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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 처음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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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 처음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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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도 해본 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 벌써 
두 번의 낙태를 감행했다. 처음 수술한 여자는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두번째 여자는 죽다 살아났다. 순서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됐다. 다행이 목숨을 건진 그녀는 그들이 보기에도 딱했던지 병사들은 열흘 간 접촉 금지 대상이 됐다.

살아난 그녀가 바로 조장이었다. 여순도 그 사실을 이리저리 주워들은 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수는 여순에게서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늦은 밤 잠깐 쉬고 있던 여순에게 말수가 다가왔다. 세번째 인데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던 것이다. 

일본인 의사에게 말했다. 바로 내일이라도 하자고 하더라. 너만 괜찮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여순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 의사의 수술 성공확률이 절반이라고 말했다. 두 번 수술해서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았어. 내가 살면 성공 확률이 확 올라가겠지.

말수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기 보다는 알아 듣지 못한 듯이 한 귀로 흘려듣고는 어쨌든 네 배가 불러오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의사가 무척 바쁘거든. 네가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특혜는 없었을 거야.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여순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래 나는 별난 여자라서 남들보다 앞서 수술을 받는 거야. 빠를수록 좋지. 그녀는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그러기도 했다. 애초부터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낼 생각은 없었다. 자신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 아기는 꿈도 꿔본 적이 없다. 다행인 것은 그가 두 번째는 성공했고 자신이 세 번째이니 어렵지 않게 끝날 것을 믿었다.

아프지 않게 끝날거야. 의사가 매우 바쁘거든. 말수는 의사가 바쁘다는 이유를 거듭 말했다. 거기에는 나도 의사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여순은 여순은 알았다. 

말수는 가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진통제 한 알을 따로 챙겨 여순에게 주었다.
의사가 마취도 안 할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병상에서 이것 구하기 힘들어. 그러니 의사 몰래 혼자 있을 때 먹어둬. 아픔이 조금은 덜 하겠지. 말수는 이곳에서 낙태는 수술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니 귀중한 약을 함부로 쓸 이유가 없다는 것. 본국에서 들어오는 양도 적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런 작고 하찮은 일을 하는데 그렇게 귀한 약을 처방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순도 그러리라고 짐작한 내용이어서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이별은 오래 끌면 낭패다. 모든 이별은 이별인줄도 모르게 끝나야 한다. 특히 나에게 온 생명이라면. 여순은 잠시 울컥했다. 생명이라는 생각, 그 생명이 자신의 몸에서 자라고 있다는 생각에 여순은 불안했다. 

정말 아플 때 써. 더 아플 수 있으니 참을 수 있으면 끝까지 참고. 말수는 여순이 쉽게 진통제를 써서 나중에 곤욕을 치를 것을 염려했다. 그는 여순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했다.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다만 여순이 아픈 것만을 위로했다. 

그는 진통제 하나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는 일부러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기를 지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런 것이라면 이렇게 금방 끝나는 것을 괜히 걱정했다. 의사는 세번째여서 인지 거침이 없었고 여순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차 생각할 겨늘도 없이 몸을 추스렸다.

그러나 여순은 지울수 없는 상처를 몸에 지니게 됐다. 이것은 지금까지 겪은 일을 다 합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작은 생채기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생명을 죽인 죄에 대한 벌을 받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겨우 이틀을 쉰 다음 바로 간호 업무를 시작했다. 쉬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저런 눈치 때문에 시키지 않아도 해야할 것을 찾아 움직였다. 그런 그녀는 의사는 눈여겨 봤다. 그날 이후 자신을 대하던 의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힐끔힐끔 보는 눈이 대놓고 이마의 땀처럼 거북스러웠다. 

그 눈빛을 보면서 여순은 말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에게 언짢은 기분을 주어서는 득 될 게 없다. 사로잡힌 그의 눈길에서 그녀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말수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관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너만 괜찮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는 신호인가. 여순은 차라리 가부를 말해 줬으면 싶었으나 자신이 말수라고 해도 의견을 내는 것은 불가했다. 

그녀는 수시로 의사에게 불려갔다. 간호 업무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차트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새로운 약품을 정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정말 하루가 길었다. 막사에서는 그런대로 일과 휴식이 구분됐으나 이곳에서는 따로 그것이 없었다.

