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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여순은 식욕이 갑자기 왕성해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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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여순은 식욕이 갑자기 왕성해 지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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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오던 사람이 안 오자 여순은 은근히 기다려 지기도 했고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그래서 다른 것은 안중에 없고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다면 다쳤거나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 일 수 있다.

아니면 일이 발각됐을지도 모른다. 여순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주저 앉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야 하는데 좀처럼 되지 않았다. 여순에게 말수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여순은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말수의 무거움을 새상 느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오늘은 오겠지, 내일은 틀림없이 소식을 가져 올거야. 이렇게 다짐했으나 그 다음날도 기대는 허사로 돌아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순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탈출은 고사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그에게서 여순은 여기서 살아가는 법,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말수 덕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끌려가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이제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에 매단 쟁기처럼 자신은 그가 가는데로 가야한다. 그런데 소는 없다. 여순은 자신의 어깨에 걸친 멍에를 끌어 줄 사람이 없자 낙담했다.

여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소는 오늘도 음메하고 울지 않았다. 그녀는 멍에를 스스로 끌 힘이 없었다. 멍한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은 초점 없이 상대를 바라봤고 문 밖의 풍경도 더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여순은 자신의 눈을 비벼댔다.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연기가 동시에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여순은 죽마을에 있을 때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어느 연기가 자기 집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인지 알아 맞출 수 있었다. 눈설미 하나는 타고난 여순이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사람보는 눈을 가졌고 그 사람과 자신을 맞출 수 있었다. 말수는 거칠었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했던 오래 감출 수 없다는 말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이거는 오래 감출 수 없어. 급한 건 나니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그 오래가 얼마의 시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여순은 말수가 정말로 하루 이틀내에 오지 않으면 숨겨둔 권총이 발각 될 것 같은 불안에 떠밀려 이리저리 해매는 자신의 꼴이 미웠다. 연기는 산불이었다.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꺼질 것이다. 날이 흐려오고 있다. 비가 곧 쏟아진다.

산불 걱정 따위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에는 신경쓸 이유가 없다. 다시 말수에게 집중하자. 여순은 손으로 이마를 집었다. 그는 바쁠 것이다. 나의 시간을 그에게 주고 싶다. 하찮은 내 인생은 이제 그의 것이다. 그런 생각을 벗어날 수 없자 그가 오지 않는 날은 군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시간보다 더 불안했다.

성경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한시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시골 성당에서 보았던 예수를 떠올렸다. 나무에 매달려 못 박혀 죽은 그의 고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예수 대신 말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하느님보다 더 오랫동안 여순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다정한 속삭임, 탈출하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광야를 탈출하는 거야. 거칠고 삭막한 이곳을 빠져 나가는 거야.

간절한 기도한 통한 것일까. 문이 벌컷 열리고 말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냉큼 손을 잡고는 빨리 이곳을 뜨자고 재촉했다. 그리고는 권총하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 여순이 숨겨 놓은 곳을 가리켰다. 말수는 그것을 꺼내 품 속에 넣었다. 

어서 가자. 그의 억세고 다급한 소리에 하느님 아버지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렸다. 내민 손을 잡고 뒷문을 통해 다급히 숲으로 들로 마구 달려나갔다. 서라 움직이면 쏜다. 외치면서 거총 자세를 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여순은 간단히 무시했다.

애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태도로 말수는 잡은 여순의 손을 놓치 않고 더 빨리 달렸다. 그러면 여순도 뒤지지 않고 보조를 맞췄다. 다리기라면 자신 있었고 방에서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던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제자리 뛰기를 했던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고 있다. 

뒤따라 오던 병사들이 멀찍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들은 적의 눈을 피해 구덩이처럼 생긴 참호 속에 몸을 숨기는데 성공했다. 씩씩 거리는 숨소리를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으로 느꼈다. 

