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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3 19:44 (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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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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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잡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는지 살폈다. 마치 잊은 소중한 물건을 찾는 것처럼 방의 구석을 돌아봤다. 작은 식탁 위의 성경책이 눈에 띄었다.

무릎을 꿇은 점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직이 불렀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녀는 성경책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옆에 있던 작은 목각 인형을 잡았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지만 점례에게 그것은 휴의가 건네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번에도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항상 같은 자세로 점례와 눈을 맞췄다. 살아 있는 것처럼 조각상이 살짝 웃었다. 점례도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숭고한 어떤 것을 마주 보고 있는 듯이 조각상을 가슴에 품었다.

마치 성모상을 그렇게 하듯이. 그리고는 얼마후 안녕, 이제 안녕하고 작별을 고했다. 다른 것은 없나 두리번 거렸다. 옳지. 그녀는 수를 놓기 위해 언제나 앉아서 무릎위에 펼쳤던 학 자수를 들었다.

여전히 학은 그 자리에 있었다.목각인형처럼 손때가 묻었으나 두 마리의 학은 여전히 날고 있었다. 그녀는 것을 곱게 접어 성경책 위에 놓았다. 남겨질 자신의 흔적들과는 이제 이별을 고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 끝났다는 안도감인가. 그러자 감은 눈 사이로 무수한 빛이 반짝거렸다. 상상속에서 그녀는 어딘지 모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빛이 사방에서 번개처럼 내리쳤고 그 빛 사이로 엄마가 다가왔다. 누군가하는 의심이 들거나 하지 않고 바로 엄마라고 알아 맞출만큼 선명한 이미지였다.

엄마라고 부르려는데 엄마는 가타부타 말없이 너무 빨리 점례의 눈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점례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빛 사이로 그림자가 내려왔고 그림자는 몇 번 변신을 하더니 휴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엄마와 달리 다급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있었다. 그가 그것을 휘둘렀다. 막 어깨와 목과 얼굴에 그것이 닿을려는 순간 휴의도 사라졌다.

물건하고 이별하더니 이제 사람하고도 이별했다. 이런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살아 나가서 기필코 살아서 다른 세상을 보고자 했는데 그 결심은 무너졌다.

하지 않겠다는 일을 해 버린 것이었고 점례는 결심을 바꾼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처지에 몰린 내가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백번 물어도 대답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데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나이가 먹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열아홉 점례가 아닌 마흔세 살 점례가 됐다.

중년의 점례는 많이 살아본 사람답게 체념할 줄을 알았다. 벽의 작은 거울에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고 그것이 맞다고 그래야 한다고 거울속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폭격이 다시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그 폭격은 어느 쪽에서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적인지 아닌지 점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본능에 따라 되는대로 방바닥에 엎드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순간 떠났고 다시 엄습했다. 점례를 방에 밀어 넣고 초소로 돌아가던 병사도 점례처럼 엎드렸다. 병사도 점례처럼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병사는 옷을 털고 있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야할 소초쪽이 아닌 점례의 방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너는 전쟁에 나간 병사의 공포를 아느냐. 죽음의 공포를 아느냐고.

이렇게 악을 썼다. 조금 전의 안쓰러움은 사라졌다. 옷 털기를 멈춘 그는 달리기 선수처럼 달렸다. 소초로 복귀가 아닌 점례의 막사였다. 등 뒤로 따라붙는 적을 따돌리기 위한 필사적인 도주였다.

늦으면 한 발짝만 늦으면 적의 총검이 등을 뚫고 앞가슴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런 공포의 힘으로 병사는 내달렸다. 죽기전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 난 그런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욕심이 아니다. 되레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 그를 존중하자. 이 시국에 내버려두는 것은 그녀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다. 병사는 그렇게 자기를 합리화 했다. 습격나갔던 다른 중대 병력이 들이 닥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그들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면 자신의 차지는 없다.