여순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런 띠를 내지 않았다. 쉴 때도 허리를 돌리거나 어깨를 주무르고 제자릴 뛰기를 했다. 운동으로 몸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지 그녀는 잘 버티고 있다. 쓰러질 것 같은데도 용케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아픈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녀는 늘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보내는 눈빛을 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되레 괜찮았다. 그렇다고해서 여순이 먼저 나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한 먼저 모른 척 했다. 부탁을 들어준다는 자신의 선심을 그가 받도록 한 것은 자신에게 그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도 이렇게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여자는 없다는 투로 여순을 칭찬했다. 충분히 만족한 그는 때에 따라서는 여순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처음에 용희는 없다고 잘라 뗐다. 불쑥 말하면 가벼운 여자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의심 많은 자를 안심시키려면 부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됐다고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간호 업무를 더 잘하는 것이라는 입에 바른 소리를 낼 줄 알았다. 사실 필요한 것도 없었다. 먹고 자고 하는 일은 막사와 견줄 수 없었고 일도 손에 익어가고 있어 일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내 부탁은 탈출이다. 여기서 빠져 나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내색이라는 것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힘든 내색, 자신이 한 일의 결과가 좋아도 전부 의사에게 공을 돌렸다. 내가 한 일의 좋은 결과는 모두 의사 덕분이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은 어떤 이득을 바래서가 아니다. 의사의 여순에 대한 믿음은 깊어갔다. 

어떤 때는 거부해도 자꾸 돈을 주었다. 미안하니 받아달라고. 전쟁이 끝나면 다 필요하다고. 여기서는 쓸모가 없지만 당장 필리핀만 가도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면서 의사는 간혹 돈을 여순에게 찔러줬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모아 두었다. 그러면서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헌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턱도 없겠지만 군용기 사는데 보태고 싶어요. 의사는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애국심을 본받아라. 그는 자신에게 하듯이 돈을 내려다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것은? 저에게는 필요없어요. 여기 놔두면 분실할 수도 있고요. 국방헌금을 하고 싶어요. 여순은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이렇게 덧붙였다. 처음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지 조금 화난 표정의 의사는 여순의 진심을 알고는 그녀를 더욱 신뢰했다.
 

그는 돈을 집어넣고 대신 전표 책을 가져오더니 수술 때문에 이틀 쉬었던 그 날에도 일한 걸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받을 돈의 목록이었다. 여순은 그렇게 하는 의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일본의사는 양심적이군. 

여순은 그러나 그것에 대해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로 조선으로 가야 돈이 쓸모가 있는 것이지 여기에 갇혀 있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휴지에 불과한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여순은 다짐했고 그 결과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다.

여순이 힘이들수록 환자가 늘어날수록 그녀의 간호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이제는 간호를 넘어 외과 의사를 해도 될 정도였다. 웬만한 내과적 처지도 의사의 지시 없이 쓱쓱 해냈다. 의사는 자신이 할 일도 피곤하면 여순에게 맡겼다. 물론 말수의 지시가 따라야 했지만 의사는 여순을 말수만큼이나 믿었다. 

