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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향의 종달새를 그리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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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향의 종달새를 그리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3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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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것을 느낀다. 밟힌 민들레가 잎이 새로 나고 있다. 아침을 눈을 뜨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저녁에 눕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너를 만나 행복하다. 날마다 죽음이 곁에 오지만 널 보면 삶의 충만을 느낀다. 대장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이번만은 미루지 말고 꼭 해야만 할 말이라는 듯이 억양에 힘을 주고 말했다.

죽으러 갔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 이런 것이다. 대장은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거짓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를 귀한 사람 대하고 있다. 어디가 이뻐서 그렇지. 점례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한 번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자 자신이 바뀌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바뀐 것이 아냐. 내가 변한 거지. 

점례는 그가 숙소를 나가 사무동으로 일을 하러 가면 빈 집에서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고 실천했다. 어제 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먼저 그것부터 처리했다. 일을 하기 전에 점례는 대장 복장에 어울리는 그를 잘 꾸몄다. 

옷 매무새를 다듬었고 머리를 보기 좋게 빗었다. 젊은 그가 잘 생기고 힘있는 그가 거울 속에서 웃을 때 점례는 언제나 그 옆에 같이 있었다. 대장은 점례가 자신을 꾸밀 때면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귀찮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점례는 믿었고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이다. 마지막 단추를 잠그면 나면 점례는 그보다 먼저  현관으로 나가 군화를 챙겼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군화는 대장의 위엄을 한껏 빛나게 했다. 그가 군화를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면 점례는 가죽 가방을 들고 그가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대장은 거의 모든 일을 점례에게 의지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점례의 손을 빌렸다. 점례는 그가 나가고 연병장에 그가 탄 지프가 뿌연 연기를 날리며 절벽 끝에 있는 사무동 쪽으로 가는 동안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서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엄마가 학교에 가는 막 입학한 어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마냥 점례는 그런 심정으로 대장이 막사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 눈을 팔지 않고 그렇게 있었다. 그를 도와 주고 싶었다.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살폈다. 

퇴근해 집에 오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식사를 챙겼고 편히 잘 수 있도록 햇볕에 잠옷을 말렸고 말린 잠옷을 걷어 잘 다려놓았다. 그가 어떤 일을 하든 점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간혹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듣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대장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점례를 믿고 의지 했다. 유마 호사카. 대장의 이름이었다. 유다는 아버지를 천환 만큼이나 존경했다. 그래서 인지 들고 날 때 언제나 액자에 든 부모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점례는 액자를 그가 소중히 여길수록 자신도 그런 기분속에 빠져들었다. 보지 못하는 부모님 대신 부모님으로 의지했다. 점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액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하루는 유마가 평생 자기 곁에 있게 해달라고 소원하기도 했다. 

유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깊은 내면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에 짓눌리고 있음을 점례는 눈치챘다. 

전황은 어떻게 되는가. 대일본 제국의 압승으로 끝나는가. 아니면 불리한가. 그래서 유마 호사카의 얼굴이 안 좋은가. 점례는 전쟁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겼으나 유마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면 그가 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답답한 시간이 이어지면 점례는 그림을 그렸다. 얼마 전에 유마가 사탕과 함께 사온 습작용 노트와 여러가지 색깔의 물감, 그리고 스케치에 적합한 연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다니. 이런 솜씨가 내 안에 있었나. 점례는 유마가 틈나는대로 자신을 따라 해 보라며 가르쳐준 대로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했다. 작은 나무 책상이 점례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었다. 책상은 유마가 직접 부하를 시켜 만든 것이었다. 진한 나무향이 가시지 않은 것이었으나 손때가 묻으면서 제법 반질거렸다. 

유마는 자수를 뜨다 심심하면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만주에서 사온 화구를 바라볼 때마다 점례는 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얀 도화지 앞에 마주앉았다.

점례는 뭐든 잘해. 일본어도 잘 하고 자수도 그렇고 이젠 제법 그림도 숙달되고 있어. 유마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점례를 칭찬했다. 하루는 그림을 그릴 때 구도가 왜 중요한지 스토리가 있어야 좋은 그림이라는 둥 실기보다는 이론을 잔뜩 늘어놓았다.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마. 돈 주고도 듣지 못하는 강의라고. 유마가 으스대며 말하면 점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리가 있나요. 너무 좋아요. 어디가서 이런 말을 듣겠어요? 하는 심정이었다. 유마는 점례의 인생 스승이었고 그림의 스승이었다. 

