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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바느질 솜씨를 바로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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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바느질 솜씨를 바로 잡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5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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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워할 대상은 멀리 있었다. 달나라만큼이나 멀고도 멀었다. 설사 가까이 있다고 치자. 그래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점례는 멀기보다는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그랬다면 두 손으로 할퀴어 줄수도 있다. 네가 원한 것이 정말로 이런 것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원한 가득한 말을 쏟아 부어 살아 있어도 죽은 몸으로 만들고 싶었다. 가장 최고의 순간에 가장 최악의 상황을 기억하라고 지워지지 않을 문신을 새겨 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점례는 분노를 키울 힘이 없었다. 점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럴수 없는 것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겨우 숨쉴 수 있는 힘으로 어떻게 저주할 수 있는가.

이제 다 필요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하늘의 달조차도 어머니가 떠놓고 기도하는 성황당의 약수도 효과가 없다. 좋아라 하고 따라 다녔던 효의도 끝났다.

완용은 이제 분노의 대상도 되주지 못했다 . 그만큼 점례는 생명 없는 존재였다. 이미 죽은 몸이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은 것은 몸뚱이 뿐만이 아니라 정신가지였다. 혼이 나간지 오래였던 것이다.

낮도 밤이었고 밤은 하나의 커다란 암흑 덩어리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소총의 격렬한 반동도 점례는 애써 무시했다. 귀울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되는 대로 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이미 죽은 육신이 사라진들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도 혹간 정신이 들면 눈물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입가로 흘러들었다.

마를 것 같지 않은 눈물은 점례의 슬픔이었다. 깊은 슬픔 속에서 그녀는 되레 완용을 동정했다. 용서하고 잊으려고 했다. 네가 나를 죽여 살수 있다면 내가 죽어주마. 그것이 점례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세상이 조금 태평해졌다. 미워하는 자를 용서해 주자 뜻밖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의 용서와 사과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인간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도 아닌 이상한 외계인의 눈으로 들이닥치는 그들이 무섭지가 않았다. 무섭지 않은 것이 되레 무서울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무서움보다는 동정심이 일었다.

이런 내 마음을 하나님은 알고 있을까. 바다 보다 넓고 하늘 보다 높은 점례의 마음을. 그들은 한결 같았다. 목뒤에 총구의 끝이 닿기라고 하는 듯이 급하고 초조했다. 

죽음의 모습을 점례는 산자들을 통해 보았다. 죽어서 들어왔다가 살아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점레는 그들이 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이것은 좋은 일인가? 자문해 보았다. 

어림없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준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그들을 위한하는 것은 내 마음이지 그들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체였다. 그렇게 그들은 점례를 대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 순간이면 점례도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체였다. 눈을 감고도 왕복을 할 수 있는 길을 잃고 사방으로 헤매다니는 눈 먼 물체였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집을 찾을 수 없다. 수호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밝은 불빛을 들고 나를 따라 오라고 간혹 뒤를 보면서 걷는 앞서가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넓고 포근한 등을 가진 수호신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날 수 없었다. 굳은 날에 깊은 바다를 건너는 어부처럼 그녀는 이리저리 쓸리다 마침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점례는 오늘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알지 못해 답답했다. 

시간은 정지됐다. 아예 멈춰 서서 돌아가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 속에서 점례는 한없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막사 밖은 꽃이 피었을까. 눈이 내렸을까.

점례는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났다. 군인들이 사람의 눈이 아닌 이상한 눈으로 점례를 노려봤다. 점례가 눈을 뜨면 서로는 서로의 눈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점례는 눈을 감았다. 먼 훗날 내가 이것을 회상할 수 있을까, 살아난다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전의 점례가 될 수 있을까.

점례는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진저리나는 나날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굴복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새장에 갇힌 새도 이보다는 나았다.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금 나와라 뚝딱’ 외치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자신을 고향 죽마을로 데려갈 도깨비를 점례는 생각했다.

천장의 대들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도깨비. 그가 나와서 방망이를 내리쳐 주었으면, 문을 열고 차례대로 들어오는 번뜩이는 두 개의 눈, 그 눈이 다른 눈을 세게 쳐 주었으면.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 하얀 수염을 날리며 호통이라도 쳐 주었으면... 점례는 그런 것을 기다렸다. 사람이 아닌 도깨비와 호랑이.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생각으로 점례는 거칠고 난폭한 호흡과 맞써 싸웠다. 그때 한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제자리 걷는 발자국 소리. 군가 소리가 멈췄다. 점례는 잠시 들었던 정신 줄을 다시 놓았다.

왁자지껄한 저 소리는 적어도 일개 소대 병력은 될 것이다. 떠드는 소리로, 군홧발 울리는 발자국으로 점례는 줄지어 선 병사들의 숫자를 어림짐작했다.

그러면 그것은 대개 들어맞았다. 덜컥 문이 열리고 두 개의 눈이 발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점례는 다시 굴복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신을 어디로 모으고 버리고 할 형편이 못됐다.

바람이 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오월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봄의 들판에서 점례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이른 민들레는 벌써 노란꽃을 피웠고 더 이른 것은 하얀 왕관을 쓰고 더 센 바람을 기다렸다. 점례는 들꽃이 환하게 핀 마을 들판으로 나갔다.

보자기에 수를 놓기 위해서였다. 여순도 따라왔다. 둘은 언제나 같이 다녔다. 황토배기 언덕이 보이는 느티나무 아래서 둘은 자리를 잡고 멀리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땀을 뜨면서 점례는 점차 완성돼 가는 한 쌍의 학에 눈길을 주었다. 효의와 완용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무언가 뜨겁고 가느다란 것이 볼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휴의가 민들레 씨앗을 들고 점례 쪽으로 불었다. 점례는 뒤돌아 보았다. 완용은 소여물을 줘야 한다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러라고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점례는 휴의의 장난이 미웠다.

여순은 모른 척했고 휴의는 수를 한 번 떠보자고 점례쪽으로 달려듯면서 말했다.

말과 동시에 점례의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들고 휴의는 서투른 솜씨로 바느질을 했다. 휴의가 가고 비뚤어진 솜씨를 점례는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례는 일어나 앉았다. 점례가 있는 방은 뒤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점례는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 옆에 딸린 화장실 앞에서 그녀는 자신 또래의 조선 여자 셋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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