참호안은 방금 군인들이 떠났는지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먹을 거리도 있었다. 여순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깡통을 따서 서로 조금씩 나눠 먹었다. 다시 달려야 한다. 떨어졌던 그들이 다시 추격을 해올지 모른다. 이번에는 여순이 재촉했다. 

‘지체할 시간 없어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기 위해 입을 벌리고 씩씩거리던 말수는 조금 더 쉬었다 갔으면 하는 간절한 눈빛을 거두고 참호 밖으로 승냥이 처럼 뛰어 나갔다. 지금 막 들어왔는데 벌써 나가자고 재촉하는 여순이 야속하다는 생각은 금새 지웠다. 

다시 밖으로 나온 여순과 말수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경주하는 육상선수 처럼 들판을 내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쉭쉭 하면서 두 사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 빨리, 그래야 살 수 있다. 여순은 그러기 위해 복부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다 잠깐 비틀거리면서 쓰러졌다.

생각도 여기서 멈췄다. 뒷간에서 부르는 은근한 조선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여순아, 놀자. 여순이 문을 열고 내다봤다. 비도 없으나 연기는 어느 새 사라졌고 눈부신 빛 서너 줄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순은 그것을 피하는 시늉으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바다 가자. 바다가서 놀자. 막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볕을 피해 반대편에 모여있던 여자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우리 바다가자 응, 여순아. 여순은 이곳에 온지 지금껏 해변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와서 여순은 자기 방과 이곳 뒤쪽 말고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방과 작은 틀이 그녀가 본 남양군도의 전부였다.

막사 밖에 해변이 있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섬이니 주변은 온통 바다 일 것이다. 그러나 여순은 그걸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고향이 더 그리울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뛰어놀던 나와 점례와 완용 그리고 휴의.

그녀는 일어섰다. 이번에는 동료들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보자. 내가 없는 사이 말수가 오면 어쩌나 생각했으나 몸은 어느 새 신발을 신고 바닥을 다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가 아니라면 철조망을 넘어 잠깐씩 해변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견디지 못하고 여자 둘이 자진하고 나서였다.

심문관은 죽은 그녀들이 왜 그랬는지 몰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며 산자들을 상대로 질문을 했고 해결책으로 산책을 내놨다. 여자의 죽음은 전투력의 상실이었고 일본군은 그걸 막을 수 있다면 이 정도의 호의는 베풀 수 있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막사를 끼고 돌아 비탈길을 내려갔다. 한 명이 앞장을 섰는데 그녀는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가는 길이 익숙한지 발걸음이 가뿐했다. 빨리 바다에 닿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여기 오면 숨통의 띄여.’

그녀는 말하면서 앞쪽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여순은 숲 사이로 보이는 파란 물결을 보았다. 그 전에 가볍게 해변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바다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바다가, 진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잠깐 뱃멀미 처럼 의식을 가져가는 현기증이 일었다.  

여순은 몸을 바로 세웠다. 여기서는 일본군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가가 손에 물에 댔다. 온기가 느껴졌다. 강한 태양 아래 물은 데워졌고 석양을 받은 바다는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물속은  조용했고 아늑했으며 끝을 모른 심연처럼 깊었다.

물이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기지개를 켜고 여순은 몸을 일으켰다. 둘러본 백사장은 길었다. 죽마을의 백사장보다 길었다. 모래는 흰색이었고 그것들은 쌓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딛는 발은 빠지지 않고 마른 땅처럼 단단했다.

그녀는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달려나갔다. 방안이 아니라 밖에서 달렸다. 질주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달려 나갈 때 그녀는 단발 머리가 귀뒤로 쓸렸다. 아랑곳 없이 그녀는 더 달렸다. 감히 따라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를 더 달리고 나서 여순은 숨을 몰아 세웠다.