유마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생도들의 얼굴을 그렸고 그의 그림을 받지 못한 생도는 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유마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화가였다.

원래 그의 꿈도 화가였다. 평시였다면 그의 꿈대로 도쿄의 한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오래 가면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아버지는 육사를 원했고 유마는 거절하지 못했다. 정치인 아버지에게 아들이 직업으로 화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심성이 고왔던 유마는 거절의 의사조차 내비치지 못한 채 육사에 들어갔다. 천성이 싸우는 것을 싫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 끌렸다.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전투 병과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승장구해 동기들 보다 서너 단계 일찍 별을 달았다. 그의 계급이 어느 정도인지 점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대장 혹은 각하로 불렸고 더 높은 자리로 이동할 거라는 소문도 들었다.

그는 생도 시절 틈틈히 화실을 들렀고 거기서 자신만의 화풍을 가다듬었다. 부모님 몰래 배운 솜씨였지만 타고난 것이어서 그곳 화방 주인은 그의 그림을 사정하다 시피해서 서 너 점을 확보했다. 일이 없는 주말이면 유마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옆에서 그리는 점례의 그림을 코치했다. 점례의 연필 잡은 손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였으며 점례가 그린 스케치 위에 또다른 선을 연거푸 그려 넣기도 했다. 

어때, 이게 좀 낫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점례는 그가 손댄 것이 대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자유스럽고 보기 좋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점례는 자신도 실력에 탄력이 붙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학교 때 학교 미술 선생의 칭찬을 받은 기억이 또렷하다. 넌 솜씨가 있어.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지. 누가 알려줘서는 이런 그림이 안 나와. 선생은 그런말을 어린 점례에게 했고 점례는 이제서야 그 말을 기억해 냈다.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구나. 너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선생님의 그 말이 지금 점례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내 생각을 그가 눈치 챈 것일까. 그도 같은 말을 했다. 점례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마사코. 점례 마사코.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고. 

일요일에는 저기 언덕에 가보자.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야. 거기서 풍경화를 그려 보는 거지. 누가 잘 그렸는지 내기 한 번 해보자. 유마가 호탕하게 제의했다. 괜찮으면 사무동에 걸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서 그려. 

점례는 그 순간 잡은 연필로 훈련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산의 허리에 핀 진달래꽃과 어우러지게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스토리가 있어야 좋은 그림이고 유마가 말했다. 지금은 전시고 여기는 전쟁터니 군인이 빠지면 재미었다.  똑같은 생각을 그도 하고 있을까. 점례는 머리를 짜내면서 그라면 풍경에 어떤 이미지를 입힐지 상상했다. 

무서운 건 싫어. 총칼이 너무 빛나면 안돼. 빛나는 건 태양이고. 그래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 거야. 황군의 늠름한 모습. 적진을 향해 조용히 다가가는 천황의 군대. 싸워서 이겨 환호하는 병사들의 얼굴이 진달래 꽃과 중첩되면 어떨까. 점례는 그림의 주제를 놓고 여러 방면으로 고심했다. 

그  때 나비 한 마리가 창밖에 어른 거렸다. 창틀에 앉았다가 꿀이 아닌 것을 알고는 그대로 날아갔다. 나비를 넣을까. 진달에도 나비가 앉던가. 점례는 진달래 위에 앉은 나비를 본 적이 없다. 꽃을 따먹기 위해 황도배기를 누볐어도 나비가 진달래꿀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달래와 나비는 사실화가 아냐. 점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일단 스케치 두 점을 그려보기로 했다. 일장기와 욱일기를 들고 산악을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주변에 활짝핀 진달래와 꿀을 먹는 풍뎅이를 그리기로 했다. 풍뎅이는 본 적이 있다. 아니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앞장선 대장 그러니까 유마가 앞서서 끌고 뒤따르는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모습은 어떨까. 좌우 양쪽에는 역시 산의 풍격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사실화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절벽 아래 막사는 희미하게 표현하고. 

그렇구나, 이렇게 두 개의 스케치를 내밀자. 그러면 그가 어떤 그림에 더 관심이 있는지 알 것이다.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점례는 화구를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구상이 끝났으니 그리기만 하면 된다. 

