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23:03 (금)
넘어지지 않게 풀린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상태바
넘어지지 않게 풀린 다리로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6 14: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깥공기는 신선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문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선과 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점례는 일부러 호흡을 길게 했다. 신선한 공기를 뱃속 깊숙이 박아 넣고 싶었다. 한 번 들어간 공기는 빠져나오지 않고 그대로 계속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점례가 맡은 공기는 먹으면 맛있는 음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막사 끝에 간신이 걸친 해가 저녁을 알리고 있었다. 조선 여자 셋 중 하나도 점례처럼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점례의 눈이 그 여자와 마주쳤고 그 순간 점례는 몸을 돌렸다. 고개만 돌리지 않고 몸 전체를 그렇게 한 것은 세상천지 누구에게도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소리인가. 내가 나를 알아볼 때 남들이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점례는 돌린 몸으로 자신이 나왔던 문을 바라봤다.

하필 내가 나올 때 나오다니, 점례는 얼른 다시 들어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기에서도 싹은 자라고 있었다.

삼월 하순이다. 경성보다도 죽마을 보다도 이곳의 봄은 더디게 왔다. 이제 겨우 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가늘고 여렸지만 싹은 싹이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바람에도 싹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렸다. 저쪽으로 갔다가 이쪽으로 왔다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점례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했다.

가슴 아래로 무언가 펑 뚫리는 듯한 기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이 공기, 이 신선한 공기를 두고 다시 천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래도록 마시고 싶었다.

점례는 내친김에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한 발 앞으로 뻗었다. 내딛지 않고 뻗은 것은 그러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걷지 않은 발은, 방안에만 있던 발은 힘이 없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뻗듯이 발을 뻗었던 것이다. 그 발 바로 아래에 철 이른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있었다.

민들레. 점례는 입 속으로 민들레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행여 밟을새라 조심하면서 그 옆에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았다. 엉덩이에 흙기운이 묻어났다. 얼마만인가. 흙과 내가 하나가 되다니.

눈뜨면 만지고 밟고 하던 흙이 이렇게 귀중하게 다가오자 점례는 모든 것이 고마웠다. 살아 있고 나는 여전히 숨쉬고 있다. 민들에에 손을 댔다. 꽃은 땅에 바싹 붙어 누가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힘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이런 것이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려고 노력해야 하고 싸워야 한다. 점례는 민들레 만도 못한 자신의 처지가 딱했다. 다시 꽃에 눈길을 주었다.

어떤 것은 벌써 씨앗을 맺었다. 같은 민들레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났다. 어떤 놈은 느리고 어떤 놈은 빨랐다. 휴의가 생각났다. 자신에게 불어주던 민들레 씨앗이 눈앞에 있다.

하얀 꽃씨가 얼굴에 닿으면 그 작은 것의 감각이 느껴졌다.

아이, 간지려.

점례는 웃었다. 휴의는 아랑고 않고 나머지를 마저 불었다. 그리고 몸통만 남은 것을 저 멀리 힘차게 던졌다. 그리고는 아직도 볼에 붙어 있는 씨앗을 불어 점례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오빠, 점례는 왈칵 설움이 몰려왔다. 오빠는 알까. 자신이 여기 있는 사실을. 여기서 하는 일을. 점례는 휴의가 그랬던 것처럼 씨앗으로 뭉쳐 있는 민들레 줄기를 꺾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세우고는 입을 오무렸다. 세게, 될 수 있으면 더 세게 불었다. 꽃씨가 날아가다 바로 앞 땅에 멈춰섰다. 바람이 멈춘 것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몇 가닥을 입만의 힘으로 다시 날렸다.

이번에는 더 멀리 날아갔다.

날아가렴. 가서 죽마을에서 피어나렴.

다시 설움이 몰려 왔다. 보고 싶다. 그러나 떠오른 얼굴은 휴의가 아닌 엄마였다. 고향집을 떠나 올 때 아버지 옆에서 눈물 짓던 엄마. 그러고 보니 엄마와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또르르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렸다. 이번에는 휴의가 어른 거렸다. 점례는 휴의에게 일본으로 간다고 알렸다. 그 말을 하던 때를 기억하자 점례는 입술이 떨려왔다.

그 때와 지금이나 다를바 없이 마구 떨렸다. 처음에 휴의는 점례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돈 벌어 자신도 논을 사고 싶었다.

공장으로 간다고. 한 일년 고생하면 된다고, 완용 오빠가 말했어.

완용이 그랬단 말이지? 그런 걸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휴의는 완용을 만나면 따져 볼 참이었다. 그것은 차후의 일이다. 점례는 곧 떠난다. 내일이다. 휴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는 아침에 보자면서 어색하게 자리를 떴다.

다음날 새벽 무렵 점례 집 주위를 서성이던 휴의는 점례가 나오자 잠깐 옆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점례 손에 쥐어 주었다.

‘가지고 가서 놀아. 공장일 하다 심심하면.’

그는 하찮은 것이니 놀다가 버려도 좋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이었다. 점례와 휴의였다. 뭐 이런 것을, 점례는 주는 것이니 받는다는 심정이었다.

그러지 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울려는 거야?

점례는 되레 휴의를 놀렸다.

난 줄게 없어. 대신 돈 많이 벌면 일본에서 올 때 아무거나 사올 게.

괜찮아. 너나 잘 챙겨.