그리고는 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은 광경을 보았다. 해변을 돌아서나오자 눈 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군함의 무리였다. 한 척도 아니고 두 척도 아닌 선단을 이룬 군함들이 여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뱃머리를 돌리고 여순에게 왜 그리 빨리 달리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달려 나갔다.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리혀 속도가 더 붙었다. 그녀는 달리면서 저렇게 큰 배는 처음 본다. 앞으로 뻗은 포신이 이쪽을 향해 사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무장적 뛰고 또 뛰었다. 

그때 섬의 저쪽 너머에서 진짜로 포성이 들렸다. 요즘 들어 더 빈번한 함포 사격은 여순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에는 밤에만 울렸으나 요즘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전쟁이 정말 코 앞까지 왔구나. 여순은 전쟁을 모래사장에서 실감했다. 

같이 온 여자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종아리가 잠길 정도까지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들은 뒤를 돌아보며 여순에게 너도 들어오라며 깔깔거렸다. 들어와, 들어와 보라고. 보는 것과는 달라. 

신발을 벗어 손에 든 용희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물이 발가락 사이로 흘러들었다. 모래가 끼는 기분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이 기분을 안다. 여순은 눈을 감고도 모래에 닿는 발가락의 느낌과 물에 닿는 느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죽마을 말고도 이런 느낌이 있다니. 

그녀는 이곳은 꿈에 본 천국이 아닐까 여겼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성경속의 지상낙원은 바로 이곳이다. 그녀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이곳이며 하느님이 벌을 주고 추방한 곳도 이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순은 감히 성경의 구절을 떠올렸고 정말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고개를 들면 푸는 바다는 끝이 없이 펼쳐졌고 잔잔한 파도는 끝없이 물결쳤다. 그 물결은 종아리에서 멈춰섰다. 여순은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 멈춰서서 발 아래를 굽어 보았다. 발끝이 엄지 발가락이 희미하게 어른 거렸다. 발톱을 깎아야 겠어. 깎고 나서 또 와야지.

여순은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 가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그런 기쁨이 가득차 올랐다. 저쪽에서 물고기들이 뛰어올랐다. 작은 녀석들이다. 하얀 배를 드러내고 곧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앞선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저런 웃음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이냐. 여순도 따라 웃었다. 웃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로 좋아서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웃는 얼굴이 보기에 좋았는지 잠시 후 첨벙 첨벙하는 큰 소리가 화답했다.

엄청나게 큰 녀석들이 떼를 지어 고개를 내밀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떠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럴 때면 파도가 일어 여순의 몸을 강타했다. 여자들은 물벼락을 피하기 위해 성급히 해변으로 올라갔다.

이런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고래다. 돌고래다. 여순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따라 해변에 당도한 여자들이 고래다 돌고래다 하고 여순을 따라 더 크게 소리쳤다.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저 쪽 산에 부딛쳤다. 

돌고래. 책에서 본 고래. 고래가 나타났다. 여순은 고래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돌고래가 사라진 쪽을 유심히 지켜봤다. 다시 한 번 떠올라라. 크게 숨쉬어라. 여순은 이렇게 응원했다. 그러나 녀석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여순은 한 바탕 회오리가 지나가고 나서 이제 가야 할 시간이 아닌가 걱정됐다. 누군가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다면 당황할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 여자 넷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을 알면 화를 내고 쫓아 올지 몰랐다. 보고는 했지? 누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했어. 삼십분 쯤 후에 돌아온다고. 벌써 지났을 거야. 빨리 가자. 여자들은 다시 막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순은 달리지 않았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도 곧  여자들과 보조를 맞췄다. 말수가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왜 예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여순의 예감은 말수가 막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에 멈춰섰다. 

잘가라. 여순아. 몸 조심하고. 또 부르면 나와. 나오니 좋지. 조장 역할을 하면 여순보다 두 살 많은 언니가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조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자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 논 직책이었다. 나이도 많고 활발한 여자 가운데 조장을 선정했다.

