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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인지 밤인지 모를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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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인지 밤인지 모를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7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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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갑판의 끈적거림과는 다른 것이었다. 죽마을 한여름의 공기와도 달랐다. 이건 뭐지? 여순은 자문했으나 그것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태양도 같은 태양이 아니었고 바람도 습기도 달랐다. 다른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고 여순은 그런 것에 대비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슴을 옥죄어 온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다른 공기 다른 냄새, 피부에 와닿는 형언할 수 없는 괴상한 느낌에 여순은 몸이 입속의 혀처럼 바싹 타들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마음이 어떤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박한 배에서 느꼈던 첫 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공기가 달라도 너무 달라.

마치 세상에 처음으로 나와 맡아보는 첫 냄새처럼 생소한 것이었다. 이런 냄새는 그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죽마을에서 봤던 넓고 넓은 바다였으나 그 바다는 아니었다.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러한 바다였다. 낯설고 어색했다. 세상과의 단절이 이런 것인가.

하늘도 그랬다. 높고 푸른 하늘이었으나 고향의 하늘은 아니었다. 무엇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이런 세상을 알았더라면, 그런 경험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에 조금은 더 잘 대응했을까. 차라리 멀미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멀미의 끝은 죽음 아닌가.

여순은 처음으로 죽음을 떠올렸다. 여자들은 비슷하게 여순과 같은 마음을 품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이렇게 뜨겁고 습하고 숨을 막아 버리는 화로에서 나오는 공기를 마시고 사는 곳도 있구나.

그러나 여순과 달리 일부는 들떠 있었다. 그중 통영의 말수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치가 남달랐다. 그는 마치 공사판의 일본인 ‘십장’이라도 되는 듯이 얼굴이 상기됐다.

오랜 시간 후 도착한 곳이 신천지라도 되는양 떠들었다. 피로는 온데간데없고 되레 생기가 넘쳤다.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그는 조선말로 빨리, 빨리 내리라고 소리쳤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가 이런 열성을 부리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타고난 성질은 꾸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려, 내리라고 이 굼벵이 조센징들아.

그가 설치는 꼴을 보고 일본인 관리는 피곤했는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중키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말수는 짙은 눈썹과 뛰어나온 광대뼈가 인상적이었다.

사람을 노려보는 기분이 드는 작고 가는 눈은 무언가를 찾아 번득이는 뱀눈을 연상시켰다. 무섭고 소름 끼치는 눈이었으나 목소리가 괄괄하고 때로는 유머도 있어 얼굴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

빨리 움직입시다. 배도 고프고 잠도 자야지요. 안 그렇소, 형씨.

그는 옆에서 느그적 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다 죽어가던 분위기는 말수의 이런 언행 때문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그는 여자들에게도 서둘러, 서두르란 말이야 하면서 앞장서 성끔성끔 뱃머리를 벗어났다.

여순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어디서 남은 힘이 있는지 그는 천근 몸뚱이를 끌고 해변에 발을 디뎠다. 얼추 사람들이 다 내린 듯 싶자 호각 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호각은 여순에게 익숙하게 다가왔다. 어디서든 일본인은 호각을 불어댔다. 그러면 알아서 움직였다. 난간을 붙잡고 버티던 마지막 여자가 하선하자 배는 길고 느린 움직임을 보인 끝에 서서히 육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면서 여순은 이곳이 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정박한 곳에는 인가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으로 간다고 하더니 일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공장은 어디있지? 굴뚝의 연기는 왜 안보이지?

여순은 궁금했으나 어디다 물어볼 곳이 없었다. 날은 뜨거웠으나 여순은 몸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오한이 나는지 떨리기까지 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이 뜨거운 열기에 감기에 걸리다니. 참 가지가지 한다.

여순은 자신을 탓했다.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자신을 책망하고 또 자책했다. 섬은 컸다. 얼마를 걸어 높은 곳에 도착하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줄 지어 늘어선 군용 막사였다.

멀리서 개미떼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미했지만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서너 명이 떼를 지어 움직이기도 했고 그보다 많은 수가 한꺼번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군인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웠다. 여자와 남자는 구분됐다. 줄이 대충 세워지고 인원 파악이 끝날 무렵 멀다 싶은 곳에서 둔탁한 굉음이 울렸다.

군인들이 잽싸게 엎드렸다. 그들은 엎드린 상태로 손짓으로 너희들도 우리를 따라 이렇게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여순은 흙냄새를 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흙냄새조차 달랐다. 시큼하면서도 때로는 음식 냄새까지 풍기던 죽마을의 흙이 아니었다. 부서지고 건조한 흙은 모래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더 큰 폭발음이 들렸다. 일어서려던 일본군은 다시 엎드렸고 여순도 따라했다. 여기는 전쟁터구나. 일본이 아니고 전쟁터야. 남양군도의 어느 섬이라는 것을 여순은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여기가 어디고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고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어디인지는 알고 싶었다. 그런 궁금증은 말수가 해결했다.

엎드린 그는 옆 사람에게 남양군도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남양군도라고 확실하게 발음했다. 그 말은 옆으로 새서 용희의 귀에 까지 들어왔다.

남양군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그 순간 들어온 감정은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였다. 그런 의문은 곧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러자 힘이 생겼다. 다 나갔던 힘이 어디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났는지 여순은 살 수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배속되기전 조선인 노무자들은 주먹밥을 먹었다.

허기진 배는 재촉했으나 여순은 손이 떨려 입으로 그것을 가져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나 억지로 집어넣었다. 누군가 막대기로 목구멍을 쑤셔 대는 것처럼 깔깔한 이물질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밥이 아니라 구렁이를 산채로 삼키고 있었다. 살려면 무슨 짓을 못해. 구렁이든 뭐든지 먹어야지. 여순은 입을 앙 다물었다. 뱃속의 울렁임, 머릿속의 혼란 같은 것은 잊자. 잊어야지.

여순은 어느 순간 남은 것 하나 없이 다 먹어치었다. 목이매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목이 막혔다. 물을 먹어야 한다. 물이 어딨지. 물 물. 여순은 저도 모르게 물을 찾다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눈을 떳을 때 아니 정확히는 의식이 조금 찾아왔을 때 그녀의 눈에는 고향집 토담을 넘어가는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어른거렸다. 온몸을 검은 칠로 덮은 녀석은 크고 길어 담장으로 머리를 넘기고도 여전히 꼬리는 땅에 걸쳐 있었다.

녀석은 그런 자세로 한동한 움직임이 없었다. 봄볕을 즐기는 여유였다. 그러다가 무슨 위험을 느꼈는지 급하게 몸통을 끌어 올려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여순은 눈을 떴다.

구렁이는 사라졌으나 몸은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여전히 무언가가 자신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담 넘어 사라진 먹구렁이가 여순의 몸을 감고 목을 죄고 있었다.

여순은 발버둥 쳤다. 손으로 놈을 떼어 내려고 몸통을 잡고 비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놈은 더 세게 죄어왔고 여순은 다시 까무라쳤다. 놈이 꼬리로 여순의 손목을 세게 내려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죽을 때 죽더라도 숨이나 쉬고 죽자는 심정으로 여순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손톱을 세워 놈을 긁었다.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과연 효과가 나타났다. 놈의 몸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순간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흘린 피는 바닥을 적시고 문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바다는 금세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하룻밤이 지났다. 그러나 밤이 지나도 낮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곳의 시계는 날마다 밤이었다. 매일매일 시커먼 구렁이는 담을 넘고 다시 대문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일을 마치고는 황토담을 넘었다. 도대체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순은 그것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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