장교는 돌아오면 자신이 없는 동안 점례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성과물을 내놓고 싶었던 점례는 장교에게 잠깐 배운 스케치 기법으로 빈 도화지에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안에서 밖을 내다 보는 풍경이다. 

토끼몰이에 나간 사람들처럼 점례의 연필심은 거침이 없었다. 사람들은 숨어 있는 짐승이 놀라도록 괴성을 지르고 냄비를 두드렸다. 응원의 소리였고 점례는 그 소리에 자극 받아 손을 더 거세게 놀렸다.

예상대로 잘 되고 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적이 달려들고 있다. 적들은 우리쪽을 향해 맞고함을 치면서 마구 총을 발사하고 있다. 점례는 그림을 멈추었다. 달려오는 병사 가운데 휴의의 모습이 언뜻 비쳐 들었다.

왜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 나타나서 일을 훼방만 놓고 있나. 점례는 고개를 숙였다. 나쁜 놈. 없어져라. 그녀는 화난 표정으로 다시 연필을 잡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을 고치고 몇 장의 종이를 버리고 나서 겨우 해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전 같았으면 쉽게 단념했을 법도 한데 요즘의 점례는 그렇지 않다. 내면도 단단해 졌고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스스로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까지 그 모든 것을 점례는 해내야 하고 지금 그 일을 해내고 있다. 퇴근 할 때가 됐다. 그림자는 산 허리를 지나고 곧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었다. 어젯밤 달무리가 지더니 오늘은 비가 올지 모른다. 고향의 엄마는 늘 하늘을 보면서 내일 날씨를 말했다. 점례는 대충 완성된 삽화를 내두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기 전에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금세 양손에 꽃이 가득했다.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라일락도 있었다.

그녀는 꺾은 꽃을 유리 항아리에 넣고 어디가 좋을지 위치를 잡기 위해 방안을 빙 둘러 보았다. 탁자위, 그래 내 탁자 위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잘 보이는 곳이다. 여기에 놓자. 그가 좋아할 것이다.

숙소로 온 그가 꽃을 보고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점례 역시 입가에 미소가 절로 어렸다. 저녁 10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병장의 병사들은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이렇게 늦은 적이 없다. 늦으면 부하를 통해 먼저 알렸는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다. 

무슨 일이지. 잘못을 저지르고 들통날 것을 염려하는 어린애 같은 두려움이 점례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무슨일이 터진 거야. 며칠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어. 점례는 지레짐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이제 안정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 

여기까지 오는 길은 별로 즐겁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좋아지고 있는데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점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막장의 입구. 그것은 처음 만주로 끌려 왔을 때 처럼 같은 처지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름이 돋으면서 사색이 된 점례는 화병의 꽃을 보면서 자신도 꼭 저 신세 같다는 한탄을 했다. 갇힌 신세. 지금은 싱싱하게 웃고 있지만 열 흘도 못돼 시들어 버려질 것 같은 느낌에 점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순간 떨었다.

오랜만의 걱정이었다. 먹구름이 몰려왔다. 예상대로 비가 쏟아지고 있다. 점례는 교실 문을 나서자 억수 같은 비에 책보를 머리에 이고 운동장을 달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싫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점차 흠뻑 젖어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 몸에 감기고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때리자 점례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친년 처럼 정말 미친 것처럼 웃고 마구 달려 나간 던 것이다. 그러자 거짓말 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옷은 젖고 축축했지만 기분이 좋으니 빗속의 질주도 나쁘지 않았다.

저기로 달려 나가 뛰어볼까. 그렇게 비에 몸을 맡기고 나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군인만 연병장을 달리는 것은 아니다. 군인이 없는 연병장은 오로지 내 차지다. 아무도 없는 넓은 마당을 나 홀로 비를 맡으며 달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점례는 비 맞는 기분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나가볼까 생각했다. 

그런 몽상을 하고 있는데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고 어느 새 유다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몸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의 그는 점례에게 무슨 생각을 했기에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몰랐느냐고  물었고 점례는 소학교 시절 비가 오는데 무작정 뛰어서 집에 온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군인들이 비에 젖어서 달리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했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병사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불쑥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리고는 병사들도 처음에는 싫지만 나중에는 환호할지 누가 알겠어요? 하고 유다의 의견을 물었다. 그의 시선이 꽃병에 머물렀다가 점례에게로 왔다.