여자들은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조장이라고 불렀다. 조장 언니는 일본군이 준 거라며 손목시계를 들어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자랑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우쭐했다. 웃는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직 10분 남았다. 우리 좀 더 있어도 돼.’

그녀는 조장의 권위로 허락했고 용희는 조금 안심이 됐다. 바다에서  10분은 짧았다. 방안의 그 시간은 뱃머리의 고통처럼 길었지만 발가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물과 모래가 있는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10 분간의 휴식. 여순은 군인들이 훈련하다 말고 10분간 휴식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대개 한 시간 훈련하고 10분간 휴식을 했다. 휴식은 자신만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것이 휴식인가. 여순은 파도가 내는 잔잔한 소리와 은빛으로 빛나는 모랫바닥의 감촉을 즐겼다. 이곳은 단순한 해변이 아니다. 교회이고 성당이었다. 그곳보다 더 평온했다. 성경이었고 예수님 말씀이었고 천사의 보금자리였다.

여순의 영혼은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바다에서 몸을 돌려 막사로 향했다. 이제 여순은 자신이 낯선 곳에 버려졌다는 느낌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여순은그녀들 뒤를 따르면서 마음이 편했다. 군함이 시선에서 흐려졌고 그 자리에 돌고래 떼가 들어 앉았다. 여순은 자신이 걸어왔던 막사 쪽으로 눈을 모았다. 그런데 해변에서 막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많이 걸어온 것 같지 않은데 이쪽에서 저쪽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감쪽같이 위장한 덕분에 막사는 바다 쪽의 공격을 용케도 피하고 있었다.언니 달리기 시합하자. 여순이 말했다.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참고 참았던 말을 꺼내니 속이 시원했다. 

저기 언덕까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그녀가 응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보았다. 그들도 동의햇다. 하나 둘 셋을 외치면서 여자 넷이 막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발에 묻은 모래가 뛰어 올랐다. 그만큼 지지 않으려는 욕심이 앞섰다. 

막사의 문을 열때 여순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와서는 한동한 바닷속을 헤매고 다녔다. 다 예수님 덕분이다. 여순은 조용히 성경책을 꺼내 들었다. 이제 일본어는 완전히 익었다. 일본 성경 덕분이었다. 조선말보다 일본어가 어떤 때는 더 편했다.

말수는 오지 않는가. 죽마을 어떻게 됐을까. 부모님은 잘 계시고. 휴의와 완용은 또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보다 여순이 걱정됐다. 무사히 일본으로 갔을까. 정신대에 들어가 총알을 만들고 비행기를 닦고 있을까. 돈은 제 때 받아 부모님 논을 사들였을까.

그리고 휴의는 왜 점례와 완용이 혼삿말이 오가는데도 점례를 받아 줬을까. 나 같으면 모른 척 하고 빠졌을 텐데. 그러면 내가 휴의 오빠와 가까워 졌을 수도 있고. 억하 심정이었는지 점례가 완용을 멀리하자 완용은 여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휴의보다 완용이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몰라. 그런데로 잘 맞았어. 혹시 알아.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올 가을이나 명년 봄에 완용과 결혼 했을지도. 이럴 줄 알았다면 완용에게 더 잘해줄 걸. 

여순은 완용에게 미안했다. 자신도 점례처럼 휴의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었으니. 정말 내가 이곳에 적응하고 있고나 한가. 여순은 이런 생각에 빠지자 자신이 지금 이렇게 한가해도 좋은지 물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다. 내가 완용과 결혼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치 앞만 보았어도 나는 이런 곳에서 이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용이 했던 말, 완용과 어처구니 없게도 함께 했던 밤에 했던 약속을 내가 왜 거절했지?

나와 결혼하자. 아직은 안돼. 왜 휴의 때문에. 미쳐어 정말. 그런거 아냐. 아니래도. 내가 잘해 줄게. 순사가 되면 논도 살 수 있어. 난 논 싫어. 그럼 뭐가 좋아. 시골말고 도시에서 살 거야. 그럼 도시로 가자. 순사가 된다며? 순사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나? 그래도 난 싫어. 

