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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선명해 지자 점례는 완용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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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선명해 지자 점례는 완용이 미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03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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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트럭이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례 일행은 한 곳에 도착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공장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점례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군인들은 작은 막사에 여자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두서없이 열 명씩 뽑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안쪽에 있던 점례는 나가지 않고 그대로 그 막사에 남았다.

모두 13명이었다. 두 팀이 나갔으니 트럭에 실려온 인원은 모두 33명인 셈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자기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날 점례는 다시 방을 배정 받았는데 애초 머물렀던 큰 막사를 잘게 쪼갠 작은 방이었다.

일인 일실이었다. 그곳이 점례가 생활할 공간이었다. 점례는 여기가 내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점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겨우 사람 하나가 들락 거릴 정도로 작은 문을 앞으로 살짝 밀었다.

밖의 풍경이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안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운동장보다 서 너배는 더 큼직한 넓은 연병장을 사이에 두고 검은 막사들이 두 세개씩 모여 있었다.

막사와 막사 사이는 간격이 있었고 병사들이 간혹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하루가 지났다. 점례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았다. 경성역에서, 신의주 역에서 들었던 군홧발 소리가 바로 문 앞에서 들렸다.

황급히 문을 닫았다. 군가 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작은 문틈으로 점례는 밖을 관찰했다. 누런 군복이 보였다. 처음에는 하나 였으나 나중에는 줄로 이어졌다. 줄의 끝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돌리고 뒤로 물러섰다. 피할 수 있는 구쪽으로 뒷걸음질 친 점례는 보따리를 가슴에 안았다. 자신을 지켜줄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정작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어 더 답답했다.

닥쳐 올 일은 점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좋지 않은 것이었다. 급하게 뛰는 가슴 때문에 점례는 트럭에서 했던 것처럼 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급하게 그녀는 입을 자기 손으로 틀어막았다.

돈을 버는 일이 이런 것인가. 논을 사는 꿈은 긴 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무서움이 몰려왔다. 그때 밖의 군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자리에 서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먹이를 다투는 사자의 것처럼 날카로웠다.

문이 열렸다. 자신이 열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밖에서 잡아 당긴 것이다. 고리를 걸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점례는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곧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기절했다.

저녁이 되어서 점례는 깨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벌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것이 몸 전체를 크게 누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꿈을 꾸는 듯했다. 점례는 겨우 세웠던 몸을 쉽게 쓰러트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러다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기를 얼마를 되풀이 했는지 모른다.

날은 바뀌었다. 그러나 긴 줄은 날마다 이어졌다. 그것이 어제보다 긴지 짧은지 점례는 알지 못했다. 가늠할 수 없어 점례는 답답했다. 그러다가 군가를 부르는 소리와 문 앞에서 구르는 발 소리가 멈추었을 때 점례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것이 내일 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에 공장은 없다. 기계도 없고 연기를 뿜어낼 높은 굴뚝도 없다. 다만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자다 깨다 다시 자기를 반복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이곳에 온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기절하는 횟수는 줄어 들었다. 대신 배가 고팠다. 허기가 졌다.

간혹 그들이 가져오는 군용 음식으로 요기를 했다. 음식을 가져오는 군인들이 고마웠다. 점례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껴 보면서 그런 고마운 군인들이 더 많았으면 싶었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점례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엄마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고향이 죽마을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하나의 짐승이었고 먹는 것과 자는 것 외에는 생각이라는 것도 없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이곳은 어디이고 나는 누군인가, 점례는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하루가 길었다. 또 어떤 날은 짧기도 했다. 길고 짧은 날들이 가고 어느 날 점례는 자신이 여기 온 지 삼개월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점례는 이제는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점례는 때로는 생각했다.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빌어야 했다. 그러나 냉수를 떠놓고 기도할 뒷간의 장독대는 없었다.

언덕 위 서낭당에 쌀 한 줌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점례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원했다. 기도를 할 수 없게 되자 점례는 어릴적 엄마가 들려주던 호랑이 이야기, 전설의 소금장수, 학교에서 배웠던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등을 떠올리면서 군인들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들이 어떤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벗어났는지 이따금 떠올렸다. 자신과 처지가 같은 옆방의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점례는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주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누군가에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그냥 자신은 여기 있으나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조선 천지에 아니 만주 천지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고 산속의 짐승도 아니고 우리의 소도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이것도 일상이라고 서너 달이 지나자 제법 익숙해졌다.

그러자 자신이 떠나 올 때 어떤 과정이었는지 뒤돌아 보는 여유가 생겼다. 종이를 흔드는 순사와 벌써 논을 사기라도 한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와 옆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완용이 떠올랐다.

옆집 오빠였고 한 때 혼사까지 진지하게 오갔던 사이였다. 아버지는 완용이 순사를 따라다니면 순사가 될 것이라며 완용과의 혼사를 서둘렀다. 완용을 통해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점례는 완용이 싫었다. 싫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커서 혼례하겠다고 뒤로 미뤘다. 어머니도 거들었다. 순사가 된 다음에 혼례를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 년 전이었다. 혼삿말이 난후 완용은 틈만 나면 점례에게 집적거렸다.

동네에는 내 여자가 됐다고 소문을 냈다. 그러나 점례는 완용보다는 윗마을 휴의 오빠에게 더 마음이 있었다. 혼사를 미룬 이유였다. 휴의는 완용과 달리 눈도 짝짝이가 아니었고 하는 행동도 미더웠다.

점례는 그 오빠 생각에 완용을 밀쳐냈던 것이다. 점례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부터 완용은 태도를 바꿨다. 트집을 잡거나 집안에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리고는 여순에게 호감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일도 완용이 꾸민 것이라고 점례는 짐작했다. 하고 많은 처녀 가운데 자신을 꼭 찍어서 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점례는 모든 것이 점차 선명해지자 일본군보다 완용이 더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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