시장바닥 같은 병상을 이리저리 뛰듯이 옮겨 다니는 여순을 보고 의사는 저런 간호사라면 세 명의 몫은 너끈해 해낼 수 있을 거라면서 전쟁이 끝나면 데려가서 조수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조선인들이 무식하고 게으르다는 말은 다는 맞지 않아. 언제나 예외는 있거든. 의사는 그렇게 여순을 예외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그 예외적 인물이 병실로 들어가면 환자들의 비명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누군가 옆에 오면 참았던 아픔이 도지는지 죽을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외쳤다. 한쪽 팔이 나가 절단 수술을 받은 하급 병사가 여순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마취약도 없으니 그가 부른다고 해서 달리 어떻게 처치할 것도 아니지만 여순은 그 소리를 방금 들은 것처럼 서둘러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는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몸을 떨었다. 감염이 심각한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환자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수술 환자가 덥지도 않은데 이마에 땀을 흘리고 떤다면 죽은 목숨이니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여순은 그의 생이 일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땀 사이로 앳된 눈동자가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여순은 환자의 손을 잡았다. 차디찬 손은 시체와 마찬가지였다. 살 수 있는 가망은 제로에 가까웠다. 좋은 항생제가 있다면 이 환자는 살아날 수 있을까. 손을 잡고 여순은 잠시 환자의 입장이 됐다. 그 때 옆자리의 환자가 자신도 보아 달라고 엄청난 소리로 신음을 냈다. 광산에서 다리를 다친 조선인 환자였다. 그는 살 가망이 있었다. 파편이 뼈를 건드리지 않고 근육을 찢어 놓았다. 상처가 아물면 그는 다시 광산으로 가야 한다. 의사는 눈짓으로 저 놈은 산다는 표시를 했다. 여순이 보기에도 찢어진 근육외에는 뼈에는 이상이 업었다. 곧 상처가 아물거에요. 살아서 고향땅에 가야지요. 조선인 인가요? 그가 물었다. 여순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홍성입니다. 충남 홍성. 알고 있나요? 알아요. 저는 보령입니다. 환자는 살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는 더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여순은 냉정하게 등을 보였고 일어나서 다른 환자 쪽으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역겨운 진물 냄새에서 해방되자 여순은 전쟁은 고름이라고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다. 진짜 그렇다. 전쟁터 보다 더한 곳은 없다. 여순은 날마다 진저리쳤고 날마다 용기를 냈다. 매일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여순은 매일매일 그렇게 환자들과 씨름했다. 습관은 묘한 것이다. 익숙하다 보니 어느 날 병실이 한가할 때면 여순은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망함을 느꼈다. 환자의 아우성 없는 병실은 생동감이 없다. 

냄새로 소독을 대신한 여순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누군가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환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 좀 봐다라고 내가 더 아프다고 그러니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서 오래도록 간호해 달라고 한결같이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저들에게 쓰임새가 있구나. 여순은 그것이 고마웠다.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출입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후송병이거나 광산 사고자일 것이다. 비명과 울부짖음. 그것은 해변의 파도처럼 갑자기 밀려왔다. 죽마을 오일 장 같은 시끌벅적한 것이었다. 물건을 사라고, 내 목숨을 사가라고 죽기전에. 내 것이 싸고 좋다고 고함치는 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그쪽으로 쏠렸다.

이곳은 죽마을의 오 일 장날이다, 여순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장날을 늘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죽마을 아이뿐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공연히 손가락을 꼽으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무언가 구경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의 구경거리, 너덜거리는 살점. 매달린 돼지고기.

장돌뱅이여서가 아니다. 구경거리가 있는 날을 놓쳐서는 안 된다. 노동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유일한 길이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한 시간 이상 데려가 달라고 운 결과로 겨우 호떡 하나를 얻어 먹을 때 여순은 행복했다. 입에서 군침이 도는 순간 더 큰 비명이 귀를 울렸다.

여순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샛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군인들이었다. 황색의 옷 사이로 굳은 피 위로 새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인근의 전투에서 당한 황군들이었다. 계급은 대개 보잘 것 없었다. 언제나 이런 중상을 당한 환자는 대개 하급병들이었다. 고급장교가 다쳐서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환자는 장교였다. 계급장이 달라서 여순은 금새 알아챘다.

장교는 팔을 나누지 못했다. 단순히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쪼개지고 갈라져 거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로 너덜거렸다.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절단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팔 뿐이 아니었다. 다리 쪽에서도 피가 비처럼 흘러내렸다.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정도 상처면 한 시간 이상 살기 어렵다.

여순은 직감적으로 이런 판단을 내리면서 병사의 눈을 쳐다봤다. 얼굴은 의외로 말끔했다. 파편이 팔을 치고 다리 쪽으로 내려간 결과였다. 어디서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이다. 젊은 얼굴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죽는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작은 몸, 가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쌍거풀이 있고 짙은 눈썹. 누구더라.

여순은 상처를 헤집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녀가 막사로 끌려온 날 처음 왔던 바로 그 사내였다. 첫 남자여서 일까. 이후의 인물들은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그 사내 만큼은 간혹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계급이 제법 있었다. 사병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여순은 알았다. 지금은 소대장으로 전투에 앞장서다 이 꼴이 됐다.

여순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제발 죽기전에 아는 눈으로 나를 보지 않기를 원했다. 너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여순은 얼굴을 돌리고 다리쪽의 상처를 살폈다. 