여순은 믿고 끝도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란 유치해. 정말 유치해 눈 뜨고 볼 수 없어.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여순은 한심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금새 해변의 추억은 사라졌다. 이 방에서 벗어나야 해. 벗어나고야 말거야.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자. 최면을 걸며 아무리 위로해 봤자 스스로하는  위로는 위로가 돼 주지 못했다. 누군가 대신 위로해 줘야 한다. 말수. 말수가 와야 한다. 그런데 왜 완용이 또 등장하지. 완용이 첨례를 넘본다.

점례는 그런 완용의 마음을 안다. 혼사를 거부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가 점례는 무섭다. 하지만 내색을 숨긴다. 숨긴다고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아, 마음 둘 곳이 없다. 말수. 말수가 필요하다. 쌍욕을 해도 씩씩거리며 거칠게 나와도 이제는 말수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 버티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말수 때문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런데도 마음 구석 한편에는 휴의의 듬직한 등이 떠오른다. 완용의 끈적한 눈길이 어른 거린다.

완용. 그는 지울 수 없는 내 몸의 각인과도 같은 것이다. 나를 등에 업고 그가 달려갈 때 몸은 물론 마음 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온기를 느꼈던 그날 저녁 잠자리.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자 완용의 넓은 등에서 퍼졌던 따뜻함이 이불속보다 더 훈훈했다. 여순은 웃었다.

떠나 올 때 그가 준 부적은 무슨 의미일까. 기다릴 테니 날 잊지 말라는 표식일까. 여순은 성경 사이에서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부적과 완용을 떠올렸다. 여순은 편지를 썼다. 부칠 수 없는 편지였지만 글자를 쓰고 나면 한동안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읽고 또 읽고 고치다 보면 점례에게 다가갔던 완용도 용서할 수 있다. 더구나 부적은 점례가 아닌 자신에게 주었다. 그것은 사랑의 징표였다. 네 목소리가 들려, 네 얼굴도 보여. 잊지 않을게.

여순은 사랑을 잃은 여인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여기 와서 흘렸던 숱한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여순은 이제 그쳐야 겠다고 다짐하고는 앞치마 끝을 잡아올려 눈물을 닦았다.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들을 저주할 용기도 사라졌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완용와 다시 만나는 것은 여순 자신이 용납하기 어렵다. 설사 여순이 다른 마음으로 자신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여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의 진척이 더딘 것을 말수를 탓했다. 탓하기는 했지만 여순은 여전히 그를 믿었다. 성경을 믿었고 부적에 의지했다. 완용을 지워졌다고 해도 부적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부적이 완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되레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의지할 것으로 부적을 품은 것은 여순이 기대고 싶은 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닥쳐오는 불안감 속에 즐거운 평화를 여순은 어는 순간 느꼈다. 쓴 글을 띄엄띄엄 읽다 여순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얼른 편지를 감추었다. 말수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수. 

말수는 예상했던 것처럼 부상을 당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돌맹이가 어깨를 강타 했다고 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세 시간 만에 깨어 났다고 했다. 어제 겨우 어깨에 걸친 붕대를 풀었다. 말수가 말했다. 여순은 그의 말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 사이 얼굴은 더 검어졌고 눈은 깊어졌다. 그는 여순이 몸을 뒤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을 동안 그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용희가 말수를 보기 위해 돌아앉았다. 두 눈이 마주치면서 서로는 서로를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두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왔다. 

오지 않는 동안 말수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광산이 또 무너져 내렸다. 조선인 8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3명이 부상 당했다. 말수는 이번에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운이 좋았다. 계속해서 좋은 운 때문에 말수는 살아났다. 