그럼 빈손으로 온다.

너만 잘 있다 오면 그것으로 족해.

약속했다. 선물 없기로.

점례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약속해.

둘은 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엄마가 싸준 보자기와 거칠게 깎은 나무 인형, 점례가 유일하게 위안을 삼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자신에게 위안을 삼을 때 점례는 휴의가 준 인형을 꺼내들고 위안을 삼았다.

이제는 손때가 묻어 그것은 반질거렸고 부드러워졌다.
만질 때마다 소나무 향이 났다. 어떤 때는 송진 냄새가 훅 끼쳐올 때도 있었다.

‘밤새 깎았어.’

돌아서면서 휴의가 말했다. 잘됐다. 차라리 잘 된 것이다. 점례는 무엇이 잘됐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차라리 잘 된 것이다.

일본은 너무 가까워. 어쩌면 오빠가 나를 찾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곳은 어림없지. 만주라고, 만주는 넓어 끝이 없지. 아무도 날 찾을 수 없어.

두 명의 조선 여자는 점례가 자신과 놀기보다는 혼자서 미친 여자처럼 있자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다가 그것도 실증이 났는지 각자 방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옆방의 소녀가 죽었다고 점례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죽었다.

점례는 갸날픈 소녀를 생각했다. 너무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해 냈다. 차라리 잘 됐나.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트럭 안에서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더 험한 꼴 당하지 않고 떠났더라면.

점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점례도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방을 둘러친 철조망위로 산비둘기 한 마리가 점례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는 것은 비둘기 뿐만이 아니었다. 어깨에 총을 건 보초 두 명이 점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례는 마치 동물원의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눈을 피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기 자리로 가야지. 여기는 내 방이 아니야. 내 공간이 아니라고. 그래도 내가 쉴 곳은, 십 분이라도 기댈 곳은 내 방 밖에 없어. 옷을 털고 점례는 자기 방문을 열었다. 

점례가 이러고 있을 때 여순은 남양군도의 어느 섬에 막 도착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멀미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여순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점례가 트럭 멀미로 고생했다면 여순은 뱃멀리로 생사람 잡다 살아온 사람 처지였다. 기차와 트럭 멀미는 양반이었다. 뱃멀미가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할 때마다 노란 액체가 덩어리로 뿜어져 나왔다. 나중에는 나올 것이 없자 속에 있는 창자가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어떤 때는 올라오던 것이 목에 걸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싶었다. 오한이 나고 온몸이 창백했다.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백짓장 같은 몸은 산송장과 진배 없었다. 같이 온 여자들도 여순과 같은 처지를 면치 못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조선인 남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타보는 기차와 뱃멀미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배를 탔던 통영의 한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갑판 위를 활보했다.

그는 쓰러져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여순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러다 죽는다 죽어.

이 정도의 참을성도 없으면서 어떻게 전쟁터가 나가겠느냐고 나무랐다. 이게 참는다고 되는 것이냐. 여순은 목구멍에서 말이 맴돌았다.

죽는다고 죽어. 누워만 있지 말고 일어나 앉아 있어.

그는 마치 노가다의 십장처럼 일꾼들을 감시하고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순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말수로 불리는 그 남자는 쓰러진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지치면 여순을 지나쳐 갑판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느긋하게 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에게는 이처럼 좋은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희미한 물체가 왔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여순은 꿈결처럼 느꼈다. 저이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의식이 꺼져갔다 돌아오면 여순은 혼잣말을 했다. 그런 것도 없으면 자신은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여순은 정신이 들면 바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제발 이 울렁거림이 멈췄으면, 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멀미만 멈추면 못 할 것이 없고 못 참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배가 크게 출렁였다.

지금껏 보지 못한 엄청난 크기의 배 인데도 태평양 바다 앞에서는 작은 나뭇잎처럼 마구 흔들렸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순은 다시 눈을 감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파도가 치는지 풍랑이 이는지 배는 한 없이 위로 올라갔다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마치 높은 산의 꼭대기에 도달하기라도 하는듯이 끊임없이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 급하게 내려왔는데 그 내려오는 것이 올라가는 것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여순은 까무러쳤다. 눈을 뒤집고 온몸을 떨다가 그냥 나동그라졌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행이다. 보지 못한 것은 본 것보다 나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여순은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일이 반복됐다. 그것도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니 나중은 조금 쉬웠다. 아마도 한 달은 넘게 배에 있었나 보다. 일부는 그것에 적응이 됐는지 그저 멍한 눈으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여순만이 예외였다. 좀처럼 멀미가 떠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일본인이 해도 너무 한다고 여순을 나무랐다. 너무한것은 내가 아니라 네 놈인데도 그는 저래서 어찌 버텨낼지 한심하다는 투로 불만을 드러냈다.

정작 불만인 사람은 상관없이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여순 쪽으로 침을 뱉었다. 여순은 그것이 자신 쪽으로 오다 갑판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여순은 자신의 멀미가 멈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날아오는 침이 보이는 것은 그것의 반증이다. 그래, 어지간히 왔다. 목적지는 있을 것이다.

배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릴 때도 됐다. 논이고 밭이고 집이고 아무 생각이 없던 것이 몸이 회복되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돈다발을 세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예상한 대로 배가 멈추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순은 일어섰다.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풀린 다리를 흔들면서 중심을 잡았다. 가슴에 안은 보따리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