그가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여순을 잡으려고 했다. 여순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 묻은 입이 무슨 말을 하려고 달싹거렸다. 차마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여순은 입가에 나온 피를 씻어 주었다. 조금만 참아요. 살 수 있어요. 그때 소대장의 얼굴에 얇은 미소인지 비웃음인지가 슬쩍 스쳤다.

그도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여순은 부끄러웠다. 자신을 아프게 했던 그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죽을 운명이다. 자신도 따라서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았다. 여순은 침묵으로 그를 벌했다. 겨우 입을 뗀 소대장은 허튼소리 할 시간이 없다는 듯 어렵게 입을 열고 말했다.

‘일본에 있는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

그가 눈짓으로 윗주머니에 그것이 있으니 꺼내 달라는 시늉을 했다. 사진 한 장이었다. 가족이 모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뒤집자 여백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그가 편지라고 말한 것이었다. 여순은 슬쩍 그것을 보았다. 

‘여기서 조선 여자를 만났는데 아주 예뻐. 전쟁이 끝나면 함께 살거야. 엄마, 그 여자를 내 아내로 맞아줘.’

전쟁터에서 소대장은 여순을 잊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런 편지를 사진 뒤에 남겼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일본 주소를 적어 놓았다. 여순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게 나인가. 조선 여자라고 부른 여자가 나 인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네가 전장이 아니라면 이런 편지를 썼을리 없어. 여순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화가 났다. 

‘난 사무라이야, 한 번 한 약속은 지켜. 이 눈이 그걸 증명해.’

그 말에는 건성으로 듣지 말라는 다짐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여순이 응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여순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그는 숨을 헐떡인다. 그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멈췄다 이어졌다 반복하는 시간이 짧다. 

절대 회복할 수 없다는 것, 그도 죽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입은 고정됐다. 눈도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아닌 척했다. 자신을 억제할 수 없어 체면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여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무라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남의 것이었으나 이제 그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고개를 들수 없다. 부서진 팔과 다리를 둘러볼 수 없다.  소대장은 그러나 바로 죽지 않았다. 힘겹게 무슨 말인가를 더 뱉어냈다. 여순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리면 들으려고 했다. 
소대장의 얼굴이 납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간 얼굴은 창백해 졌다. 여순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 여순 자신도 알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표현인지 아닌지 여순은 알 수 없었으나 그것 때문에 답답하지 않았다. 

그는 끄덕이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진 그에게 용희는 동정의 손짓 대신 병균이 퍼지지 못하도록 시체를 어서 치우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지, 시체는 생명과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여순이 일어서려고 머뭇거리자 의사가 다가왔다.

다른 곳으로 가봐. 죽은 사람에게 허비할 시간 없다. 의사가 팔꿈치로 그녀를 꾹 찔렀다. 의사는 정확했다. 그의 행동은 매정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다. 여순은 고병실 창가로 가 서쪽 바다를 내려다봤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석양이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소대장의 피보다 더 붉고 검었다.

일이 되려는지 필리핀행 호위함 승선은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이곳 일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추가병력이 필요했다. 병력과 노무자는 물론 위안부도 부족했다. 병든 자가 아닌 튼튼하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건장한 남자와 모집한 여자를 데려올 책임자로 말수가 선발됐다.

처음에 그는 거절했다. 여기 일이 더 급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자신이 의사 말에 반대 의사를 한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지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러나 용기를 냈다. 의사에게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의사는 자신의 뜻을 더 세게 밀어붙였다. 감히 조선인 주제에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괘씸했다. 가라면 가야지. 그럼 너말고 내가 갈까. 의사는 이렇게 큰 소리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의사 정신과 헌신에 대한 믿음은 커졌다.

조선인으로 자신보다 더 의사 일에 적극적인 그를 의심하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의사는 자신의 말이 부탁이 아닌 명령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너도 알다시피 광산 노동자가 많이 부족하다. 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대규모로 조선과 대만에서 학도병들이 온다. 거기다 위안부까지. 네가 할 일은 하찮은 게 아냐. 

말수는 이곳이 걱정되지만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아쉬운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여순 이었다. 그녀와 같이 갈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여자를 고르는 것은 자신이 자신 없다고 둘러대 봤으나 의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순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거절했다. 의사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고 말수는 거기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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