휘관에게 전달하라는 뜻이었다. 의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사실은 지휘관의 명을 따르지 말라는 거부 의사 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의사는 옷을 고쳐 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요한 것을 놓고 왔는데 급히 찾으러 가는 표정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그가 어떤 답을 가져올지 여순은 미리 짐작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결정된 것을 이제는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의 거부는 죽음이외에는 없었다. 

의사의 재방문에 지휘관은 내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는 얼굴로 나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걱정말라며 되레 의사를 다독였다. 만약 그러면 네가 고쳐주면 되지 않느냐고 지휘관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의사를 돌려보냈다. 

여순은 지휘관이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말수가 준 권총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사가 자리를 빈틈을 타 약병 몇 개를 챙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느냐고 독자들은 물을 필요가 없다. 궁지에 몰린 여자는 못한 것이 없다. 

독자들 중 일부는 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는 위험한 행동이니 당장 멈추라고. 눈 한 번 꾹 감으면 그만이라고. 어떤 사람은 차마 밖으로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하고 여순을 설득하려고 했다. 

사람은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힘이 생길 때가 있고 이성에 앞서 어떤 주체할 수 없는 자존심에 전신을 맡겨 버릴 때가 있는 법이다. 나를 거꾸러뜨리면 너도 거꾸러져야 한다. 여순은 한 번 먹은 의지를 되돌리지 않고 다지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여순은 안 하던 분칠을 하고 의사가 언젠가 내민 화장품도 발랐다.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옷은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이른 아침에 남편 생일 꽃을 사러 가는 부인의 차림새로 변신한 여순은 예뻣다. 손거울 속의 그녀는 뽀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드러나는 속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심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이전의 서투른 간호사를 독자들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녀는 무서운 이 위안에 대한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자, 두번째 청을 받은지 삼 십 분이 지났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그녀는 멀리 있는 권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신 가까이 있는 약을 챙겼다. 여러 약물을 혼합하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여순은 의사에게 새벽 5시 출발이면 지금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애써 웃음 지었다.

어색한 순간을 깨기 위해 그는 길어야 보름이면 올 텐데, 뭐 작별까지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눈으로 여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손을 잡기 위해 의자를 돌리고는 잠깐 아무 말 없이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 행동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여순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순이 안쓰럽다. 일본에 있는 부인에 대한 생각은 그 순간 들지 않았다.

그에게도 요즘 들어 부쩍 죽음의 공포가 수시로 찾아오고 있었다. 의사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듯이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로 여순을 바라봤다. 살인죄를 짓고 사형 구형을 외치는 재판관을 응시하는 피고인의 심정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의사를 덮쳤다. 그도 나처럼 여순을 부르는구나. 그는 체념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계급이 높은 그를 의사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여순이 의사를 상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의사는 돌아 나오면서 앞으로 솟아 엄격해 보이는 지휘관의 이마를 떠올렸다.

의사는 침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떠오른 나쁜 생각에서 도망치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지휘관을 상대로 대들어 봤자 창피만 당할 뿐이다. 저 여자는 내 여자요. 의사는 잠꼬대 같은 말을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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