그렇다면 그것을 한 번 다시 경험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의 눈빛이 어렸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장교는 전화기를 돌렸다. 그리고 당직사관에게 요즘 우리 군대의 군기가 빠졌다고 냅다 호통을 쳤다. 그리고 병사들을 지금 즉시 집합시켜 각개 훈련에 돌입하라고 지시했다.

정말요? 잠은 언제 자고요. 점례가 자기 책임이라는 듯이 미안한 감정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야, 한번은 그래야해. 훈련은 때와 장소가 없어. 군대는 강하게 키워야지. 실전에 도움이 될 거야. 죽고 사는 문제인데 한 시간 잠 못 잔다고 해서 뭐가 문제지. 

유다는 되레 점례를 안심시켰다. 잠시후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군인들이 완전군장을 한 모습으로 열을 지어 연병장으로 모여들었다. 연병장은 순식간에 가득 차서 언제 텅 비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들은 모여서 군가를 부르고 달리고 총을 세워 허공을 찔렀다. 

대장은 창문의 커튼을 열고 점례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이제 됐으니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는 투였다. 장교는 점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빗속을 달리자고. 그리고 연병장이 아닌 뒷산으로 점례를 끌었다. 익숙한 길이었으나 비에 젖어 미끌거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점례는 유다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은 그런자세로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점례는 약간 무서웠으나 재미 있었다. 무서운 것은 그의 한 마디에 수많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었고 재미 있는 것은 상상했던 빗속의 질주를 하는 것이었다.

익숙한 곳을 찾아가는 듯이 장교는 잡은 점례의 손에 힘을 주면서 거침없이 위로 올라갔고 점례도 이 길은 나도 안다는 듯이 주저 없이 따라 올라갔다. 위로 올라 갈수록 군가 소리는 점차 흐미해졌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기는 까지는 올라와 본 적이 없다. 점례는 이제 그만 갔으면 싶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억수로 쏟아지고 있는데 산으로 가는 길이 불길했다. 재미도 없었다. 이제 그만 내려 가자고 하려는 참에 유마가 커다란 바위앞에 멈추섰다. 바위에서 뒤를 돌아보자 연병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구령 소리에 맞춰 대열을 맞추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이 개미떼들처럼 요란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더 쏟아졌다. 하지만 흰 구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췄다. 구름이 가렸던 달이 빠르게 구름 사이를 지나쳐 갔다.

저 아래서 헤쳐모여 하는 병사들처럼 구름과 달은 이리저리 떠다녔다. 대장은 이런 구경은 처음이지? 하는 표정으로 점례를 향해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위 틈에 있는 작은 구멍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유다의 등 뒤로 마지막 구호를 외치며 환호는 병사들의 구령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병사들은 비를 맞고 마치 큰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고함을 치고 있었다. 동굴속은 아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밖의 습한 기운과는 달리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동굴 속에 들어간 유다는 흥분이 가라 앉았는디 옷을 털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맙다 점례야 한 마디 했다. 정말로 그는 점례가 고마웠다.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준 것은 참모가 아닌 점례였다. 이 빗속의 훈련을 생각해 낸 점례를 위해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그는 이 동굴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 대신 불부터 피웠다. 이곳을 여러 차례 온 듯이 행동이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안은 군인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타다 남은 장작 더미도 있고 먹다 남은 술병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불만 그으면 됐다. 마른 장작은 작은 불쏘시기에 금방 타올랐다. 굴 밖에서 바람이 불자 불은 더 세게 탔고 대장은 장작을 불덩이에 더 던져 넣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던 점례는 불 앞에 앉자 몸 전체로 빠르게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장의 눈이 잠깐 번개처럼 번쩍이더니 점례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하려고 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려는 태도였다. 그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점례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식은 몸에서 열이 나는데는 금방이었다. 

삼십 분쯤 후 그들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좋았고 달과 별이 서로 경쟁하듯이 아래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오기를 잘했지. 그래요. 정말요. 이런 풍경을 언제 보겠어요. 소나기에 먹구름에 달에 별에 그리고 오월의 진달래까지. 점례가 두서 없이 말을 받았다. 

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려가다 말고 비에 젖은 꽃잎을 만졌다. 갑작스런 감상이 그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점례를 돌아봤다. 점례는 진달래꽃은 따서 먹어도 된다고 했다. 나 어릴때는 많이 먹었어. 