전쟁터 병사의 동물성과 이기심은 이런 때 써먹어야 한다. 그것이 싸우는 병사가 취할 태도였다. 그는 더 서둘렀다. 어깨에 걸린 총이 부자연스럽게 덜컥거리자 아래ㅗ 내려서 오른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앳된 얼굴의 어린 초병은 이제 더는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에 이기는 마음으로 황제폐하의 이름으로 그는 발보다 먼저 총검을 들이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초병은 무언가 허공에 매달려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태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총신의 끝에 달린 대검을 세우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내리쳤다.

점례가 힘없이 떨어져 내리면서 머리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사병은 씩씩대며 ‘빠가야로’를 서너 번 외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찌르려고 총 잡은 손을 뒤로 뺐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할 줄 몰라 찔러 총 자세를 한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대신 방바닥에 떨어진 성경책을 발로 걷어찼다.

그 옆에 있는 목각 인형은 또 이건 뭐야 하는 억하심정으로 군홧발로 밟았다. 부서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인 병사는 했던 욕을 여러 번 되풀이 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초소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리지는 않았다. 금새 어둠이 내렸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졌다. 점례도 쏟아지는 별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신성한 것이 망가졌다. 점례는 그런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는 꿈속을 진창처럼 헤맸다. 늪지대를 벗어나자 맑은 개울물이 나왔다.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그녀는 나뭇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했다.

아궁이 앞에 앉은 점례는 마른 솔잎을 집어넣고 그 위에 장작 서너 개를 얹었다. 마른 솔잎은 연기를 내면서 금새 타올랐다. 점례는 바짝 불 곁으로 다가가 젖은 옷을 말렸다.

손을 비비며 몸도 말렸다. 따뜻한 온기가 전신으로 번졌다. 불은 꺼지지 않고 잘 타고 있다. 장작에 옮겨붙어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등을 두드리며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 소리였다.

장작에 붙은 불은 작은 화산이 폭발하는 듯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그 순간 의식의 저편에서 점례는 막사를 벗어나 집에서 저녁을 짓고 있었다. 무쇠솥이 끓고 밥 익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일 나간 아버지는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점례는 소리 질렀으나 목구멍에서 막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점례는 그렇게 소리 지르다 눈을 떴다.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뜰에서 만났던 조선인 여자였다. 한동안 멍해 있던 점례는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 날 초소의 장교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지 못했으나 과자 먹어 하고 내밀 때 지난번에 보았던 바로 그 과자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랐다.

서두르지도 않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전투복에서 화약냄새도 없었다. 전투 대신 행정업무를 보는 장교였다. 쫓기고 살기 뛴 얼굴 대신 잔잔한 여유가 있었다.

한 번은 군용 실과 대바늘을 들고 왔다. 천 조각을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는 자수를 뜨는 점례를 위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댓가를 지불했다. 그는 점례가 읽는 성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말은 언제 배웠니? 우리글도 잘 쓰는구나. 자수도 좋고.

장교는 점례를 칭찬했다. 점례는 그에게서 인정을 느꼈다.

그 시각 남양군도의 여순은 말수와 마주 앉았다. 조선인 십장으로 일본군을 대신해 노무자들을 책임진 그는 다른 조선인과는 다른 신분을 이용해 여순을 만나러 왔다.

만남이 지속될수록 그는 여순이 말수가 적으면서도 강단이 있고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무엇을 도모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둘이라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그는 광산에서 곡괭이질을 하다가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될지를 계획했다. 광산에서는 툭하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부상자는 부지기수였고 부상자 가운데 일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면 그대로 방치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자 말수는 탈출을 꿈꿨다.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자신은 너무 젊었다. 29살의 나이에 돈 벌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것이 후회됐다.

도망치자.

그는 여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다 나왔는지 심하게 떨렸다. 삶을 내걸고 하는 도박꾼다운 태도였다. 여순이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입술 역시 바르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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