다음 날에도 사고가 터졌다. 이번에는 일의 진척 사항을 보러 왔던 일본군 장교가 다쳤다. 이번에도 말수는 운이 좋았다. 다들 혼비백산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만큼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었고 평소에 가지고 있던 대담함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다쳐 피가 낭자한 일본군 장교를  들쳐 업고 무작정 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죽을 것 처럼 비명을 질렀다. 어지간히 힘이들어갔다. 너는 안 죽어 임마, 죽을 사람은 그런 힘 없어. 말수는 조선말로 지껄이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상처에서 피가 멎자 그는 팔이 뒤로 돌아간 장교의 부러진 팔을 원래 위치로 맞췄다. 말수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고 그 장교는 고통 속에서도 말수의 침착하고 노련한 치료를 눈여겨봤다. 죽을 거라던 장교는 능숙한 말수의 솜씨에 그만 넋을 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 

‘너 조선에서 의사였니.’

죽었다 살아난 자의 첫 질문치고는 그런대로 들어줄만 했다.

의사였구나. 어쩌다 이곳까지 왔어.

말수는 여러 번 조선인을 치료한 적은 있었지만 치료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말수는 못 들은 척하면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했다. 기회가 자신에게 올 지 모른다는 어떤 예감이 순간 작용했던 것이다. 

장교가 대답이 없자 질문을 잊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찡그리고 상처를 내려 보는 말수에게 재차 물었다. 의사였나고? 이번에는 조금 짜증 섞인 질문이었다.  정작 짜증을 낼 것은 자신인데 말수는 이놈의 자식 하면서 혀를 찼다. 그러면서 말수는 준비한 답을 내놨다.

‘아버지가 한의사였어요.’

그는 눈대중으로 심부름을 하면서 침도 놓고 다친 환자들을 꿰매는 일을 도왔다고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다음날 말수는 섬에 하나 밖에 없는 진짜 일본인 의사에게 불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가 부족한데 네가 대신 도와달라고 의사는 말했다.

네 솜씨를 봤다. 응급 처치를 잘했더구나. 그는 말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항생제 진통제 주사제 등의 목록과 사용량 등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 내가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은 못한다. 궁금하면 물어봐라.

그날로 말수는 광산에서 나와 의사의 조수가 됐다. 의사는 장교가 조선 의사가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일손도 덜겸 어려운 것은 그에게 떠넘길 요량으로 덥석 말수의 손을 잡았다. 

노가다 십장에서 졸지에 의사가 된 말수는 막사 옆 간이 병원에서 다음날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하얀 가운을 입었으나 말수는 자신이 진짜 의사인 것이나 된 것처럼 뻐기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을 낮추면서 말도 고급스럽게 사용하려고 애썼다. 위치가 사람을 만들지 않는가. 십장에게는 십장의 언어가 있고 의사에게는 의사의 언어가 았다. 

그는 첫날부터 실력을 발휘했다. 일본 의사가 바라는 바대로 고쳐도 일을 하기 어렵거나 위태로운 환자는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죽어도 좋은 환자들이었다. 쓸모없는 환자는 전투력의 손실만 가져올 뿐이다.

환자는 광산 사고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총상이나 폭판 파편으로 일그러진 일본군 들이 들이닥칠 때도 있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마치 성난 파도처럼 간이 병실이 들썩였다. 그는 노동자보다는 군인을 우선 치료했다. 

환자는 쉬지 않고 밀려들었다. 말수는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광부일 보다 의사 일이 더 바빳다. 생존은 더 보장됐으나 하루는 짧았다. 저녁에도 불려나가기 일쑤였다. 당장 죽을 염려는 없었으나 고된 것은 이것이 더 심했다. 

여순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말수는 여순에게 가지 못하는 심정에 애를 태웠다. 한 시간도 짬을 낼 수 없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러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수는 무릎을 쳤다. 