미심쩍어 하는 그를 대신해 점례가 먼저 여러 개를 따서 한 잎에 넣고 씹었다. 그도 따라했다. 대장이 점례를 보고 웃었다. 점례의 입에 붉은 꽃잎이 붙어 있었다.

이것을 말려서는 차로 마시거나 술로 만들어 먹기도 해요. 그러냐고 장교가 관심을 가졌다. 비가 그친 야밤은 그야말로 환상적 풍경을 자아냈다. 온통 붉은 꽃밭이 눈을 황홀하게 했다. 

붉은 것 위에 영롱한 물기가 아롱거렸다. 아름다운 늦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전쟁터라니 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례는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오늘따라 포성도 들리지 않았다. 

대장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감탄에서 벗어나 하산을 서둘렀다. 점례도 뒤질세라 그 뒤를 따라 달리듯이 내려왔다. 다음날 대장은 점례에게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점례가 스케치한 그림이 들려있었다.

좋아, 내가 사람 볼 줄을 알아. 대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그림에는 목적이 있어. 전쟁처럼.

일장기와 욱일기, 그리고 착검한 총을 세우고 양쪽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이 직사각형의 도화지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풀지 않고 장교는 다른 그림을 집어 들었다.

막사와 막사 높이와 나란히 핀 진달래와 바닥의 민들레, 노란 꽃 위에 앉은 검고 푸른 커다란 나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두 남녀. 이건 나고 이건 너지.

대장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한다는 듯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점례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군인의 눈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유마는 말했다. 점례는 선생님이 잘못을 지적할 때 느끼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연필 가져와. 그는 점례가 가져온 연필을 대검을 꺼내 조심스럽게 깎아 나갔다. 날이 바짝 선 검은 천천히 움직였다. 이 부분은 세밀화처럼 정밀하게 여러번 칠해야 해. 그가 깎은 연필로 나비의 일부에 자신의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좋아요. 점례는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곳은 괜찮은지 물었다. 손 볼 곳이 있다면 고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연필을 놓았다.

그리고는 경성에 가면 찾아야 할 사람과 주소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혹 잃어버릴지도 모르니 외우라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불리해졌고 자신은 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배치될지 모른다고 했다. 본국의 아버지가 손을 써 만주에 남으라고 했으나 자신은 직접 전쟁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거절했다는 말도 했다.

네가 싫증 난 것 아냐. 되레 그 반대야. 널 지키고 싶어. 그는 그날 밤 거의 자지 않고 자신의 일본 육사 시절과 정치인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조선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 앞으로 벌어질 세계 질서에 대해 믿고 끝도 없는 말을 해댔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점례는 그가 정신적 혼돈을 겪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처음으로 불쌍하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나보다 다른 사람 걱정을 먼저 한 것은 이곳 만주에 와서 처음 겪는 감정의 변화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유다의 일부를 점례는 받아들였다. 군복을 입고 각세운 그가 허물어진 성곽처럼 처량했다. 마음속으로 점례는 그와 영혼의 교류를 갈망했다. 떠나 있어도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할 존재를 위해 점례는 지금까지 있었던 크고 사소한 일에 대한 경멸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가 나를 놓아주려고 한다. 너무나 비현실적 세계에서 살다가 갑자기 풀려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유가 주어졌지만 주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머슴의 막막한 심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러나 그녀는 한때 꿈꿔 왔던 탈출의 순간이 저절로 왔다는 기쁨에 몸이 들떴다. 죽마을을 떠나올 때 그 점례가 지금의 점례는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장교와 작별을 고했다. 그녀는 안전한 지역까지 군인의 안내를 받으며 만주 시내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장교가 준 고흐가 동생 테오와 지인들에게 쓴 책과 일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서양 미술사에 관한 미학 책이 들려있었다. 심심할 때 읽어봐. 습작에 도움이 될 거야. 점례는 책에서 유마의 손길을 느꼈다.

만주역은 부산했다. 이른 제비 두어 마리가 낮게 날아서 어디론가 급히 날아갔다. 하늘에는 높이 솟아 제자리를 맴돌며 시끄럽게 우는 종달새 무리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금은 새들이 계절이었다. 

점례는 죽마을에도 제비가 왔겠지, 종달새는 저렇게 지저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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