조선 여자 하나가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했는데 여기로 데려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마침 결핵으로 괴로워하던 고급 장교 하나가 여자라는 말에 눈을 번뜩이더니 당장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그래. 경력은. 오래되지 않았어요. 한 일년 정도. 그것도 보조 역이었어요. 그런 건 상관 없다. 말수는 달렸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는 도착하자 마자 임시방편으로 가져온 붕대를 시험 삼아 여순에게 간호사 수업을 시켰다. 묶고 풀기를 반복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팔에 찌르는 연습을 시켰다. 여순은 어안이 벙벙했다. 탈출 모의가 이것인가. 말수는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허겁지겁 연습을 마치고는 당장 여기를 떠나 병원 막사로 가자고 했다.

너는 이제 부터 간호사다. 인천에서 수련을 받았다. 한 일년 정도 됐으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이렇게 말수는 이동하는 중에도 여순에게 이것저것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알렸다. 여순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나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인지했다. 

여순은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했다. 묶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됐다. 문제는 주사였다. 좀처럼 핏줄을 찾아 정확히 찌르기 어려웠다. 말수가 말했다. 말수가 연습용으로 내민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면서 안타까운 눈초리를 보냈다. 간호사가 주사도 찌르지 못하면 간호사가 아니지. 다시해봐. 절대 떨지말고. 그러면 여기서 못나가.

그러면서 말수는 평생 이곳에서 갇혀 살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떨라고 협박했다. 권총을 받아 들었을 때보다도 용희는 더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 떨지말자. 이까짓것 찌르지 못할 이유없다. 말수가 다시 손을 내밀고 주먹을 쥐었다.

여기 보이지. 불끈 솟은 힘줄. 거기에 찔러.

여순은 그래 해보자는 심정으로 퍼렇게 솟은 말수의 힘줄을 찾아 찔러넣고 포를 뜨듯이 그것을 위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주사기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됐다. 이렇게 하는 거다. 가자. 어서 가자. 

짧은 말수의 말에 여순은 해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탈출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도망자를 쫓아오는 적을 해칠 권총은 필요없다.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군함을 타고 이 섬을 빠져나가리라. 간호복을 입은 여순은  많은 수련을 쌓은 사람처럼 자신감이 넘쳐났다. 찢어진 상처, 부러진 팔다리를 보고도 여순은 놀라지 않았다. 이런 상처 정도는 인천에서 숱하게 봐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찢어진 환자들을 대했다. 

자신에게 이런 잔인함이 있고 침착함이 있고 칼로 살을 찢고 바늘로 꿰매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여순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이제 여순은 숙련된 간호사였다.

일본군은 한의사 아버지에게 의학 상식을 배우고 경성제대서 서양의술을 익힌 조선 의사 말수와 인천에서 간호사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간호사 여순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일본군을 세심하게 치료했고 그들의 행동을 소상하게 관찰했다.

그 즈음 여순은 식욕이 왕성해졌다. 그러나 밥걱정은 없었다. 임시 병원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고기도 있고 간혹 열대 과일 같은 것이 남양척식주식회사 이름을 달고 상자째 들어오기도 했다.

밥보다 과일이 더 맛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은 여순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여순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배가 불러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달마다 있던 것이 두 달째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다. 그녀는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상의할 대상은 말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애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말수는 어떻게 그것을 지우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더 크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터지고 갈라지고 뭉개진 외상은 어느 정도 해볼 만했으나 속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일본 의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막사에 있던 여자가 임신한 것은 흔한 일이었다. 장교는 여순이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자신도 해 본 적은 없지만 해보자고 했다. 

전투력의 상실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에 먼저 한 것은 말수의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다. 혹시나 여순에게 무슨일이 생길까봐 걱정한 것이다. 어렵게 얻은 자리를 놓칠 수도 있다. 지우면 일주일 후면 다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수는 아첨하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해보자고. 죽기밖에 더하겠니. 일본인 의사는 말수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죽기밖에 더하겠어. 말수는 그 말을 속으로 따라 하면서 이제 곧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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